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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시작하는 순간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말에 대해 연인으로부터

"그러게 말이다...근데 변하더라."라는 답을 듣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영원한 사랑'의 '로망'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직 너뿐이야', '사랑해서 결혼했다'와 같은 말을 매우 자랑스럽게 말하곤 한다.

그러나 '연식'이 오래된 인간일 수록

그런 말이 얼마나 허구이며, 무책임한 말인지를 깨달아 가게 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허위의식을 다른 방식으로 극복해

'가족애' 등으로 관계를 재정립해 나가는

지혜로운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좀 잘난 척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비영구성때문에

모든 사랑과 관계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영화 <시간>(김기덕, 2006)에서는

사랑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내포하게 되는 권태에 대한 불안을

자신의 육체를 바꾸는(성형수술) 극단적인 방법으로 극복해 나가려하는 여성이 등장하고,

<엘레지>(이자벨 코이셋, 2009)에서는

사랑의 비영구성을 냉소하면서 연인과 헤어지는 남성이 등장한다.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사랑이 시간과 반비례해서 줄어든다는 사실과

그 과정에서 그 사랑의 소멸, 변화를 야기하는 가장 큰 동인이 육체라는 사실을

매우 잘 (어쩌면 지나치게) 의식하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현실적 진실을 잘 알고 있는 <시간>의 새희(성현하 분)와 <엘레지>의 데이빗(벤 킹슬리 분)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사랑을 회의하고 불안해하며,

그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미리 사랑을 떠나보낸다.

 

그들의 인식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낭만적이지만 허구적인 모토를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한편으론 매우 영리하고 현실직시적이다.

지금 이 순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내 몸이 늙고 병들고 추해졌을 때에도 지금처럼 사랑해 줄 수 있을까?

'아플때나 병들었을 때나',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사랑하고 아끼라는

결혼식 주례사는 얼마나 지키기 힘든 말인가.

 

그러나 그들의 현명함은 한편으론 유아적인 것이다.

그들은 결국 시간을 통해 변하고 퇴색되어 버릴 사랑에 대한 불안 때문에

지금의 사랑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언젠가 버려질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넌 결국 날 떠나게 될거야'라며 한없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선수쳐서 떠나보내기'의 방법으로 극복하려 하는 것은

상대방이 겪을 상처보다 자신의 상처를 먼저 걱정하는 자기방어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불안한가에 대해서를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한다.

그들의 불안은 사실 사랑의 다른 모습이거나 그 일부분이다.

이 세상에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이런 불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 불안으로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퇴색시켜 버린다.

 

영원하지 않을 줄 알면서도 우리는 왜 매번 사랑에 빠지는가?

냉소만으로는 이러한 메커니즘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버려지는 것이 두렵다는 것은 버려지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그만큼 지금의 사랑이 소중하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 이별하게 될 때 자신이 겪게 될 상처를 미리 걱정하고

그 상처를 최소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려 하는, 일종의 이기심이다.

물론 그 '소중한' 사랑은 영원할 수 없을 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그 감정은 강렬한 실재이다.

 

새희와 데이빗은 헤어졌던 연인들과 다시 만난다.

너무 오래 만나 자신의 몸이 지겨워져서 떠날 거라 생각했던 새희는

완전히 바뀐 새로운 육체로 지우(하정우 분)를 유혹하고,

연인이 자신보다 열 다섯살이나 젊어, 결국 늙은 자신을 버리고 젊은 남자에게 떠나버릴 거라 예상했던 데이빗은

암으로 죽어가고 있는 콘수엘라(페넬로페 크루즈)의 병든 육체와 다시 대면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재회'는 무엇인가.

이 영화들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인가.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던 사람이 드디어 영원한 사랑을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유치한(?) 수준의 영화들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의 지나친 자기방어 덕에 다시 시작된 사랑은 이미 빛이 바래 버렸다.

새희는 과연 지우의 사랑을 믿을 수 있을까?

지금 그가 사랑하는 건 성형 수술 전의 새희인가, 성형 수술 후의 새희인가?

데이빗은 과연, 죽음을 앞두지 않았더라도 콘수엘라가 자신에게 돌아왔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들은 연인을 다시 만났지만, 그들의 불안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영화 <시간>은 지우가 과거의 새희를 잊지 못하자, 새희는 자신의 과거 육체에 대해 질투를 느껴야만 하게 되고,

두 개의 완전히 다른 모습의 여자가 모두 새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지우는

성형수술로 자신의 몸을 송두리째 바꾼 뒤 우연한 사고로 급사하는 결말을 그린다.

그녀의, 시간을 통해 변질되어 버릴 사랑에 대한 불안은 결국 대상의 죽음을 통해 끝이 나고 마는 것이다.

 

전신성형으로 이제 지우인지도 불분명한, 그러나 지우인 것 같은 주검 앞에서

새희는 어떻게 슬퍼해야 하는가.

완전히 다른 육체가 된 연인에게,

이전보다 아름답고 젊은 육체가 되었건, 싸늘한 시신으로 마주하게 되었건

우리는 과거와 동일한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가.

사랑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육체를 배제한 사랑이 가능한가?

 

영화<시간>은 이처럼 사랑과 시간과 변화와 육체의 상관관계에 대해

비현실적일만큼 극단적인 상황 설정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날카롭게 문제제기하고 있다.

 

 

한편  <엘레지>는 이러한 불안을 영화에서 더이상 보여주지 않은 채 끝을 맺지만

이러한 '열린 결말'을 통해서 영화는 다른 무언가를 더 말하고자 한 듯 하다.

 

그동안 50명이 넘는 여성과 사귀어보았고,  

콘수엘라에 매혹된 자신의 감정이 그녀의 아름다운 육체-특히 그녀의 가슴-에서 비롯된 것이었던 데이빗은

겨우 5명의 남성을 사귀어 보았다는 콘수엘라의 과거(?)에 끊임없이 집착한다.

혼자 쿨한 척은 다하고 콘수엘라를 만나는 동안에도 오랜 섹스파트너도 주기적으로 만나면서도,

시간이 날때마다 콘수엘라의 과거의 남자들에 대해 궁금해하고

그녀에게 다른 약속이 있을 때마다 다른 젊은 남자를 만날까봐 의심하고 전전긍긍해 한다.

 

그러나 사실 자신의 경륜을 근거로

콘수엘라와 자신의 사랑이 얼마 가지 않을 것임을 수시로 강조하는 데이빗보다

훨씬 더 성숙한 존재는 콘수엘라이다.

데이빗이 자신에게 가지는 의심과 집착의 태도와

그러는 한편 종종 보여주는 '너는 조금 있으면 나보다 더 젊고 멋진 남자에게 가게 될거야'라는 말 사이에서

콘수엘라는 그의 자신에 대한 감정이 '장난감에 대한 소유욕' 같은 것이라고 정의한다.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어하진 않지만 감정에 진정성이 부족하다는 것.

언젠간 자신도 가지고 놀다 버릴 것이면서도 빼앗기긴 싫어하는 장난감 같은 것이라는 것.

 

데이빗은 자신의 콘수엘라에 대한 집착을 억누르려고 애쓰지만

그러기 위해 자신의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마저도 포기한다.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마음껏 사랑하는 방법을 그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콘수엘라가 그녀의 졸업 축하 가족파티에 그를 초대했을 때

그는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며 참석하지 않는다.

데이빗은 "나한테 도대체 왜이래요?"라는 콘수엘라의 원망에 아무 답도 내놓지 못한 채

'그래 다 끝났다. 진작에 이렇게 될줄 알았다'며 체념한다.

그리고 곧 자신에게도, 그녀에게도 그들의 사랑은 잊혀질 거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짐작과는 달리 그는 그녀를 2년이 넘도록 제대로 잊지 못했다.

그러다 2년 뒤 그녀에게서 '할 말이 있다. 이 말은 당신에게는 내가 직접 해야 할 것 같아서 연락했다'는 메시지에

새삼 두려움을 느낀다. 그녀의 '할 말'이란 그녀의 결혼 소식쯤이 될거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투병 소식을 듣고 그는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그런 그에게 콘수엘라는 '당신은 늘 내가 너무 젊다고 했는데...지금은 내가 당신보다 더 늙어버린 것 같군요.'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데이빗은 자신의 그동안의 생각의 오류를 깨닫고

뒤늦게 콘수엘라에게 다가가지만, 모를 일이다.

영화는 콘수엘라의 암 진행 정도가 꽤 심각하다는 것을 이야기해주면서도

그녀가 죽는 모습까지는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수술 뒤 병들고 지친 콘수엘라의 육체 앞에 나타난 데이빗이

용기를 내어 그녀의 병상에 자신의 몸을 비스듬히 뉘이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그들의 앞날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당장은 그녀 옆을 지키고 있지만, 그녀의 투병생활이 참혹하거나 지리해지면서

데이빗은 차츰 그녀로부터 떠나게 될 수도 있고

그러기 전에 그녀가 죽어 버려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사랑은 막을 내릴 수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또는 운 좋게 그녀가 완치되어 정말 데이빗보다 훨씬 젊고 멋진 남자에게로 가버릴 수도 있다.

 

그저 우리가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데이빗이 짐작했던 것보다는 그들의 사랑의 유효기간이 길었다는 것.

육체의 노화나 소멸은 단지 통계학적으로만 짐작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사랑이란 감정 역시 경험이나 통계만으로 미리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지나친 허위의식 속에 지금의 사랑을 신성시 하거나 낭만화하는 것도 경계해야 할 일이지만

자신의 지적 통찰력을 믿고 온전히 'fall-in-love'하지 못하는 것도 비겁한 일이라는 것...이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이쯤해서 <엘레지>와 비슷한 설정이지만 

병 앞에서 사랑에 대처하는 태도에 있어서 좀 더 '고수'들을 직접 보여주는 드라마가 하나 떠오른다.

드라마 <네멋대로 해라>(2002)의 훌륭함은 매우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점은

고복수(양동근 분)가 뇌종양에 걸렸다는 사실 앞에서도

전경(이나영 분)과 복수는 자신들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곧 죽을 지도 모르고, 수술을 받은 뒤에 장애가 생길 지도 모르지만

복수와 경은 용감하게 계속 사랑한다.

복수는 이미 자신의 병을 알고 있던 상태에서 경을 만나고,

경은 복수의 병을 알고 난 뒤에 복수에게 청혼을 한다.

물론 복수는 결혼을 하자는 경의 제안을 거절한다.

자신의 육체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어쩌면 아예 소멸해버릴 지도 모르기 때문에

사랑까지는 포기하지 못했어도 결혼까지 할 엄두는 못내는 것이다.

 

그때 경이 말한다.

"우리, 살아있을 때 살고, 죽었을 때 죽어요. 살아있을 때 죽지 말고, 죽었을 때 살지 말아요."

이 얼마나 성숙한 태도이며 쉽지 않은 말인가.

 

몸의 변화와 소멸은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마음까지도 변할 수도,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성숙한 자세는

'그러므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명분 하의

'어떤 것에도 마음을 열지 않는다'는 '쿨함'의 가장이 아니라,

충분히 현재의 감정과, 그 속에 배태된 불안까지 껴안는 것이 아닐까.

 

감정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변할 것을 알면서도 현재의 감정에 충실하는 것.

사랑할 수 있을 때 마음껏 사랑하고,

그러했기 때문에 헤어지게 될 때에는 후회나 미련 한 방울 남기지 않으며  헤어질 수 있는 것.

 

헤어질 때를 걱정하며 사랑하고, 사랑했을 때에 대해 회한을 남기며 헤어지는 것은

똑똑하지만 용기가 부족한 자들의 사랑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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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달콤한 영화는 영혼의 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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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진품이라는 것이 별다른 의미가 없는,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품’이라는 점에서 태생적으로 키치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키치Kitsch’라는 단어는 원래 윤리적인 부정함과 진짜가 아닌 것을 의미했지만, 현재에는 그 의미가 확장되어 예술품을 모사한 - 특정한 예술의 모작이라는 뜻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지위와 권위 그리고 양식을 흉내낸다는 의미에서 - 다소 조악한 작품이나 그러한 것을 선호하는 취향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는 예술이라는 성역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현대에 들어서 ‘키치’는 원래의 부정적인 의미 외에 일부러 서툴게 표현하거나 저속한 척 하는 양식적 특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오히려 정통 예술의 엄숙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은 그런 것에 열광하며 키치 매니아임을 자처하기도 한다. 영화에 있어서도 저예산으로 기술적으로 조악하게 만들어지거나 장르의 통속성을 극대화하거나 희화하는, 흔히 B급이라고 불리는 영화들이 키치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불리기도 한다.

사실 키치와 예술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감상의 대상이 갖는 영구불변한 속성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의 태도나 제공자의 의도에 의해 얼마든지 왜곡되거나 조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예술영화를 보러가는 이가 영화 그 자체가 제공하는 세계를 통해 철학적인 성찰에 도달하거나 형식적 특성이나 시각적인 구성을 통해 심미적 쾌감을 얻었다면 그것은 작품을 예술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반면 예술영화를 감상한다는 사실이 주는 쾌감 -마치 미술관 관람이 미술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싸이월드의 전시용 사진을 하나 더 생산하기 위해 전락하는 것처럼 - 에 함몰되거나, 작품 세계외부의 자신주변의 심리적 상황에 쉽게 동화시켜 이해하고 감정적으로 소비하는 것에 만족한다면 그 순간 예술영화는 키치로 전락하고 만다. 다시 말하면, ‘키치’란 창작의 과정뿐 아니라 소비와 유통의 과정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술 작품 특히 영화의 경우에는 수용자 입장에 더 자주 처하게 되는 우리로서 경계해야할 것은 어떤 예술품이든 키치로 전락시킬 수 있는 시장원리와 감상주의적인 수용태도일 것이다.

