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시작하는 순간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말에 대해 연인으로부터
"그러게 말이다...근데 변하더라."라는 답을 듣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영원한 사랑'의 '로망'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직 너뿐이야', '사랑해서 결혼했다'와 같은 말을 매우 자랑스럽게 말하곤 한다.
그러나 '연식'이 오래된 인간일 수록
그런 말이 얼마나 허구이며, 무책임한 말인지를 깨달아 가게 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허위의식을 다른 방식으로 극복해
'가족애' 등으로 관계를 재정립해 나가는
지혜로운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좀 잘난 척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비영구성때문에
모든 사랑과 관계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영화 <시간>(김기덕, 2006)에서는
사랑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내포하게 되는 권태에 대한 불안을
자신의 육체를 바꾸는(성형수술) 극단적인 방법으로 극복해 나가려하는 여성이 등장하고,
<엘레지>(이자벨 코이셋, 2009)에서는
사랑의 비영구성을 냉소하면서 연인과 헤어지는 남성이 등장한다.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사랑이 시간과 반비례해서 줄어든다는 사실과
그 과정에서 그 사랑의 소멸, 변화를 야기하는 가장 큰 동인이 육체라는 사실을
매우 잘 (어쩌면 지나치게) 의식하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현실적 진실을 잘 알고 있는 <시간>의 새희(성현하 분)와 <엘레지>의 데이빗(벤 킹슬리 분)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사랑을 회의하고 불안해하며,
그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미리 사랑을 떠나보낸다.
그들의 인식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낭만적이지만 허구적인 모토를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한편으론 매우 영리하고 현실직시적이다.
지금 이 순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내 몸이 늙고 병들고 추해졌을 때에도 지금처럼 사랑해 줄 수 있을까?
'아플때나 병들었을 때나',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사랑하고 아끼라는
결혼식 주례사는 얼마나 지키기 힘든 말인가.
그러나 그들의 현명함은 한편으론 유아적인 것이다.
그들은 결국 시간을 통해 변하고 퇴색되어 버릴 사랑에 대한 불안 때문에
지금의 사랑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언젠가 버려질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넌 결국 날 떠나게 될거야'라며 한없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선수쳐서 떠나보내기'의 방법으로 극복하려 하는 것은
상대방이 겪을 상처보다 자신의 상처를 먼저 걱정하는 자기방어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불안한가에 대해서를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한다.
그들의 불안은 사실 사랑의 다른 모습이거나 그 일부분이다.
이 세상에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이런 불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 불안으로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퇴색시켜 버린다.
영원하지 않을 줄 알면서도 우리는 왜 매번 사랑에 빠지는가?
냉소만으로는 이러한 메커니즘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버려지는 것이 두렵다는 것은 버려지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그만큼 지금의 사랑이 소중하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 이별하게 될 때 자신이 겪게 될 상처를 미리 걱정하고
그 상처를 최소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려 하는, 일종의 이기심이다.
물론 그 '소중한' 사랑은 영원할 수 없을 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그 감정은 강렬한 실재이다.
새희와 데이빗은 헤어졌던 연인들과 다시 만난다.
너무 오래 만나 자신의 몸이 지겨워져서 떠날 거라 생각했던 새희는
완전히 바뀐 새로운 육체로 지우(하정우 분)를 유혹하고,
연인이 자신보다 열 다섯살이나 젊어, 결국 늙은 자신을 버리고 젊은 남자에게 떠나버릴 거라 예상했던 데이빗은
암으로 죽어가고 있는 콘수엘라(페넬로페 크루즈)의 병든 육체와 다시 대면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재회'는 무엇인가.
이 영화들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인가.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던 사람이 드디어 영원한 사랑을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유치한(?) 수준의 영화들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의 지나친 자기방어 덕에 다시 시작된 사랑은 이미 빛이 바래 버렸다.
새희는 과연 지우의 사랑을 믿을 수 있을까?
