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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딴따라커리'에 해당되는 글 2

  1. 2007/09/03 디지털 마니아와 포비아
  2. 2007/08/12 성매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

디지털 마니아와 포비아

2007/09/03 11:13 | Posted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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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 ‘교과서’들 중 상당수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내용을 연구하여 풀어놓은 것들이 있는데, 이 책에 실린 글들 중 상당수가 그러하다. 결국 우리가 사회에 대해 '상식'으로 알고 있는 내용들을 경험적 연구로서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는 글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김영주의 「디지털 세상의 이방인, 노인」은 디지털 시대에 대부분의 노인이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정작 노인들이 구미디어에 의존하는 것이 왜 문제인가, 문제라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가 정작 탐구거리이지 않는가. 이 글의 문제의식은 현 세상에 있어 네트워크에서 배제된 삶은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 질 수 있고, 대부분의 노인들은 디지털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지 않음으로서 디지털 정보, 문화로부터 배제되고 있고, 이러한 배제는 정치 사회적인 소외, 문화적인 소외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사회복지와 더불어 디지털 복지가 고민되어야 하고, 그 방법은 노인 생활의 많은 시간을 디지털적인 문화의 양식으로 바꾸어야 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허한 주장이고 문제의 분석도 단순하다. 노인이 디지털에 적응하지 못함으로, 적응하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디지털 세상에서 디지털은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라는 것이 논리이다.
안정임의 「디지털 빈곤」이라는 그래도 보다 폭넓은 주제를 좀 더 탐구할만한 개념들로 소개하는 것처럼, 처음에는 보인다. 디지털 빈곤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면서, 디지털에 접근, 이용이 힘든 집단은 디지털 세상에서 일상적 삶을 영유할 수 있는 기초적인 자원을 공급받지 못하며 이는 디지털로 제공되는 사회적 서비스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디지털 ‘접근’이 물리적으로 가능한가 아닌가가 문제가 아니라, ‘만족할만한 접근’인가 아닌가이고, 이 기준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인터넷 보급자와 이용자 비율이 높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 이용하는 수준이나 만족도가 같을 수 없다. 정보사회에서 소득, 지역, 연령, 교육 수준 등의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한 정보 격차 및 정보 빈곤층의 출현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소유 여부가 평등하지 않음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디지털 사용능력이 평등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지 않는가. 이걸 어떤 수준에서 ‘교정-재분배’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기는 할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이 없이 디지털 시대에 빈곤을 이야기하면 공허할 뿐이다.
또 이 글은 2003년도 BSA(British Social Attitude)의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의 대다수(51%)는 ‘관심이 없어서’이고 28%는 ‘기술이 서툴러서’, 29%는 ‘컴퓨터나 인터넷 구매 비용이 없어서’사용하지 않는다는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이러한 조사가 디지털 격차의 발생 원인이 단지 외부적 환경 여건이 아니라 내면적 태도 및 인식과 관련있음을 시사해준다고 결론 내린다.
   매우 단순하게 외부-내면을 나누는 것인데, 예를 들어 대다수 저학력 노인층이 펀드나 주식구입을 하지 않고, 부동산 투자할 돈이 없다고 해서 사람들은 우려하지 않는다. 이 주식이라는 놀이를 통해 얼마나 많은 부가 우습게 얻어지고 또 잃고, 이것이 최종적으로는 일반 소비자에게 피해가 감에도 불구하고, 이를 ‘주식포비아’- ‘재테크포비아’에게 가르쳐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는 것 같다. 이런 지식과 디지털 지식의 차이는, 삶에 유용한 정보/기술의 습득이라는 차원에서는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디지털 지식/기술’의 포비아에는 더 우려하는 것일까. 디지털 세상에 이것이 근본적인 세상에 접속할 수 있는 지식/기술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오직 시작일 뿐이고, 사실은 다른 (예를 들어 주식/재테크 기술) 기술/지식도 마찬가지의 불평등을 낳는다.
  어쨌든 이 글의 결론은 그래서 디지털 빈곤은 미디어와 정보 확대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으며, 디지털 정보와 미디어가 개인의 일상생활의 질을 어떻게 향상시킬 수 있는지, 자신의 정체성 표현이나 사회적 참여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인지할 수 있는 ‘디지털 리터러시’의 문제라는 것을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에서 필요한 정보와 원하는 서비스를 얼마나 자유롭게 활용하고 누릴 수 있는가라는 점이고, 이를 위해 기본적인 미디어 접근과 이용능력, 리터러시가 요구되는 것이지, 모든 계층이 디지털 격차의 상위집단에 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 글의 결론을 인용해본다.

