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의 작가가 근래 읽은 작품 중에서 이 소설이 가장 좋다고 했다. 그래서 읽게 됐는데, 과연 <고래>에 필적할 만했고 그 작가가 좋아할만했다. 2007년 미국은 도미니카 역사와 ‘현대의-판타지’를 가득 담은 이 소설에 퓰리처상을 비롯한 거의 모든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여했다. 작품은 한국에서도 목하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모양이다. 이런 문학은 사랑할만하다. 여전히 ‘문학의 힘’ 같은 문구를 떠올리게 한다. 번역소설인데도 소설의 문장들은 그야말로 ‘즐겁게’ 읽힌다.
> 문학적 글로벌리즘 : 오스카의 면모가 가장 결정적으로 드러내듯, 문화적 글로벌리즘 위에 이 소설의 서사가 펼쳐져 있어 놀랍다. 오스카는 중남미 ‘지역’ 고유의 문제(미국과의 투쟁, 인종 문제, 중남미 나라끼리의 독특한 관계)를 담지한 ‘민족’(도미니카)의 인간이면서, 동시에 미국(과 제1세계)의 온갖 현대적 대중문화와 문학(특히 SF를 필두로 한 장르소설!) 및 또한 일본 문화(아니메와 오타쿠 등)가 만들어낸 세계적이며 현대적인 인간이다.
도미니카는 (우리에게는 거의 비가시적일만큼) 불가해한 인종적-문화적 특수성을 가진 고유의 실체인 듯하지만, 기실 이미 그 속에서의 삶은 현대와 자본주의, 그리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체제 속에 있다. (아마도 ‘근대’는 그 이전부터 그것을 가능하게 한 힘이었을 것이다. ‘신세계’가 유럽인들에게 발견된 이래. 그것이 세계문학 및 세계대중문화의 최초의 성립 요건이기도 하다.)
오타쿠이며 숫총각인, 장르와 게임 마니아이자 ‘뚱땡이’인 젊은 남자들은 목하 우리 주변에도 적지 않지 않은가? (오히려 가장 다른 것은 원래적인 도미니칸과 한국인들이다.)이런 존재를 통해 글로벌-하이퍼-모더니티는 ‘아래로부터’(?) 구현된다.
> 비유와 문체 : ‘언어적-예술적인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신랄하고 유머러스하고, 세계에 대한 통찰을 담은 문장이다. 한국말로도 잘 옮겨진 이 문장은 우리가 말하는 좋은 의미의 ‘구라빨’(세계와 ‘시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권력에 대한 지극히 풍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내 주변에서 이런 식의 문장 구사력을 가진 이는 딱 두 사람인데, <고래>의 작가와 <현대사 인물의 재구성>이라는 책을 쓴 작가이다. 전자는 새 장편소설 출간을 앞두고 분투중이라 하고, 후자는 근자에 생계와 프로야구 때문에 글을 잘 못 쓰고 있다.
(그외 : * 문체/비유의 글로벌리즘 : ‘백만 년만에 만난’ 등의.
* 오늘날 한국소설의 문체 : <완득이> 식 문체가 한동안 유행할 듯. 이 문장체는 과연 미덕이 있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갈까?)
> 모든 위대하고 중요한 문학이 그러하듯, ‘역사’로부터 <오스카>의 서사는 왔다. 다시 말하면, 시간(역사)에 관한 사유가 이 소설의 스케일이다. <고래>도 <백년 동안의 고독> 등도 그랬듯, 역사에 관한 가장 독특한 방식의 해석과 전유가 소설의 특징이다. 이 소설에 있어 그것은 중남미사+도미니카사이다. 그것은 한편에는 중남미식 군사독재(소설의 허두에 ‘푸쿠’라 칭해지는)와 CIA의 음모,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쿠바혁명과 체게바라와 고난에 찬 민중의 삶이 대칭을 이뤄온 그 역사이다. 또한 그것은 ‘미국으로의-디아스포라’사(史)이다.
‘미국으로의’ 디아스포라는 19세기 이래, 미국을 꼭지점으로 한 세계적 모순과 그에 입각한 문화적-상상력의 원천 그 자체이다. 이탈리아계는 <대부> 시리즈와 마피아를, 유태인과 아일랜드계는 미국의 지배력 자체(의 일부)를, 중국계는 미국의 아시아 표상과 차이나타운으로 요약되는 온갖 것을, 일본계는 재패니메이션과 자동차를... 아마도 이 소설은 지금 당장의 미국에게 중요했으리라. 다양한 라티노들이 미국의 ‘하부’를 잠식하게 됐으니까.
글로벌-하이퍼-모더니티는 물론 ‘미국’을 무대로 하여 ‘영어’로 씌어진 것에 의해 펼쳐짐으로써 완수된다.(<고래>가 <오스카 와오>보다 못할 게 뭐가 있나? 하기는 <고래>도 작년 프랑스어로 번역되기도 했지만.) 이는 또다른 ‘제3세계’ 소재의 작품인 <슬럼 독 밀리어네어>의 경우와 비교할만하다. 인도의 뭄바이 빈민가를 배경으로 하고 영국 감독이 만든(영어와 인도어가 반씩 나오는) 이 작품의 젊은 주인공은 또 다른 오스카이다. ‘퀴즈쇼’의 패자(覇者)가 되는 그는, 제3세계 가운데에서도 가장 밑바닥에서 자라난, 비참한 ‘운명’(카스트의 질서나 ‘세계사적’ ‘빈곤’이 한 명의 개인에게 부여하는 운명)의 담지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의 ‘현업’은 휴대폰 회사 텔레마케터이다. 그는 텔레마케팅용 컴으로 형과 연인의 전화번호를 검색해 찾아낸다.
이 작품도 ‘아카데미’를 비롯해서 영화상을 다 휩쓸었다. 오바마 전후(前後)의 미국, 또는 ‘부시 이후’의 미국의 문화담당자들은 제3세계와 ‘유색인’들에 대해 뭔가 굉장히 미안해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우리(?) 제3세계인들은 이 기회를 잘 활용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 미국에서 성공한 도미니칸의 상징일 A.로드.
야구는 이번 WBC에서 잘 나타난것처럼 미국을 중심(정점)으로 한
환태평양+카리비안 대중문화의 중대한 매개체이다.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는 <카탈루니아 찬가> <인간의 조건> 같은 20세기의 위대한 소설을 연상하게 한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 인간해방을 위해 길을 떠났던 20세기의 수많은 젊은 휴머니스트들은, 불가해한 위력 때문에 영혼과 목숨을 모두 희생당했다.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까? 그리고 그 희생의 값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김연수는 20세기 ‘인간의 조건’과 ‘혁명’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또한 ‘성공작’인가에 무관하게 민생단 사건과 간도공산당을 다루었다는 점 자체도 작품을 고평하게 만들 요인이다. 오늘날 한국문단에서 누가 그런 문제를 쓸까. http://blog.daum.net/hongmeilove/13207302
아마 이 작품에 나오는 이야기는 <주권과 순수성> 같은 작품이 제대로 된 입지를 갖고 있는가를 검증할 자료가 될 것이다. 만주는 분명 한편으로는 ‘민중의 만주’이자 ‘소수민족의 만주’로 다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민생단 사건은 어떤 서사로써 다뤄져야 하는가? ‘난생 처음 사랑에 빠졌다 혁명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순진한 청년’의 이야기는 적당한 장치였는가? 문장은 왜 이렇게 모호하고 거친 데가 많나? (김훈의 악영향마저 뵈는 것 같다.)
소설 속의 ‘나’는 김연수의 다른 소설들과 심지어 <청춘의 문장들>에 나오는 ‘소년’들과 유사하다. 김연수는 다른 ‘젊은’ 작가들에 비할 수 없이 큰 ‘시야’를 지녔고 김O하에 비하면 정말 진지하지만, 그의 ‘순진한 청년’은 1989년 스무 살에서 성장이 딱 멈춰 있다. 민생단 사건을 겪고,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고도 그렇다.
그래서 그의 소설 자체 보다 ‘촛불’을 거론한 ‘후기’가 차라리 더 좋았다. '후기'는 어떻게 이 소설이 결국 그렇게 마무리될 수 있었나를 설명하고 있다. ‘후기’의 ‘열망 문제’도 미성숙의 한 지표이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쯤은 그런 ‘미성숙’에 기대어 살고 있다고 인정할 수도 있다. 그리고 소설의 ‘사랑’보다는 실제의 ‘춤’이 훨씬 더 나은 매개인 듯하다. 이 점이 사실 매우 중요하다. 과연 작가는 알까? ‘후기’는 문장도 더 아름답다.(짧으니까)
* 소설이 환기해 준 여전히 해결 안 된(될) 문제들;
- 코민테른과 조선공산당.
: 1920-30년대 조선에서의 ‘운동’을 이해하는 것은 거개 여기 달려 있다... 어떤 ‘독자성’과 ‘연대’가 가능했을까? 내가 당시 그 운동의 한 사람이었다면? 좌든 우든, ‘종파’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는 ‘식민지’ ‘약소민족’ 운동의 비애와 무관하지 않고, 그래서 다음의 문제와도 연계된다.
- 한홍구가 주장하는 ‘북한 정권의 트라우마’라는 것.
: 한홍구가 북한을 ‘내재적’으로, 그리고 ‘동정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장치가 민생단 사건이다. 한홍구가 미국에서 ‘민생단과... 김일성’으로 박사를 받고 막 귀국하고 난 뒤에 어디서 강연을 했다. 그때 들어 나도 처음 민생단 사건에 대해 알게 됐다. 그의 강연은 깊은 설득력이 있었다.
: 그런데 ‘사건’은 벌써 두 세대 전. 오늘의 북한(의 지도부)은 처음의 ‘트라우마’와 무관한 괴물이다. 그들은 ‘3세’를 ‘지도자’로 옹립할지 모른다. 그러면 북한은 세계사회주의운동사에 더 큰 오점일 것이다.
- 종파와 그에 대한 처리 방식
'동지'들끼리의 '잔혹'은 어디에서 비롯됐는가? 그것은 단지 '스탈린주의'의 문제인가? 제국주의라는 거악 탓인가? 또는 (전공투까지 포함한) 동아시아 공산주의 운동의 어떤 특징인가? 좋게 이해할 때 그 '잔혹'은 목숨 걸어 운동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 잔혹의 문화는 여전히 남아 있다 보인다. 진보정당 사이트에 들어가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원츄~! 펴자마자 이 책에 ‘쎄게’ ‘꽂혀’버렸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 책을 읽어보라 권하고 있다. 그가 대식가이든 미식가이든, 여성이건 남성이건, 채식주의자건 비만인이건... R선생처럼 먹는 일 자체를 경멸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빼고. 먹거리(먹기+먹는 파티+먹는 곳+요리하기+여행하며 먹기+누군가에게 해 먹이기...)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소장할 만하다. * ‘요리 기행’류의 글을 누구나 쓰고 싶어하고 또한 쓸 수 있다. 세상의 수없이 많은 블로그는 어설픈 ‘맛집’ 탐방기와 아마추어 사진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또한 이미 황석영ㆍ성석제처럼 글재주 좋은 많은 작가들이 음식에 대한 책을 썼다. 그런 글들은 주로 기억과 개인적 취향을 주제로 한다. 한편으로 <헝그리 플래닛-세계는 지금 무엇을 먹는가>는 세상의 그러한 글쓰기와 사진 찍기의 궁극에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 그런 류들과는 완전히 다른 주제를 가지고 있다.