지금 그가 사랑하는 건 성형 수술 전의 새희인가, 성형 수술 후의 새희인가?
데이빗은 과연, 죽음을 앞두지 않았더라도 콘수엘라가 자신에게 돌아왔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들은 연인을 다시 만났지만, 그들의 불안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영화 <시간>은 지우가 과거의 새희를 잊지 못하자, 새희는 자신의 과거 육체에 대해 질투를 느껴야만 하게 되고,
두 개의 완전히 다른 모습의 여자가 모두 새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지우는
성형수술로 자신의 몸을 송두리째 바꾼 뒤 우연한 사고로 급사하는 결말을 그린다.
그녀의, 시간을 통해 변질되어 버릴 사랑에 대한 불안은 결국 대상의 죽음을 통해 끝이 나고 마는 것이다.
전신성형으로 이제 지우인지도 불분명한, 그러나 지우인 것 같은 주검 앞에서
새희는 어떻게 슬퍼해야 하는가.
완전히 다른 육체가 된 연인에게,
이전보다 아름답고 젊은 육체가 되었건, 싸늘한 시신으로 마주하게 되었건
우리는 과거와 동일한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가.
사랑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육체를 배제한 사랑이 가능한가?
영화<시간>은 이처럼 사랑과 시간과 변화와 육체의 상관관계에 대해
비현실적일만큼 극단적인 상황 설정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날카롭게 문제제기하고 있다.
한편 <엘레지>는 이러한 불안을 영화에서 더이상 보여주지 않은 채 끝을 맺지만
이러한 '열린 결말'을 통해서 영화는 다른 무언가를 더 말하고자 한 듯 하다.
그동안 50명이 넘는 여성과 사귀어보았고,
콘수엘라에 매혹된 자신의 감정이 그녀의 아름다운 육체-특히 그녀의 가슴-에서 비롯된 것이었던 데이빗은
겨우 5명의 남성을 사귀어 보았다는 콘수엘라의 과거(?)에 끊임없이 집착한다.
혼자 쿨한 척은 다하고 콘수엘라를 만나는 동안에도 오랜 섹스파트너도 주기적으로 만나면서도,
시간이 날때마다 콘수엘라의 과거의 남자들에 대해 궁금해하고
그녀에게 다른 약속이 있을 때마다 다른 젊은 남자를 만날까봐 의심하고 전전긍긍해 한다.
그러나 사실 자신의 경륜을 근거로
콘수엘라와 자신의 사랑이 얼마 가지 않을 것임을 수시로 강조하는 데이빗보다
훨씬 더 성숙한 존재는 콘수엘라이다.
데이빗이 자신에게 가지는 의심과 집착의 태도와
그러는 한편 종종 보여주는 '너는 조금 있으면 나보다 더 젊고 멋진 남자에게 가게 될거야'라는 말 사이에서
콘수엘라는 그의 자신에 대한 감정이 '장난감에 대한 소유욕' 같은 것이라고 정의한다.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어하진 않지만 감정에 진정성이 부족하다는 것.
언젠간 자신도 가지고 놀다 버릴 것이면서도 빼앗기긴 싫어하는 장난감 같은 것이라는 것.
데이빗은 자신의 콘수엘라에 대한 집착을 억누르려고 애쓰지만
그러기 위해 자신의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마저도 포기한다.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마음껏 사랑하는 방법을 그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콘수엘라가 그녀의 졸업 축하 가족파티에 그를 초대했을 때
그는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며 참석하지 않는다.
데이빗은 "나한테 도대체 왜이래요?"라는 콘수엘라의 원망에 아무 답도 내놓지 못한 채
'그래 다 끝났다. 진작에 이렇게 될줄 알았다'며 체념한다.
그리고 곧 자신에게도, 그녀에게도 그들의 사랑은 잊혀질 거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짐작과는 달리 그는 그녀를 2년이 넘도록 제대로 잊지 못했다.
