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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공장 앞에서 데모를 하였다. -백무산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노동은 인질로 잡혀갔다
납치범들은 총칼로 인질을 위협하며
흥정을 하는데 써먹었다
그러다가 납치범들은 더 큰 마피아
소굴의 나라에 통째 납치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두 번씩 빼앗겼다

노동법도 빼앗겼다
노동삼권도 빼앗겼다
깃발도 빼앗겼다
함성도 빼앗겼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종이 되었다
그래서 납치범들은 주인을 자처했다

거리마다 여전히 4월의 피는 흐르고
거리마다 여전히 5월의 흰 뼈들은 굴렀다
6월의 거리를 소나기로 퍼부으며
우리는 납치범들을 몰아내고자 했다
우리는 빼앗긴 것을 돌려받기 위해 싸웠다

경찰은 데모를 하였다
납치범들의 졸개인 경찰은 무장을 하고
주인 앞에 몰려와서 데모를 하였다
최루탄을 쏘고 군화발로 짓이기며
과격시위를 하였다
쇠몽둥이를 들고 곤봉을 휘두르며
극렬시위를 하였다
공장 앞에 몰려와
극렬하게 데모를 하였다

노동자들은 진압에 나섰다
저들의 살상 무기를 막자고
지게차가 나섰다 포크레인이 나섰다
깃발을 들고 함성으로 나섰다
주인인 노동자들은 피흘리며 진압에 나섰다




경찰은 시청 앞에서 데모를 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주권은 선거일만 선심쓰덧 풀려났다.
납치범들은 경제를 들먹이며
표를 사는데만 급급했다.
그러다가 납치범들은 더 큰 광우병 마피아
소굴의 나라에 통째 납치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래서 우리는 항상
두 번씩 빼앗겼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민주주의도 빼앗겼다
집회의 자유도 빼앗겼다
발언 기회도 빼앗겼다
촛불도 빼앗겼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종이 되었다
그래서 납치범들은 주인을 자처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거리마다 여전히 4월의 피는 흐르고
거리마다 여전히 5월의 흰 뼈들은 굴렀다
6월의 거리를 소나기로 퍼부으며
우리는 납치범들을 몰아내고자 했다
우리는 빼앗긴 것을 돌려받기 위해 싸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경찰은 데모를 하였다
납치범들의 졸개인 경찰은 무장을 하고
주인 앞에 몰려와서 데모를 하였다
물대포를 쏘고 군화발로 짓이기며
과격시위를 하였다
방패로 찍고 곤봉을 휘두르며
극렬시위를 하였다
시청 앞에 몰려와
극렬하게 데모를 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민들은 진압에 나섰다
소고기 수입을 막자고
촛불을 들었다 수만이 나섰다
깃발을 들고 함성으로 나섰다
주인인 시민들은 피흘리며 진압에 나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난 200년의 역사, 식민지 시기 역사, 근대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계몽이라는, 엘리트라는 것이 왜 궁극적으로는 폭력일 수 밖에 없는지
결국 우리는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그 의미는 정말 명확하고 쉬운 것.
시민들이 주인이 되는 사회

MB나 이번 정권이 좋아하는 '경제'적 용어로 말하자면,
장기적으로 주가총액이 우상향 곡선을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국 민주주의는 승리한다는 것,
그러나 그 와중에 부도나고 망하고 떨어지는 회사가 있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주인이 주인인 사회..
납치범과 데모하는 종들..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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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방가~ 2008/06/03 08:45

    어머, 오랜만이네요, 긴님.^^잘 읽었습니다...우울하지만 우리에게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믿습니다.

  2. asd 2008/06/04 11:13

    yes.. democracy is democracy when politics are by 'demos'..

루시드 폴 -사람이었네

2008/02/29 21:26 | Posted by

사람이었네        -루시드 폴

어느 문닫은 상점
길게 늘어진 카페트 갑자기 말을 거네

난 중동의 소녀
방안에 갇힌 14 살하루 1 달러를 버는

난 푸른 빛 커피
향을 자세히 맡으니 익숙한 땀, 흙의 냄새

난 아프리카의 신
열매의 주인 땅의 주인

문득, 어제 산 외투
내 가슴팍에 기대 눈물 흘리며 하소연하네
내 말 좀 들어달라고

난 사람이었네
공장 속에서 이 옷이 되어 팔려왔지만

난 사람이었네
어느 날 문득 이 옷이 되어 팔려왔지만

자본이란 이름에
세계라는 이름에
정의라는 이름에
개발이란 이름에

세련된 너의 폭력
세련된 너의 착취
세련된 너의 전쟁
세련된 너의 파괴


붉게 화려한 루비
벌거벗은 청년이 되어 돌처럼 굳은 손을 내밀며
내 빈 가슴 좀 보라고

난 심장이었네
탄광 속에서 반지가 되어 팔려왔지만

난 심장이었네
어느 날 문득 반지가 되어 팔려왔지만

난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이번에는 수능에 나온 시 읽기를 다음으로 잠시 미루고, 최근 발매된 루시드폴의 신보 "국경의 밤"(3집)의 히든트랙 버전의 '사람이었네'를 읽어보기로 한다. 노래와 함께 들으면 꽤나 감동적인 수작이지만, 가사만 따로 보았을 때는 꽤나 단순한 가사들이 많다. 원래 노래라는 제한 (멜로디에 맞추어서 글자수가 제한된다던지 하는 요소) 때문에 피치못하게 가사에 쓰이는 ‘시’는 어느정도 단순화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제한 때문에 운율과 리듬이 생기기도 하다. 어쨌든 요즘 들은 노래 중에 참 마음에 와 닿는 노래다.