무엇을 잡아먹거나 사먹는가, 그리고 거기에 얼마나 돈을 쓰고 어떻게 요리하는가? 또한 누구와 같이 먹으며, 먹고 나서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는 개인적 차원을 넘는다. 먹는 일을 둘러싼 관계만 ‘문화-정치’를 드러낼 수 있다. 세계 24개국, 30가족(주로 중하층이라 설득력있다.)의 600끼니를 직접 탐방하고 유머러스한 기행기와 질 높은 사진으로 담은 이 책은 ‘굽고 삶고 볶고 튀기’는 잡식동물로서의 인류에 대한 가장 훌륭한 보고서임에 분명하다. 또한 먹는 일을 둘러싼 모든 민감한 가장 정치적이며 동시에 문화적인 현안을 대부분 담고 있다. 그것들은 글로벌 자본주의와 세계정치, 역사와 문화전통, 세대와 계급의 문제이다. 이 책을 통해 패스트푸드 제국주의, 육식의 윤리성, 당뇨와 식품자본, 바다 윤리 등과 같은 핵심적인 정치적 사안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수십년 간의 경력을 바탕으로 하여 수년간에 걸친 ‘프로젝트’로서 씌어진 이 책은 그래서 외국에서 이미 여러 가지 상을 받았을 것이다. ** ‘지금’, 그러나 완전히 서로 다른 공간에서 서로 다른 역사적 전통 하에서 살아가는, 그러나 점점 비슷해지고 있는 세계의 ‘인간’들이 무엇을 어떻게 먹고 있는가 하는 이야기(글+사진)는 꽤 충격적이기도 했다. ‘타인의 삶’이 거기 확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가자미를 미역국에 넣고 끓이는가 아닌가, 김장김치에 갈치를 넣어도 되는가 아닌가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화해’가 쉽지 않은 차이도 거기 있다.
에콰도르와 그린란드의 가족들은 내가 평생 절대 못 먹어볼 거 같은 희귀한 음식들을 먹는다. 기니피그 훈제 고기와 바다표범 스튜, 북극곰 고기 등. 해마, 염소불알, 불가사리 튀김 같은 중국 음식들은 그래도 멀지 않은 미래에 먹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영국과 인도의 어떤 가족들은 이미 알고 있지만 별로 먹고 싶지 않은 것들을 주로 먹는다. 쌀을 먹지 않고 빵으로만 탄수화물 섭취원을 삼는다거나 브라만계급이라는 이유로 고기는 전혀 먹지 않는다.
한편 차드와 부탄의 가난한 가족들은 너무 못 먹는다. 수단에서 쫓겨난 차드 피난민들이 먹거리를 위해 쓰는 돈은 일주일에 1,120원이고(나머지는 유엔지원으로 나오는 배급품) 부탄에서는 4,620원이다.
미국과 멕시코의 어떤 사람들은 반대 방향으로 너무 못 먹는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질 낮지만 가장 효율적으로 대량생산되어 급하게 칼로리를 공급하는 맥도날드ㆍKFCㆍ버거킹ㆍ타코벨에서 만든(또는 배달한) 치킨과 피자, 코카콜라를 ‘일용할 양식’으로 먹는다. 미국인들이 패스트푸드에만 쓰는 돈은 부탄 사람들 전체 식비의 10배나 된다. 배운 중간층인데도 그렇다. 미국인들의 식생활은 너무도 강력한 식품자본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어서, 자신들의 끔찍한 식생활과 그 결과(소아 당뇨비만, 성인병 등등)를 알면서도 고치지 못한다.
*** 먹는 일의 평등과 불평등은 정확히 주변부와 중심의 차이, 그리고 지역 내부의 계급적 격차를 반영해내는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의식주에 결부된 일상문화가 얼마나 큰 정치적 문제를 품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슬로우푸드와 거리 음식, 가정요리, 채식 등의 앞날은 어둡다.
미국식 식문화에 저항하는 일, 그것은 매우 어렵지만, 마치 스크린쿼터문제처럼 ‘문화다양성’ 문제의 핵심일 수 있다. 이는 비단 ‘좋은 차이’를 보존하는 중요한 일뿐 아니라, 자본이 삶의 모든 것을 규율하는 미국식 삶에 반대하는 것과 연관이 깊다. 그러나 그 문제는 아직 잘 안 보인다. 그것이 개인에게는 죽고사는 문제(건강)와 바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 덧1) 우리는 지금 무엇을 먹고 있는가? 지금 먹고 있는 것을 성찰해보고 낯선 음식문화에 융통성을 갖는 일은 중요한 도전적 과제가 될 듯하다. 책을 죽 읽어보니 내가 먹는 것과 가장 비슷한 것은, 일본과 독일의 중간층 가족이다. 그들도 한편으로는 글로벌자본주의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지만, 전통 때문이든 ‘건강담론’ 때문이든, 생선이 끊이지 않는 식사를 선호하며 유기농스런 음식도 좀 추구한다. 물론 상당한 양의 술과 함께(^^).
덧2) 과테말라와 일본의 술꾼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이미 알콜중독자병원이나 간질환 병동에 입원해버린 분들 말고, 세계의 술꾼들을 찾아 탐방하여 누구와 함께 왜 그렇게 마셔대며 사는지를 찍고 써서 <써스티(thirsty, 목마른; 술을 좋아하는.) 플래닛>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그로써 뭐가 드러날까? 순치된 디오니소스월드와 가부장제의 그늘 같은 것? 또는 사랑의 전말과 점진적 자살 같은 실존 문제? 이런 프로젝트는 돈이 엄청나게 많이 들겠고 무엇보다 사진을 배우는 게 우선이다만은.
(우리는 '얼굴 있는 음식'들, 즉 포유류 육식에 특히 불편해할 수 있다. 그림의 기니피그나 바다표범처럼. 둘은 그린란드와 에콰도르에서 중요한 먹거리, 즉 단백질 섭취원이다. 인간에게 별로 거부감 없는 귀여운 얼굴을 가졌을 때 특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음식'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하물며 개처럼 자주 접하는 얼굴에랴! 개고기는 맛있다. 개를 먹음으로써 더욱 나는 '인간'임이 확연해진다. 그래서 문제라는 것이다.)
우울증은 정상적 상태의 일부가 아니라 파괴적인 ‘병리’를 지닌 질병일 뿐이라는 사실에 대한 강조가 책의 큰 주제이다. 저자는 이를 우울증의 사회적 ‘은유’(수잔 손택의 개념과 같은 것)와 문화적 신화에 대해 비판ㆍ반대로 구체화한다. 그 과정에서 좀 ‘오바’도 하기 때문에 책은 논쟁적이다.
저자는 매우 풍부한 의학적 지식 외에도 상당히 다양한 인문학 지식으로 서구 문학사 전체를 '들이대며' 자신의 논증을 완수하려 한다. 특히 미국의 생물학과 유전학, 그리고 정신의학과 뇌과학은 지(知)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하는 데 중요한 동력이 되고 있기 때문에, 인문학과 의학적 사고를 결합하고자 하는 이런 책을 읽는 것은 유익하고도 흥미롭다. 부가적으로 사실 매우 만연해있는 질병인 우울증에 관한 여러 지식을 얻을 수 있으며 세계 정신의학계의 동향도 좀 알 수 있다.
상당히 자주 우울해지거나 지나치게 소심하거나 만사에 너무 자주 무기력ㆍ무감각(!)해지는 기질을 갖고 있는, 그래서 고통스러운 사람들은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필요도 있겠다. 우울증을 흔히 ‘마음의 감기’라고들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사실 감기 이상의 치명성을 우울증은 갖고 있다. 실질적인 도움이란 자신의 '우울' 상태를 정시하고, 2주 이상 '심각한 우울'에서 못 벗어났다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는 일이다. 뿐 아니다. 결정적으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계속(!) 못 해내는 사람(예컨대 석사논문을 5년씩 쓰고 있다든가)이나 가족, 친구, 연인 등등 필수적인 인간관계도 모조리 '파토'내고 사는 사람들도 우울증을 겪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의사와 상담한 후, 처방이 내려지면 프로작(1정에 900원 정도. 고가약에 속한다.) 같은 항우울제를 먹어도 좋다고 생각된다. 의사들에 의하면 항우울제가 인생을 진정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꿔줄 수도 있다. '프로작혁명'이라는 말도 있고, 프로작의 별칭은 심지어 Happy Maker(!!)이다.
인정의 조건> 저자가 쓰고 있는 바에 동의할 수 있는 대목이 많고 저자의 진정성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비관과 우울이라 칭해지는 증상과 기분ㆍ인식의 계열을 보다 정밀하게 분리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인간의 본원적 유한성과 그에 대한 직시(이는 비관과 허무에 대한 인식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저자에 의하면 ‘즐거운 은둔’이나 ‘신념으로서의 자살’이 가능할 거 같지 않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였으나 노년에 결국 자살한 프리모 레비 케이스처럼 그것은 우울증의 증례일 뿐), 사회적 비참과 소외와 그에 대한 예민한 통찰(이는 무기력과 비판, 세속적인 것에 대한 거리두기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기분장애와 그에 따른 무기력ㆍ우울증 자체(이는 뇌손상과 직접 연관되는 병리로 규정된다)을 제대로 구별할 수 있는가?(인식과 기분은 서로 다르지만 얽혀있다.) 만약 그 구분이 모호할 수밖에 없고 ‘실금’일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병리학적 엄밀함이 더 필요한 거 아닌가? 즉, 다음과 같은 기분 및 인식 계열의 차이에 대한 구별.
> 뇌손상 / 기분장애 / 무기력 / 우울함(멜랑콜리) / ... / 소외 사회 비판 ... 냉소주의 ... 허무주의 /
둘째, 의학적 견해의 속화된 생물학적 사회화에 대한 방비가 필요하다. 즉 비판이나 속 깊은 통찰, 사회적 비관주의 전체를 질병이나 유전자 결함으로 간주하는 상식의 출현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는 것. 정치적 유전자주의. 이슬람교와 공산주의를 사고장애로 간주한다든가, 또는 은둔과 자살을 죄악으로 간주한다든가 하는 생체권력은 탄생 가능하다. 또는 거기에 결부된 사회적 책임을 돌보지 않고 개인의 (유전자적) 결함이나 병리로 단순히 치부하는 미국적인 생물학주의는 거부되어야 한다.(한편 그래서 정치적으로 “명랑 좌파”(우석훈)가 필요하다.) 그래서 아예 우울증의 권역에 확실한 기분장애나 무기력이 아닌 것을 걷어내고 서술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저자의 아포리 혹은 망설임은 “심오한 것과 우울한 것 사이에 그어진 실금”(134), “우울증에 전면적으로 대항한다고 해서 소외와 오랜 비탄에 대한 경탄을 멈춰야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던 것 같다.”라고 쓸 때와 “관습적 견해에 따르면, 지성인은 염세주의적 유럽인이다. 그들은 어두운 복합체다. 사회와 불편한 관계에 있고, 내면에서는 악마와 싸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카프카나 키에르케고르가 이런 지성인의 모범이 되었다.”와 같이 말할 때 드러난다. 여기에는 일정한 무지와 미국식 사고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저자는 “(139) 비통에 빠지는 것은 바위의 승리이고 압제자들의 승리이지만, 기쁨을 누리는 것은 시지프스의 승리이고 우리의 승리이다. 우리가 약물 치료를 제대로 받는다면, “탄성을 지니고도, 멜랑콜리에서 벗어나고도, 사람은 소외의 핵심적 문제를 볼 수도 있고 그것을 탐구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중략) 단지 비전을 얻는 데 우울증이 얼마나 필요한지는 분명치 않다고 말하는 것뿐.”이라 말하여 겨우 종합을 이루는 듯하다. 그러나 이 종합이 자주 저자 자신에 의해 흔들린다.