 

키치적 양식 - 의도된 싼티 혹은 과도한 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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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키치’라는 단어를 영화와 결합시킬 때 쉽게 떠오르는 작품들이 있다. 오랜 뮤지컬 레퍼토리이자 코스툼 플레이와 동시 상영되는 전용극장을 가지고 있는 <록키 호러 픽쳐 쇼>같은 영화, 타란티노나 로드리게즈 등의 B급 영화들에 대한 오마주를 퍼붓는 싸구려 액션, 호러 영화들. 우리나라에서는 이명세의 <개그맨>으로부터 시작해 장선우 감독이 신인배우로 등장했던 <귀여워>나 B급 달궁의 인터넷 만화를 영화화한 이재용의 <다세포 소녀>같은 영화들 혹은 독특한 뮤지컬형식을 선보였던 <삼거리 극장>같은 영화를 떠올릴 수 있다. 이런 영화들은 공고해보였던 예술의 영역을 무너뜨리는 ‘키치’적 양식의 긍정적 힘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이 젠체하면서 선보였던 고급스러운 양식들을 일부러 싼티나게 만들고 엄숙한 태도들을 조롱하면서 예술이라는 단어에 주눅든 관객들에게 긴장 풀고 마음껏 낄낄거리게 해주기 때문이다.

‘키치’가 독이 되는 순간은 바로 관객이 의미 없는 외장(外裝)들에 짓눌리게 할 때이다. 예를 들면 점잖은 서생이 음란물을 써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야설작가로 등극하는 이야기를 다뤘던 <음란서생>은 야설작가가 되는 한석규의 모습을 다룰 때는 한껏 가볍다가도 정빈인 김민정과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면 갑자기 엄숙함을 강요한다. 거기에 과도한 세트미술과 의상은 알 수는 없지만 왠지 억압적이었을 듯한 가상의 시대성을 꾸며낸다. 이것은 근간 만들어진 시대극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키치적 특성인데, 세트나 의상이 인물이나 이야기의 배경이 되기보다 전경으로 등장하여 영화를 버림으로써 영화를 하나의 거대한 패션 동영상처럼 만들어버린다. 지난해 개봉했던 <황진이> 역시 기생 황진이이가 아닌 주체적인 여성으로서 명월이를 조망해보고자했던 연출의도는 작고 연약한 송혜교를 짓누르는 가채와 과도한 화장 그리고 인물보다 더 두드러지는 치마폭에 휩쓸려 사라지고 말았다. 이것은 작품 자체의 존재의미나 예술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없어 내면이 텅 빈 미술품들이 과도한 장식과 문양에 집착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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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적인 양식을 택한 영화들이 스스로를 키치로부터 해방시키는 방법은 솔직해지는 것이다. 자신이 보여주는 것은 그저 표면적으로 소비되기를 원할 뿐 그 외에 어떤 더 깊은 의미나 엄숙한 의도들이 숨어있지 않음을 까발리는 일이다. 만약 자신의 과도한 양식 안에 무엇인가 진실된 것, 인생의 참된 의미들이 숨어있다고 밝히는 순간 그것은 기만의 늪에 빠지게 되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TV에 넘쳐나는 광고들처럼, 그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미술관 같은 아파트, 무도회장 같은 아파트를 보여주며 그것을 성취하면 인생의 목적에 자동으로 도달하게 된다고 사기를 치는 것과 똑같아지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인스턴트 커피향 속에 유명한 문호의 문학적 향기가 숨어 있다고 믿거나 아이와 파스타를 만들거나 가족과 요트여행을 가는 것이 한 사람의 인생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과 같다.

 

<디 워>현상을 통해 본 ‘키치’의 유통과 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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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한국 영화는 11년만에 관객증가율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한국영화의 위기’와 ‘영화산업의 정체’니 ‘관객의 외면’과 같이 추상적이고 구호 같았던 어구들이 숫자로 확인된 것이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옹호든 비판이든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한국영화 역대 흥행순위를 새로 쓴 영화가 나타나기도 했는데 그것이 바로 심형래 감독의 <디 워>이다. <디 워>는 작품 자체가 가진 특질에서뿐 아니라 그것이 소비, 유통되는 과정에서 그리고 수용의 측면에서 ‘키치’적인 속성을 골고루 드러내주는 작품이었다.

엄청난 물량공세와 디지털 기술로 무장한 상업 영화인 <디 워>가 예술품이 되고자 했다는 말은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 예술의 의미를 우리가 흔히 예술영화라고 부르는 내러티브상으로 철학적 진지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에만 한정하지 않는다면, 즉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다 포괄하여 종합적으로 평가한다면 상업적인 성공의 여부와 예술성은 공존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시리즈>나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시리즈는 상업적 성공과 더불어 기술적인 진보를 통해 영화라는 매체의 또 다른 차원을 열어주었을 뿐 아니라 내적 완결성을 갖춘 새로운 해석의 영웅서사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예술적인 가치가 인정되기 때문이다.

<디 워>도 이런 맥락에서 예술의 영역으로 진입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개연성을 무시한 내러티브와 표피적인 캐릭터 그리고 전혀 참신하지 않은 시각적인 연출로 인해 그저 요란한 CG로 무장한 오락영화에 그치고 말았다. 장르에 대한 어떤 참신한 해석이나 시도도 찾아볼 수 없었던 이 작품의 수명은 그저 한 시즌정도로 보인다. 사실 <디 워>는 영화 자체로서는 어떤 비난이나 찬사도 입 아픈 일이 될 만한 그저 그런 여름방학용 블록버스터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영화가 소비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공방은 흥미로운 것이었다. 일단은 특정 국가나 민족성보다는 가상의 보편적 공간과 정서를 공략하는 SF영화답지 않게 민족정서를 마케팅전략으로 공략했고, 심형래 감독을 학벌과 권위의식에 찌든 대한민국사회에 항거하는 투사로 변신시켰다. 네티즌들은 마치 <디 워>를 옹호하는 것이 사대주의에 대한 거부이자 학벌이나 권위에 찌든 영화계 그리고 그런 태도의 대변인으로 보이는 평론가들에 대한 비판과 동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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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워>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전형적인 멜로디인 아리랑을 엔딩 크레딧에 삽입한 것이나 그것을 홍보하는 과정에서 한국에서 SF라는 장르에 시도하는 행위의 숭고함 혹은 심형래 개인이 가진 불굴의 의지를 영화에 덧씌운 것은 이 영화가 ‘키치적’으로 소비되도록 부추기는 일이다. 수많은 관객들로 하여금 그 영화를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영화를 홍보하면서 파생된 이상정서, 과도한 민족주의와 감상성을 구매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영화를 비롯하여 대중이 사랑했던 무수한 영화에 비판의 칼날을 댔던 수많은 평론가나 지식인의 미적인 척도를 ‘대중성’이라는 21세기의 최고선(最高善)으로 격파할 수 있다는 환상을 소비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환상을 구매하면서 받게 되는 묘한 위안감과 정서적 충만감 그것은 작품의 본질과 상관없는 일종의 기만일 뿐이며, 그것이 바로 키치적 소비의 근간이다. <디 워>는 영화외적으로 형성된 기이한 숭고주의와 민족주의로 인해 유통과 소비의 과정에 있어서 키치적인 태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디 워>를 즐기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지만, 그 영화에 어떤 위대한 의도와 고상한 가치가 배태되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키치의 달콤한 독성에 스스로를 중독시키는 일이다.


우리의 오감에 달콤한 영화는 여러 가지가 있다. 아주 단순하게는 관객의 현실을 잠시 잊게 해주는 해피엔딩을 갖춘 영화들부터 그러한 기본 공식에 여성주의나 정치적 올바름을 살짝 가미한 변주들이 있다. <프리티 우먼>에서 <프린세스 다이어리>에 이르는. 키치적으로 달콤한 영화는 그런 영화들보다 영악하다. 그것은 마치 관객에게 다른 차원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처럼 군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처럼 마치 여성주인공의 성장담을 다루는 것처럼 굴지만 결국 속이 텅 비어있기는 마찬가지다. 우리가 조심해야할 영화는 영화를 보고 불쾌해지는 순간이 아니라 충만해지는 순간이다. 불쾌함은 그 원인을 찾아보게 만들지만, 충만함은 사고를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영화가 아주 만족스러웠다고 느끼는 그 순간 혹은 자신이 이 작품을 선택한 것이 그것을 둘러싼 어떤 기운 때문이었다면 의심하고 질문하라. 그래야만 영혼이 무사고(無思考)의 달콤함에 길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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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너무 원론적인.. 2008/02/27 08:53

    말을 좀 어렵게 쓰셨지만 이야기 하는 건 결국 영화는 대중의 만족적 소비를 위해 만들어지니 이를 조심하라는 말씀... " :우리가 조심해야할 영화는 영화를 보고 불쾌해지는 순간이 아니라 충만해지는 순간이다. 불쾌함은 그 원인을 찾아보게 만들지만, 충만함은 사고를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는 글을 보니 님도 그냥 계몽주의자시고 386이신듯. 사고와 즐김을 대비시키는...

  2. BlogIcon 짐씨네 2008/02/27 14:53

    모든 영화가 대중의 만족적 소비를 위해 만들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영화들은 마치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차원을 보여주는 척하면서 사실은 매우 타협하기 좋은 수준으로 대중을 만족시킬 뿐이라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대중적임을 표방한 영화는 전혀 위험하지도 키치적이지도 않지요. 그리고 저는 거짓된 충만함이나 정서적 기만을 즐김과 동일시한 적은 없습니다. 충만함. 불쾌감을 즐김과 사고로 나누신 것은 읽으신 분의 자의적인 잣대인 듯. 저는 다른 즐김이 단순히 일시적으로 정서를 만족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키치적인 것을 경계하면서 영화나 여타의 예술이 본질적으로 감상자에게 던지고 있는 메시지들을 찾아내거나 그것의 의미들을 비판하고 깨부수는 것...그런 것들도 충분히 즐김에 속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짜로 즐기는 건 작품의 표면 위에서 창작자의 의도나 상업적인 술수에만 휘말려서 놀아나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발견해내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키치적인 예술, 혹은 달콤하게 흡수되는 예술 혹은 그런 감상태도는 문제가 있다 뭐 그런 얘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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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왕창-

내 인생에서 '경제'관념이라는 걸 처음 일깨워 준 계기는
초등학교 2학년때쯤이던가...어머니가 대학병원에서 소매치기를 당한 사건이었다.
하필 그 전날 곗돈으로 탄 꽤 큰 액수의 돈을 핸드백에 넣고 있었던 어머니는
병원에서 접수를 하려고 줄을 서있다가 지갑을 통째로 털렸다.
돈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감각은 모호한 나이었지만
엄마, 아빠의 망연자실해하던 표정이 너무도 심각해서
그때부터 돈은 참 무서운거구나...사람을 저렇게 절망스럽게도 만드는 구나
하고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었다.

하필 가족들이 몸이 안좋아 병원에 왔을 때 큰 돈을 잃은 것은
소매치기를 당한다는 일이 주는 '타격'의 크기를 실감하게 하긴 했다.
그러나 소매치기를 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적개심은 사실 못가졌다.

이 세상에 나의 돈을 불법적으로, 부당하게 빼앗는 자들이
어디 소매치기 뿐이던가?
세상엔 그들보다 더 잔인하고 뻔뻔스럽게 남의 돈을 빼돌리는 자들이
너무도 많다.
그나마 소매치기는 뭔가...'약자'가 택한 '호구지책'이라는 느낌을
완전히 지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드라마 <네멋대로 해라>에서도, 고복수(양동근 분)가 소매치기범 출신이라는 사실은
불우한 청년이 어쩔 수 없이 지녀야했던 그냥 한때의 '어두운 과거' 쯤으로밖에 안보였다.
계속 재범을 저지르는 복수의 후배 소매치기도
"오죽하면..."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 드라마에 존재하는 소매치기들은 하나같이 불쌍해보였다.
물론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지만, 생계형 범죄 중 하나라고 여겨지는 마음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복수나 복수같은 소매치기들보다도,
그를 계속 의심하고, 복수를 이용해 소매치기 일당을 다 잡아들이려는
박형사가 더 잔인하고 못되게 보였었다.

그만큼 소매치기라는 범죄에 대한 '악'함에 대한 감도는
살인, 강도, 강간 등의 강력범죄에 비해 좀 약하다.
그 흉악범들을 꼭 잡아 감옥에 쳐 넣어야 한다, 식의 생각이
나에겐 사실 잘 안드는 것이다.
소매치기범을 쫓는 형사의 이야기인 영화 <무방비도시>는
그래서 처음부터 몰입이 잘 안됐다.

<무방비도시>는 소매치기 조직의 '사장'인 백장미(손예진 분)와 그의 일당이
그녀의 조직을 소탕하고자 하는 형사집단, 그리고 그 중 한명인 형사 조대영(김명민 분)과
대치되는 상황을 다룬 영화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허술하기까지 해서, 그렇잖아도 몰입이 잘 안되는
'소매치기 소탕'이라는 소재에 더더욱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1. A: 소매치기단 백장미파(삼성단)의 조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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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첫 '소매치기'장면은
일본에서 벌어지는데, 맥빠지게도, '첫판'부터 '실패'다.

백장미가 어떤 여자 핸드백에 칼집을 내고 있는데
하필 그때 핸드백 속 휴대폰이 울려 백을 쳐다본 핸드백 주인이
그녀를 발견하고 소리를 지른 것이다.
그러자 백장미의 '안테나'(발각 시 칼 등의 무기를 이용해 도주로를 확보하는 역할)가
자신들을 잡으려는 한 시민의 팔을 칼로 자르고 도망간다.
백장미는 눈을 부릅뜨고는 "겁대가리들은 많아가지고.."라고 비웃는다.