사람이었네 작사 조윤석(루시드 폴)

어느 문닫은 상점
길게 늘어진 카페트
갑자기 내게 말을 거네

조용한 나래이션 톤으로 루시드 폴은 노래하기 시작한다. 갑자기 왠 카페트가 말을 거는지, 처음에는 왠 판타지틱 시추에이션이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루시드 폴의 감정 잡힌 잔잔한 목소리 때문에 그런 의문은 뒤로 미루어지고 만다.

난 중동의 소녀
방안에 갇힌 14살
하루 1달라를 버는

오, 여기까지 노래를 들었을 때, 땡 하고 충격이 온다.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바로 노동가치설. 카페트가 말을 걸었는데, 자신이 중동의 소녀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가사의 제목은 ‘사람이었네!’. 그렇다. 우리가 쓰고 있는 물품들 모두 사람이었다. 사람의 외화인 노동력이 응집되어 만들어진 ‘상품’이라는 것. 결국 노동자와 노동생산물은 노동자의 노동력의 외화로 노동자의 외부에 대립되고, 이 노동자의 노동력의 외화인 상품의 소유가 자본가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소외가 발생하고 불라불라.... 캬...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는 시적 감각. 인간은 노동을 통해 외부 세계와 대립하여 외부 세계 속에 자신을 실현한다. 어느 문닫은 상점, 길게 늘어진 카페트는 중동의 한 소녀의 노동력의 결과이고, 이 또한 ‘사람이었다’. 노동력의 외화임으로, 결국 ‘사람이었다.’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비인간적이고 ‘탈인간화’된 제도 속에서 이를 잊고 산다. 2002년 월드컵때 월드컵에 쓰인 공을 만든 동남아시아 아이들 얼마나 착취를 당했는지, 사람들은 탈인간화된 제도 속에서 알아차릴 수 없다. 월드컵의 함성과 붉은 ‘악마’들에 가려서.

그렇지만, 사람이었다. 그 공에는 동남아시아 아이들의 땀이 스며있었다. 사람이었다.

‘어느/문닫은/상점’이라는 가사 속에서, ‘어느’의 익명성, ‘문닫은’의 소통불가능성-탈인간성, 상점이라는 것에서 자본주의적 ‘차가운 교환’을 읽었다면 오버일까. 중동의 소녀가 만든, 중동의 소녀의 노동력의 외화인, 그럼으로 중동의 소녀였던 그 카페트는 중동과는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 혹은 이 노래가 쓰였을 유럽에서 그 소녀와는 전혀 단절되어, 탈인간화되어 하나의 상품으로 ‘길게 늘어져’ 있다. 그 카페트는 화자에게 말을 건다. 나는 방안에 갇혀서 하루종일 카페트를 짜서(즉 자신의 노동력, 즉 자신의 삶을 외화시켜, 생명을 짜내어서 카페트를 짜는) 하루 1달라를 버는 소녀라고.

카페트를 ‘짜는’ 것과 생명력을 짜내어서 인간에게 주어진 한정된 삶을, 유일무이한 생명의 시간들을 ‘짜내어’ 날실과 씨실을 교차시켜서 만들어낸다. 이 카페트를 짜는 중동의 소녀와 화자가 날실과 씨실을 매개로 만남이 ‘짜’진다. 이렇게 짜여진 만남은 ‘방안에 갇혀’ ‘하루 1달라’ ‘중동’ ‘14살’이라는 어휘들이 환기하는, 아동착취, 노동력착취, 중동-미국이라는 세계체제 속에서의 위치 등등이 뼈아프게 아로 새겨진다.

난 푸른 빛 커피
향을 자세히 맡으니
익숙한 땀, 흙의 냄새

스타벅스 때문에 한국에서도 많은 논란이 된, 커피 농가의 착취가 떠오르는 다음 가사. 마찬가지로 화자는 푸른 빛 커치의 향을 맡으니, 땀, 흙의 냄새를 떠올린다. 1연과 2연이 시각으로 이어져 있다면 (상점에서 본 카페트 - 방안에 갇혀서 카페트를 짜는 중동의 14살 소녀) 3연과 4연은 후각과 이것이 환기하는 기억으로 이어진다. 후각과 기억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현대 뇌의학이 입증하지만, 오래전부터 문학에서는 프루스트 옹의 유명한 마들렌 꽈자와 함께 흔히 쓰이는 장치이다.

난 아프리카의 신
열매의 주인
땅의 주인

누구인가. 그 땀, 흙의 냄새는... 아프리카의 신, 열매의 주인, 땅의 주인인 아프리카인. 냄새는 현재의 기억을 넘어 먼 고대, 아니 아프리카인들이 아프리카의 신이고 열매의 주인이고 땅의 주인이었던 것은 그리 먼 옛날이 아니었다. 그 시대를 환기한다. 아려한 냄새가 이끄는 과거, 또는 그 분위기...

앞서와는 중동 소녀의 극심한 노동조건과는 달리 아프리카인들의 노동조건은 생략되어 있지만, 우리는 이 아프리카 인들의 노동조건들도 그들이 예전에는 '신이자 주인'이었던 것과는 반대로, 극심한 착취 속에 허덕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득, 어제산 외투
내 가슴팍에 기대
눈물 흘리며 하소연하네
내 말 좀 들어달라고

시각과 후각에서, 촉각과 청각으로 감각이 이동하며, 노래 본연의 ‘청각’을 강조하며 화자가 ‘다른 목소리’들을 내기 시작한다. 타자의 목소리들을 발화한다. 외투의 목소리를...