우울증과 여성 젠더>
흥미롭게도 여성 우울증 환자에 대한 남성의 반응을 위주로 기술된다. 여성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남성의 2배이기 때문이다. 모든 우울증 연구는 여성에 더 많이 집중되어 있다. 한데 우울함(증)의 증례는 소극적이고 사려 깊고 조용하다(180)는 ‘여성적’이라는 속성을 지닌다. 즉 우울(증)의 젠더...! 이는 두 가지 차원 즉 에스트로겐과 가부장제의 두 축으로 서술되어야 한다. 에스트로겐에 대한 언급은 없고 여성의 ‘애착’을 위주로 모호하게 이 문제를 기술했다.
즉 우울증은 일단 시작되면 성차이가 없다. 우울증의 성차이는 재발율의 차이가 아니라 최초 발병율의 차이인데 애초에 첫 삽화를 겪을 확률이 여성이 높다. 왜? 첫째 유전적인 이유로, 한달 주기의 호르몬 변화가 스트레스조절 기능에 교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 둘째, ‘인간관계와 관련된 불운을 들여다보면 남자와 여자는 더이상 같지 않다’는 것. 여자들은 다중적 애착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애정의 비용’ 가설.(311) 애정은 사회적 선이나 우울증의 위험인자인 것이라는 점이다.
우울증과 문학사>
학부 때 하버드에서 문학사를 (복수?)전공한 듯(274) 인문적 소양이 깊은 저자는 줄타기를 반복한다. 우울증이 지닌 병리에 대한 의사로서의 고발은 진정성이 있다. 그의 인문적 소양은 경탄할만하다. 저자는 우울증이 한갓 질병일 뿐이라는 명제를 단호하게 말하기 위해, 우울(증)에 결부된 사회문화적ㆍ역사적 ‘상징’들과, 그리고 문학적 전통에 대해 어려운 대결을 시도한다. 고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햄릿> <베르테르>에 이르는 텍스트에 나타난 우울증(멜랑콜리)을 대상으로. 그러나 병리적 산물이 아니라 ‘인류의 유산’으로 간주되는 이런 텍스트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그의 논리는 자주 한계를 갖는다. 다시 말해, 이는 세계와 인간의 조건(‘세계의 비참’은 중단되지 않고 있다)ㆍ정신성의 본연성 자체에 우울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생기는 아포리아이다. 물론 명민한 저자는 이에 대해 자각적이다.
다시 아포리아는 여기서도 멜랑콜리, 기분장애, 우울증을 구분하지 않거나 못하고, 또는 (문학자들의) 성격 자체를 문제삼기 때문에 발생한다. (생물학적으로도 이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 염세주의자나 비판가들의 뇌는 다르다?) 다시 말해 저자가 모호하게 말하는 “멜랑콜리의 어떤 판본”(우울의 역사문화적 전개)이라는 표현은 멜랑콜리 개념ㆍ담론의 역사적 진화(“그러나 광증이나 치질이 분리돼 나가면서 고결한 멜랑콜리에는 쾌감결여, 소외, 과거반추, 슬픔만이 남았다.”)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그것의 구별되는 원인과 증례를 정확히 개념화하려 하지 않는(못하는) 것을 드러낸다. 특히 이 장의 서술과정에서 자주 멜랑콜리와 (텍스트에서 독해가능한) 우울(증?)을 동일시한다.
소외와 우울증>
결미의 이 대목에서는 매우 웃고 말았다. 저자는 자신이 ‘소외’를 잘 이해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기가 겪은 삶(저자는 독일계 유대인)과 그 속에서의 소외 회고담을 쓰고 있는데, 전혀 ‘소외’스럽지 않고 오히려 저자가 얼마나 잘 주류의 삶을 살아왔는가를 보여줬기 때문. “내게 소외를 말하지 마라. 나는 소외가 만개한 60년대의 하버드에 살았고, 거기에서조차 어두운 아웃사이더였다.(328)” 저자는 ‘소외’에 대해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를 갖고자 하나 매우 한계가 많은 것이다. 또한 저자가 쓰고 있는 ‘소외’라는 말은 사실 그 자체가 매우 뭉툭한데, 이는 미국적 인문주의의 한계인지 저자의 한계인지? 저자는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겪을 수밖에 없었던 또는 당장 치명적인 빈곤과 가부장제의 침해를 받은 환자들을 많이 알고 있을 것인데, 왜 이 정도? 이 대목에서는 혹 이 의사가 보는 환자들은 대부분 백인 중산층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소외를 존중한다. 하지만 그것이 우울증과는 분명히 다른 상태인지 증명할 것을 요구한다.(332)”는 말은 저자 본인에게 돌려야 할 것이 아닌가. 오히려 독자는 이를 기대했지만 끝내 책에 나오지 않았다. 이 책에 전반적으로 부족한 것은 정치적ㆍ사회적 상상력이다. 이는 우울증의 여성성을 다룰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 저자는 양심적이며 학제적인 것을 추구하는 학자이다.
요컨대 우울을 찬양할 필요는 없으나 우울증에는 반대해야 하고, 우울증을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소외에 더욱 열심히 반대해야 한다... 이들은 역으로 흥미로운 테제들이다. 왜냐하면. ‘지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서 낙관한다’ㆍ‘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 마셈’은 우리의 명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덧) 정신성의 결여ㆍ문화의 피상성에 대한 (인)문학주의자들의 시대착오적 한탄, 그리고 좌파의 무능(‘비판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다, 우울하고 칙칙하다’)도 우울 만유주의자에 의하면 우울증의 증상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오히려 (젠더) 철학 등에서 ‘우울’이 주요한 키워드로 부각되는 경향도 있다. 지배를 비껴가는 정신의 (여성적ㆍ소극적) 저항으로 이를 읽는 듯.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엘피, 2007)ㆍ<환상의 돌림병(지젝의 문화읽기)>을 상기해보라.
덧2) 우울증에 관한 책이 꽤 많다. 소위 메이저 출판사에서 2007년에 발간된 책도 여러 종이다. ‘우울증’이 새로운 대중적 관심 분야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Toni Morrison만큼이나 중요한 미국의 현대 여성 작가인 Sherley Anne Williams의 작품입니다. (갑자기 빨강머리 앤이 자기는 우아하게 e가 뒤에 붙는 Anne이 그냥 Ann보다 좋다고 이야기하면서, Sherley란 성이 얼마나 상상력이 부족한 성인가를 마릴라에게 설득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어쨌거나, 영어로 썼지만, 그럭저럭 읽히길 바랍니다횻.) 흑인 도망 노예와 그녀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백인 여성의 우정이 성립하는 과정을 나름 세밀하게 그린 소설. 실제로 뮤지컬도 나왔음.
Here in this novel, Dessa Rose, we are led to a more intricate friendship between Dessa and Ruth. Of course, it took more than 200 pages and struggle for both protagonists to identify themselves with the very names I so conveniently put here. Unlike the excess perpetrated by Sethe and Beloved in Tony Morrison’s Beloved, I find it rather subtle and satisfying the way Dessa and Rufel came to mutual understanding in the course of the plot.
After escaping the lustful grasp of Nehemiah (it might be the second flee), Dessa took an unwilling shelter under the wing of an insecure white woman, Rufel. Finding the unknown white woman to breastfeed her own baby, a “negro,”Dessa was dumbfounded. She could not understand how and why the white woman breastfed, if not touch, the black baby. That Rufel nursed the baby (later named Desmond Kayne) was the reverse of customary black wet nurse (for Dessa as well as me). It was interesting to see Rufel, with full reminiscence of her Mammy and typical white prejudice against the black, enjoy the moment of breastfeeding and naming Dessa’s child. Contrary to Rufel, Dessa callously dismisses any opportunity to know the white woman. (“But if she understood the white woman, she would have to. . . have to do—Something And—” 114.) Dessa knew and refused any obligation following such understanding.
And the scene in which Dessa and Rufel argued about the name of Mammy was intriguing. Here Rufel, who cherished so much of her memory with Mammy, got slapped in the face by Dessa’s heated argument that “Mammy ain’t nobody name, not they real one” (119). Of course these two women were arguing about two different mammies, but the argument itself led to rather unintended consequences. First, Dessa’s rather harsh but angled argument betrayed Rufel’s ignorance not only to Mammy but her husband (in the later chapter of the novel). Here Dessa boasted over her detailed knowledge about her own Mammy. Her name Dessa remembered. Second and more importantly, this scene brought up more serious issue: motherhood under the slavery. In the same vein with Beloved’s emerging motif, Dessa Rose incessantly unearthed the inconvenient truth about motherhood before readers: No black mother can raise up her own children. Nada. However stubbornly she wanted to cling to the memory, Rufel had to admit the brutal crime that white people committed against black race. Her admission does not necessarily deny her precious memory that “Mammy, through caring and concern, had made Rufel hers, had laid claim to her affections” (147).
Dessa, on the other hand, had to learn that she was not the only one suffering from the slavery. After she witnessed the love-making between Nathan and Rufel, she contemptuously named her “Mizz Ruint[Ruined]”. That drove Rufel crazy. She in the first place had no room for understanding that relationship could be natural. Rufel was seen in her eyes another would-be-cruel mistress. And then, she knew that white women also were vulnerable to male violence; they can also be easily violated.After Oscar-Happening, they came to mutual understanding, enjoying the presence of each other. That is depicted well in the climactic revelation:
“My name Ruth,” she say, “Ruth. I ain’t your mistress.” Like I’d been the one putting that on her.
“Well, if it come to that,” I told her, “my name Dessa, Dessa Rose. Ain’t no O to it.” I didn’t even not think about my tongue. This was the way she was, you see, subject to make you mad just when you was feeling some good towards her. And she was good. (232)
They were finally bonded in “womanhood,” which Nehemiah disdained in the end of the novel. Someone might complain the way Dessa and Ruth came to friendship and further bond was too aesthetically structured.I enjoyed, however, this unexpected bildungsroman. At least it was not so “thick” claim as shown in Beloved.
breastfeed... It's first time I wonder, how would it feel to breastfeed your own baby, or any baby. Can woman feel some fluid going out of her body? It's really interesting, and no man can experience it!!
Caring baby inside one's body is amazing too. But breastfeeding... It seems kind of self-sufficient system! I wish someday later, some VR device comes out to experience being a woman. It's pity, that we can't share our body experiences..
기인, frankly I have no idea what it would be like breastfeeding one's own child. but i heard a lot from those undergoing breastfeeding themselves that it involves DEFINITELY unbearable soreness and causes lack of sound sleep. as for newly-borns, you have to breastfeed them every two hours, which sounds obviously NOT pleasant at all. to me it seems quite scary, even after reading those sceneric depiction of breastfeeding in novels.