각 집단은 자신의 환경과 경험, 욕구와 필요에 따라 디지털 활용의 목적이 다를 수 있고 사회는 그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그들이 상이한 목적에 따라 적절하고 창의적인 디지털 이용을 할 수 있도록 여건과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본다. ‘디지털 빈곤’은 디지털 소외, 디지털 배제라는 부정적 개념보다는 ‘디지털 차이’의 관점에서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281)

이런 하나마나한 소리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이것을 나이브한 본질주의로 불러야할지, 글의 목적 자체가 교과서이기 때문에 훈장님 소리로 끝맺는지 모르겠다. 중간에 꽤 흥미로운 지적들을 한 것들이 전혀 쓸데없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결국 이런 사회과학 ‘교과서’는 지금까지 이러이러한 관점에서 연구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인 듯하다. 한 개별 주체/집단이 디지털 이용을 만족하고 있는가의 문제를 따지면서, 이 개별 주체/집단과 구조 속에서 발생한 필요를 ‘그들’의 목적으로 상정하고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정리하면, 각 집단은 자신들이 원하는 디지털 활용의 목적이 있고 ‘사회’는 이를 인식하고 여건과 편의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본다’라는 것이다. ‘사회’라는 게 뭔지, 알 수 없는 추상적 집단인 것 같은데, 정치사회인 국가 시스템 + 시민사회적 운동을 말하는 것으로 상정해볼 수 있고 넘어가자. 우선 자신이 원하는 디지털 활용의 목적이라는 것도 애매하고 사실 각 집단이 원하는 것이 충돌할 수 있다. (계급이라는 개념이 왜 나왔을까) 그것을 ‘사회’가 어떻게 조절할 수가 있는가. 이것을 ‘차이’라는 중립적 개념으로 현상을 호도해서, 노인들이 디지털 기술을 별로 배우고 싶지 않아하는 것이 그들의 ‘주체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게 소외나 배제라는 ‘부정적 개념’으로 표현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만약 ‘사회’가 ‘적절하고 창의적인 디지털 이용을 할 수 있도록 여건과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면 말이다. 결론을 곱씹을수록 어이없다.

이 책을 읽으면 좋을 사람: '디지털 세상'에 관심있는 고등학생이나 대학교 새내기들.

ps. 이 책의 목적과 다르게 너무 신랄하게 비꼬았다면 죄송. 그러나 내가 책을 읽는 목적에 따라서 비판한 것뿐이니 그것도 고려해야되지 않겠소. 또한 편저이기 때문에 간간히 꽤 읽을만한 글도 있었다는 사실. 단, 내가 맡은 부분이 이 두 글이었으니 어찌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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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매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  (0) 2007/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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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가영, 「성매매, 누구와 누구 혹은 무엇과 무엇 사이의 문제인가?」


 

0. 들어가며

성매매에 대해서 주위 지인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종종있었다. 그럴때마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성매매의 금지이다. 매번 듣게 되는 반론은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는 성매매 여성의 ‘노동권’, ‘생존권’과 같은 문제이다. 내가 성매매 여성을 너무 ‘구조의 희생자’로 몰아 그들을 ‘대상화’하거나, 어짜피 ‘구조’가 작동중이고 이를 제거할 수 ‘없다면’ 보장해줘야 할 권리를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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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성매매를 허용하는 것이 '비성매매 여성'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남성들의 성욕이 일정할 터인데, 이를 '풀 곳'을 막아버리면 어디로든 '터지게' 되지 않겠냐는 논리이다. 나는 이에 대해서는 성매매를 합법화하거나 이를 ‘당연시’하게 되면, 이는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는 가부장적 인식을 강화시켜 오히려 ‘비성매매’ 여성을 성폭력에 노출시킬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사실 이러한 내 인식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새내기 때 페미니즘 교양학교에서 읽은 「섹슈얼리티 강의」의 영향이 컸다. 성매매 여성은 포주와의 관계에서 억압되어 있고, 그들은 ‘피해자’일 뿐이라고 99년에 나온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종종 ‘나이든 남자’ 선배들이 성매매 여성이 항상 그렇게 억압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술자리’에서 넌지시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던지, 아니면 그래도 그것도 ‘가부장제-자본주의 구조’ 속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해방의 대상’으로만 생각해왔다. 내 인식의 한계선이라고 최근 깨달은, ‘대상성’의 문제와 ‘주체성’의 문제가 여기서도 계속 내재해있었다.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된 2004년 전후 성매매 여성들의 ‘생존권’ 발언 때도 나는 이것은 ‘포주’가 강압적이든 교묘한 세뇌로든 시켜서 한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나에게 그들은 ‘주체’가 아니었다. 이제 이런 문제들이 가시화되고 논의된 2006년 다시 이 책은 나에게 말을 건다.