이 장면은 백장미의 오른팔인 안테나의 잔인함을 보여주긴 하지만,
소매치기로선 참 '무능한' 백장미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갸우뚱하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소매치기들의 우두머리인 백장미의 '소매치기'장면이
처음부터 이런 '어이없는' 실패로 돌아가게 해서
도대체 이 영화는 뭘 보여주고자 하는걸까?

이것은 '소매치기'라는 것만으로는 안타고니스트의 '악한' 느낌이 덜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저들을 꼭 잡아야한다는 감정이입을 하게 만들기가 쉽지 않아서
이런 '잔혹'한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감정을 유발하려 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의 첫장면인 만큼
백장미의 '능력' 증명이 아니었을까?
즉, 백장미는 '초장부터'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냥 '하수' 소매치기처럼 보였던 것은
영화의 실수다.(나는 그래서, "아, 나중에 '훈련'을 받고 '보스'가 되는
백장미의 '피래미' 시절을 보여주는 건가보다"라고 짐작하기도 했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적잖이 당황했다.)

관객에게 이러한 '출발'은
백장미를 비롯한 이들 소매치기단에 대한 '경이감'이나 '신뢰'를 주기엔
여러가지로 부족하다.

그 이후 그녀의 '능력 증명'은
기껏해야 새로 영입한 바람잡이(소매치기할때 바람잡는 사람)가
"내가 당신(백장미)의 능력을 어떻게 믿냐?"고 묻자
자연스런 손동작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듭으로 묶어
바람잡이 양복의 윗주머니 만년필을 순식간에 꺼내는 모습으로 행해진다.
이 '기술'에 반해 바람잡이는 단번에 장미의 수하로 들어간다.

그러나...이 정도 기술은
관객에게 그녀의 능력을 믿게 할 정도라고는 보기 어렵다.
약간 방심한 바람잡이의, 겉으로 드러나 있는 양복주머니에서
만년필 하나 꺼내는 일은, 나라도 조금만 연습하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의 소매치기일당의 우두머리 정도라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정도의 '쓰리' 실력은 보여줘야하는데
그것이, 이 영화에선 좀처럼 보여지지 않는다.

장미가 모시고 싶어하는 최고의 '기계'인 강만옥(김해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녀가 전설적인 쓰리꾼이었는지를 우리는 확인하기 전에
(장미의 제보로 출동한-이 부분도 도통, 뭘 의도한 '제보'인지 알기 힘들다) 경찰들에 의해
그녀 역시 출소후 개과천선해서 살려던 마음을
(아들때문에)어렵게 버리고 '개시'한 첫날부터 발각되어 죽고 만다.

또한 백장미파는 백장미와 '기계'(소매치기 작업꾼) 한 명,
'바람' 한명, '안테나'를 하는 백장미의 보디가드 한 명
이렇게 4명이 전부이다.
어떤 '조직'이라 하면, 마피아, 조폭 등에 익숙해진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관객들에게
달랑 4명으로 조직된 '단체'는 '소꿉장난'같아 보인다.
그들의 범죄가 소매치기 외의 문제(마약, 폭력, 도박 등)와
연루가 되어 있지도 않아서 극악무도한 집단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자신들이 훔친 돈이 한 아이의 병원수술비라는 사실을 알고는
도로 갖다주는 '선행'까지 하니...이건 뭐하자는 플레인지?)

이런 허술하고 빈약한 조직의 보스(장미)가 일본까지 건너가서 '국제적'인 소매치기는
어떻게 했는지도 이해가 안되고,
또 그런 국제적 소매치기단이
왜 또 더 좁고, 자기네 영역도 없고, 경찰들에게 잡힐 위험도 훨씬 큰
한국에 다시 건너왔는지도,
그리고 그렇게 위험천만하게 한국으로 와서 겨우 몇 탕 해먹고는
왜 도로 일본으로 도망가기 위해 '생쑈'를 하는지도 납득이 안간다.

경찰들에게 <삼성단>이 검거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백장미가 소매치기 전과가 상당하다는 점도 노출되어 있었고,
그녀의 소재지도 분명하며, 경찰들과의 왕래까지 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 중반, 그녀가 곧 일본에서 활동했던 소매치기단의 일원이었다는 점도
일본쪽에서 보내온 CCTV를 보고 금세 파악된다.
조직망이 복잡한 것도 아니고,
장미의 '보스'로서의 능력도 '불완전'해 보이고,
이미 너무 많이 경찰쪽에 노출되어 있고....
이들 조직은 금방 허물어질 것이 틀림없었다.

이렇듯 <삼성단>은
보스의 영웅성이 약한 점,
조직망이 지나치게 단촐하고 허술한 점,
일본이라는 큰 '시장'을 두고 귀국해서 다시 회사를 차렸는지가 불분명한 점 등으로 인해
영화의 (악한) 한 축으로서의 강력함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2. B; 광역수사대의 목표 불확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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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러한 허술한 <삼성단>을 검거하고자 하는 경찰은
"한국의 FBI"라고까지 자칭하는 최고의 수사대로서
지나치게 '조직적'이고 의욕이 충천해 있다.
그들은 '강력범죄'만 맡는 아주 특수한 경찰들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관객의 눈에(적어도 내 눈에는) '소매치기'는
강력범죄로 보일 만큼 그렇게 극악하지도 않은 데다가
영화에서도 '안테나'의 한 두번의 잔인한 칼부림을 제외하고는
돈을 훔치는 것 말고 나쁜 짓도 별로 안한다.

우리나라 사람에겐 '의적'에 대한 관념이 있다.
홍길동이나 임꺽정같은, 부자들의 돈을 도적질하여
의로운 데에다 쓰는, 그러한 '의로운 도둑'들에 대해선
관습적으로 '관대'하다.
즉, 남의 돈을 도둑질하는 것만으로 누군가를 무조건 비난하진 않는 '유전자'같은 것이 있다.
물론 <삼성단>은 의로운 데에다 쓰는 자들도 아니지만,
진짜 훔쳐선 안될 돈을 훔치는 정도로 나쁜 자들도 아니다.
그래서 옷 사러 명동에 나온 사람들의 주머닛돈 몇 푼을 훔치는
소매치기들 정도 가지고는 '강력범죄'의 이미지가 잘 안와닿는다.

<삼성단>의 대립축인 <광역수사대>는
그런 그들을 잡기 위해 동원된 경찰조직 치고는
너무 본격적이고 오버스럽다.
그리고 별로 새롭게 수사할 내용이 없는 듯 한데
너무 오랫동안, 힘들게 수사를 한다.

이미 백장미의 프로필도 다 알고 있으며
소매치기단 조직망도 파악되어 있다.
그리고 '소매치기범' 잡는 데만 평생을 바친,
소매치기 전문 경위 오연수가 수사반장이다.

이렇게 <삼성단>에 비해 과도하게
조직적이고 비대하고 철저한 <광역수사대>는
무엇을 하기 위해 소집된 것인가?

이 한국땅의 모든 소매치기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이 부분에서 영화는 불분명한 태도를 취한다.
주로 소규모나 점조직으로 활동하는, 게다가 조직 없이도 할 수 있는 범죄이기도 한
소매치기 범죄자들을 모두 검거, 소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
다른 영화들에서 쉽게 다루는 조직폭력단 검거와는 좀 문제가 다른 것이다.

그럼, 일본에서 있었던 소매치기 사건의 범인을 잡기 위해?
그건 일본에서 보내온 CCTV만 봐도 금방 알아챌수 있다.
왜냐하면 이걸 보기 전부터 수사단 반장은 백장미(외모, 신상, 소재지 등)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음만 먹으면 금세 그녀를 찾아내서, 검거하면 간단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또다시 소매치기를 할 때를 기다려 '현장'을 급습해야만 하는듯
뜸들이며 그녀의 주변만을 맴돈다.
도대체 무엇을 알아내고 싶어서 머뭇거리는 것인가?
일본의 사건의 범인이라는 것만 확실하면
(이건 백장미가 용의자로 지목된 순간 일본을 통해 목격자들만 찾으면 금세 확인되는 일 아닌가?)
당장에 잡아들일 수 있다.

그렇다고 그녀의 '윗조직'(몸통?) 또는 '다른 조직'을 잡아들이겠다는 목적인가?
영화는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수사단과 소매치기의 여러 조직들은
일종의 '공생'관계, '애증'관계처럼 보이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런 그들은 어느 순간에 대치하는 것일까?
언제 싸우고, 언제 쫓고 쫓기고, 언제 잡고 잡혀야 하나?
영화는 그게 불분명하다.


그래서 '대치'의 극적인 순간을 '억지로나마' 만들기 위해
얼토당토 않게, 백장미가 스스로 자기 조직이 '일을 나가는'
장소, 시간을 경찰에게 제보를 하는 퐝당한 시츄에이션을 연출한다.
그리고 나서 자기는 일본으로 도망칠 궁리를 한다는.
(그래놓고 나서, 이 경찰출동으로 죽게 된 강만옥의 죽음 소식에 충격을 받는 얼굴이라니...
진짜 뭐하자는 것인지?)

영화를 만든 사람들도 양심은 있었던 탓인지,
이러한 상황에 새롭게 '변명'을 덧붙인다.
그녀의 이러한 일들이 '운명' 또는 '의도'라고.(둘중 어느쪽인지도 영화만 봐서는 잘 모르겠다. 내 독해력의 문제인가?)



3. C: 운명 또는 의도-그 허술한 '뒷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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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운명, 또는 의도란
백장미와 조대영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이 두 사람은 여러가지로 얽힌 복잡한 관계이다.
백장미가 '이모'로 모시는 소매치기계의 '고수'가 조대영의 엄마이고,
백장미와 조대영은, 물론 백장미의 의도적 접근이었지만, 애정관계 비스무리한 것에 빠진다.
백장미의 엄마는 조대영에게 붙잡혔다가 도망치던 중 차에 치어 죽었다.

즉, 백장미와 조대영은 둘 다 소매치기범을 엄마로 두었는데
조대영만 하필 엄마의 직업을 세습받지 않고 경찰이 됨으로써
여기저기 관계가 얼그러진 셈이다.

백장미에게 있어서 조대영은,
자기가 모시고 싶은 '보스'(강만옥)의 아들이기도 하고(플러스 관계)
자기 엄마를 검거했던(마이너스 관계),
그리고 그랬다가 엄마를 놓쳐준(플러스 관계),
그러나 그때문에 오히려 엄마를 차에 치어 죽게 만든(마이너스 관계),
또한 지금은 자기를 검거하려 하는 경찰(마이너스 관계)이기도 하고,
그래서 자신이 유혹하고, 잠자리를 함께 한 남자(플러스 관계)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조대영에게 있어서의 백장미도 마찬가지로 플러스/마이너스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둘의 대치는 생겨났다  허물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이 과정이 재미도 없고
(<색,계> 수준의 뜨거운 욕망을 보이든가...아니면 진짜 두뇌게임을 하든가),
왜 조대영이 백장미를 안 잡는지, 왜 백장미가 조대영을 유혹하는지 납득도 잘 안되고,
마이너스 관계로서의 복수인지, 플러스 마이너스 관계가 얽힌 기구한 운명인지 모호해서,
영화 보며 여러 차례 고개를 설레설레 젓기까지 했다.


4. A,B,C의 조합이 최고의 배우들을 말아먹은 영화, <무방비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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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의 드라마 중독자로서,
2007년 가장 재미있게 본 드라마인 <연애시대>와 <하얀거탑>의 주인공
손예진과 김명민이 주연을 한다는
이 영화에 대한 기대는 남달랐다.
두 배우는 그 드라마들이 아니고서도 '남몰래' 아끼고 좋아하는 배우들이었다.
또한 김해숙 역시 '가슴시리게 만드는 엄마' 역할이라면 누구에게 뒤질 연기자인가?
(이 영화에서도 역시 김해숙의 연기는 내용과 관계없이 매번 가슴 절절하게 만든다.
그녀 특유의 약간 울먹이는, 한이 깃든 목소리와 말투,
당뇨병환자, 노숙생활, 소매치기범 등으로서의 표현력은 이 영화의 감상포인트다.)

그들이 나오는 영화라니...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었다.
그런데 위의 세 요소들이 하나같이 너무 형편없어서, 그것들의 조합이 만들어낸
이 영화 <무방비도시>는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도무지...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한없이 재미라도 느끼게 해주지도 못하고
짜릿한 자극을 주지도 않는 영화다.

'손예진'의 팜므파탈로서의 변신과
화려한 패션과 실루엣의 강조는 물론 훌륭하지만
영화 내용의 지지부진, 오리무중으로 인해
섹시함이나 매혹 보다는 백치미나 자뻑표정으로 보이기도 한다.
'김명민'의 밋밋한 캐릭터와 수동적인 행동패턴은
<하얀거탑>의 그야말로 '명민'한 외과과장 장준혁을 떠올리는 팬들에게
실망을 안겨준다.

최근 한국영화계가 여러모로 '침체'와 '위기'에 처해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 영화를 사랑하는 한 관객으로서 무척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으며,
무언가 여기에 나도 도움을 줄 수는 없을지,
내가 이러한 '위기'를 초래한 또 한명의 '방만한' 관객은 아니었는지
반성과 통찰을 해보기도 했었다.