Anways, the point of the novel is the fact a white woman, the former slave owner, breastfeeding a black baby. it was quite the reversal image, as i had put earlier above, of tradition black Mammy.
So you can't feel the fluid run out of your body.. hm;;;
Ya I heard that, when you get a baby you can't have much sleep..
and all those responsibilities!..
pains also..
But somehow my girlfriend kind of talked me into it ^^; Hope I can get one someday~ They say, especially women ususally say that having a baby was one thing they don't regret. I wonder that is true.. Maybe that's only voice we can hear...
Like marriage, having baby is something you do and regret, or you don't do and regret it.. They say... So just do it... hm..
Nowdays its kind of my inquirities.. ^^;
You can give me some advices about it
점입가경임미다~!!!누구 소외감 느끼라고 이런 영문대화를......ㅋㅋ저도 못봤습니다만, 지난주 토요일 <그것이 알고싶다>의 주제가 "내 아이가 죽도록 밉다"였다던데요...못봐서 아쉽지만 궁금하더군요...모성애라는 게 마치 '천부'적인 '본능'인 것처럼 만드는 '모성신화'가 얼마나 오랜 세월 여성들을 억압해왔는가...나혜석도 생각나고요.
점입가경은 아닌디...흐흐...그나저나 긴쿤께서 제 말을 달리 해석하신 것 같군횸. 그냥 저는 단순히 젖을 먹이는 행위를 여성만의 자족적 행위라고 보기가 어렵구..그걸 너무 이상화하는 게 거시기 하다는 댓글이었지요.
뭐 닥치면 다 하기 마련이지 않을까요. 그리고 뭐 기쁨이 있겠죠, 당연히. 저는 그게 너무 이상화되는 게 싫다는 거죠. 여성이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행위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아름답고...뭐 자족적이다, 라고 명명하는 게 남자들이 쉽게 '성녀화' 해버리는 전형적 방법이라고 생각해서요. @.@님의 말씀처럼. 뭐 그렇게 아름다운 일이면, 젖을 맘편히 먹일 수 있는 곳을 좀 설치해주시든지. 사실 젖먹이를 둔 많은 엄마들이 집 밖을 나가면 마땅히 젖먹일 곳을 찾지 못해 고생이잖아요. (작품과 관련 없는 글들이 주루룩...)
제가 가끔 '여성'이 되고 싶다거나, 여성만이 할 수 있는 경험에 대한 동경(?)내지 호기심을 갖는 것은,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생명'과도 연결되어 있지만 소유욕이거나 내가 되고 싶은 것은 20대 미모의 여성만으로 한정되어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50대 여성이 되어보고 싶은 것은 아니니까, 일종의 판타지죠.
CHANGE 같은 영화처럼..
트랜스젠더 분들은 '예쁜 여자'가 되고 싶은 건지, 그냥 '여자'가 되고 싶은 건지, 이게 경계가 애매하기도 하고, 예전에 누나가 말한것처럼 하리수같은 분들은 과도(?)하게 성적인 여성성을 추구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은데..
이 작품이 시장에서 당장 반응을 얻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의 상정 독자인 초등학교 고학년~중학생 남성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한국 판타지 시장의 시장 잠재성은 높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이 시장 독자들을 형성시키는 기획의 일환으로는 번역 소개하는 것이 의미있는 작품으로 판단된다.
주지하듯이, 한국 판타지 시장은 무협 시장과 겹쳐진 영역, 일본 게임 애니메이션 시장과 겹쳐진 영역, 그리고 서양 고전 판타지 영역으로 나뉜다.(김남훈, 「드래곤과 마법사, 한국」, <<판타스틱>> 2호, 2007. 6.) 무협지와 같이 강한 주인공의 성장담은 전형적인 영웅서사의 형태를 따르는 판타지를 도출했고, 일본 게임 애니메이션 시장과 겹쳐진 영역은 로도스 전기 류의 애니메이션 식 마법들과 주인공 파티의 대결 구도를 따르는 분야를 낳았다. 그리고 서양 고전 판타지는 최근에서야 비로소 3대 판타지 소설인 <반지의 제왕>, <어스시의 마법사>, <나니아 연대기>가 번역되어 나왔고 대중적 반응도 <반지의 제왕>을 제외한다면 그 명성에 비해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물론 <반지의 제왕>의 인기는 영화의 인기에 힘입은바 크다.
이러한 시장 상황은 서구 판타지 번역물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이다. 특히 이처럼 현지에서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생을 대상독자로 한 작품은, 보통 몸이 약하고 공부(과학이나 역사학)을 좋아하는 남학생을 주인공으로 한 성장담이라는 공통된 특질을 갖고 있다. 이는 작가나 제작자가 상정하고 있는 판타지 독자의 이미지 상이기도 하다. 본래 서구 판타지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모험심과 탐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한국의 판타지는 고전 영웅소설담이라는 기원을 갖는다. 이 둘을 이미지화해본다면 콜럼버스 대 홍길동이라는 구도로 표현할 수 있다. 이는 근대 이후 동서양 역사 전개과정에서 비롯된 대중들의 욕망의 차이에서 비롯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서구 판타지가 신대륙을 찾아서 모험을 떠나고 그 ‘미지의 개척지’를 전유하려는 제국주의적 욕망을 표상한다면, 동양 판타지는 지배 계급을 전복하려는 민중의 열망을 자신들을 대변해주는 영웅에 투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동서의 기존 장르적 문법은, 현대 장르소설의 문법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현대 서구 판타지가 한국에서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이 책은 서구 판타지의 이러한 문법을 충실하게 구현하고 있다. 주인공 Felix은 중학생 정도로 심장병을 앓아서 몸이 허약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소년이다. 항상 병원을 들락거리고 입원도 자주하기에 친구는 없지만, 머리가 좋고 과학책 읽기를 좋아하는 소년이다. 과학을 좋아하는 그를 코스타리카라는 천연 밀림이 잘 보존된 중남미 국가에 부모가 데리고 간다. 코스타리카는 지구에서 유일하게 대서양과 태평양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장소가 있는 나라이다. 그래서 제목이 ‘DIVIDE'(분리)이다. 여기는 코스타리카의 산으로, 동쪽으로 물이 떨어지면 대서양으로가고 서쪽으로 물이 흐르면 태평양으로 흐르게 되는 지점이다. Felix은 이 ’divide'에서 순간 기절을 하고 일어나보니 환타지 세계였던 것이다. 이 환타지 세계에서 Betony라는 엘프 소녀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함께 모험을 겪고 이 세계의 마법을 이용해서 건강해 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스토리이다.
이 세계는 과학이 지배하는 현실세계와 거울쌍을 이룬다. 현실세계에 인간들이 산다면 환상세계에는 엘프들이 살고, 인간은 과학을 사용한다면 엘프들은 마법을 사용한다는 식이다. 그리고 각자의 세계에는 서로의 세계에 대한 신화나 전설들이 있어서 환상세계에서는 인간이나 과학 같은 것이 신비스러운 존재로 그려진다. 이러한 설정은 한편으로는 손쉬운 설정이지만, 주인공들로 하여금 두 공간을 쉽게 오갈 수 있게 하며, 또 현실 세계에 대한 알레고리적 비판이나 교훈을 독자에게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장치로서도 기능한다. 예를들어 그리폰 남성은 수학자 여성은 역사가로 그려져, 이 그리폰 동료들의 도움으로 역사적 문헌 속에서 심장병 치료 마법을 찾고, 수학적으로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차원 공식을 계산하는 것을 통해서 지식, 공부의 중요성을 아이들에게 일깨워준다. Felix또한 병이 낳고 나서는 과학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또 전체적으로 환타지 세계가 역사적으로 수렵기에서 농업혁명이 일어나는 신석기 시대와 중세가 혼합된 체계로 그리고 있고, 그 와중에 인체실험을 거치지 않은 약품을 판매하는 요정을 악당으로 그림으로써, 암시적으로 유전자 조작 약품 등의 위험성 등을 경고한다.
이렇게 현실세계를 너무 쉽게 떠올리게 하는 장치는, 성인 독자에게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반감시킨다. 작가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면서 고려했을 요소들에 대한 흥미나,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알아나가면서 느끼게 되는 지적 호기심은 거의 전무하다시피하다. 그저 현실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환상세계’라는 장치를 통해 서술하는 우화적인 거울세계라는 느낌이 더 많이 드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성인 독자나 본격 환상문학 독자들의 흥미를 끌만한 요소는 그다지 많지 않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청소년에게 환상 문학이라는 장르를 소개한다는 점에서의 장점들을 갖고 있고, 현대적 메시지도 강하지 않게 서사적으로 잘 구조화되어 있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한국 청소년 환상 문학 시장을 구축하려는 기획의 일환으로는 괜찮은 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궁극적으로 한국 문학시장을 다양하고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청소년 장르문학 시장을 키우고, 이들에게 장르문학의 즐거움, 책읽기의 ‘즐거움’ 자체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면, 이러한 책들이 장기적 기획의 일환으로 소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청소년 장르문학은, 한편으로는 청소년(특히 소년)이 성인 대중문학으로 나아가는 매개가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장르문학과 본격문학의 매개역할을 한다. 현재 본격문학 독자의 대부분이 여성인 이유는, 소녀시절 장르문학과 본격문학을 매개해주는 하이틴 로맨스 문학의 영향력도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장르문학이 단기적으로 시장에서 큰 반향을 끌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해리포터의 전세계적 성공 이후, 한국 출판계에서 청소년 장르문학을 기획해보려는 시도가 많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되지만, 해리포터의 예외적이고 일시적인 인기와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물론 해리포터의 열풍 이후에 독자들이 장르문학의 문법에 덜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장점은 분명하기에, 지금이 청소년 장르문학 시장에 장기적인 기획으로 뛰어들기에 적합한 시점임은 분명하다.