1. ‘성매매’와 ‘성매매 여성’은 동의어인가?

198 사회적으로 구성된 성매매 문제를 ‘구조’로만 환원시켜 사고할 수도 없고, ‘개인의 자율적 선택’으로만 사고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매매를 둘러싼 문제들이 ‘구조로서의 성매매’와 ‘구조 안의 개인인 성매매 여성’이 만나서 만들어 내는, 의도되지 않은 다양한 사회적 경향 속에서 논의되고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성매매 근절이나 성노동이 왜 성매매 문제의 해법이 될 수 없는가?


처벌법 변경내용
구분 윤락행위방지법 성매매특별법
성매매 알선 법정형 하한 5년 법정형 상한 10년
성매수자 처벌 1년이하 징역, 300만원이하 벌금 옛 법과 같음 (경찰, 무조건 입건 방침)
성매매자 피해자 성매매 여성 무조건 처벌 업주 강요에 따른 성매매일 경우, 형사처벌 제외
경제적 제재 없음 성매매 알선자 수익 몰수 및 추징
(*www.empas.com 토픽검색 '성매매특별법' 중에서)
처벌법 주요내용
'윤락 → 성매매'로 용어 대체
'성매매목적의 인신매매’ 개념 도입
성매매로 인한 수익 전액 몰수·추징
성매매관련 범죄 처벌 대폭 강화
외국인 피해여성의 집행유예 실시
구조, 재활등의 과정 국가에서 지원




199 성매매를 비판하고 근절하려는 움직임은 성매매를, 개별 남성과 여성 사이의 ‘거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는 가부장적 전제와 여성 노동시장의 구조적 문제, 빈곤 같은 여러 가지 문제가 결합되어 구조화된 여성 억압의 총체적 문제로 보는 시각에 기반한다. (...) 가부장제 사회는 성을 파는 여성과 성을 팔지 않는 여성 사이에 구분과 위계와 낙인의 체계를 갖고 있지만, 성을 사는 남성과 성을 사지 않는 남성 사이의 구분을 부각하지는 않는다. 사는 남성은 주체할 수 없는 강한 성욕을 지닌 ‘정상적 남성성’으로 이해되지만, 파는 여성은 ‘정상적 여성성으로부터의 추방’을 의미한다.

200 성매매 여성들의 성노동자화를 지지하는 측은 성매매 여성의 선택을 모두 구조로 환원시키면서 강요된 수동적 선택으로 보는 급진주의 입장을 비판한다. 이들은 성매매의 근절 존속 변화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여성주의자가 아니라 문제 당사자인 성매매 여성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성매매 여성 스스로가 근절이든 존속이든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성매매 근절 의지를 가진 페미니스트들이 성매매 여성을 무기력한 ‘피해 대상’, ‘구제 대상’으로 만드는 것을 비판한다.