그러나...이 영화를 보면서는,
'방만함'은 나보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더 많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소매치기'라는 새로운 '범죄'를 소재로 했다는 점,
악역의 주인공이 여성이며, 그녀가 남성주인공을 '이용'하기 위해 유혹하는 내용이라는 점,
선/악, 남/녀의 대치가 만들어낼 극적 긴장감이
영화 보기전에 꽤 많이 기대된다는 점 등의
좋은 출발선을 가졌던 이 영화는,
소재나 새로운 발상, 구도를 제대로 배치, 조율하지 못해
'무방비'로 허물어버려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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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BlogIcon 하이腦 2008/01/27 16:39

    영화 줄거리에 대해선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배우들이 워낙에 미더워보여서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 기대에 못 미치나보군요. 손예진이 드라마 <연애시대> 때 보여준 연기를 영화에서도 보고싶은데, 그녀의 영화 선택이...흐음....아쉽군요. 김명민은 역시 <하얀거탑>의 오라(aura)를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요. 좋은 배우라 해도 역시 좋은 작품을 만나야 하고, 좋은 영화는 좋은 씨나리오가 있어야 하는 거겠죠. :)

각각 네 커플의 사랑이야기 다룬 <내 사랑>과 <기다리다 미쳐>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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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워킹타이틀이 제작한 <러브 액츄얼리> 바이러스는 엄청났다. 이듬해 <새드무비>,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등 연말연시를 겨냥한 옴니버스영화 붐을 일으키더니, 올해도 종합 ‘러브 스토리’ 선물세트 두편을 탄생시켰다. 평생 한번 보기도 힘든 개기일식을 계기로 사랑을 찾거나 떠나보내거나 인정받거나 뒤늦게 발견하는 네 커플의 이야기를 다룬 <내 사랑>과 군대 간 남친과 기다리는 여친, 일명 ‘군화’와 ‘곰신’ 네 커플의 파란만장 730일을 다루는 <기다리다 미쳐>가 바로 그것이다. 두 영화는 20대에서 30대 사이의 젊은이들의 사랑을 다루는 점에서, 딱 네 커플을 고른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사랑이 애틋한 기다림과 연관되는 점에서 닮은꼴을 하고 있다. 영화를 보기 전 이 글은 ‘무엇이, 무엇이 닮았을까’에 초점을 맞출 생각이었는데, 두 영화를 보고 난 뒤 게임의 규칙은 ‘다른 그림 찾기’로 바뀌었다. 비슷해 보이는 두 영화의 외양 속에 숨겨진, 사랑에 대한 다른 이해. 그것을 한번 찾아보려고 한다.


지고지순한 기다림 vs. 어쩌다보니 기다림

두편의 영화에서 사랑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테마는 ‘기다림’이다. 이 기다림을 효과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해 <내 사랑>은 달과 태양이 만나는 개기일식을 은유적으로 차용한다. 낮과 밤이라는 상반한 영역에 존재하던 하늘 위의 존재들이 120년 만에 만나는 숭고한 순간에 오랫동안 기다리고, 더 오랫동안 사랑해왔던 남녀가 만난다. 그 덕분에 이들의 만남에는 어쩐지 운명이니, 일생이니, 유일이니 하는 묵직하고도 경건한 수식어들이 들러붙는 느낌이다. 이를테면 3년 전에 세상을 떠나버린 장난꾸러기 연인 주원(최강희)의 기억은 현재의 세진(감우성)의 삶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고, 신입생 때부터 좋아해왔던 선배 지우(정일우)를 따라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그를 해바라기하는 소현(이연희)이 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아내를 잊지 못하는 카피라이터 정석(류승룡)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아무리 밀어내도 덤비는 수정(임정은)이 있고, 6년 전에 헤어진 연인의 전화 한통을 받으러 한국으로 돌아온 진만(엄태웅)도 있다.

반면 <기다리다 미쳐>는 대한민국의 신체 건강한 남자라면 그리고 그런 남성들을 애인으로 둔 이라면, 누구라도 한번쯤 혹은 여러 번 경험해봤을 군입대가 기다림의 계기가 된다. 통과의례의 중요한 절차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워낙 일상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기에 운명이니 뭐 그런 말보다는 ‘너 고생 좀 하겠다’ 정도로 위로받는 수준에서 끝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절차를 거치면서 군대 안팎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과 상황이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네 커플은 약동하는 젊음을 묶어둔 2년 동안 그런 변화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요약적으로 보여준다. 6살 연상연하커플(장근석/손태영)은 나이의 벽과, 사회와 군대의 거리를 깊이 실감하고 거의 이별 직전까지 갔다가 해후하고, 아무 문제 없을 것 같았던 닭살 CC(김산호/유인영)는 우여곡절 끝에 헤어진다. 원래 단순히 밴드 멤버였던 커플(장희진/데니안)은 ‘세상에서 가장 꼬시기 쉬운 게 군대 간 남자’라는 공식을 잘 살려 연인이 된다. 그리고 같은 집에 살던 날라리 커플(한여름/우승민)은 다소 시끌벅적하게 멤버 교체를 하면서 그냥 잘 산다.

두 영화는 공통적으로 오래 기다림의 미덕을 칭송한다. 그러나 <내 사랑>이 기다림 자체를 사랑의 순도와 등가로 만들어버리는 것과 달리 <기다리다 미쳐>는 그것은 사랑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 중 한 가지일 수 있다고만 말한다. 그런 차이가 <내 사랑>의 모든 연인은 겉은 다르지만 실제로는 마치 한 종류의 사랑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기다리다 미쳐>의 연인들의 사랑이 좀더 다양한 느낌으로 다가오게 만든다. 물론 두 영화 모두 인터넷 게시판에서 한번쯤 본 듯한 연애담을 말랑말랑한 클리셰에 녹여내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한 사람이 아이디를 바꿔가며 도배질하는 듯한 전자에 반해 이 사람 저 사람이 올린 듯한 글을 짜깁기한 후자가 좀더 재밌을 뿐만 아니라 사랑과 관계에 대해 일원화한 가치평가를 하지 않는 점에서 좀더 매력적이다. 적어도 <기다리다 미쳐>는 기다림과 기다지 않음 사이에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는 걸 알려준다. <내 사랑>에서 모든 기다림이 긍정적인 답변으로, 그렇지 못하면 적어도 유일한 사랑으로 가치평가받는 것과 달리 <기다리다 미쳐>는 헤어져도 각자 웃으며 만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해주기 때문에 사랑을 보는 좀더 포용적이고 현실적인 시선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섹스리스 천사들 vs. 몸이 먼저 가는 인간들






기다림과 사랑에 대한 등식을 보여주는 <내 사랑>보다 그 사이의 약간 복잡한 함수관계를 설정하는 <기다리다 미쳐>가 더 확실하게 갈라서는 지점은 바로 ‘섹스’를 다루는 방식의 차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내 사랑>에는 섹스가 없고, <기다리다 미쳐>에는 섹스가 있다. 그 때문에 전자는 판타지가 되고, 후자는 로맨틱코미디가 된다.

<내 사랑>에는 섹스신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데, 그것은 있는데 없는 척 넘어가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순수한 사이들이라서 통 그럴 생각들이 없기 때문이다. 굳이 섹스를 떠올릴 수 있는 장면이 있다면 그것은 세진과 주원이 지하철에서 타의로 부비부비하다가 얼굴이 빨개지는 정도다. 이외에는 각 커플의 뽀뽀-키스가 아니다- 정도가 <내 사랑>에 등장하는 육체적 관계의 전부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향해 “귀여워, 귀여워”를 외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노래가 관객의 정서를 대변한다기보다는 등장인물에 대한 평가를 강요하는 캠페인송처럼 들린다는 사실이다. 모두 다 육체적으로 끈적끈적하게 굴어야만 현실적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모두가 날개없는 천사처럼 똑같이 동화에나 나와야 하는 수준의, 그리고 실제로 거의 불가능한 그런 무색무취의 섹스리스한 관계만을 사랑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건 좀 곤란하지 않은가. 이한 감독이 <연애소설>에서 그런 사랑을 선보였을 때는 나름의 동감을 자아낼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는 어떤 남녀들의 특수한 삼각관계에만 한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시간, 다른 세계에 속한 모든 커플이 ‘귀여운 사랑’만을 지향한다면 그것은 좀 기괴하고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프리허그 운동가 진만의 ‘프리허그’가 공허해지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프리허그’를 처음으로 생각해낸 이는 분명 차가운 이 세상을 인간의 온도로 따듯하게 만들고자 하는 의미있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진만의 방황이 왜 프리허그라는 결론에 도달했는지 성의있는 대답이 존재하지 않을 때 그것은 현실성 제로의 ‘귀여운 사랑’처럼 그저 안아주는 행위의 외양만을 모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기다리다 미쳐>에서 섹스는 사랑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섹스를 통해 사랑의 권력관계를 탐구한다느니 뭐 그런 심오한 짓거리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런 건 몰라요’라며 내숭을 떨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 영화에서 비록 불발로 끝나기는 했지만 가장 인상적이고 바람직한 섹스신은 남보람(장희진)이 서민철(데니안)을 유혹하기 위해 면회를 가는 장면에서 나온다. 남보람의 깜찍한 계획에 따라 서민철은 아직 마음이 동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몸이 움직이는 대로 관계를 막 시작하려는 그 순간, 그녀는 콘돔없는 섹스를 살짝 거부한다. 결국 그녀가 준비한 콘돔을 찾느라 그냥 날이 새고 말지만, 안전한 섹스와 자신의 몸을 위해 당당히 요구하는 남보람은, 좀체로 한국의 주류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던, 섹스가 원래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는 20대 여성으로 그려진다. 군대 간 애인 때문에 외로워하다가 ‘외로워서 섹스를 할 수도 있구나’ 깨닫게 되는 강진아(유인영)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섹스에 대한 욕구와 그 때문에 빚어진 결과- 짝사랑의 민망함과 파탄 난 연애- 를 자기비하나 자책으로 연결하지 않고 성장통으로 인정하며 훌쩍 자라는 모습은 어떤 ‘가장한’ 순수보다도 아름다워 보인다. 게다가 이전까지 한국영화에서 30대 커리어 여성에게만 한정되었던 섹스에 대한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그것에 대한 건강한 자기긍정이 20대 여성에게까지 확대된 것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다.

관객이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려면

이렇게 유사한 기획의도를 가진 두편의 영화가 현실감각을 상실한 판타지와 현실을 다소 과장한 로맨틱코미디라는 다른 길을 걷게 된 근본적인 차이는 영화 내부에 자신이 다루는 사랑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이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서 비롯한다. <내 사랑>의 엑스트라들은 주인공들의 사랑놀음에 동원된 방청객 역할을 충실히 한다. 같이 감탄하고 같이 웃어주고 같이 귀여워해준다. 하지만 <기다리다 미쳐>의 엑스트라들은 약수터신에서 물 뜨러 온 아줌마 아저씨들이 가장 잘 보여주는 것처럼 ‘쟤들 뭐니?’라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세상도 그 사랑에 포옥 빠져서 같이 웃고 울어 줄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커플이라면 ‘염장질’이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릴 정도로 사랑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의 심리까지 헤아려야 한다. 그래야 주인공들끼리만 사랑하다 마는 영화가 아니라, 관객이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영화가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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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패는 처음부터 노출되어 있다.
 

치아즈(탕웨이 분)가 이(양조위 분)에게 접근하여,
그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는 것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다.
대학의 친구들과 함께 벌인 치기어린 '쇼'로 한번,
3년 뒤 반군 조직에 의해 보다 철저히 준비, 위장된 '작전'으로 한번.


 

 첫번째 접근에서는, 그들의 정체가 금세 탄로나리라는 것이 쉽게 예측된다.

그들은 그저 '혈기왕성한 청년들'이었고,

돈 좀 있는 집 자식인 한 친구의 비상금을 털어

어쭙잖게 도모한 '결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치기어림, 어쭙잖음으로도

그나마 치아즈와 이의 단독 만남까지 갈 수 있도록 한 것은

치아즈의 매력의 힘이었다.

이는 그녀의 아름다움과 매혹적인 자태에 현혹되어

그녀의 패거리들이 벌이는 우스꽝스런 연극에 한 꼭지 출연해 놀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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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연극은 이의 갑작스런 상해로의 귀국으로 금세 막을 내린다.

그리고 그들의 연극이 이의 부하이자 광위민의 동향 선배였던 조덕희를 통해

얼마나 허술한 애들 장난이었는지가 밝혀진다.

치아즈 패거리는 조덕희를 우발적으로 죽이면서

해산되고, 3년이 흐른다.



3년 뒤, 그동안 중경정부의 첩보단 조직에서 일하게 된 광위민이 다시 치아즈를 찾아온다.

그는 그녀에게 3년전의 계획을 다시 한번 실행해 볼 것을 권유하고

치아즈는 이를 수락한다.

그녀는 중경정부 조직의 오와 만나 이에게 다시 접근할 방법에 대해 학습을 받고

그녀의 신분도 막부인으로서 좀더 철저하게 위장된다.

재회한 이와 치아즈는 3년 전에 못 다한

서로에 대한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밀회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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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번 역시, 그녀의 신분은

너무도 쉽게 이의 부하들에 의해 노출되어버린다.

다만, 그녀에게 빠져있는 이에게 보고만 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처럼 이 영화에서 치아즈의 정체는

'첩보원'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쉽게 발각된다.

즉, 그녀의 '첩보'는 처음부터 실패였다.



조덕희와 이의 부하가 치아즈와 그녀의 조직에 대한

조사 결과를 줄줄 읊는 장면들은

그녀의 '임무'와 '소명'이란 것이

얼마나 하릴 없이 파괴될 수 있는 것인지를 보여줘서

허탈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중경정부의 첩보원이 사랑(욕망)때문에

자신의 임무를 '포기한다'는 내용이라는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사전 정보는 조금 잘못된 것이었음을 확인하게 됐다.



처음부터 치아즈에게 주어진 선택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이나 국가(민족)의 강요에 따라

이를 살리거나 죽일 수 있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거나 포기할 수 있는

능동적 '주체'가 아니었다.

그녀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아 끼고

이에게 '가요...어서 도망쳐요'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러면 그는 죽었을까?

그리고 그녀는 살 수 있었을까?



어쩌면 이가 암살되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죽는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가?

이미 이의 조직에서는 그녀의 정체와 그녀 관련 조직단에 대해

모두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이가 죽은 뒤에 그녀의 단체 역시 모두 체포, 처형되었을 것이다.