마리 드 프랑스는 여성주의 비평이 힘을 얻으면서 새롭게 읽히기 시작한 여성작가이다. 그녀가 프랑스 어로 시를 썼기 때문에 과연 영국 중세문학의 갈피에 끼워넣을 수 있느냐의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12세기 영국의 문맥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글을 이제는 중세 영문학 시간에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영문학과의 필독서 또는 must-have (or must-carry)인 Norton Anthology 8판에도 그녀의 글이 실렸다고 하니, 나름 정전의 반열에 오른 것이 아닌가 싶다. 마리 드 프랑스는 14세기 시인 초서에 비견되는 여성작가이이기도 하고, 남자 작가들이 때때로 보이는 일방적 관음증에서 벗어나 여성의 시각에서 섬세하게 글을 썼다는 점이 이 책을 읽는 재미이기도 하다. 여성작가가 글쓰기를 통해 권력을 얻고자 하는 야심이 어느 정도 드러나기도 하고 이 책에 담긴 Chaitivel과 같은 이야기시에선 궁정식 사랑(courtly love)의 구도에서 수동적인 입장만 요구받는 여성이 얼마나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하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자리에선 11편의 이야기 중 기사 랑발의 이야기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수업 발제문을 약간 고친 것!^^)
Marie de France의 Lais: 기사를 기사로 만드는 것
한 편의 서언과 열한 편의 이야기로 짜인 마리 드 프랑스(Marie de France)의 『이야기』(The Lais)는 사랑의 충만함과 이지러짐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준다. 사랑을 모르던 한 기사는 사냥하다가 치명적 부상을 입어 사랑을 강제적으로나마 배우게 되고, 인내와 우연의 개입을 통해 사랑의 결실을 보게 된다(Guigemar). 어느 연인의 사랑은 보답되지만(Lanval, Yonec), 또 다른 지순한 사랑은 보답되지 못한 채 산에 묻히기도 한다(Les Deus Amanz). 어떤 사랑은 정도가 지나쳐서 끔찍한 최후를 맞기도 한다(Bisclavret, Equitan). 누군가의 외도는 사랑으로 칭송되지만, 또 누군가의 사랑은 부덕함으로 지탄을 받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사랑의 면면만큼이나 그 길이와 구성 방식 또한 다양하다. 어떤 경우는 사랑을 돕기 위해 초자연적인(현대의 눈으로 보건대 비과학적인) 대상물도 등장한다. 누군가는 이러한 민화적 소재에 흥미를 느끼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근대식 낭만 이데올로기의 원형이라 불리는 중세 로맨스의 ‘개인간의 사랑’이, 혹은 쉽게 이름 붙이는 ‘사적’인 감정이 마리 드 프랑스의 『이야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인가? 12세기 중후반의 유럽 사회에서 유행처럼 번진 궁정식 사랑이 사적 감수성의 전형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자. 열 한 편의 이야기 모두 기사와 기사를 둘러싼 여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손쉽게 근대적 사랑의 모태라고 이름 붙이기 전에 이들의 사랑을 둘러싼 사회 구조를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이 글은 궁에서 내쳐졌던 기사 Lanval의 이야기를 통해 봉건제 내 후원인-피보호인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중세의 견고한 후원인-피보호인 관계 내에서는 가장 내밀한 개인간의 감정도 개인적 영역으로 남아있기 어렵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 이러한 사회망 내에서 중개인(go-between)으로 오가는, 혹은 그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는 요정여왕과 Guinevere, Guildeluec과 Gualadun을 살펴보면서 이들이 영주-가신의 관계망에서 어떤 전복적 힘과 한계를 갖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이들의 사랑 이야기도 Andreas Capellanus의 가르침처럼 청년을 유능한 기사로 성장하게 하는 교육 효과를 지니지만, 크레티엥(Chretien de Troyes)의 로맨스와 다르게 여성인물의 역할이 적극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두 이야기의 문제적인 결말을 통해 기사도의 지향점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랑발」: 버림 받은 기사의 회복기 「랑발」은 『이야기』에 수록된 열한 편의 이야기 중 유일하게 아서 왕의 궁전과 그의 기사를 다룬다. 크레티엥의 전작이 아서 왕의 기사들에 할애된 것에 비하면 마리 드 프랑스가 아서 왕의 궁전에 보이는 관심은 상당히 인색한 편이다. 이 유일한 아서 왕 이야기에서 아서의 기사 중 한 명인 랑발은 아서의 관대함에서 제외되는 존재로 그려진다. 후원인-피보호인 관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려면, 군주는 자신의 가신에게 충분한 물질을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아서는 랑발을 제외한 모든 가신들에게 넉넉하게 쓸 것을 (심지어 아내까지) 제공하는 군주임이 드러난다.
He[Arthur] gave out many rich gifts: To counts and barons, Members of the Round Table— such a company had no equal in all the world— he distributed wives and lands, to all but one who had served him. That was Lanval; Arthur forgot him, And none of his men favored him either. (13-20행)
그러나 랑발은 잊혔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그의 용맹스러움, 관대함, 그리고 아름다움 모두 너무나 탁월해서 다른 가신들의 질투를 받을 정도였는데 아서는 그를 잊었다. 랑발은 아서 왕에게서 어떤 물질적 후원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곧 그곳을 떠나야 했다. 실제로 그는 “높은 지위를 가진 왕의 아들이었지만, 유산을 기대할 수 없는”(the son of a king of high degree / but he was far from his heritage) 지위였기 때문에 아서 왕의 궁전으로 흘러들어 그의 기사가 된 것이다(27-28행). 당시 장자 상속에 밀린 차남 이하의 아들들은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다른 군주의 궁에 들어가 자신의 용맹스러움과 기량을 증명해야 했다. 랑발은 본디 갖추고 있는 기량 때문에 동료 기사들 사이에서 견제되었던 것에 반해, 왕은 그 기량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게 분명하다. 군주의 눈밖에 나는 일은 기사 로맨스에서 흔한 줄거리일 수 있는데, 주인공 기사 주변에 동료 기사가 없다는 것은 남성간의 관계가 중시되는 기사들의 세계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그를 견제하는 다른 기사들에게서 모함을 받은 엘리둑도 홀로 궁전을 빠져 나오지 않았다는 게 랑발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여기에서 랑발의 고립 이유에 대해 몇 가지 추측을 해본다면 첫째, 랑발은 자신의 밑에서 섬길 부하를 거느릴 자금이 없었다. 둘째, 요정여왕을 만나기 전 랑발은 사랑을 알지 못해 진정한 기사라고 인정되지 못했다. (사랑을 알아야 진정한 기사가 된다는 이야기가 많지 않은가. 예) Troilus and Crysede의 트로일러스나 Guigemar) 셋째, 이 이야기의 후반부에 귀네비어가 접근하는 것으로 보건대 사실 그는 여왕의 총애를 받아서 질투에 눈이 먼 아서 왕이 그를 고의로 잊은 것일 수 있다. 어느 것이 가장 큰 이유인 줄은 모르겠지만, 아서 왕의 재원을 나눠 받지 못한 랑발이 금전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은 분명하다. 어찌 됐건 랑발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철저히 고립되어 Cardoel을 떠나 들판으로 온다(43-44행). 자신의 말도 건너길 거부하는 강 앞에서 그는 홀로 누워 고민한다. 마리 드 프랑스는 랑발의 고립 상태를 끊임없이 강조한다. 이때 진한 자줏빛 옷을 입은 여인들이 그에게 다가와 자신들의 요정 여왕이 있는 곳으로 랑발을 이끈다. 요정 여왕은 적극적으로 랑발을 찾아와 그를 사랑했다고 고백하고, 그가 그녀의 사랑에 성실하게 반응한다면 어떤 것이든 해주겠다고 제안한다. 이에 랑발은 의무성실이행을 약속한다. 물론, 그것을 말로 약속하기 전에 그녀를 ‘쳐다보았고’ 그녀의 빼어난 아름다움에 사랑에 빠져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의 계약 조건을 내세운다.
“Lovely one,” he said, “if it pleased you, if such joy might be mine that you would love me, there is nothing you might command, within my power, that I would not do, whether foolish or wise. I shall obey your command; For you, I shall abandon everyone. (121-28행)
이들이 사랑의 서약이 군주와 가신의 보호-충성 서약과 전혀 다를 바 없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 계약을 맺음으로 랑발은 훌륭한 후견인을 얻었다. 버림받은 기사를 요정 여왕이 거둬서 먹이는 대목은 마리 드 프랑스의 안도와 함께 잘 드러난다(Now Lanval is well cared for. /The more lavishly he spends, / the more gold and silver he will have. 140-42행) 랑발은 이제 충분한 재원을 확보했고, 그가 요정 여왕의 계약 조건만 충실히 이행한다면, 곧 기사로서의 입지도 확보할 수 있다는 전망도 보여준다. 요정 여왕은 그를 자신의 궁전에 오래 두지 않고 랑발이 있어야 할 곳으로 보낸다. 요정 여왕이 랑발을 제외한 다른 남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과, 그가 요정 여왕에 대한 비밀을 지키기만 한다면 그녀의 관대함은 계속될 것이라는 약속은 남성 판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사를 성숙시키는 외부 기제(deus ex machina)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아름다운데 관대하고, 관대하면서 오직 한 남자만을 위해 봉사하는 여왕은 궁정식 사랑에서 기사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여인이 아닐 수 없다. 사랑을 얻고, 돈을 얻은 랑발은 이제 원탁의 기사들을 떠날 때의 어리석고 세련되지 못한 기사가 아니다 (“he was no fool, no boor”177행). 177행으로 추정해보건대, 랑발은 돈도 사랑도 몰랐기 때문에 그가 본디 갖추고 있던 덕성으로도 사람들의 환심을 살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돌아온 랑발은 요정 여왕이 제공해준 재화로 수많은 사람들을 자기 궁으로 끌어 모은다. 이 지점에 오면 랑발이 아서와 동등한 후원자/영주의 자리로 성장한 것을 알 수 있다. 랑발이 주체가 되어 모든 행동을 한다.
Lanval gave rich gifts, Lanval released prisoners, Lanval dress jongleurs[performers], Langal offered great honors. There was no stranger or firend To whom Lanval didn’t give. (209-14행)
기사에서 준 영주의 자리까지 성장한 랑발은 이제 마지막 시험을 남겨둔다. 자신을 잊은 적이 있던 아서의 여왕(귀네비어)의 유혹 앞에서 랑발이 끝까지 군주-가신의 서약을 지킬 수 있는지를 요구 받는다. 그가 이 유혹을 이길 때 아서 앞에서도 충직한 가신이 되는 것이고, 또한 동시에 자신이 섬기는 요정 여왕과의 계약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랑발」에서 보여지는 사랑은 개인적 사랑일 수 없다. 계약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고 할까. 여왕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길 거부하고, 자신의 요정 여왕의 아름다움이 낫다고 이야기한 랑발은 다시 고립된다(Lanval was alone and forlorn, / he had no relative, no friend. 398-99행). 왕에 대한 충성을 지키기 위해 귀네비어를 모욕하게 된 랑발은 도리어 왕의 분노를 산다. 왕의 분노를 해결하는 것이 아서 궁의 ‘정의’(436행)이기 때문에 랑발이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지 못할 경우 그는 다시 아서 궁에서 쫓겨나야 한다. (*기사가 되는 길은 험난하고나!) 그러나 때에 맞춰 도착한 요정 여왕과, 그때까지 두 군주에게 충성스러움을 보여준 랑발의 덕성 때문에 그는 구출된다. 요정 여왕은 현실의 왕과 그의 가신들에게 경외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요정 여왕은 랑발의 충성심을 제대로 알아 보지 못하는 아서와 아서의 기사들을 꾸짖고는 랑발과 함께 아발론(Avalun)으로 떠난다. 이 결말부만 보면, 아서의 궁으로 대변되는 현실 정치에서 랑발처럼 성실한 기사가 도리어 오해받고 고립되는 상황을 고발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랑발이 요정 여왕을 만남으로써 권력관계에 적합한 기사로 성숙했다면, 그의 남다른 도덕적 고귀함은 현실 정치에 그리 맞지 않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짐작해본다. 랑발과 같은 기사가 정착할 곳은 이상향에 가까운 아발론일 뿐이다. 마리 드 프랑스는 이 이야기를 통해 요정 여왕과 랑발의 사랑 이야기를 보여 주기보다, 무엇이 기사를 기사로 만들어 주는지를 보여준다.