외투가 ‘가슴’에 기대 하소연한다. 상대적으로 부자나라의 화자를 따뜻하게 감싸는 외투를 만든 이는, 외투였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헐벗고 가난한 이가 아니었을까. 외투의 따뜻하고 포근한 촉각이, 눈물이라는 차가운 촉각으로 이어지며 외투를 만들었던 이, 또는 외투라는 모양을 취하도록 노동력을 투하한 이의 차가운, 헐벗은 촉각을 환기하고, 이는 다시 하소연이라는 청각으로 이어진다. ‘내 말 좀 들어달라고’. 문제는 이것이다. 낮은 목소리, 다른 목소리들의 발화. 이는 발화되기 힘들고, 이렇게 매개자에 의해 발화되더라도, 본래의 목소리는 아니다. 물론 여기서도 궁극적으로는 화자를 매개로 발화되고 있지만, 화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적 매개로 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전면에 내세우는 방법을 취해서 최대한 비매개적으로 목소리를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난 사람이었네
공장속에서 이 옷이 되어 팔려왔지만
난 사람이었네
어느날 문득 이 옷이 되어 팔려왔지만

‘팔려온’ 옷. 팔려온 것은 옷이지만, ‘사람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란 무엇인가. 노동자란 무엇인가. 갖은 것이, 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자기 자신을 파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판다는 것은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상품을 사지만, 이 상품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이었다. 다른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자본이란 이름에
세계라는 이름에
정의라는 이름에
개발이란 이름에
세련된 너의 폭력
세련된 너의 착취
세련된 너의 전쟁
세련된 너의 파괴 * 2

전면화되는 화자의 주장은, 노래 속에서는 코러스로 배경화가 된다. 자본, 세계, 정의, 개발이라는 ‘이름들’로 자행되는, ‘세련된’ ‘폭력, 착취, 전쟁, 파괴’. 폭력, 착취, 전쟁, 파괴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자본, 세계, 정의, 개발이며, ‘너’라는 타자로 호명된 그 무엇이다. 세계체제일 수도 있고, 구조, 또는 자본주의라는 기계...

붉게 화려한 루비
벌거벗은 청년이 되어 돌처럼 굳은 손을 내밀며
내 빈 가슴 좀 보라고

히든 트랙에는 2절로 위와 같은 가사가 이어진다. 붉은 루비는, 얼마전 아프리카에서 문제가 되어 영화화 되기도 했던 ‘붉은 다이아몬드’를 떠올리게 한다. 자본에 의해 자행되는 벌거벗은 폭력, 착취, 전쟁, 파괴들. 벌거벗은 청년, 즉 노동자가 등장한다. 앞서 ‘외투’를 입은 화자와 비교해보라. ‘외투’를 입은 화자의 ‘가슴’에 기대어 울던 목소리와 비교해보자.

벌거벗은 청년은, ‘내 빈 가슴’을 보라고 이야기한다. 화자 앞에 있는 ‘붉게 화려한 루비’가 무엇이었는가 하고.

난 심장이었네
탄광 속에서 반지가 되어 팔려왔지만

그것은 심장이었다. 생명력이었다. 아프리카 탄광에서 루비를 캐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쥐어짜고 있는 사람이었다.

난 심장이었네
어느 날 문득 반지가 되어 팔려왔지만

자본이란 이름에
세계라는 이름에

난 사람이었네
자본이란 이름에
세계라는 이름에

사람이었네
정의라는 이름에
개발이란 이름에
사람이었네
세련된 너의 폭력
사람이었네
세련된 너의 착취
사람이었네
세련된 너의 전쟁
사람이었네
세련된 너의 파괴 *5

사람이었다. 사람이었네. 그렇다. 사람이었다.


사람이었네        -루시드 폴

어느 문닫은 상점
길게 늘어진 카페트 갑자기 말을 거네

난 중동의 소녀
방안에 갇힌 14 살하루 1 달러를 버는

난 푸른 빛 커피
향을 자세히 맡으니 익숙한 땀, 흙의 냄새

난 아프리카의 신
열매의 주인 땅의 주인

문득, 어제 산 외투
내 가슴팍에 기대 눈물 흘리며 하소연하네
내 말 좀 들어달라고

난 사람이었네
공장 속에서 이 옷이 되어 팔려왔지만

난 사람이었네
어느 날 문득 이 옷이 되어 팔려왔지만

자본이란 이름에
세계라는 이름에
정의라는 이름에
개발이란 이름에

세련된 너의 폭력
세련된 너의 착취
세련된 너의 전쟁
세련된 너의 파괴


붉게 화려한 루비
벌거벗은 청년이 되어 돌처럼 굳은 손을 내밀며
내 빈 가슴 좀 보라고

난 심장이었네
탄광 속에서 반지가 되어 팔려왔지만

난 심장이었네
어느 날 문득 반지가 되어 팔려왔지만

난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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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메뚜기 2008/03/03 16:33

    긴님의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좋아하는 노래인데, 어쩌면 이런 노래가 진정한 '민중가요'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사람이었네'가 주변부 인민을 "푸른 빛 커피"나 "아프리카의 신"등으로 신비화, 혹은 타자화 시키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 부분은 비단 루시드 폴 만이 아니라 많은 좌파 문화인들이 간과하는 문제인 듯도 하구요... 여하튼 좋은 글 감사합니다^^