이가 소속된 왕정위의 정부는 그녀의 조직 따위는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잡아들여 처리할 수 있을만큼

훨씬 철저하고 치밀한 조직과 정보망을 갖고 있다.

그들은 그녀를 계속 감시하고 주시하면서, 그녀가 무슨 짓을 벌이는지

자신들의 손바닥 위에 놓고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첩보'나 '암살' 등을 목표로 한 한 여자의

국가적 차원의 행위, 결의를 다룬 영화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 부분에 있어서 치아즈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1938~1942년, 항일, 반제, 애국 등의 시대적 배경은 그냥 이 영화를 화려하고 심오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적당한' 외피에 불과하다.



나에겐

"원수인 한 남자에게 응징을 하기 위해 접근한 한 여자가

그와 만나면서 결국 사랑을 하/믿게 되는 과정"

이라는 편이,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더 적절한 독법으로 보였다.



2. 그 남자, 그여자

남자,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를 '일반적인 사랑'의 문법으로만 대했다.

다만, 자신의 상처와 삶의 방식 때문에

표현 방법이 때때로 거칠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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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인사를 나누고, 자신의 집에 놀러온 그녀와 말을 섞고,

비가 쏟아지는 하늘 아래서 돌연 한 우산을 쓰게 되면서 가슴떨려하고,

그녀의 연락처를 외워 그녀와의 데이트를 즐기고,

자신의 일때문에 3년간 소식을 모르다가 다시 만나자 그녀를 다시 보게 된 것이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하고,

영화를 보러가는 그녀를 납치하듯 데려와 '당신을 가지는 일이 그렇게 힘든 일이야?'라며 가학적인 섹스를 하고,

그녀가 홍콩으로 돌아갈 지 모른다는 사실에 초조해하며 그녀의 침실로 들어가 정사를 나누며

아무도 믿지 않는 것 만으로 지켜온 자신의 목숨이지만 그녀의 말만은 모두 믿겠다고 말하고,

바쁜 일들 속에서도 그녀 생각때문에 일에 집중하질 못해 괴로워하고,

그녀의 위로와 그녀가 불러주는 "우린 영원히 함께 하리이다"란 노래를 부르며 잡아주는 손 앞에서 눈물을 짓고,

그녀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며, '반지 따위는 관심없어, 반지를 낀 당신 손이 보고 싶었을 뿐이야"라고 말한다.

그의 감정은 언제나 솔직하고 명료했다.



문제는 여자, 치아즈이다.

그가 저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공식대로' 사랑에 빠져들고 있을 동안

치아즈는 자신의 정체성때문에 그 말들을 오인하기도 하고 믿지 못하기도 한다.

그의 행동이 자신을 시험하는 것인지,

그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게 아닌지,

그가 자신의 정체를 파악해 함정으로 끌어들이는 것인지

늘 확신이 서지 않아 두려워한다.



이 불안과 불신을 어떻게 넘어서서

치아즈 역시 그의 사랑을 '믿게' 되는가의 과정이

이 영화의 중심 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3. 놓아라, 다이아몬드가 그리 좋더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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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불안과 불신을 일거에 소거해 버린 것은 반지, 다이아몬드였다.

이것 때문에 혹자들에게서는 이 영화가(혹은 치아즈 캐릭터가)

"왜 다이아몬드때문에 조국을 버리고 그 남자에게 넘어가느냐?" 또는

"다른 건 다 안되고, 다이아몬드에 넘어가는 게 사랑이냐?" 등의

비난을 받기도 한다.
또한 "결국 여자한테 사랑이란 다이아몬드와 섹스 아니냐"는,

좀더 냉소적인 말로 그녀의 감정의 '이동'을 이해해주는 축도 있다.



그러나 반지는 값비싼 물질이어서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아니다.

그녀가 그 반지 앞에서 마음을 바꿔 먹은 이유는

이 영화의 첫 장면이 설명해 준다.



마작을 함께 하던 이의 부인이 이에게 "지난번에 사달라는 다이아도 안사주고"라며 핀잔을 하고

이는 "다이아도 돌덩이인데 그런 거 끼고 있으면 마작 패도 못들걸"이라며

아내에게는 다이아몬드 선물을 해주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는 치아즈에게도 말했듯 다이아몬드 따위는 관심이 없으며, 그것은 돌덩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끼고 있어봐야 생활하기에도 불편하기만 한 거추장스러운 물건이라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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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가 치아즈에게는 선물하고, 그걸 낀 그녀의 손이 보고싶다는 소박한 진심 때문에,

그 '비실용적'이고 비싸기만 한 6캐럿짜리 비둘기 알 반지를 그녀에게'만' 안긴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이런 귀한 걸 끼고 거리로 나가기가 두려워요"라고 말할 때

"내가 함께 있어주잖아"라며 그녀의 떨리는 손을 잡아주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그녀는 확신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다이아몬드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일이었다면 어떤 것이든

그녀는 그를 믿게 되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사랑은 '다이아몬드'였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에게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의 확인,

그리고 오랜 세월 고독과 두려움에 길들여진 자신과 함께해 주겠다는 그의 약속이었다.



감독이 다이아몬드라는 상징적인 '물질'로

치아즈 감정이 고조되는 정점을 만들어 낸 것은 어떤 점에서 무척 손쉬운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만들어낼 감정의 '불순'에 대한 오해를 덜기 위해

영화의 도입을 '다이아몬드'에 관한 대화로 시작했던 것은 나름 배려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4. '시작'과 '확신'의 지점?

그러나 '다이아몬드' 지점은 그녀가 그의 사랑을 믿게 되는 지점이지,

그녀가 그를 사랑하게 되는 지점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훨씬 이전이었을 것이다. 언제부터일까?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를 가늠하는 것은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했을때, 그 사랑이 언제부터인지를 더듬어보는 것 만큼

모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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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이 이러저러한 행동을 하는 걸 본 순간 반했다, 식의 말을 하기 좋아하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대체로 사후적으로 만들어 낸 작위적인 낭만 모멘트일 뿐

감정의 기점같은 건 찾기 어려운 법이다.



치아즈에게 있어 이를 사랑하게 된 순간은

어쩌면 1938년 처음 만나 인사만 나눈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날 돌아와서 치아즈는, 원래 피우지 않던 담배를 아주 익숙하게 꺼내 물고,

이가 어떤 사람이었냐고 묻는 친구에게 "살짝 봤는데...상상했던 거랑은 다르더라"라는 말 한마디에서

이미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짐작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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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와 함께 빗속에서 우산을 쓰게 되었을때, 함께 양복을 맞추러 갔을 때, 함께 식사를 할때,

처음 섹스를 했을 때, 섹스 도중 절정에 올라 울부짖게 됐을 때, 그의 눈물을 보았을 때...등

그 어느 순간일 수도 있다.

그녀의 감정이 움직였음은 오와 광위민 앞에서

자신이 그에게 마음까지 빼앗기고 있음을 털어놓는 장면에서 이미 확실해졌다.

그녀는 다이아몬드 사건 이전에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으며,

다만 그의 감정을 확신하지 못해 자신의 마음도 드러내지 못했을 뿐이다.



따라서 다이아몬드 씬은

두 사람이 사랑을 하게 되는 첫 지점이 아니라,

치아즈가 이에게 자신의 감정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마지막 지점이다.



 이가 그녀의 말을 듣고 반지 상점에서 뛰쳐 나와 도망치고

사무실에 돌아와 부하로부터 그녀 일당의 정체에 대해듣고

화를 내며 그동안 왜 보고하지 않았냐고 묻자 부하는,

"그건...두분 관계에 대한 확신이 서질 않아서..."라고 답한다.

그리고 "물론...지금은 확실해 졌고"라는 말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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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하가 확신하지 못한 '두분 관계'란 무엇인가?

제3자의 눈에서 볼 때, 그녀의 정체에 대해 알고있는 사람임에도,

그들의 관계는 '정치적 게임'의 관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 아니었을까?

'첩보'의 문제로만 접근하기엔

이도 치아즈도 '감정'이 너무 강렬해 보여서

어쩌면 '적대'관계가 아닐지도, 아니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어서

그녀에 대한 보고를 미뤄뒀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지금은 확실해' 진 것은

명백한 암살계획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5. "욕망, 그 위험한 色, 신중, 그 잔인한 戒"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정치 게임'이 아니라 '사랑게임'으로 점철된 영화로도 읽을 수 있다.



이 영화 제목이 말하는 '색'과 '계'는

사랑이라는 개인적 욕망의 '색'과

국가, 이념, 정치 등이 강요하는 룰의 '계'의 충돌로도 볼 수 있지만,

사람이 사랑을 할 때 촉발되는 욕망(색)과

그것을 솔직하게 드러내지/인지하지 못하는 사랑의 룰(계)로 볼 수도 있다.

그것이 두 사람을 항상 불안하고 두렵게, 그러면서도 지독한 사랑에 빠지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 드러냄/인지를 힘들게 하는, '신중함'에

정치적 이념의 문제가 일부 포함되어 있을 수는 있지만.


사랑은 언제나 그 '신중함'때문에

유지되기도 하고, 깨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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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쾌락의 역설'이다.

모든 욕망이 너무 쉽게 충족되면, 쾌락의 역치는 점점 커진다.

그것은 결국 욕망을 사그러들게 만들고, 사랑을 끝장내게 한다.

그러나 반대로 지나치게 충족되지 않는 욕망은 쾌락을 주지 못하므로

점점 지치게 만들고, 욕망을 포기하게 만든다.



이와 치아즈가 그렇게 치명적이고 뜨거운 사랑을 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이 욕망(색)과 신중함(계) 사이에서의 줄타기를 잘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줄타기를 가능하게 한 힘은 자신들의 신분-정체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점까지 부인할 순 없다.)

양자 사이의 균형이 깨지고, '계'를 포기하는 순간

'색'은 두 사람을 파멸로 이끌었다.



죽은 치아즈도, '일단은' 살아남은 이도

그들의 사랑 때문에 고통을 겪기는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더 살아가야 하는 이의 고통이 심할 수도 있다.

그는 믿어의심치 않았던, 그래서 확인하려 들지도 않았던

치아즈의 사랑을 이제부터 다시 되짚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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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자신을 사랑했던 것일까, 의도적으로 접근했을 뿐인것일까.

그녀가 마지막 순간 자신을 도망치게 한 것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한 행동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 순간까지 철저히 자기 신분을 속이고, 암살계획의 현장으로까지 자신을 이끈 것은

그동안의 관계가 모두 거짓이었던 것으로 생각되게 하기도 한다.

또한 그런 그녀를 자신이 처형하도록 명령해 죽였다.

이 삼중고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의 운명은,

(물론 1945년 뒤에는 어쩜 살아있기도 힘들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사랑을 믿으며 죽을 수 있었던 치아즈보다 훨씬 가혹할 것이다.




6. 덧붙여-

이 영화는 2시간 30분이 넘는 시간이라는 길이에도 불구하고

지루함을 주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 영화가 두 개의 기승전결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938년 이야기/ 1941년 이야기

두 개의 닮은 꼴 이야기가 각각 완결된 기승전결을 지니고 있으면서

첫번째보다 두번째에 모든 것의 강도를 높여놓았다.

그러나 기본 틀은 두 개가 거의 동일하다는 점,

이것이 이영화의 재미난 특징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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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두 이야기에서

이와 치아즈의 마지막 만남에서 이가 하는 말,

"입고 계시오."와 "끼고 있어"는

그의 그녀에 대한 감정과 그것의 표현방식을 보여주는 말이어서

짧지만 매우 인상적이다. 

 

그리고, 또한!!!!

절대 잊지 못할 것은

이 영화 속 양조위의 눈빛이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찍은 영화속의 삶을 진실로 살아낸 것은 아닐까 싶을만큼

그 상처와 외로움이 나이와 함께 체화된 듯한 그 눈빛, 표정은

이 영화가 주는 최고의 매력이다.



다시 양조위가 출연한 영화들을 찾아서 다 보고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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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JECT 중국, 색계 실제 주인공 사진전

    2008/01/12 21:31 | TRACKED FROM China Life

    영화 ‘색, 계’가 인기를 끌고 있는 가운데 최근 중국 광둥(廣東)미술관에서 색, 계’의 실제 주인공의 사진이 전시돼 영화 팬들의 눈길 색,계의 중국 영화 포스터 이안감 영화 ‘색, 계’는 중국 여류 작가 장아이링(張愛玲)이 1939년 상하이(上海)에서 일어난 실화를 소재로 쓴 소설 ‘색계’를 토대로 만든 작품 실제 주인공 출중한 미모의 정핑루(鄭蘋如) 1937년 일본의 상하이 점령 이후 각 정권간의 치열한 첩보전 속에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는 정..

Comment

  1. ㅁㅎ 2008/01/09 18:03

    재밌는 글이네요. 같은 이유로 저 역시 양조위 씨가 출연한 영화를 다시 죽 훑어보고 있습니다.

    • BlogIcon coolya 2008/01/09 19:39

      앗, 감사합니다...
      글이 길기만 길고, 얘기가 산만하고 두서없어서
      사실 쓰고 나서 부끄러워하고 있었는데, 감사함미당.
      양조위, 쵝오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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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나 변호사가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당신들이 법을 만듭니다"


시드니 루멧 감독의 영화 <평결(Verdict)>의 후반부에서 폴 뉴먼이 맡은 의료과오소송의 원고측 변호사는 최종변론에서 배심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 한국에서 출시된 비디오 제목은 <심판>

폴 뉴먼은 이 영화로 다시 한번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데 바로 이 대사가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영화가 변호사를 이렇게 멋지게 그려낸 영화는 없다, 그래도 폴 뉴먼은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이는 원고 변호사가 배심원들에게 영화가 관객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법을 실제 사건의 사실에 적용하여 그 사건에 합당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일을 '사법작용(adjudication)'이라고 한다. 사법작용은 그 사건에 또는 그 사건의 해결에 적용되어야 할 실체적, 절차적 법리가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법률심과 그 사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판단하는 사실심으로 나뉜다. 배심제는 사실심을 일반인들에게 맡기는 제도이다.