마리 드 프랑스의 이 작품이 Norton에 올라와 있는 건 이 작품만은 영어로 된 작품이라서인가요? 아니면 로망스 문학의 전통속에 있어서 번역판이지만 영문학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사랑과 돈이 덕성을 입증해주기 위한 밑거름이라는 건 시대를 막론한 현실 논리인 모양이군요. 그나저나 초반에 있는 '개인간의 사랑'이 그림 덕에 절묘하게 띄어쓰기가 되어서 한동안 犬人間으로 읽으며 랑발이 개의 형상을 하고 있는 기사인가라는 얼통당토 않은 생각을 수초간 했다는 ^^;
강신익 선생님의 이 책과 <몸의 역사, 몸의 문화>를 사면서 처음 든 생각은 “한 발 늦었다” 였습니다. 물론 접근의 출발점이 의학과 문학이라는 점에서 많이 다르지만, 몸을 가지고 역사와 문화를 말해보고 싶은 저에게 강신익 선생님의 이 책은 큰 도움이 되는 한 편, 저 같은 의학의 문외한으로서는 말할 수 없는 부분들까지 상세히 설명되어 있는 책이라는 사실 때문에 좌절감을 안겨 주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근대에 들어 한국 땅에서 몸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달라졌으며, 그것이 한국의 문화를 어떻게 바꾸어놓았는가’에 관심이 있는 저는, 선생님의 이 두 권의 책들을 통해 제 의문에 대한 의학적인 측면에서의 많은 영감과 지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점, 먼저 감사드립니다.
1. 저는 병원에 가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TV나 영화에서 사람의 몸에 주사바늘을 꽂는 장면도 섬뜩해하는 편이라, 웬만하면 주사 맞고 피 뽑고 하는 일은 안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의사·간호사들과의 그런 물리적인 접촉, 치료 과정이 싫어서 뿐 아니라, 제 몸이 ‘부끄러워서’라도 저는 병원에 가는 것이 꺼려집니다. 말하고 싶지 않은 내 몸의 경험이나 비밀을 그들은 환히 꿰뚫어 보고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의사라는 존재들은 내가 아님에도 나를, 나의 몸을 더 잘 알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으로 나를 평가하고 통제하려 들 것만 같아 그들이 ‘두렵습니다.’ 그들이 저의 차트에 적는 그 알아보기도 힘든 ‘꼬부랑글씨’의 진단과 처방 내용도 마땅치 않습니다. 내 몸에 대한 판단에서 그들은 나를 소외시킵니다. 또 쏟아지듯 나오는 의학 관련 기사들 사이의 모순들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의학적으로 ‘건강’해지는 길인지도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선생님의 이 책에서는 저와 같은 의학 앞에서 평생 ‘환자’의 입장으로만 살아야하는 사람들(선생님께서도 <몸의 역사 몸의 문화>에서는 ‘대중’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고 계시듯 이러한 존재를 여기서는 잠정적으로 ‘대중’이라고 규정하겠습니다.)이 가지는 몸과 의학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에 대해서 의학의 ‘진보’가 가져온 ‘대가’라고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각종 영상장비를 통해 우리 몸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외과수술의 영역도 그만큼 넓어졌다. 심지어는 칼을 대지 않고도 몸속 깊숙이 자리한 병소를 도려낼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진보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내가 간직한 비밀스런 영역이던 몸이 이제는 X-ray, MRI 등 각종 검사의 다양한 의학의 시선에 노출되고, 그렇게 노출된 내 신체정보가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넘겨지고 공유함으로써,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게 되었다.”(64쪽)
의학의 ‘진보’는 몸에 대한 사유를 바꾸어 놓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선생님께서 <몸의 역사 몸의 문화>에서 더 상세히 논하고 계시는 의철학이라든가 의학과 사상의 연관관계에 대해 읽어보면 그 과정을 보다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몸 담론, 몸에 얽힌 문화의 변동과정에 관해 진단하고 반성하려 할 때 역시 의학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의학자의 입장에서 의학(의 역사)을 반성하려 하는 시도 역시 저처럼 의사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고맙고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1세기 의학은 인식과 방법의 폭력에서 벗어나 생생한 삶의 현장 위에 다시 세워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근거 없는 무병장수의 환상을 퍼뜨릴 것이 아니라, 앎과 삶이 하나였던 과거를 되짚어가며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눈으로 지금의 앎과 삶을 바라볼 수 있다.”(8쪽)
“내가 말하려는 의학사 역시 세계를 이해하는 앎의 체계와 그에 따른 삶의 방식에 대한 것이다. 특히 그런 체계와 방식이 몸에 대한 관점을 어떻게 바꾸는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몸에 대한 과거의 관점을 적절히 받아들여 현실과 비교하는 것이 의학사를 공부하는 까닭이며 내가 이 책을 쓰는 목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과학을 보편과 합리에 근거한 지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먼저, 그 보편과 합리를 구분하는 잣대가 무엇인지 검토해야 한다....과학이 스스로 씌운 문화의 폭군이라는 혐의를 벗으려면 과학이 내세우는 보편과 합리라는 가치를 논리와 도덕과 문화로 정당화할 수 있어야한다.“(4쪽)
“보편성과 합리성의 기준에서 보면 동양의학은 벌써 사라졌어야 마땅하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20세기말부터 동양의학의 영향력이 훨씬 더 커졌는데, 이것은 모든 것의 바탕이던 과학(서양의학)의 보편성이 심각하게 도전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서양의학의 보편성과 합리성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수천 년에 걸쳐 몸에 쌓인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의학의 역사는 이렇게 앎과 삶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과정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5쪽)
2. 그런데 바로 이점, 의학자가 의학을 반성하며, 그것을 대중(의사가 아닌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님으로써, 이 책은 약간 혼란스러워지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때때로 ‘우리’라는 표현으로 의학이 가져온 몸 정체성의 혼돈 속에 둘러싸여있는 대중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부분에서는 의사들을 ‘그들’이라고 표현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인간 염색체의 DNA를 구성하는 30억 쌍의 염기 서열을 모두 알게 되었지만, 이런 지식이 우리의 삶과 어떻게 연관되었는지 생각해보면 그저 막연할 뿐이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구조 그 자체로만 보고, 왜 그런 구조이며 그 구조가 우리가 살아가는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따져보지 않았기 때문이다.”(8쪽)
“그들(의사-인용자 주)은 사람을 몸과 정신으로 나눠 정신에 상처를 남기지 않고, 몸만 실험 도구로 쓸 수 있다는 말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그렇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우리들도 거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해부학 실습실에서 죽은 몸을 열어 보면서 그것을 물질의 덩어리로만 여기지는 않는가? 내 몸의 일부를 기계나 다른 사람에게서 얻은 장기로 바꾸면서 내 몸을 하나의 기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가?“(9쪽)
“우리는 쉽게 몸을 앎과 삶의 결합 또는 그것의 결과물로 생각하지 못한다. 그것은 한가한 철학자가 즐기는 사유의 모험이나 이상일 수는 있어도 바쁜 현대인에게는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책에서 이 같은 현실에 도전해 보려고 한다.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상식마저도 어느 정도는 역사와 문화의 산물임을 보여주고, 우리의 상식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지 그리고 우리의 의학은 변해가는 상식의 흐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생각해 볼 것이다.”(13쪽)
그런데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위의 인용부분들에서 말하는 ‘우리’가 정말 의학자가 아닌 ‘우리’, ‘대중’일까요? 이를테면, DNA의 염기서열의 구조를 발견했다는 사실은 의학자가 아닌 ‘우리들’의 삶에는 그다지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학문, 전문지식에 대한 ‘대중’들의 태도이지요. 그들이 아는 ‘상식’과 그 상식에 의거한 ‘삶’은, 애초부터 학문적인 ‘앎’과는 분리되어 있거나 그것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재구조화한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식물에서 ‘대중’들은 외우기도 힘든 외국어로 된 무슨 성분이 들어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사실은 대중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식물을 먹으면 숙면을 취할 수 있다든가, 암을 예방할 수 있다든가 하는 식의 지식은 급속도로 대중들에게 확산될 수 있지요. 그렇듯 DNA의 염기서열 구조를 발견한 사실 앞에서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대중’이라는 ‘우리’들이 아니라, 의학자들이 아닌가요? 그리고 ‘우리’는 굳이 그것의 구조가 우리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따져볼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요? 그 연결고리를 만들어주어야 하는 것은 의학전문가들의 몫이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의 입장에서 “내 몸의 일부를 기계나 다른 사람에게서 얻은 장기로 바꾸면서 내 몸을 하나의 기계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저는 대부분 아닐 거라고 생각됩니다. 내 몸의 일부를 기계나 다른 사람의 장기로 대체해야 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존재들입니다. 그런 시술을 하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르는, 즉 내 몸이 소멸되어버릴지도 모르는 위협의 상황에서 현대(서구)의학이 발명해 낸 기계와 장기이식술에 의존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나 자신의 몸에 대해 치열하게 감각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겐 그런 수술을 받는 자신의 몸이 기계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몸에 이식되는 기계와 다른 사람의 장기마저 자신의 몸으로 받아들여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 기계 삽입, 장기이식을 물질적으로만 바라보는 이는 그 수술을 하는 의사들일 뿐 아닐까요?
이러한 대목들에서 ‘우리’는 그러므로 의학의 문외한인 대중들이라기보다는 의학자들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글 몇 군데에서는 바로 ‘의사’로서의 정체성과 ‘의사’의 범주를 넘어선(넘어서고자 하는) 존재로서의 정체성이 혼란스럽게 섞여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의사인 ‘그들’과 의사가 아닌, 잠재적 ‘환자’인 ‘우리’ ‘대중’들 사이를 명확히 구분하시고자 한 것인지요, 아니면 양자를 아울러 얘기하고자 하신 것인지요?