  2. 2008/03/04 06:55

    넵. 감사합니다.^^ 윗 글에도 잠깐 언급한 것이지만, 타자의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낭만화라는 경로를 거치지 않고,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전달하는 방식 자체가 참 힘든 것 같아요. 특히 가사라는 형식에서는요. 제가 읽어본 것 중에는, 유재현의 '시하눅빌 스토리'가 괜찮았는데...
    루시드폴은 예전 "할머니의 꿈"에서도 그랬지만, 주변부 인물을 신비화, 타자화 시킴으로서 얻어내는 낭만적 정서와 자기 반성/또는 유사 자기 반성으로 인한 감정적 충족? 때문에 나름 팔리고 -_-;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유재현 선생은 그 이후로는 논픽션으로 가신 것 같던데.. 삶의 소묘가, 소묘하는 주체의 매개성이 문학의 의의일터인데, 역시 쉽지 않네요. 자신이 변하면서, 타자를 타자화하지 않는다는 것..

  3. 글 읽으며.. 감탄에 감탄을 연발했습니다.
    사람이었네, 를 며칠 전 처음 들으며, 거의 울뻔했거든요.. 마치 그 열넷의 소녀가
    방안에 갇혀 처절하게 울부짖는 것 같아서...
    꽤나 감상적으로 노래를 다시 듣고, 듣고, 하다가
    우연히 이 글을 발견하고선 그제서야 이 안에 담긴 여러 메세지를 읽어볼 수 있었어요.
    긴님의 글을 읽다보니 정말 루시드 폴 노래가 수작이라는 걸 더 잘 알겠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4. 2008/08/13 22:37

    앗; 감사합니다... 갑자기 급 죄송스러워지네요. 너무 옛날에만 쓰고, 요즘에는 쓰지를 않아서... ㅜㅠ 힘내서 다시 써봐야겠습니다 ㅎㅎ

사령(死靈) -김수영

…… 활자(活字)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어라.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
이 황혼(黃昏)도 저 돌벽 아래 잡초(雜草)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 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纖細)도
행동(行動)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郊外)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김수영을 논하는 것은 언젠가는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은 일이다. 얼마전 조사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시인을 뽑는 설문조사에서 평론가들과 시인들 모두 1위가 김수영이었다. 60년대 김수영은, 70년대 김지하나 80년대 박노해와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또는 30년대 임화와도. 김수영은 굳이 비교한다면 소설가 김남천과 닮아있다고 할까. 자기고발과 변명, 절규와 반성 사이에서 흔들리다가 시대와 함께 나아갔다. 이 지점이 김수영을 여타 다른 ‘지식인-문인’들과 다르게 한다.

특히 우리가 익숙한 식민지시대 지식인들이 자기고발과 변명, 절규와 반성 사이에서 결국에는 변명과 소심한 반성으로, 시대와 함께 추락했다면, 김수영은 시대와 함께 비상했다. 그리고는 죽어버렸다. 지식인들이 김수영에 그렇게 애타게 호감을 갖은 것은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지식인이란 언제나 자기고발과 변명, 절규와 반성을 하거나, 하는 척 하거나, 해보려고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러했던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하기에. 그리고 시대와 함께 또는 시대에 '의해' 비상하기를 꿈꾸기에.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라는 오래된, 낡은(?) 용어로 설명하자면, 언제나 그 중간에서 요동하는. 지식인이 이러한 요동 속에서 탈출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한 방향은 투사이고, 다른 방향은 생활인이다. 전자는 피지배계급, 후자는 지배계급에로의 귀속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예전에는 시가, 문학이 행동 보다 먼저 있을 수 있는지, 아니면 이 또한 하나의 행동인지, 혹은 행동을 좇아서 기록하는 것인지에 대해 사람들이 논의하고는 했었다. 행동을 좇아가는 것을 모방함으로서 행동에 앞서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고, 행동이 나아가는 것을 ‘적절’하게 모방함으로서 하나의 행동으로 규정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도 있다. 결국 무엇이 ‘행동’을 위해 가장 적합한 것인지를 물었다.

결국 문학이라는 내적 구조 속에서는,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을 모방함으로서, 문학 외적 구조 예를 들면 현실에, 하나의 행동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규정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모두 ‘구조’의 경계라는 것을 가정하는 것으로, 궁극적 지향점은 가장 큰 구조이자 제일원인인 현실 구조에 방점이 찍힌다.

그러나 이는 결국 문학이라는 것이 완결된 행위로 도출되어 나와서 구조로 굳어지고 나서를 상정하는 것이고, 시인의 입장에서는 문학-함은 사유의 흔적이자 과정, 그리고 자기 확인이고 행위이다. 특히 발표하고 출판을 하는 것은 행위이고, 자기-되기의 피드백이다. 자기 외부에 자기를 객관화하며 (주관을 외부에 정립하며), 이 객관은 일종의 유사 대화처럼 기능할 수 있다. 결국 사유란 유사-대화이고, 시 쓰기 또는 문학-함은 독특한 형태의 대화이고 사유이고 행위이다.