"판사나 변호사가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폴 뉴먼은 영화의 중심줄거리를 이루는 소송의 최종변론에서,사법작용의 반(半)을 배심원들이 맡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면서, 한편으로는 판사나 피고측 변호사가 엉뚱한 법리를 적용하라고 요구하더라도 정당한 법리를 적용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 소송에서 판사와 피고측 변호사들이 부당하게 주도권을 장악한 사법시스템은 힘없고 외로운 원고가 투쟁해야 할 대상이었고, 이 싸움에서 원고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배심원들뿐이었던 것이다.

폴 뉴먼이 변호하는 원고는 출산을 위해 피고측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분만을 위해 피고 마취의사로부터 마취를 받던 중 구토를 일으키며 산소부족으로 무의식상태가 되어 버린 한 여성. 그리고 이 여성을 대신해 실제 폴 뉴먼을 선임한 가난한 동생 내외이다. 폴 뉴먼 측에는 자신의 일을 도와주는 한 명의 사립탐정이 있을 뿐이고, 변호사 보수도 선금을 한 푼도 받지 않았음은 물론 모든 비용을 변호사가 우선 책임지는 성공보수계약을 하였을 뿐이다.

이에 비해 소송의 피고는 보스톤 지역의 실력있는 가톨릭재단이 운영하는 병원과 마취학 교과서를 저술했을 정도로 저명한 마취의사이다. 피고들은 그 재력과 명성에 걸맞게 지역 최고의 로펌을 선임하고 그 로펌은 10여명의 변호사들로 무장하여 맞선다.

원고 변호사 폴 뉴먼은 알코올중독 전력이 있는 '응급차 쫄쫄이'(안경환의 'ambulance chaser'에 대한 번역)이다. 영화 첫 장면에서 폴 뉴먼이 사건을 수임하기 위해 영업행위를 하는 장면은 냉혹하다. 폴 뉴먼은 바에서 양주 샷을 들이키며 신문의 부고 난을 하나하나 체크해나간다. 사고사를 당한 사람들의 장례식에 찾아가 조문객을 가장하여 명함을 돌리는 것이다.

이 영화의 미덕은 변호사를 하나의 직업으로만, 의뢰인들을 고객으로만 생각했던 바로 이런 형편없는 변호사가 자신의 의무를 깨닫고 의뢰인을 한 명의 인간으로 느끼며 작은 영웅으로 재탄생하는 장면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의뢰인 vs. 사람

이같은 변화의 한 지점은 폴 뉴먼이 재판 전 최종협상을 앞두고 피고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있는 원고의 사진을 찍는 장면이다. 1분 정도의 테이크가 침묵 속에 진행되지만, 폴 뉴먼이 아마도 생전 처음 자신의 클라이언트를 대하면서 겪게 되는 심리의 변화는 명징하다. 자신에게는 단지 하나의 클라이언트였던 "진짜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중환자실이므로 간호원들이 들어와 나가달라고 요구할 때 폴 뉴먼은 너무나도 명백했지만 이제야 느끼게 된 자신의 실체와 이에 따르는 의무를 말한다. "나는 이 여자의 변호사요(I'm her lawyer)." 이 빛나는 장면은 존 트라볼타 주연의 씨빌액션(Civil Action)에서도 오마쥬된다.

조금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피고측의 부당한 괴력은 재판 진행과정에서 나타나게 된다. 폴 뉴먼은  '피해자의 구토는 마취를 잘못한 것이 원인'이라는 증언을 해 줄 의사를 확보하지만, 피고측은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 의사가 재판 시작 전날 카리브해 휴양지로 전격 휴가를 떠나도록 만든다.

결국 원고측의 유일한 증인이었던 의사도 없이 폴 뉴먼은 재판을 시작해야 한다. 폴 뉴먼은 어렵사리 외지의 마취의를 증인으로 불러오지만 급히 구한 사람이라서 준비도 덜 되어 있고 의술보다는 증언을 직업으로 사는 사람이라서 파괴력도 떨어진다. 게다가 애초 피고 편이었던 판사는 원고측 증인을 자신이 스스로 신문하면서 피고측에 과실이 없었다는 점을 배심원들에게 강조한다. 이대로 간다면 원고는 당연히 질 수 밖에 없다.

막판 뒤집기, 그러나. . .

그러나, 폴 뉴먼은 마취가 잘못된 이유는 마취의가 실수로 식사를 하고 얼마 되지 않은 피해자에게 마취를 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실제로 원고에게 환자병력 등을 물어보는 역할을 하였던 입실수속 간호사(admitting nurse)를 백방으로 찾는다. 병원 입실과정에서 물어보는 것 중 하나가 언제 식사를 했는가이기 때문이다.

간신히 찾아낸 간호원이 재판 최종일에 나와 증언한다. "환자는 1시간 전에 식사를 하였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러나 본인이 작성한 기록에는 환자가 9시간 전에 식사를 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사고가 터진 후 마취의가 나에게 1자를 9자로 바꾸라고 말했다."

피고 변호인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반대신문을 하러 나온다. 당신 병원기록에 스스로 9시간이라고 써넣고 서명까지 하였는데 지금 하는 말을 왜 믿어야 하죠? "혹시 나중에 쓸 일이 있을 지 몰라서 9자로 고치기 전에 복사를 해놓았어요. 여기 가지고 있어요."


'우리들의 재판'은 가능한가

보통의 법률영화들은 여기서 끝마쳤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제목이 <평결>인 이유는 바로 배심원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싶어서였으리라(참고로 판사의 결정은 판결이라 하고 배심원의 결정은 평결이라고 한다).

판사는 절차적인 그러나 나름대로 정당성 있는 이유들을 들어 간호사의 증언 자체를 증거에서 배제할 것을 배심원지시(jury instruction)을 통해 배심원들에게 명령한다. 그러므로 간호사는 증언대에 서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간호사의 증언을 끝으로 재판은 끝나고 배심원의 평결을 기다려야 한다. 이대로라면 원고는 져야 한다.

피고측도 그렇게 믿고 있고 재판을 관람했던 피고병원의 임원은 피고병원의 수장인 추기경에게 이렇게 보고한다. "간호사의 증언이 있었지만 배심원은 그 증언을 무시하도록 지시를 받았습니다." 추기경은 묻는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간호사 말은 믿었나요?"

그렇다. 여기에 배심제는 판사와의 견제와 균형 속에서 "우리들의 재판"을 가능하게 하는 간극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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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뜬금없지만, 나름 기다려왔던 '본 얼티메이텀'을 기다리며 3년 전 영화를 보고 썼던 글을 되돌아본다. 캬. 영화 시리즈를 기다린 것은 처음인 듯! 결말이 정말 궁금하다. 본 얼티메이텀을 보기 전에, 기억을 되살릴 겸 해서 올려본다. 최근에 본 '미드' DEXTER를 보고 문득 생각이 나기도 했고 ^^


새로운 슈퍼맨의 등장이다. 이 영화는 자아 정체성에 대한 고독한 물음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본'은 홀로 다친 몸을 이끌고 걸어가며 카메라는 거대한 아파트를 비춘다. 인간소외, 군중, 익명성, 고독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이 말은 단지 직장을 가지고 가족 안에 존재해야 하는 경제적, 성적 필요성을 지칭하는 것을 넘어서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자아는 관계를 통해, 타자를 통해서 자기를 확인 받고 구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사회적' '존재'인 것이다.

주인공 '본'은 사고로 인해 기억을 상실했고 혼자이다. 많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기억상실증'환자를 다루었지만, 그들은 항상 그들의 기억을 채워넣으려는 주위 사람들로 둘러쌓여있다. (예외적으로 '메멘토'라는 영화의 단기기억상실증은 과거의 자기 자신이 늘 자신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본은 완전한 의미에서의 혼자이다. 기억이라는 자아 정체성을 구성하는 인자는 물론, 이를 구성하게끔 하는 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고 직장 상사, 부하 마저도 없다. 그는 군중 속을 걸어가지만 그 곳은 무인도이다. 그에게는 '그' 마저도 없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물을 수 밖에 없다. 'who was I?' 현재의 관계를 통해서 확인 받지 못한다면 과거의 기억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받아야만 한다. 아니면 '나'라는 것은 없다.

언제나 슈퍼 히로들은 고독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실제로 자기 자신인 슈퍼 히로적 정체성을 숨기고 현실 생활에 살아갔기 때문이다. 그들을 '알아주는'이가 없고, 그들의 삶은 분열되어 있다. 그러기에 외로울 수 밖에 없다. 슈퍼맨의 붉은 빤스와 파란색 타이즈, 베트맨의 가면 등은 그 코스튬으로 가려야만 하는 그들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아니, 그들의 '일상'생활이 바로 그들의 코스튬이고, 그들의 가면이다. 클락 켄트의 안경이나 웨인의 턱시도는 '참' 모습을 가린다. 그럼에도 그들은 슈퍼 히로일 때의 삶에서의 위안과, 일상 생활에서의 즐거움(오 그 미녀들! 007 본드걸만 욕하지 마라... 기실 모든 슈퍼히로의 원형은 이런 '스파이' 또는 '비밀 요원'일지 모른다. 본도 또한 '비밀요원'이다.)을 동시에 누리기도 했다. 그리고 항상 그 슈퍼히로들의 '본드걸'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알아간다는 사실 또한 떠올려보자.

이렇게 '행복한' 슈퍼히로에 비해, 우리의 '본'은 그렇지 않다. 그의 '여인'조차 1탄의 중반 이후에 등장해서 2탄의 초반에 죽어버리고 만다. 일상 생활이 없고, 관계도 없다, 또 기억도 없다. 그는 끊임없이 '나는 누구였는가?'를 묻는다. 그는 '과거'를 바탕으로 자신을 재구할 수 밖에 없다. 유일하게 그를 타인과 구별해주는 것은 '살인기술' 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는 과거에 킬러였다, 그리고 킬러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

2편은 그의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과 그 여인이 죽는 것으로 이 영화는 시작한다. 이 여인과 그녀와의 관계가 '본'의 핵심이다. 비록 그녀가 기억상실 이후 본이 짧게 만난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만이 '본'과 관계를 맺는 사람이다. 영화의 가장 마지막에 CIA 관찰관이 그의 과거를 말해주려고 할때, 본이 거부 하는 것은 상징적이다. 그는 이제 'who I was'를 묻지 않는다. 본은 분명 킬러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여인과의 관계를 통해 이를 극복한다. 그녀는 죽기 직전 본에게 그가 킬러'였음'과 상관없이 그는 지금 '그'임일 수 있음을 말한다. 그 당시 본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는 간절히 본을 바라보고 있다. 여기에 대답이 있다. 본은 이제 그녀가 사랑하는,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나'로서 위치를 규정할 수 있고 여기서부터 출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 그녀의 간절한 눈빛은 한발의 총성과 함께 흐려진다.

'적'들에게 '본'은 아직도 킬러이다. 이제 '그녀'의 사랑으로 위치시킬 수 있는 그녀가 사라진 이상, '본'이 가장 쉽게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방법은 적들의 호명 -킬러로서의 본-에 응답하는 길이다. 그러나 '본'은 CIA관찰관이 자신의 과거를 말해주는 것을 듣기 거부한채, 다시 자신이 누구인지를 물으러 나선다.

그러면 이제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 선택의 폭은 적다. 그가 그임이 그녀와의 관계와 그 추억에 의해서 확인되었지만, 그 기억은 점점 옅어질 것이다. 본은 타인과의 관계를 가져야만 한다. 그 관계 속에 '내'가 있다. 그러나 그 관계는 자신의 기억을 부정한채, '일반인'으로의 위장 잠입의 형태로 될 것인가. 이는 기존의 슈퍼 히로의 이중현실과 마찬가지의 패턴이 될 것이다. 그들은 두 현재를 살지만, 본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단절로.

아니면, 다시 본은 어떠한 경로로든 자신의 '적성'과 '과거'를 살려 킬러가 될 것인가. 그러나 이는 애써 정립했던 그녀의 애인으로서의 '나'를 부정하는 것이고 그녀와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떨쳐내는 일이 될 것이다.

어떤 것이든 쉽지 않은 행로이다. 이제 그 대답을 하게 될, 3편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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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타까웠다.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기대에 못 미쳤고 ‘수준 낮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영화를 보러가며 어떤 기대를 했던가?
사실은 아무 기대를 안 했었다.

우리 세대는 ‘광주’ 때문에 ‘의식화’ 되기 시작했다.
80년대 중후반, 5월이 되면
학생회관 앞에 ‘통곡의 벽’처럼 ‘광주의 벽’이 설치됐고
그 앞에서 학생들은 전율할 그 사진과 글들을 보았다.

평생 잊을 수 없는, 그 인간의 육신과 국가폭력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서사와 이미지들 말이다.

고3 때 이미 그 사진의 일부를 봤던 나는 학부 1학년이 되자 별 주저 없이
‘순례단’에 끼어 광주에 갔었다. 그 뒤로도 여러 번.
광주 출신이 아니어도 광주는 우리 세대 사람들에게
어떤 윤리적 ‘부채감’의 장소이자 정치적 기준점이었다.
아마도 영남 출신(일부)들은 더 크게 그렇게 느꼈는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기도 했었다는 것.

2/
‘5월 광주’의 서사와 표상이란 무엇인가?
우리(내)가 접한 첫 번째 그것은
독일 TV 방송을 편집한 광주항쟁 비디오와 <타임> 등에 실렸다는 사진들과,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통해서였다.