그러다 2년 뒤 그녀에게서 '할 말이 있다. 이 말은 당신에게는 내가 직접 해야 할 것 같아서 연락했다'는 메시지에
새삼 두려움을 느낀다. 그녀의 '할 말'이란 그녀의 결혼 소식쯤이 될거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투병 소식을 듣고 그는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그런 그에게 콘수엘라는 '당신은 늘 내가 너무 젊다고 했는데...지금은 내가 당신보다 더 늙어버린 것 같군요.'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데이빗은 자신의 그동안의 생각의 오류를 깨닫고
뒤늦게 콘수엘라에게 다가가지만, 모를 일이다.
영화는 콘수엘라의 암 진행 정도가 꽤 심각하다는 것을 이야기해주면서도
그녀가 죽는 모습까지는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수술 뒤 병들고 지친 콘수엘라의 육체 앞에 나타난 데이빗이
용기를 내어 그녀의 병상에 자신의 몸을 비스듬히 뉘이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그들의 앞날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당장은 그녀 옆을 지키고 있지만, 그녀의 투병생활이 참혹하거나 지리해지면서
데이빗은 차츰 그녀로부터 떠나게 될 수도 있고
그러기 전에 그녀가 죽어 버려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사랑은 막을 내릴 수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또는 운 좋게 그녀가 완치되어 정말 데이빗보다 훨씬 젊고 멋진 남자에게로 가버릴 수도 있다.
그저 우리가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데이빗이 짐작했던 것보다는 그들의 사랑의 유효기간이 길었다는 것.
육체의 노화나 소멸은 단지 통계학적으로만 짐작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사랑이란 감정 역시 경험이나 통계만으로 미리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지나친 허위의식 속에 지금의 사랑을 신성시 하거나 낭만화하는 것도 경계해야 할 일이지만
자신의 지적 통찰력을 믿고 온전히 'fall-in-love'하지 못하는 것도 비겁한 일이라는 것...이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이쯤해서 <엘레지>와 비슷한 설정이지만
병 앞에서 사랑에 대처하는 태도에 있어서 좀 더 '고수'들을 직접 보여주는 드라마가 하나 떠오른다.
드라마 <네멋대로 해라>(2002)의 훌륭함은 매우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점은
고복수(양동근 분)가 뇌종양에 걸렸다는 사실 앞에서도
전경(이나영 분)과 복수는 자신들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곧 죽을 지도 모르고, 수술을 받은 뒤에 장애가 생길 지도 모르지만
복수와 경은 용감하게 계속 사랑한다.
복수는 이미 자신의 병을 알고 있던 상태에서 경을 만나고,
경은 복수의 병을 알고 난 뒤에 복수에게 청혼을 한다.
물론 복수는 결혼을 하자는 경의 제안을 거절한다.
자신의 육체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어쩌면 아예 소멸해버릴 지도 모르기 때문에
사랑까지는 포기하지 못했어도 결혼까지 할 엄두는 못내는 것이다.
그때 경이 말한다.
"우리, 살아있을 때 살고, 죽었을 때 죽어요. 살아있을 때 죽지 말고, 죽었을 때 살지 말아요."
이 얼마나 성숙한 태도이며 쉽지 않은 말인가.
몸의 변화와 소멸은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마음까지도 변할 수도,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성숙한 자세는
'그러므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명분 하의
'어떤 것에도 마음을 열지 않는다'는 '쿨함'의 가장이 아니라,
충분히 현재의 감정과, 그 속에 배태된 불안까지 껴안는 것이 아닐까.
감정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변할 것을 알면서도 현재의 감정에 충실하는 것.
사랑할 수 있을 때 마음껏 사랑하고,
그러했기 때문에 헤어지게 될 때에는 후회나 미련 한 방울 남기지 않으며 헤어질 수 있는 것.
헤어질 때를 걱정하며 사랑하고, 사랑했을 때에 대해 회한을 남기며 헤어지는 것은
똑똑하지만 용기가 부족한 자들의 사랑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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