…… 활자(活字)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활자는 타인의 사유의 흔적, 또는 내 사유의 흔적, 나의 외부에 정립된 주관이다. 김수영은 시 쓰기를 통해서 자신의 사유를, 감정을 활자화한다. 그 활자화 속에 김수영은 ‘활자는 반짝거리면서...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한다. 김수영이 동시대 썼던 시들에서 등장하는 ‘자유’라는 단어들과 상호텍스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사유와 활자, 활자와 활자 들이 넘나들면서 마주본다. 시가 쓰여지는 순간을 가정한다면, 그 순간 사유와 활자는 지면에서 맞닿았다가 순간, 서로 마주본다. 거울에 손끝을 대자마자 맞은편에서 나-이미지가 나타나지만, 이는 거울에 손끝을 댄 순간의 나이고, 거울에 손을 떼자마자의 나는 나-이미지를 응시한다. 영-활자의 대립. 그렇다면 죽은 것은 활자이고 산 것은 영일 터인데, 아니다. 자유를 말하는 것은 활자이고, 침묵하고 있는 것은 영이다. 침묵은 죽음이고 부자유이고, 자유는 삶이고 당위이다. 하지만 침묵하는 것, 죽어있는 것은 영이고, 당위와 자유는 활자이다. (활자의 한자가 살아있는 글자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어라.

벗. 활자일 수도 있고, 지식인이 아닌 ‘투사’일 수도 있다. 활자는 투사이다. 투사인 활자를 김수영은, 죽은 영은 썼었다. 활자들, 벗 앞에서 당위와 자유를 말하는 살아 있는 존재자 앞에서 죽은, 침묵하는 김수영은 고개를 숙이고 ‘듣는다’. ‘그대-활자-자유-투사’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어라’. 활자의 일갈이자, 시를 읽고 있는 독자에 대한 일갈이자, 김수영-죽은 영의 부탁이다. 고개 숙이고 시를-활자를-쓰고 고개 숙이고 활자를-시를 읽는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
이 황혼(黃昏)도 저 돌벽 아래 잡초(雜草)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 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 활자이자 죽은 영인 김수'영'. 황혼도 잡초도 페인트 빛도. ‘고요함도’. 자유를 말하고 있는 활자가 아닌 모든 것들을, ‘활자화’하며, 죽은 영인 김수영은 활자가 되어 고개 숙인 자신을 포함한 활자가 아닌 모든 것, 살아있지 않은 자유가 아닌 모든 것에 일갈한다.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纖細)도
행동(行動)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郊外)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

그대-활자, 투사의 정의는 우리-지식인, 시인의 섬세와 대비된다. 결국 그러나 활자란 죽음일 뿐이다. 투사가 결국 가는 길이 죽음인 것처럼. 그리고 행동은 죽음에서만 나온다. 죽음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던 시대, 그리고 죽음만으로 다른 행동들에게 자유를 말할 수 있는 시대는 먼 과거도 아니고, 아직 끝나지도 않았다. 그 욕된 교외에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그대는. 활자는. 투사는.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지식인의 모순, 시인이라는 존재자의 모순(시인은 시를 쓸 때 시인인가, 시를 썼기 때문에 시인인가, 시를 쓸 수 있기에 시인인가), 죽어있는 활자가 살아있고, 살아있는 영이 죽어있다. 결국 죽어있는 활자는 살아있는 영이 썼을 것인데, 살아있는 영이 살아있는 활자를 쓰고, 자유를 말하면 죽어버리게 되고, 죽어있는 활자는 모든 영들이 죽어있다면 살아있는 자유를 부르짖어도 죽어버릴 수 밖에 없다.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이렇게 김수영이 썼다면, 김수영은 패배하고 회고에 빠지며, 변명을 하듯, 시를 싸지르고 생활인으로 복귀할 수 있다. 하지만 김수영은 이렇게 쓴다.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방점은,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아니냐. 아니냐! 스스로에게 돌아와서 박히는 '활자'. 패배자들이, 변명하려고 시를 쓰는자들이, 마지막에 말줄임표로 끝을 흐린다면, 김수영은 말줄임표로, 침묵 속에서 시작하여, 맞춤표를 찍는다.

사령(死靈) -김수영

…… 활자(活字)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어라.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
이 황혼(黃昏)도 저 돌벽 아래 잡초(雜草)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 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纖細)도
행동(行動)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郊外)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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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2/27 06:48

    活字와 死靈의 대립.

    활과 사, 자와 영. 지식인과 투사, 지식과 행동, 시와 현실,
    의미가 서로 바뀌면서도 고정되어 있는 변증..

    시를 쓰는 김수영과 시를 읽는 김수영, 시를 쓰는 순간의 김수영의 분열.
    결국 시인이 시를 읽는다는 것, 또는 산다는 것은, 그런 분열 속의 진동일까.

    시를 읽는다는 것은, 다시 살아내는 것일까.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다시 살려내고 싶어하는 것일까.

    오래된 주문을 외워서 빙의하는 것. 죽은 자들의 글을 읽으며, 언젠가 내가 죽어서, 내 글만이 살아남을 때, 그 글이 안타까이 또는 덤덤히 나를 부르는 상상. 시인은 점점이 자신을 여기저기 흩어놓고, 누군가는 이 잔해들을 부여잡고 다시 그 시인을 부른다.

    소월의 '무덤'이 떠오른다.

와사등(瓦斯燈)-김광균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 여름 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高層), 창백한 묘석(墓石)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夜景)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思念)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조선일보}, 1939.6.3)


수능에 나온 시 읽기는, 역시 가장 최근에 수능에 출제된 작품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무쪼록 괜찮을 것 같다.
김상봉 선생의, 문학 교육이야말로 문학을 망치고 있는 주된 원인이라는 말에 십분 동의한다. 수능에 나온 시 읽기 기획은, 수능에 나온 시를 읽고, 그 다음에 수능에 나온 문제들을 살펴봄으로서, 수능에 나온 문제들이 얼마나 시를 단순화시키고 시를 '탈시화'하는지도 될 수 있으면 언급하고자 한다.