광주의 서사는 조폭 그 자체였던 대한민국 군부가
자기 ‘국민’에게 저지른 만행에 관한 이야기였고,
그 이미지들은 ‘피를 먹고 자란다’는 민주주의의 수난 당한 표상이었다.

그런 다음에는 <금희의 오월>과 홍희담의 <깃발>, 그리고 박노해의 「윤상원 평전」
.
그리하여 우리에게 광주의 서사와 표상은 많이 달라졌다.
‘5월 광주’는 독점자본과 미제에 대한 인간의 저항과 혁명이자,
노동계급이 중심이 된 아름다운 인민 자치 즉, 코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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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된 패배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버려서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는 그런 화엄(華嚴)의 시간과 인간.
5월 22일부터 26일까지의 광주에
정말로 섬광처럼 왔다갔다는 그런 해방의 시간과 인간.

그뒤로도 ‘광주’는 심오하고 거대한 정치적 상징이며 구심이었지만,
광주는 ‘국가’의 일부가 되었고, ‘혁명’은 현실의 ‘정치’가 되었다.
윤한봉이 죽기 직전에 말했듯 광주는 더 이상 진보의 표상이 아니게 됐다.

나도 2002년 대선이 끝난 후 광주에 관한 내 마음의 빚을 청산했다.
광주 출신의 내 친구들은 거의 노무현을 찍었었다.
이때 우리가 겪은 마음의 변화를 길게 쓰지는 못한다.

아무튼, 올 봄에는 우연찮게
‘여성주의의 시선에서 본 5.18의 재현’ 심포지움에 참석했다.
광주를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새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여성들이 주도가 된 그 세미나에서도 별로 새로운 이야기를 얻어 듣지 못했다.

3/

그러나 나는 <화려한 휴가>를 보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개봉 일주일만에 영화가
무려 2백만의 관객을 불러 모았다는 소식 하나는 새로웠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훌륭했다.
실제로 5월 27일 새벽에 도청에서 죽은 윤상원이나 이후 검거되어 옥사한 박관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최근에 폐기종으로 죽은 윤한봉의 광주가 아니라,
그리고 또 최근 병석에 누운 황광우의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에 회고된
혁명가들의 광주가 아니라,
그야말로 아래로부터의, 또는 옆으로부터의 5월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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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는 시종 택시기사 민우(김상경 분)의 시각에서 그 5월을 조명한다.
택시기사나 노동자, 철가방, 양아치 들은
도대체 왜, 어떻게,
‘시민군’으로서 조직되고, ‘시민군’으로서의 ‘의식’을 갖게 되었을까?
어떻게 결국 목숨을 버리게 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었을까?

영화를 보면 이 무거운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무엇 때문에 어떻게 죽을 수 있는가?

「밤길」(윤정모)이냐 <깃발>(홍희담)이냐
또는 ‘민주화운동’이냐 ‘혁명적 민중봉기’냐는
먹물들의 해석 논쟁이나 혁명가의 광주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옆으로부터의 광주를 말하는 서사는 별로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한 한, <화려한 휴가>는 일관성을 지키고 있었다.
영화에서는 실제로 5월 광주의 중요한 주체였던(내가 그렇게 알았던),
‘수습위’의 지식인이나 ‘투사회보’의 대학생들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아주 흥미로운 해석이 아닌가?

허나 몇 장면을 빼면 영화는 참으로 엉성하고 헐렁했다.
‘대장님’이나 ‘신부님’ 같은 설정이 그러했거니와,
이야기는 인과나 섬세함이 너무 결여되어 있었다.
감독은 5월 17일부터 열흘 간 벌어진 거대한 드라마를 담아낼 능력이 도무지 없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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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마 한 사람의 택시운전기사의 눈에 들어온 5월의 열흘 간이
그렇게 부정확하고, 그렇게 급작스럽고, 혼란스럽지 않았을까?

갑자기 닥친 혁명과 죽음을 과연 윤상원이나 박관현인들 잘 이해했을까?
그런 면에서 역으로 <화려한 휴가>는 대단한 미덕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의 시선과 ‘아래로부터의’ 한 사람의 시점에서의 광주.

4/

다시 또다시 그러나,
그래도 되는가?

'시민군'이 되고 목숨까지 버려야 했던 원인과 이유를 그렇게 모르는 것,
몰랐던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은 옳은가? 혹은 그게 더 좋다고 감독은 판단했는가?

이는 영화 <꽃잎>이 동정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결코 옹호될 수는 없는 이유와 같은 것이다.
80년 광주에서 죽거나 미친 사람들이
비록 그때 소녀이거나 무지렁이들이었다 해도
죽지 못해 살아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또 다른 세월을, 끔찍한 ‘26년’을 살아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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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살아내기만 한 게 아니라, 견디고 또 무한히 높아졌다.
죽은 사람들 뿐 아니라 산 그들도 또한 광주 사람들인 것이다.
영화는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마지막 결혼식 장면에서 잘 암시해낸다.
그래서 영화는 죽은 기층 민중들이 어떻게 어떤 동기로 죽었는지
설득력있게 설명하지 못했지만, 잠정적으로만 실패했다.
죽은 자와 산자는 잘 어울려야 했다.


그렇기에 '
가족주의'는 얼마나 위대한 한국적인 이유(그리고 핑계)인가?
그리고 ‘서울대 법대’. (이 5음절이 들리는 순간, 솔직히 영화관을 뛰쳐나가고 싶었었다.)

감독은 택시기사가 총을 잡은 이유를 <태극기 휘날리며>에 준해서 해석했다.
가난한 장남은 서울대 법대를 가야하는 똑똑한 동생 때문에
총을 잡고 ‘국가’를 단숨에 초극해버렸다.
<화려한 외출>은 <태극기>처럼 한국적 가족영화인 것이다.

무척 가슴이 답답하다.
착한 한국의 기층 남성(특히 불쌍한 장남)은 그렇게 심하게 가족의 포로인가?
그렇다라고 영화는 말한다.
그러나 광주의 택시기사가 정말로 그 정도 수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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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영화가 그 똥 밟았던 ‘양아치’의 일생과
5월 광주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탐구하려 했다면 어땠을까?
‘양아치’는 도청 계단에서 죽어가며,
항쟁의 와중에 자신이 처음으로 ‘인간 대접’을 받았다고 똑똑히 말했다.
그것이 그가 죽어도 좋은 이유였다.

만약 그가 주인공이었다면
이야기는 <전태일>이나 「열린사회와 그 적들」 같은 데로 나아가게 될 것이겠다.
전자는 저항 속에서 이뤄지는 존재의 열림,
후자는 그럼에도 열리지 못함을 다룬다.

그래서 한편으로 영화에서 ‘월남 방위’의 죽음이야말로 정말 미스테리한 것이다.
(신부와 교사의 도청 사수는 그냥 동화스러운 것이라 치고)
가장이며 세사에도 밝은 그는 왜 다시 도청으로 들어갔을까?
오히려 그 인물이야말로 윤상원만큼 급진적이지도 않고 택시기사처럼 무지랭이도 아닌,
한국 민주주의의 이념적ㆍ윤리적 수준을 표상하는 것이 아닐까?

 요컨대 <화려한 휴가>는 <깃발>이나 <윤상원 평전>에 비교되기 좋은 텍스트이지만,
<금희의 오월>보다 못한 텍스트이다.

더 잘 만들어진 광주에 관한 이야기는 또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전이 세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언어와 시선으로 자꾸 재번역되어야 하듯이 말이다.

  *5 덧

<화려한 휴가>가 한계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휴가> 보기’는 2007년의 한국 사회에서 중요하고 훌륭한 하나의 제의가 되고 있다.

 나는 어찌어찌하다가 중1짜리 소년들과 이 영화를 같이 봤다.
영화를 보고 나오다가 그들 중 똑똑한 녀석 하나가 뜬금없이

“그 놈은 무덤도 쓰지말고 까마귀 밥으로 만들었어야 돼요.”라고 말했다.
(나, 당황해서) “누구... 누구 말이냐?”
“전두환 말이에요.”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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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에야 태어난 이 소년은 어디서 들었는지 전두환이 죽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나, 한참만에 겨우 이해하고) “야, 전두환은 아직 안 죽었어!”
그러자 다른 소년들도 가세하여 정말 의아하다는 듯,
“안 죽었어요?”
“(나) 응, 안 죽었어. 잘 살고 있어.”

그 뒤로 나는 ‘백담사’와 ‘전재산 29만원’이라는 전두환 관련 키워드들을
섣불리 꺼냈다가 큰 곤욕을 치룰 수밖에 없었다.

소년들이 쏟아내는 의문(왜 전두환과 그 일당이 제대로 처벌받지 못했는지를 주제로 한)에 대해,
차근차근 요약해서 답변할 수 있는 준비가 안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전이구투’부터 5.18 특별법과 ‘시공사’와
여러 기억들이 한꺼번에 종없이 떠오르며
어린 것들 앞에서 쓰면 '교육적으로 안 좋은'
“C8”만 자꾸 말머리에 붙으려 했던 것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흥미로웠다.
어떤 40대는 자기 마누라에게
광주가 5.18과 연관되는 건지, 5.16과 연관되는 건지 묻고 있었고,
어떤 60대 역시 자기 마누라에게
‘안성기 씨가 참 인간성이 좋은 거 같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검색해보니, <네이버 지식in>에서
<화려한 휴가>에 관련한 질문 중에 네티즌들이 가장 많이 본 것은

“제가 화려한 휴가를 보고 궁금한게 2가지 있습니다.
1. 화려한 휴가가 1970년대쯤이잖아요.. 그때 우리나라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2. 화려한 휴가가 왜 화려한 휴가인지 궁금합니다.
빨리 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였다.

  광주청문회가 있지 않았는가? 하긴 그것도 너무 멀지.
드라마 <제4공화국>이나 <제5공화국>은 안 보고 뭐했다는 말인가?
아니, <26년>도 있잖나?

그래도 나는 그들의 말이, 궁금증들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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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뉴스를 보니, 이명박이라는 자는
“광주 합동연설회에 앞서 시내 한 호텔에서 지역 정책공약을 발표하던 중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와 '5.18 사태'로 3차례 지칭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부랴부랴 <화려한 휴가>를 보고 광주에 갔다는 박근혜라는 한 여자는
“이 후보의 '역사 인식'을 문제삼으며 맹공을 퍼”붓는 한편,
"역사의 아픔을 풀기 위해 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덧붙여 “DJ가 자신을 '국민 화합의 최고 적임자'라고 칭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고.

그리고 지역주의의 포로인 동시에 ‘꼴우’의 심사를 가진
어떤 네티즌들은 <디워> 열기에 편승하며,
<화려한 휴가> 개봉과 <디워> 폄하와 심형래 학력 위조 파문 등등이
거대하게 기획된 정권 재창출 음모라고 소리쳐대고 있었다.

그렇다면 <트랜스포머>야말로 그 음모에 역시 미국이 개입돼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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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휴가

2007/08/06 20:34 | Posted by 짐씨네
 

화려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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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힘은 무섭다. 결코 잊혀질 수 없을 것 같은 상처들도 현재성을 상실하면 균질한 과거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경험한 이에게는 너무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고통과 실감의 순간들은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세대들의 감각 속에서 의미와 개념으로 전환되어 버린다. 모든 현재는 과거가 될 운명을 거부할 수 없기에 조금이라도 앞서 태어난 이들은 자신이 경험한 어떤 것들이 사장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발버둥쳐야만 한다. 과거를 어떻게 현재로 소환할 것인가, 역사를 어떻게 지금-여기와 관련시킬 것인가의 문제는 기억을 갖고 있는 자들, 지울 수 없는 사건을 몸속에 각인하고 있는 이들의 소명이다. 기억을 어떤 방식으로 서술할 것인가는 지금 이 자리에 어떻게 서 있을 것인가와 긴밀하게 연관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꽃잎>이 광주 금남로에 피를 뿌렸던 원혼을 어린 소녀의 몸을 통해 은유적으로 살려내며 지식인적 사유와 죄의식을 이야기한 영화였다면, <화려한 휴가>는 좀 더 직접적이고 대중적인 코드로 현재와 접속하려고 한다. 이 영화가 광주에 다가가려고 했던 그 길 위에서 이성욱의 글처럼, 대중의 죄의식이 자본을 위해 소비되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지만, 과연 형식의 대중성은 언제나 위험한 것인가. 그런 의문에서 이 글은 시작한다.



지적인 성찰을 피해 도청에 이르는 길


<화려한 휴가>의 기본적인 설정은 <태극기를 휘날리며>와 상당히 유사하다. 의좋은 두 형제가 있고, 큰 형은 실질적 가장으로 동생의 보호자임을 자처한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형제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인이 있다. <태극기를 휘날리며>의 나약하고 불쌍했던 어머니는, <화려한 휴가>에서는 혈연적인 연결은 아니나 심정적으로 모든 이의 어머니상처럼 작용하는 눈 먼 어머니 나문희로 대체된다. 6.25와 5.18 이전 두 가족의 낯간지러울 정도로 화목하고 끈끈한 유대감이 전시되지만 이러한 풍경은 깨지기 위한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어떠한 정서적 공명도 자아내지 않는다. 그들의 모습은 비극적인 사건이 없었으면 언젠가 도달할지도 모르는 (실제로는 도달 불가능하지만, 도달할 수 있다는 환상을 자극하는) 가상이며 주인공으로 하여금 훼손된 과거를 회복하기 위한 어떤 희생도 불사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김지훈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그날의 금남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이끈 것은 독재 정권의 폭력적인 정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라기보다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누군가에게 자행된 실제적 폭력에 대한 거부반응 때문이었을 것이다. 택시운전기사 민우(김상경)는 신애(이요원)와의 첫데이트를 방해하는, 극장 안으로 파고든 최루가스나 눈앞에서 시민을 폭행하는 공수부대의 모습을 목도하고도 어떤 저항감도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그저 빠른 달음박질로 피해 달아나야할 상황일 뿐, 저항정신을 자아내는 충격적인 광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 시대에 폭력은 일상화되어 있었고, 민중들에게 그런 모습은 고통스럽지만 감내해야 하는 현실이었다. 보통 사람들의 감내와 순응이 저항으로 전화되기 위해서는 좀 더 강렬하고, 직접적인 상실의 경험이 필요하다. 진우(이준기)는 절친한 친구의 죽음때문에 거리로 나왔고, 진우를 만류하던 민우가 총을 잡게 된 것은 진우를 잃음으로써 동생의 상실감을 스스로 체감하게 되었기 때이다. 이런 정서의 연쇄 반응, 슬픔의 도미노가 숨죽이던 민중을 폭력에 대항하여 일어서게 만든다.