이 문제는 결국 이 책의 목적인 현재의 의학과 몸에 대한 인식을 반성할 주체가 누구이며, 그 주체들이 취해야 할 행동의 방향, 대안에 대한 물음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의학자·의사와 일반인들이 지금-여기의 몸에 관한 질문들에 동일한 방식으로 답하고 동일한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요? 현재의 의학이나 기계로서의 몸 인식에 대한 맹신, 과잉적용의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로 접근하는 일이 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의학자와 그 지식의 ‘적용’을 받게 될 일반인 사이에는 조금 달라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예를 들면, 루키즘(Lookism)이 팽배한 이 시대에, 성형수술을 하려고 상담을 받으러 온 성형중독자에게 의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내 몸은 마음이고 마음이 내 몸이다. 몸은 물질이면서 정신이고 추상이면서 눈에 보이는 현실이다. 그래서 몸은 하나의 문화 공간이 된다. 몸은 육체와 정신으로 나뉜 것이 아닌, 그저 ‘몸’일 뿐이다.”(13쪽)라는 선생님의 입장에 의거할 때, 몸을 고치는 일은 마음을 고치는 일일 수 있기 때문에 성형수술이 필요할 수도 있고, 몸은 물질이 아닌 정신, 추상이기도 하므로 몸을 고치려하지 말고 마음을 다스리라고 권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3. 이 질문과 관련하여 더 말씀 드리면, 선생님께서 이 책에서 논의하실 때 전제하시는 사실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의학의 ‘진보’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마치 몸의 비밀은 이제 거의 다 풀린 듯 보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몸을 다 볼 수 있게 되었고, 몸에 관한 탐구가 유전자라는 최소물질단계에까지 이르러서, 이제는 인간 몸의 신비가 거의 다 밝혀졌다고 전제하시는 듯 보입니다. 다만 우리(그것이 의학자든, 일반 대중이든)가 반성해야 할 것은, 거의 다 드러난 이 몸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의 문제에만 있다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몸은 이제 신성한 불가침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몸의 어떤 부분도 첨단 진단장비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없고, 장기에서 세포에 이르기까지 몸은 변형·대체·보충·재생의 대상이 된다. 몸은 세포와 조직과 장기의 수준에서 분리 가능한 부품의 집합이다...인공보형물, 장기이식, 인공수정, 대리모, 생식의학, 재생의학 등의 발달로 몸의 정체성은 더욱 심각한 혼란에 빠진다. 나는 누구이고 내 몸은 무엇인가?”(64~66쪽)
그러나 사실 의학은 엄청난 ‘진보’와 ‘발전’의 이면에, 여전히 미지의 영역들이 무한히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의 ‘말씀’이고 ‘마이더스의 손’인 줄 알았던 의사선생님들도 수많은 실수와 오류를 범합니다. 각종 의료사고와 오진, 의약업계의 이해관계에 따른 분쟁 등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 역시 신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불완전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제가 ‘문학박사’임에도 문학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듯, 그들도 사람의 몸에 대해서, 의학에 대해서 통달한 존재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Atul Gawande라는 의사의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Complications)>(김미화 역, 도서출판 소소, 2003.)을 보면서 저 역시 좀 더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현대의학이란 여전히 ‘불확실성’의 영역에 속해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의사에게는 너무나도 막강한 재량권이 주어지는 현실을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 그 책의 기본 태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의사·의학자가 현재의 몸 담론에 대해서 취해야 할 태도와 일반인들이 취해야 할 태도가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몸의 정체성, 나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은 혹시 그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의학이 몸에 관한 비밀의 많은 부분을 밝혀냈고, 몸에 생기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이면에 여전히 풀리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 거기에서 (특히 의학자들의) 몸에 관한 정체성 혼란은 더 심화되는 것이 아닐까요?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4. 한편으로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몸을 의학(기술)으로 ‘고치려’는 욕구와 관련된 성찰을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그 해결이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비르쇼가 세포들의 공화국으로 그린 몸이 우생학에 이르자 정치권력의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가 현대에 오면 일부 사이비과학이 만들어낸 관념의 희생양이 된다. 내 몸에서 뽑은 정보를 나도 모르게 저장하고 가공하며 때로는 상품으로 만들어 팔기도 한다. 사회문화가 만든 몸의 이미지에 따라 내 몸을 바꾸려는 욕구에 휘둘려 마치 마약에 빠지듯 다이어트 열풍과 성형중독에 빠져들기도 한다. 나는 이제 내 몸의 주인이 아닌 것이다.”(75쪽)
제가 준비하고 있는 책에서도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의문을 여전히 풀지 못했는데요, 몸짱·얼짱이 되고자 하는 인간들의 욕망은 ‘나쁜 것’입니까?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한 노력(성형수술, 다이어트)을 하는 것은 결국 내가 ‘내 몸의 주인이 아닌 것’이 됩니까? 데카르트식으로 말하자면, 몸을 ‘다듬는’, ‘고치는’ 노력을 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닌지요? 왜 몸을 고치고자 하는 것이 내 몸을 잃는 일일까요?(덧붙여, 엊그제 성형중독, 몸짱중독에 빠져드는 것도 ‘뇌 기능 이상’이라는 연구결과가 뉴스에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성형중독-몸짱중독’은 뇌기능 이상」, 뉴시스, 2007.7.2 기사) 이런 것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선생님께서 이 책의 말미에 가서 일종의 ‘대안’의학으로 말씀하신다고 보이는 ‘면역학’과 ‘진화의학’을 참조하더라도 저는 이 의문이 잘 해결되지 않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외부와 접촉을 통해 새로워진 내가 적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변하지 않는 나를 지키는 것으로 믿었던 면역세포가 사실은 끊임없이 나를 바꾸면서 외부와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내 정체성은 나를 끊임없이 바꿈으로써 비로소 지킬 수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이처럼 면역학에서 몸은 나와 남과의 수많은 관계들로 구성된다. 이전까지 의학이 변치않는 실체인 몸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었다면, 면역학에서는 수많은 관계를 통해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것이 된다.”(86쪽)
“몸을 기계로 보는 근대의 관점을 거부하고 수천만 년에 이르는 진화의 관점에서 몸을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진화의학 또는 다윈의학이다. 진화의학에서 질병은 몸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고, 진화적응의 부작용일 뿐 고장 난 몸이 아니다. 진화는 우리 몸속에 수많은 오류를 만들고 또 그것을 수정한다. 질병은 오류를 수정하기 전 몸의 상태다. 그렇지만, 수정의 과정이 완벽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진화는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통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질병은 진화의 과정에서 흔히 나타날 수 있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질병은 정복해야 할 적이 아닌 순간 적응해 나가야 할 조건일 뿐이다.”(88쪽)
면역(학)에 대한 선생님의 설명을 보며 참 많은 시사점을 얻었습니다. ‘수많은 관계를 통해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몸에 대한 면역학의 새로운 설명은 몸의 정체성에 대한 어떤 출구를 보여주는 듯하여 반가웠습니다. 진화의학 역시 몸의 ‘다양성’의 측면을 밝혀주고, 또한 몸을 시간의 연결망 속에서 이해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또다시 생긴 의문은, 면역학이나 진화의학의 관점에서도 현재의 ‘몸 가꾸기’에 대한 인간들의 열망은 일종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것’일 수 있고, ‘진화’의 과정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내 몸이 나의 것이 아니게 되는’ 어떤 비극의 종착점이 아니라, 또 그러한 ‘중독’들마저도 몸에 대한 다양성, 정체성 구성의 과정으로 ‘포용’해줄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권선징악’이 아니라 ‘권미(美)징추(醜)’가 시대의 가치관이 되어버린 것에 대해 사람들은 쉽게 개탄하고 비판하지만, 왜 비판받아야 하는가, 왜 문제인가에 대해서, 근본적인 성찰은 안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몸이라는 것이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데 있어 엄청나게 중요해졌다는 사실은 분명한데, 왜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 사회문화에 ‘적응’하려고하는 노력이 잘못된 것인지, 그리고 이를 ‘교정’하고자 한다면 누가 바뀌어야 하는지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오~ 잘 읽었습니다. 의사 친구들에게 사주어야 (현대의학을 고발한다 포함) 하겠어요. ㅎㅎ
제 생각에 루키즘의 문제는 우선, 쉽게 계급의 문제로 치환될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빈/부가 추/미라는 가치론적 영역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외모를 가꿀 여가/비용의 문제. 이를 문제시하지 않고, 미를 권하는 사회는 그 미가 '노력'의 문제로 바꾸는 것. 기실 외모는 노력하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것 + 부의 문제가 상당분 있는데, 이를 무능력으로 규정하는 것.
둘째, 외모에 따른 호불호는 문화를 매개로한 인간 본성이라 할 수 있을터이지만, 이것을 절대시화하는 문화는 우선 태생적인 조건에 한계지어지고 후천적인 노력(부에 기반한)을 할 수 없는 사람입장에서는 일종의 계급같이 작동하기 때문에, 평등이라는 가치상 우려할 부분이 큰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계속 딴지를 걸었던, 이쁜 사람만 드라마 나오는 것의 문제점은 이 외모-계급의 고착화를 낳는게 아닐까요?
이의 해결방안. 비연예인의 외모를 갖은 이들이 대동단결. Tv에서 비연예인스러운 외모가진이들의 쿼터제 실시. 그 이유. 미란 절대적 기준이 아니고, 노출정도에 따라서 정이 들기도 하기 때문에, 우리 일반인과 비슷한 외모를 지닌 이들의 노출빈도를 높이고, 이들이 긍정적 역할을 맡도록 함으로서, 대중에게 일반인 외모를 어필할 수 있는 권리. 즉 드라마 제작시, 해당 역할마다 통계학적으로 안면윤곽 눈크기 코높이 등등을 직업군마다 조사해서 '전형성'이 있는 얼굴, 체형, 외모를 중시할 것. (새로운 파시스트 등장. 외모의 '전형성' 논란!)
Tv라는 매체의 파급력을 고려하고, 그 '공공성'을 인정한다면, 일반인 다수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일반인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연예인'과 유사한 외모를 가진 소수 특권 계급의 전파 독점에 대한 투쟁...
‘단숨에’까지는 아니지만 하룻만에 다 읽을만한 책이었다. 책의 이야기는 전체가 '실화다. 글을 쓴 사람은 기자 출신의 소설가로, 기자 생활을 하면서 취재했던 내용을 소설 쓰듯 플롯을 만들어 풀어놓았다.
책은 ‘생의 비의’에 관한 재밌는 ‘이야기책’이었다. 책에서 다룬 ‘생의 비의’란 특히 죽음의 의미와 운명에 관한 것이다. 운명과도 같은 뜻하지 않은 사고와 전혀 준비하지 않은 죽음(체험)이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변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책에 나오는 12명의 사람들은 해난, 감전, 산사태, 홍수, 등반, 비행기 여행 때문에 갑자기 사고를 당한다. 심지어 서울 시내 한 가운데에서 술 먹고 길 가다가 맨홀에 빠져 9일간을 지하 하수도에 갇힌 회사원도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임사(臨死) 체험’을 한다. 그러니까 이 책에는 죽음의 순간에 대한 12개의 묘사가 있다.
이 묘사는 흥미롭다. 그리고 유익하다. 죽음에 대한 상상은 생을 진지한 것으로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런 사고를 언제든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수대교에서, 삼풍백화점에서 그리고 고속도로의 수많은 지점들에서 우리는 ‘1분 뒤의 생(사)’을 모른 채 웃으며 삶의 연속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사체험>
‘임사체험’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타인이 죽어가는 순간(임종)을 지켜봐서, 생에서 사로의 그 신비로운 단절이 무엇인지 대략 알고 있다.
가래 끓으며 힘없던 호흡이 어느 순간 정말 멎는다. 정적이 흐른다. 사자가 누운 공간이 조용하고 지켜보는 사람이 집중하고 있다면, 바로 그때 무게가 ‘21그램’쯤 된다는 인간의 영혼이 기(氣)가 되어 솟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자기자신이 죽는 그 절대의 시간을 예상해보거나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임사체험은 있다. “아, 이런 게 죽는 거구나.”하는 막연한 느낌. 그러나 그것이 진짜 ‘자신의 죽음’인 것인지는 모른다. 종합병원의 기계들은, 혈압과 맥박으로, 호흡수와 뇌파로 측정할 수 있어도 말이다.
급박한 사고를 당해 맞는 죽음은 몽롱한 채로 오거나, 의식이 이미 없어진 상태에서 오기 때문이다. 물론 급박하게 맞는 죽음에 대한 자기 인식이나 자기 감각도 여러 차원일 것이다. 그것은 분노와 슬픔 같은 격렬한 감정과, 공포와 고통 혹은 나른함 같은 궁극적인 감각과, 회한과 포기 또는 윤리가 뒤범벅된 상태일 것이다.
삶>
불의의 사고를 당하기 1분 전의 삶과, 사고를 당하고 난 1분 뒤의 삶은 완전히 다르다. 사고당한 사람은 이제 그야말로 살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똑똑히 의식하는 상태에서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들은 인간의 한계와 가능성이 종합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사고라는 임사 체험의 공통성도 흥미롭다. 살아온 삶 전체가 주마등처럼 파노라마로 펼쳐진다고 한다. 그리고 윤리적 성찰의 순간이 온다.