201 성노동이냐, 성매매 근절이냐 하는 양자택일 규정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여성의 삶을 하나의 구조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존재하는 모든 지식과 주장은 그 지식과 주장을 만든 인간의 ‘부분성’ 때문에 ‘전체’가 아닌 특정 부분을 설명하는 지시이다. 따라서 성매매 근절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의 주장도 성노동자화를 주장하는 성매매 여성과 페미니스트들의 주장도 모두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앎의 부분성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와 다른 입장을 참고하여 나의 부분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이다. (...) 서로 다른 입장들이 각자 스스로가 부분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서로를 참고하여 자신의 부분성을 보완하면서 비판적으로 더 넓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성매매 문제와 당사자 여성을 이해하는, 덜 왜곡된 방법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202 근절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성매매 근절보다 성매매 여성들의 기본적인 인간 욕구 충족을 정치적 목표로 상정할 때 더욱 현실적인 이해와 변화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친하게 지내보자는 것인데, 이 ‘친하게 지내는 것’이 누구와 누구 사이에 가능한 것인가? 마초들과도 ‘서로의 부분성’을 참고해서 나의 부분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을까. 나의 부분성을 고려하지 않으려는 사람들과 어떻게 이렇게 논의할 수 있을까. 결국 대문자 ‘진리’라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각 개별 여성들의 사례에 집중해야한다는 것은 어느 차원에서는 옳지만, ‘나의 입장’을 세우고, 그것을 의제화하는 것. 또는 운동이나 법제정의 차원에서 이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어떤 여성에게는 성매매가 ‘자율적 선택’이거나 ‘취미’일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사회 구조가 강요한 것일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사기와 납치’ 후의 고문일 수도 있다는 것, 이것을 가능성으로 인정하는 것. 그러면 이제 우리는 ‘성매매’ 자체에 대해서는 입장을 가질 수 없고, 개별 ‘성매매’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문제는 ‘사기와 납치’ 후의 고문의 입장인 성매매나 구조적으로 강요된 성매매 여성은 과연 발화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이를 대신 발화해주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성매매 ‘근절’을 주장하는 이유는 성매매 여성들의 기본적인 인간 욕구 충족이 ‘성매매’라는 관계에 종속되어 있을 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인간 욕구 충족’과 같은 애매한 어휘는 많은 논의로 정교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3. 성매매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는 한 가지 방법

여기서 민가영은 가부장제는 성적 등급화의 문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문화 구조에서 자유롭기 어려운 여성들은 다양한 행위성을 통해 성적 등급화 문화와 협상을 벌인다고 주장한다. 이 때의 협상은 ‘자유의지로 동기화된 행위가 아니라 성적 등급화 문화를 통해 구성된 행위성’이라고 한다.

203 성적 침해를 등급화하는 문화에서 여성들은 그들이 경험한 성적 폭력 그 자체로 문제화되지 않는다. 가부장제는 피해를 당한 여성이 어떤 여성인가, 가해를 한 남성이 어떤 남성인가에 따라 여성의 피해에 등급을 매긴다. (...) 가부장제 문화에서 여성의 성적 침해는 그 자체로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남성과 남성 사이에 문제를 발생시킬 때 ‘정치적’인 사안으로 부상한다. 다시 말해, 남성과 여성 사이의 문제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피해 여성과 관계된 남성과 남성 사이의 문제로 나타난다.

208 성매매 여성들이 성매매를 금지하려는 사회의 움직임에 반대하고 나선 ‘시위’는, 성매매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작업이 가부장적인 성적 등급화의 문화 구조를 해체하는 일과 함께 이루어지면서 입체적인 지형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가영이 이야기하는 ‘자유의지’라는 것은 공허하다. 구조 밖에서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언제나 구조 속에서 작동하는 ‘자유의지’가 문제이고, 구조가 얼마나 압박을 하느냐의 문제이지, ‘자유의지’가 없는 사람도 없다. 즉 생물학적으로 재귀조직으로 사람의 인식과 판단을 생각해본다면, 모든 ‘재귀조직’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의미한다. 이러할 때 우리가 공격할 수 있는 지점은 이것이 ‘자유의지’냐 ‘구조’냐 하는 문제틀이 아니라, 한 개별 주체가 ‘재귀적’으로 구성하는 문화 구조의 폭력성일 것이다. 모든 개별 주체들은 주체적으로 선택을 한다. 다만, 문제는 그 주체의 선택의 맥락인, 문화 구조이다. 이것이 공격의 대상이지, ‘자유의지’같은 말을 쓰기 시작하면 관념론적 이야기로 빠지기 십상이다.

그러기에 ‘가부장적인 성적 등급화의 문화 구조를 해체하는 일’이 정말 중요하다. (결국 개념의 어휘들만 바꾸었을 뿐이지 나는 아직도 '구조'만을 문제시하는지도 모르겠다... )


4. 성매매 경험이 체화된 여성의 몸에 대한 탐구로

인간 경험이 언어, 기호, 담론으로 환원되지 않는 비언어적 영역인 ‘몸’에 대한 탐구가 중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성매매가 성매매 여성에게 경험되는 방식은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조건에 의존적인가, 독립적인가?’ 등의 질문을 제기하고, 생물학적인 심리학적인 연구를 필요로 한다. 호주, 네덜란드, 북유럽처럼 성매매가 합법화된 곳에거 성매매 여성들의 몸에 관한 연구를 참조(있다면, 있을 법한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몸’이 과연 독립적인 실체인지, 담론에 의해서 영토화되지 않는 ‘신비’의 지대인지는 미지수이다. 인간이라는 것 mindful body라는 것은, ‘몸-마음’ 이분체라기 보다는 ‘뫔’적 존재이다. 그래도 성매매 속에서 이루어지는 섹스 자체의 특수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문화에 의해서 매개되지 않는, 심히 의심스럽지만) 이것을 밝혀내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일 터이다.