생각해보면, 사실, 우리나라 문학교육에, 또는 수능(대학 수학능력평가시험)에 있어서 '시 감상력'은 별반 중요한 요소가 아닐지 모른다. '언어영역'은 시의 대강의 '뜻'만을 파악할 것을 요구할 뿐. 그런데 이렇게만 교육을 시키면 시를 '즐기는 일'은 역시 무리이고, 시를 교육현장에서 시험에 맞게 가르치는 것 때문에 시가 싫어졌다는 이야기도 여기저기서 들리는 바이니, 참 마음이 답답할 수 밖에. 이제 나도 노인네 다 되었는지, 혼자 설교하고 앉았다... 쩝.

여튼 김광균의 '와사등'을 살펴보자. 뭐, 정말 찬찬히 다각적으로 읽어보려면, 당대 사회에 대한 앎, 그 속의 김광균 개인과 그가 속한 집단에 대한 앎, 이 시가 시사 속에 놓인 영향관계 등등을 우선 정리해보고 들어가는게 좋겠고, 김광균의 이 시는 그러할 때 더욱 그 진가(?)가 나타날 수 있겠지만, 그런 것은 지 맘대로 일축해보기로 하고. 들어가보자.

우선 제목 와사등(瓦斯燈). 이는 가스등의 음차식 표기라고 한다. 가스등은 당대 조선에서는 아마 석탄가스 가스등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조선 가스등의 역사 같은 것을 더 참조해야함), 이는 노르스름한 불빛을 내면서 탄다고 한다. 이 가스등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되겠다.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워낙 유명한 시이기때문에, 전통적 해석에 반하는 나름의 해석을 해보려고 한다. 이 시를 차근히 읽어보자. 차단-한은 애매한 단어로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되어 왔는데, 가장 일반적으로는 '차디찬' 또는 불빛이 희미한 정도로 해석되어 왔다. 아니면 이 시 전반적으로 세계에서 '차단'된, 자아의 고독감을 나타낸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런데 앞서 말했던 것처럼 '가스등'이 당대 세계적으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석탄가스'등이라면 노란색 불빛일 터인데 '차디찬'이라는 이미지와는 조금 맞지 않는 부분이 생긴다.

그리고 또 의문은,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는 것. 가스등이 걸려 있는 경성의 하늘이라는 것은, 건물들이나 아니면 적어도 가스등이라도 있을 터인데, '비인 하늘'이라는 것. 비인 하늘에 걸려 있는 '가스등'이라니, 어떤 심상이 떠오르지 않은가?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라는 것 또한. 한국시 전통에 흔히 있는 어떤 소재가 떠오른다. 나만 그런가? ㅡ,.ㅡ;

그렇다, 사실 이 시의 '와사등'의 원소재는 '달'이 아닐까. 나는 예전부터 이 시의 '와사등'이 은유하는 바가 달이라고 생각했고, 그러할 때 이시의 전체적인 이미지와 식민지 조선의 20대 초반 모던뽀이 김광균 시인의 '모던스러움'과 '조선스러움'의 미묘한 갈등이 손에 잡힐듯 독자의 마음을 흥분시킨다.

달과 고독의 연결은 워낙 전통적인 연결이었고, 세계 보편적 연결이다. 다시 '달'로 생각하고 이 시의 첫 연을 읽어보자.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비인 하늘에, '차단-한 등불'하나 '슬픈 신호'처럼 걸려 있다. 어디에 갈 수도 없는 조선 식민지 젊은 모던뽀이. 달과 '호올로'의 연결. 수년전 보아양의 'No.1'처럼 달과 홀로움, 외로움의 연결은 자연스럽다. '차단-한'이라는 시어와, 저 멀리 우주 공간에 시체처럼 허옇게 떠있는 달과의 연관성. '비인 하늘'의 이미지 속의 '달'. 그 전통적 시가 속에 나오는 달을 '와사등'이라고 이름붙이는 모던뽀이. 그림이 관심이 많았던 김광균은, 달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어떤 그림을 보았을까.

긴― 여름 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高層), 창백한 묘석(墓石)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夜景)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思念)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늘어선 고층으로 시선이 가는 것을 보자. 가스등을 보자가 고층건물로 시선이 이동을 해서 '찬란한 야경'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라는 이미지 이동은 뭔가 어색하다. 가스등이라는 문명의 이기에서 또다른 문명의 이기로 넘어감도 그러하고, 시선이 가스등보다 오히려 더 위로 고층으로 넘어간다.

이것에 비해, 이 '와사등'을 달로 생각할때 이미지의 선명도나 시적 구조의 탁월함이 더욱 돋보인다. 여타 학문 이론에는 '오캄의 면도날'이라는 가설 처리법(?)이 있다. 똑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이 여러 개 있다면, 보다 간단한 것을 택하라는 말씀. 문학에는 '기인의 뻥구라'라는게 있는데 똑같은 문학작품을 설명하는 이론이 두 개 있다면, 보다 그럴듯하고 작품을 복잡다단 미묘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을 선택하라는 말쌈.