중요한 것은 거기서 인간이 성숙을 향해 비약한다는 것이다.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온 뒤 그들은 삶에 대한 다른 태도를 갖게 된다. 도(道) 하나를 제대로 얻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다시 구별하게 된다. 삶의 ‘연속됨’을 채우고 있는 것들의 부당한 권력을 깨닫게 된다. 물론 이러한 새 통찰이 과거로부터 이어진, 연속된 존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오류를 범하는 것일 테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을 통해 분명 비약하게 된다. 잠시나마.
특히 재밌었던 것은 물에 빠진 사람과 등반가들의 이야기였다. 자연이 그들을 살해한다.
책을 읽으면 사람이 물에 빠지면 어떻게 되는지, 수영을 정말 잘하는 선원들도 바다에 빠지면 왜 몇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죽는지 잘 알 수 있다. 북해 같은 찬 바다에 빠지면 수영을 잘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곧 온몸이 얼어 죽는다.(타이타닉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책 첫 번째 이야기에 그려진 대로 2월의 인천 앞바다에 빠진 40대의 선장은 20대의 견습선원보다 빨리 죽는다. 인도양 같은 따뜻한 바다에 빠질 경우 수영을 잘 할수록 더 오래 버틴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의 순간이 더 길어진다는 뜻도 된다. 결국 ‘탈진’이나 상어 같은 큰 물고기의 공격으로 죽게 되므로. 그래서 바다에서의 죽음은 별로 바람직스럽지 못한 듯하다.
한편, 등반가들의 이야기는 아주 낯설다. 산을 전혀 모르는 나는 여전히 그들이 잘 이해가 안 된다.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거기 왜 올라가는지?
등반가들의 경우는 '사고'라 하기 어렵고, 그들은 결코 평범한 사람들도 아니다. 그들은 사고를 자초하는 것 아닌가? 그들은 스스로 거기 가서 죽음과 자연에 도전한다. 등정에 성공하면 또 더 위험한 빙벽과 더 높은 산을 찾아간다. 생명체가 거의 없고 공기도 희박한 해발 7-8000미터의 산에서 일어난 눈사태와 크레바스의 균열이 과연 말 뜻 그대로 의외의 사고인가?
34세의 등반가 이현조 씨는 2005년, 8120m 낭가파르바트 루팔 빙벽에서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등정에 성공했다. 같이 사고를 당한 이씨의 친구는 부상을 당했다. 한 사람의 부상은 전체 등정대의 위험을 초래한다. 그래서 그는 다른 동료들을 위해 자일을 스스로 끊고 죽으려 했다.
그러나 이현조 씨는 그 친구까지 구하고 살아 돌아왔다. 그의 친구와 이현조 씨는 한국 등반계의 전설이 되었다. 그러나 이현조 씨는 올해 5월 16일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 결국 목숨을 잃었다. 또 눈사태라는 사고를 만난 것이다.
모든 에피소드들이 좋은데, 죽음 앞에 다가섰던 인간들이 결국 기독교의 신에게 귀의하는 결말은 흥미롭지 않았다. 심지어 수니 무슬림이었던 한 우즈베키스탄인 여성이 한국에서 비행기 사고를 당한 후 기독교로 개종한다는 이야기는 매우 우울했다.
극한 체험을 했던 사람들이 삶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갖게 되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초월적 힘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니, 극한 체험을 안 했더라도, 개별 인간은 한 없이 약하여, 마음이 순두부처럼 무르고 죄의식에 고통스러워한다. 유한자인 거의 모든 인간에게는 성스러운 힘과 절대적인 의지처와, 특히 ‘지금 당장’의 위로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왜, 도대체 왜? 기독교 방식? 왜 하필 그 하느님?
그것이 한국의 풍토이자 문화이다. 마치 영화 <밀양>에서 아들을 잃고 절망과 죄책감에 빠진 전도연에게 이웃의 기독교인이 찾아오듯이, 사고 후 육체적 고통과 ‘외상후스트레스장애’에 빠진 우즈베키스탄 여인에게도 한국의 기독교도가 재빨리 다가왔던 것이다. 어찌나 동작이 신속ㆍ정확한지, 그들의 고통과 생에 대한 대면을 냉큼, 기독교의 영토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왜 다른 공동체와 다른 위안과 다른 극복은 없거나 태부족인가? 기독교의 공격적 전도를 이겨낼 다른 무엇인가는 없는가? 왜 그런가?
<밀양>에서 전도연이 나중에 깨닫듯이, 그것이 쉽게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유일자에 기댄 용서와 화해가 단지 내적으로 쉬울(안일할) 뿐만 아니라, 이웃에 그(것)들이 있기 때문에 간편하다. 산사나 선원(禪院)보다 흔하고 안전하고, 언어와 노래가 단순명쾌하며, 그럼에도 노하우가 잘 확립되어 있고, 경비마저 덜 들기 때문이다. 이 모두는 한국적 악순환인 것이다.
관련해서 또 하나 더 덧붙인다. 기독교도인 등반가들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에서는, 해발 7-8000미터의 산에 올라가서 스스로 죽음 앞에 다가가고, 반복적으로 죽음에 도전하는 등반가들은 결코 기독교스러운 신을 찾지 않는다는 것. 그들은 오로지 자연, 그리고 같이 등반하는 동료에게 기댄다는 사실.
그렇게 하여 등반가들은 최고의 인간됨을 실현한다. 좀더 알아보기 위해서 라인홀트 매스너의 책도 찾아 읽을 생각이다.
자살로 인간을 이해하기 ver 0.3 : Kay Redfield Jamison/이문희 역, <자살의 이해>, 뿌리와 이파리, 2004
어떤 작가와 예술가들이, 혹은 어떤 철학서와 예술작품이 자살에 낭만적이거나 신비한 외피를 입힌다. 반 고흐, 어네스트 헤밍웨이, 마야코프스키, 실비아 플러스, 버지니아 울프, 발터 벤야민, 질르 들뢰즈, 아리시마 다케오, 미시마 유키오, 다자이 오사무, 그리고 전혜린, 김광석. 이런 인간들의 죽음이 자살에 대한 후광을 더한다.
하지만 자살은 극단적인 고통과 병적인 혼미,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절망 속에서 선택된다. 그것은 낭만적이고 예술적인 충동과 거리가 멀다. 자살자는 인간된 마음을 지켜주는 유머감각과 따뜻함, 자존감이 모두 너덜너덜 헤어지고 박살난 상태에서, 멍해진 채로 그 길을 택한다. 그리고 자살자 옆에 남겨진 사람에게도 엄청난 아픔을 남긴다. 자살은 가장 독성이 강한 고통이다.
자살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이 인간 행위의 극한에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생의 의지, 혹은 자기보존본능은 자동적이며 일상적이다. 태어나는 순간 우리 모두는 그것을 소지하게 되고 지속적으로 훈련한다. 그리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는 ‘본능적인 것’ 이상으로 강하게 된다.
그러나 자살은 이 모두를 뛰어넘는다. 그래서 자살은 문제적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겪는 개인적인 고통과 사회적인 모순이 자살이라는 현상에 결절한다. 자살을 통해서 ‘살아나감’과 살아있음의 어울림, 즉 사회에 대해 다시 사유할 수 있다.
그래서 서구에서는 ‘자살학(suicidology)’이 발전해왔다. 존스홉킨스 의과대학 정신과 여성 교수인 케이 레드필드 재미슨(Kay Redfield Jamison)이 쓰고(원제 ‘Night Falls Fast’) ‘뿌리와 이파리’에서 번역 출간한 <자살의 이해>에 의하면 지난 30년간 1,500여건의 과학 및 임상논문들과 수백 권에 달하는 저서와 전공논문들이 발표됐다 한다. 이중 몇 권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었는데, 사회학적 자살론의 교과서처럼 여겨지는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을 제외할 때 <자살의 이해>는 자살에 대한 가장 깊은 통찰을 제공해준다.
자살은 인간의 복잡성이 야기해내는 가장 문제적인 행동인 탓에, 자살의 원인과 기제는 특정한 요인들로 환원되어 설명되지 못한다. 개별 자살자들에 대해 행해지는 과학적인 ‘심리 부검’으로도 자살에 이른 한 인간의 마음과 생을 다시 조립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살에 대해 말할 때, 인간을 신경전달물질과 DNA에 의해 지배받는 한갓 동물로 보지 않고, 동시에 형이상학적 행위로 미화하기 않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자살에 관한 책들을 보면 균형잡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살에 대해 쓰는 사람들은 때로 턱없이 자살을 미화하거나, 자살 사례를 말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풍자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감상에 젖는다.
균형을 잡고 있으면서 새롭고 믿을만한 의학ㆍ자연과학의 성과가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 책의 큰 미덕이다. 저자의 공식적인 태도는, 자살이 맞서기 힘든 강적이지만 예방하고 치료해야 할 ‘병’이라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자살이 우울ㆍ조울ㆍ분열증ㆍ인격장애와 같은 정신질환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자살을 병으로 취급하는 객관적 입장에 다소 불만을 느낄 수 있겠지만 저항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저자 자신, 임상경험이 많은 정신과 의사이면서 스스로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는 조울증 환자라는 사실이 신뢰를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인이 어디에 있든, 저자는 진정한 연민으로 자살자와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덧> 자살에 관한 책이 꽤 많이 번역됐지만, 한국인 저자가 자살에 관해 쓴 책은 거의 없다. 왜 그럴까? 근대가 시작된 이래, 엄청나게 많은 남/녀/노/소가 (골고루)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근자에는 매일 하루 30명이 넘는 사람이 야만스러운 경쟁의 밀림에서 ‘자진탈락’ 하고 있는데 말이다.
전 자살하면, 김소월과 커트 코베인이 떠올라요. 저도 석사때 자살에 관심이 생겨서 이 책 읽었는데, 그닥 감명받은 기억은 없네요. 왜 1910년~20년 희곡 텍스트에서 유닥 자살이 많이 결말로 등장하는가의 문제는, '자살'의 본질을 캐는 것보다는, 당대 상황과 희곡이 공연되었을 때의 가장 드라마틱한 결말, 당대 시대적 상황, 드라마투르기의 한계, 선전선동의 필요성 등으로 결론을 내렸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제가 관심을 가졌던 2.8 선언 직전 동경유학생 집단의 크리스마스 공연장에서 연행되었던 희곡에도 자살로 연극이 끝나는 것이 있어서, 그런 해석으로 도달하게 되었던 기억이 불연 나네요 ^^ 그 와중에 읽었던 책들..
대학원 과정때, 어떻게든 '해답'을 찾으려고 나만의 해석을 내려보려고, 책과 자료를 뒤지고 발표문 썼던 것들, 돌이켜보면 즐거웠어요. ㅎㅎ
저 블로그는 <자살의 역사와 기술>에서 임의로 발췌한 거네요. 저 책도 봤는데 상당히 풍자적인 톤으로 씌어져 있습니다... 1920년대 신문을 보면 온통 자살 기사로 넘쳐나죠. 긴 군이 찾은 '원인'은 뭐였는지? 나중에 제것과 비교해봅세다... 커트 코베인이 죽은 날(과연 자살인가? http://www.cobaincase.com),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들었는데 경악하던 배씨의 음성이 아직도 생생... 김광석이나 <남경에서의 강간> 저자인 아이리스 장의 '자살'도 의혹이 제기됐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