지식인 주인공을 최대한 배제한 <화려한 휴가>에도 정부와 민중의 대립에 대해 직접적으로 발화하며 비판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인물은 존재하는데, 그것은 시민군의 대장인 박흥수(안성기)와 김신부(송재호)이다. 전역 장교인 박흥수는 민중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것은  ‘진정한 군인’의 태도가 아니라며, 대항전선을 형성하는 구심점이 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진정한 군인’이 과연 무엇인가는 매우 추상적이며 모호하므로, 그것은 그저 눈앞에 펼쳐진 폭력을 부정하는 것에 그칠 뿐 군대/정부의 작동방식 그 자체에 대한 근원적 반성이라고 보기 힘들다. 김신부는 정신적 지원자의 역할을 하며 외신의 보도를 시민군에게 전달해주면서 독려하지만 그의 비판적 발언은 독백이나 탄식에 가깝다. 이 작품이 켄 로치의 혁명 영화들과 차별성을 이루는 지점은 이 두 인물의 역할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전남도청의 지하실에서 시민군은 미군의 개입에 대해 두 인물의 분리된 견해를 잠시 맞이하지만 그것은 어떤 토론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일주일 뒤의 종말이라는 박흥수의 논리에 쉽게 손을 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분명 당대에 민주주의 수호자로 표상된 미국의 이중성과 당시의 정부의 지배논리를 어떤 방식으로 돌파해야할 것인가라는 전망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계기를 차단한다. 아마도 그러한 전망이 존재했더라면 영화 속에서 그날의 광주가 더 많은 현재성을 획득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날의 도청은 무고한 민중의 집단 장례터가 되는데 그치지 않고 지금-여기를 위한 무엇이 될 수 있는지까지 말할 수 있는 사유의 장소로 형상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미 규정되지 않은, 형성되는 주체로서의 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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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화려한 휴가>는 5.18의 혁명성의 실체를 지적 논의를 통해 형상화하는 길을 피해나간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정서적 반응을 최대화하면서 그것을 관객에게 그대로 이양한다. 그것을 위해 금남로를 물들인 선혈을 보여주는 데 인색하지 않으며, 공수부대가(폭력의 근원이 누구였는지를 애매하게 암시하며 악의 화신처럼 형상화된 공수부대의 대장만을 보여주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비극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관객이 영화 외적인 지식을 통해 메워 넣지 않으면 안 된다)자행한 폭력을 극적으로 제시한다. 비극의 근원을 극렬하게 파헤치기보다 비극에 처한 인물의 상황만을 최고조로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비극적이기보다 멜로드라마틱하다. 비극은 주인공이 표상하는 정의가 실현불가능함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필연성을 통해 제시하지만, 멜로드라마는 지적, 심리학적 필연성보다 그들이 처한 상태의 비장미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멜로드라마는 보는 이에게 견고한 사유를 촉구하지 않고 정서적 동화를 자아낸다. 이러한 효과는 바로 대중성과 쉽게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이 장르가 갖고 있는 양날의 칼이 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사회를 지배하는 보편적 논리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그 논리로 인해 파생되는 삶의 폭력성을 과잉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지적성찰이 가득한 영화들은 현상에 거리를 두고 비판적 자의식을 통해 분석해내지만, 그 과정에서 대중과의 호흡을 잊어버리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멜로드라마는 말랑말랑한 외피를 통해 대중의 정서 속으로 깊이 침투하고 현실의 균열된 지점들을 드러낸다. <화려한 휴가>는 80년대를 지배했던 폭력적인 정치의 핵심으로 다가서지는 않지만, 그것의 외현을 대중이 가장 소화하기 쉬운 형태로 제시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주요 캐릭터 가운데 유일한 여성인 신애이다. 그녀는 이미 과거속의 혁명에 참가할 수 없는 현재의 관객들이 정서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동화될 수 있는 인물이다. 간호사인 신애는 총을 잡는 대신 총에 맞고 쓰러진 시민들을 치료하는 역할을 한다. 앰뷸런스를 타고 총격전의 한가운데로 침투한 그녀는 사람을 살리러 갔다가 죽이고 마는 아이러니한 체험 속에서 분열된 자아를 경험한다. 이것은 5.18의 시민군이 총격전을 통해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했던 것을 비난하는 설익은 비폭력주의가 그날의 시민들에게 불가능했음을 설득하는 대목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옳음을 폭력을 통해 시위했다기보다 그것 외에는 자신의 혹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지키는 일이 불가능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들이 그 과정에서 겪었을 심리적 혼란상을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이미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녀가 도청을 빠져 나와 지프차를 위에서 불 꺼진 광주시내를 돌며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외치는 것은 실상 이 영화의 주제이자,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거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당시의 광주에서 도청의 시민군과 집안에서 숨죽이고 있는 이들은 그들과 우리로 분리될 수 없는 심정적 상태였을 것이니 말이다. 그녀가 확성기를 통해 말을 거는 이들은 6.25나 광주나 동일한 비극적 역사라며 무차별적 과거로 몰아넣는, 인식의 어두움 상태에 있는 오늘날의 관객인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혼란 속에서 대중의 힘을 처음 보았던 구스타프 르 봉은 그들이 가진 방향성 없는 힘과 감성본위의 태도에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감정의 충동질에 의해 움직이는 군중을 폄하하며 대중이란 무지로 똘똘 뭉쳐진 거대한 타자로 규정했던 그도 그들 안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큰 힘이 도사리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대중이란 언제나 동일한 정서에 반응하고 무자각적 행동을 양산해내는 확고불변한 대상이 아니라 매번 다른 방향성을 갖고 운동하며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되는 집단 주체이다. 그러므로 대중적 양식을 차용하고 그들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한다는 것 그 자체가 <화려한 휴가>의 치명적 약점이라고 보아서는 곤란하다. 이 영화가 대중의 시선을 어디로 향하게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이 작품은 ‘5.18의 광주와 죽음을 각오하고 그들이 지켜내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매우 충실하며 대중을 자극할 수 있는 영화적 장치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물론 해석을 포기하고 기억을 선택한 이 영화가 의의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은 ‘5.18’의 민중을 전면적, 직접적으로 제시한 첫영화라는 영화사내에서의 위치적 특수성 때문이며 이런 면죄부는 이 작품까지만 유효하다. 한국관객은 앞으로 더 많은 광주를, 80년대에 대한 더 깊은 성찰을 만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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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변해..." "어,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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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는 것, 영원한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그런 믿음이 깨진 것은 보봐르의 『인간은 모두 죽는다』를 읽고 나서였다. 그 작품의 불사의 존재인 주인공 은 영원히 산다는 것은 모든 것에 대한 끝없는 권태로움과 사랑하는 이와의 계속되는 이별 을 의미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벗어버리려 고 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자신의 불안감을 얼르고 달래도 여전히 영원한 것, 변하지 않는 것은 눈 떼기 힘든 매혹을 가지고 있다.

허진호 감독의 '봄날의 간다'는 사랑에 관한 이런 매혹이 깨지는 순간을 포착한 영화이다. 사랑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존재하고 그것 중 어떤 것도 모든 사람에게 들어맞는 것은 아니 듯이 다양한 사랑의 방식이 존재한다. 그리고 사랑이 단순히 상대의 육체나 재산을 탐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면, 즉 사랑 그 자체의 무목적성을 충족시킨다면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의 방식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대상이 일치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사 랑의 방식이 일치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적절한 타이밍을 포함 하고 있는데, 적절한 타이밍을 맞추지 못한 사랑은 본의 아니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안겨주 고 끝나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와 은수의 사랑 역시 봄날처럼 덧없이 왔다가 사라져 버리고 만다. 추운 겨울 대합실에서 만나 대밭으로, 냇가로, 산사로 소리를 잡으러 다니던 둘은 서로의 눈 길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들의 막연한 호감은 은수의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두 마디, "라 면 먹고 갈래요?" 와 "자고 갈래요?",에 상우가 빙그레 웃음을 보냄으로써 연애로 전환된다. 이제 두 사람이 잠시라도 보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고, 술만 마시면 그 사람이 발을 동동 구르며 나를 기다리고만 있을 것 같아서 서울서 강릉까지 택시를 잡아타고 단숨에 달려가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여자는 영원을 말한다. "우리도 저렇게 같이 묻힐까?" 그녀가 영원을 말할 때 그녀는 영원을 믿고 있었을까? 적어도 그 순간에는 믿고 있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다음 순간까지 그녀가 영원을 믿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영원을 말하던 여자는 그들의 사랑이 점점 일상이 되어갈수록 권태를 느끼고 상우가 그녀를 가족에게 소개하려고 하자 짐을 챙기기 시작한다. 어쩌면 정말로 변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 던 사람은 여자인지도 모른다. 처음의 그 떨림과 가벼움이 점차 편안함과 무거움으로 대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을 테고, 이미 결혼생활의 온갖 비루함을 맛보았을 그녀에게 결혼은 사랑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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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의 행동에 대한 이유는 추측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데 반해 상우의 사랑은 감정을 자 극한다. 그것은 이 영화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인물이 상우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가 일 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랑의 아픔을 겪었을 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미 여자는 떠날 준비 를 하고 있는데 그의 (그녀와 같이 먹으려고 사들고 온) '떡볶기같은' 따뜻함을 간직하고 있 기 때문에 그의 사랑에 대한 기억은 슬픈 것이 되고 만다. 그녀가 올 때마다 흔들리고 눈물 짓는 그를 보면서 약간은 촌스럽지만 사랑에 있어서 그 절대성을 인정받는 '순정'이라는 단 어를 떠올리게 된다. 그래, 진심이 통하지 않는 사랑이 있는 거지. 그렇게 그를 위로하고 싶 지만 그것 때문에 보는 사람 역시 가슴이 아파진다.

이 영화를 보면 가슴이 아파진다. 한없이 우울해지고 답답해진다. 애인이랑 보러 가지 말라 는 애초의 카피와 주위사람의 만류를 들었어야 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을 보아도 답답 하고 우울해지는데 그것은 이것과는 약간 다른 이유에서였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을 보고 난 뒤의 감정이 '그래 일상은 저렇게 지리멸렬한거지. 내가 사는 것도 저렇게 비루하고 궁상 맞고 속물스러운 데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했을 테지.'였다면, 허진호감독의 이 영화들은 '그래 저렇게 예쁘고 따뜻해 보이는 사랑에도 결국 끝은 있는 것일 테지. 그리고 그 끝은 사 랑했던 만큼 아픈 것이겠지'였다. 정말 다른 과정을 통해서이지만 그래서 보고 나면 어떻게 든 나의 감정을 안으로 꽁꽁 싸두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어 끝없이 우울해지곤 한다.

그렇지만 그런 아픔들을 피해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아픔도 고통도 없는 삶은 성장 없는 삶과 다름없을 것이다. 봄날은 가지만 봄날 뒤에는 여름의 작열하는 태양도 가을 의 쓸쓸함도 있고 겨울의 매서운 추위도 있기 마련이다. 언제까지나 봄날이 지속되기만 바 란다면 그 봄날이 가지고 있는 서툰 몸짓과 불안정한 심리상태까지 억지로 끌어안고 있어야 한다. 이 영화가 상우의 봄날에만 집착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떠날 준비를 하는 그의 또 다른 미소로 끝난 것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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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짐씨네 2007/06/26 14:09

    긴의 글을 보다가 예전에 써놓았던 글이 생각나서 올려봅니다.

    아...이것을 쓰던 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군요. 그래서 그때는 말로만 조잘조잘 읊조렸던 부분들이 이제 마음으로 동의가 되는 부분도 있습네다.

    뭐 봄날이 요란스럽게 가든, 마구 상채기를 내서 살 맛이 안나든...
    결국은 잘...살아야 하는 것이겠죠.

  2. BlogIcon 2007/06/27 00:11

    :)
    이 영화 개봉 쯤에 쓰신 거에요? 벌써 6년전이네요...
    6년전.. 떠올려봅니다... :)

  3. 짐씨네 2007/06/27 09:45

    응. 극장에서 보고 쓴 거니까. 그게 벌써 6년이구나.

  4. 2007/06/28 08:09

    네.. ㅎ 누나가 제 나이 무렵이었을 때네요 ^^;
    시간이 흐른다는 것...

    ㅎ 요즘 감상적이되어서 그런지..
    신기하기도 하고 애닯기도 하네요..

    밤이도다/봄이다/밤만도 애달픈데/봄만도 생각인데/날은 빠르다/봄은 간다

    괜히 김억이 또 떠오릅니다 ^^

  5. BlogIcon Gore 2007/07/03 16:01

    여백이 많은 영화는, 다시 볼 때마다 그 빈공간을 또 다른 의미로 채워가며 보는 재미가 있지요. '봄날은 간다'도 다시 봐야겠네요.

    요 전에 '오아시스'를 두고 사랑이 어쩌니 한 번 목소리를 높인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봄날은 간다를 다시 보게 되면 '그들이 서로 사랑하긴 했나'가 화두가 될 것 같아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영애가 이쁘니까 강추! =_=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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