달을 보다가 화자의 시선은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은 문명의 이기를 돌아본다. 창백한 묘석은 곧바로 달의 시체같이 하얀 빛과 연결되는 바. 황혼에 낮달처럼 창백한 것. 긴 여름 해는 '황망히 나래를 접고' '찬란한 야경'은 고고한 이세계 달에 비하면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져 보인다.

이러한 문명과 자연의 대비. 모던뽀이는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문다. 이 세계에서는 갈 곳도 없고, 이론도 없다. 무엇을 하자 말인가. 39년은 일본의 파시즘화 야욕이 본격화되기 시작하고 만주사변은 이미 8년전, 조선의 지식인들은 암흑기에 빠져들고 많이들 자포자기화, 또는 일본의 파시즘에 동화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세계와는 차단된 저세계의 달은 시체처럼 하얗게 저 멀리서 '차단-한' 불빛을 드리우고 있다. 모던은 균열을 일으키고, 김광균이 좋아했던 서구와, 김광균이 믿었던 근대는, 그리고 이 서구와 근대의 매개자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했던 일본은 미쳐돌아가는 구나. 길이 없다. 저 창백한 '비인 하늘'에 떠있는 와사등은, '내 홀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문명의 이기, 멋있어 보였던 늘어선 고층, 찬란한 야경은 시체들의 무덤인 듯, 잡초인 듯, 창백한 달 아래서 그 아우라를 잃고, 화자는 입을 다문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모던, 근대는 계속되지만, 화자의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아우성 소리. 피부라는 얇은 막으로 외부와 나는 구분되고, 외부의 아우성 소리에 나는 눈물 지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근대문학 초창기의 또다른 풍경을 떠올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외부의 축제, 군중들의 자본주의적 환락 속에 홀로 눈물 짓는 젊은 화자의 모습. 주요한의 "불노리"에서 보았던 모습이, 그대로 반복된다.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西便) 하늘에, 외로운 강물 위에, 스러져 가는 분홍빛 놀……. 아아,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4월이라 파일날, 큰 길을 물밀어가는 사람 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주요한 <불노리> 1연)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군중 무리에 섞이지 않고, 홀로 괴로워하는 젊은이의 표상. '공허한 군중의 행렬'. 보들레르적 산책자처럼 모던 도시를 매혹과 냉혹을 반복하며 산책하는 관찰자가 아니라, 내 피부라는 얇은 막 사이로 나와 너의 구분을 통해서 우울함을 증폭시키며, 자신의 비애를, 자신의 나아갈 길을, 그 막힌 길, 길 없는 길에 방황하는 젊은 영혼.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것이냐. 1919년 주요한은 1939 김광균과는 달랐다. 2.8독립선언 직후, '문학으로 독립운동을, 문학의 근대화를!'이라고 부르짖으며 창간했던 잡지 <창조> 창간호 맨 첫머리에 실린 '불노리'라는 시는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西便) 하늘에, 외로운 강물 위에, 스러져 가는 분홍빛 놀……. 아아,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4월이라 파일날, 큰 길을 물밀어가는 사람 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주요한 <불노리> 1연)
라고 하며, 김광균과 비슷하게, 홀로 외로운 절망하는 화자를 그렸지만, 마지막에는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능라도(綾羅島)까지, 물살 빠른 대동강을 저어 오르라. 거기 너의 애인(愛人)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곧추 너의 뱃머리를 돌리라. 물결 끝에서 일어나는 추운 바람도 무엇이리오. 괴이(怪異)한 웃음 소리도 무엇이리오, 사랑 잃은 청년의 어두운 가슴 속도 너에게는 무엇이리오, 그림자 없이는 '밝음'도 있을 수 없는 것을…….
오오, 다만 네 확실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 오오, 사로라, 사로라! 오늘 밤! 너의 발간 횃불을, 발간 입술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발간 눈물을…….

오늘 밤, 너의 발간 횃불, 발간 입술, 눈동자, 눈물을 사르르라, 불사르라, '그림자 없이는 밝음'도 없다고 부르짖으며 끝을내고, 주요한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학교를 자퇴하고 상해 임시정부로 나아가는 길에 선다.


하지만, 김광균에게는 어떠한 집단이, 전망이 있었는가. 어떠한 길이 있었는가. '길-게 늘인 그림자'뿐, 그 '그림자'가 '그림자 없이는 밝음도 있을 수 없는 것을'이라는 아포리즘으로 치환되지 않는다.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말인가. 죽음의 이미지, 차단-한 먼 이공간의 달 아래서, 20대 초반 시인은 묻는다.
20년전 20살 시인이 '불노리'라 이름붙인 시는 자신을 불사르라 했건만, 그 때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뒤따른 국내외의 희망찬 분위기와 동경유학생집단의 독립에 대한 패기에 찬 목소리가 함께 있었다면,
20년 후, 파시즘으로 내달리고 있던 일제하 식민지, 청년은 '와사등'이라 이름붙인 시 아래, 창백한 달빛 아래에서 창백한 묘석과, 무성한 잡초인 듯한 야경 아래, 묻는다.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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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돌아온 긴. 뜬금없이 ‘수능에 나온 시 읽기’라는 기획(?)으로 글을 시작해보려 한다. 안다. 딴에는 ‘기획’이라고 해서 몇가지 기획들을 내보였지만 별로 오래간 것이 없었다는 것을... 그러나 이번에는 약속해본다. 이번 기획은 될 수 있는 완성(!) 해보겠다고. 즉. 94년도 이래 수능에 나온 모든 시들을 함께 ‘읽는’ 일을 해보겠다는 말.