5. 성매매/여성과 차이의 정치학

210 젠더는 그 자체로 작동하기보다는 계급, 인종, 성적 위계 같은 다른 사회적 불평등 권력관계와 상호 지지하거나 의존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젠더와 관련된 문제가 젠더 하나로만 환원되어 이해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12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제 하의 결혼과 성매매를 성적 노예화와 연결시키면서, 여성들이 그들을 성매매로 몰아 내는 것과 동일한 힘에 의해 결혼을 강요받는다고 말한다. 여성들은 사랑과 결혼을 최고의 만족으로 규정하는 가부장 이데올로기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결혼을 한다. 이런 면에서 가부장제에서의 자유결혼이 성매매와 공통되는 맥락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의에서 방점은 성매매/여성이 아닌 비성매매/여성이다. (...) 이제 성매매/여성에 대한 이해와 소통을 위해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은 성매매를 경험한 여성이 지닌 차이와 특수성이어야 할 것이다. 이 특수성에 대한 이해는 두 범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매매를 작동시키는 성별 권력관계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로 연결된단. 그리고 이 특수성과 차이를 부각하는 것은 성매매 여성들에게 단순한 피해의 ‘대상’이 아닌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어떤 문제를 바라볼 때 특수성과 공통성의 문제는 복잡하다. 성매매/여성, 비성매매/여성은 ‘여성주의’라는 입장에서, 가부장제 속의 억압이라는 공통성을 갖는다. 그런데 이것이 ‘최종심급’인가. 어떤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이야기할 지도 모른다. 여성-노동자 모두 ‘자본주의 체제’ 속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다고. 그러면 이제 ‘자본주의 타도’의 깃발 하에 뭉치면 되는 것일까. 그 와중의 억압은 어떠한가. 하나의 깃발 하에 뭉쳐서 분명한 적을 향해 행진을 하는 ‘강철의 군대’ 이미지. 이것이 포기된 이유는 여러 가지 이겠지만, 무엇보다도 이제 그게 사람들을 ‘끌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에 대해 민가영은 ‘비트겐슈타인의 가족 유사성 개념’으로 새로운 상상을 제시한다.


213 비트겐슈타인의 가족 유사성 개념은 공통성과 특수성이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 맥락을 공유하는 의미는 ‘동일한’ 것이 아니라 ‘유사한’ 것이다. 이 유사도 공통적이거나 보편적인 유사가 아니라, 서로 엇갈리는 ‘가족 유사’라는 특징을 갖는다. (...) 연속선이라는 개념이 어떤 것을 중심으로 그것에 가깝거나 먼 연속을 말한다면, 가족 유사성은 부분적으로 겹치는 유사, 서로 다르게 겹치면서 형성되는 유사성을 의미한다. 가족 유사성 개념은, 성매매를 전체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의 문제와 연결시키면서도 성매매 문제의 특수성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준다.


민가영이 이 개념을 통해 구성하는 우리 편과 적은 결국 ‘전체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와 ‘가부장 사회’이다. 이로서 연대하면서도, 서로의 차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이러한 전략은 결국, 점진적으로 반가부장 사회로 나아가면서, 서로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연대하여 힘을 키울 수 있다는 전제에서 성립한다. 혹은 이러한 담론은 그러한 전제를 만드려는 노력이다. 차이는 인정하지만 연대하자.

2004년 성매매특별법 이후 터져나온 성판매 여성들의 목소리는 '성실한' 기존 급진주의적 페미니스트들에게 심각한 문제를 제기했음에 분명하다. 민가영의 통찰이 분명한 '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목소리들을 끌어안고 통찰하려고 하는 모습은 분명 있다. 성매매 여성의 '목소리'를 듣는 '방법' 또한 가부장적 문화구조 속에 작동하기 때문에 문화구조를 해체하면서 성매매 여성의 '기본적인 인권'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조금은 '추상적' '정답'과 함께 보다 '정치'한 답들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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