간만에 돌아왔으면, 지금껏 격조했던 이야기와, 죄송하다는 말씀을 해야 하는 것. 물론 고정독자나 ‘독자’가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겠고, 아마 없을테지만, 그냥 혼자라도 속풀이를 해본다. 자기변명의 내면화랄까....(점점 일제시대 문인들이 이해가 되기시작한다면 오바일까. 우리 오빠들 생각나네 ㅡ,.ㅡ; )

그리고 이 ‘속풀이’와 ‘수능 기획’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말.

아... 목구멍이 포도청. 긴이 학부시절, 박사수료한 ‘늙수그레’한 선배들이 사은회 같은 술자리에서 왜 담배를 뻑뻑피어대며, 나에게 ‘너는 아직 젊으니까 다른 길을 가라’라고 말했는지, 빨간볼의 예비 문학도는 알지 못했도다. 석사졸업할때까지만 해도, 생활고는 인문학도에게는 깃 세운 바바리코트 같은 것 인줄만 알았도다. 1930년대 말 작가들의 빈궁한 삶과 일제하의 훼절에 관해 읽으면서도, 그것은 그냥 ‘텍스트’였도다.

그러나 88만원세대, 긴군도 생활이 하 수상하고, 먹고 살기가, 한달 한달 그 다음달의 생활비를 벌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이 불안정성에, 심신이 피로하야, 빨갰던 볼은 회색빛을 띠고 문학에 대한 열정은, 생활에 대한 피로로, 인문학에 대한 자긍심은 한숨과 함께 내뱉는 공기로 산산히 흩어져..... (지금 왠 청승을 떨고 XX이냐. 정신차려야지. 아싸. 힘내자.)

뭐 어쨌든 요즘 마음이 이래저래 불편하다. 희망을 걸었던 당은, 대선에 폭싹 망했고, MB와 한나라당의 ‘잃어버린 10년’을 두 눈뜨고 지켜봐야 하는 것도 괴롭고 괴롭다.

뭔 말을 하려기에, 이렇게 서론과 ‘변명’이 긴 것인지. 그렇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속물인가봐아아~~ 미안해~~ (전지현 언제적 버전 -_-;) 먹고 살려고, 언어영역 문제집을 쓰고, 대치동서 강의했다. 흑. 이 말하기가 그리 힘들었나... 어찌됬든 이를 속죄(?)하는 겸해서, 나름 -_-; 수능에 나온 시 읽기라는 기획을 마련했다 이것.

평소에도, 우리나라 중고등 문학 교육이 문학을 죽인다 뭐다 하면서 분개했던 긴. 낮에는 친우들과 평등과 착취를 논하며, 밤에는 대치동서 ‘이거 모르면 대학 못 간다’라고 말했던 것. 시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기에 시라고 하면서, 문제집에는 ‘정답’과 ‘오답’을 나누며 ‘오답해설’ 따위를 쓰고 있었던 것. 학벌을 비판하며, 학벌을 팔아먹으며 근근이 연명했던 것. 아으. 만식이 형님처럼 ‘민족의 죄인’은 아닐지언대, ‘문학의 죄인’(-_-; ) 이라 부를 것인가.

여하튼. 한 팔로는 이 시는 요렇다라고 하지만, 한 팔로는 그래도, 나름 이를 중화(?)한다는 변명하에, 수능에 나온 시를 천천히 읽으며 ‘미적 감상’을 시도해볼 예정. 내 문제집을 풀었던, 내 강의를 귀를 쫑긋하고 들었던 아해들아, 미안하다. 사실 말야, 시는 참 좋은거란다. 사실 말야, 나는 김상봉 선생님(<<학벌사회>> 욜라 흥미롭고 조금 웃기면서도 재미있다. 진지한 철학도의 무게잡음에는 의도치 않게 약간 우스꽝스러워지는 면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본격적으로 다루어보기로 하자.)의 의견에 동의한단다. 그리고 사실 말야, 나는 파란색이 싫단다. 빨강은 아니더라도 오렌지가 좋단다. 어쨌든. 변이 길었다. 슬프다. 이 또한 요즘 과일과 신선한 야채 못 먹고, 다음달 생활비 걱정해서이다.

아 글도 왜 이리 뻔하고 재미없게 써질까. 중남미 어떤 작가가 말했다던데. 가난해야지만 글 잘 써진다는 거 개뻥이라고. 정말 굶으면서 글 써봤냐고... 헐.

다음 시 예고! 우선 읽어보시랍~

가난한 사랑 노래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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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ㅎㅎ 2008/01/30 03:59

    긴님, 재미난 연재를 기획하시는군여-몰라도 이런 제목의 글이라면 독자 꽤나 생기실겁니다. 무궁한 발전이 있으시길...88만원세대 긴님 화팅~^^

요즘 원더걸스의 '텔미'가 장안의 화제다. 국문과라는 일제 잔재스러운 이름의 과에 적을 두고 있는, 석사때는 '시전공', 지금은 지가 뭐 전공하는지 잘 모르는 긴님은 'Wondergirls'라는 가객 처자들(성춘향 또래인)의 'Tell me'라는 곡을 그 모냥새만 보아도, 미제 단어로 정체성없는 뇬들이라고 비하할 것 같지만, 사실 그러기 전에 이미, 그 춘향이 또래 처자들에게 홀딱 맘을 빼앗겨 버린 것!

언제나 시전공이라는 의무감 땜시, 기여코 한국근현대시사를 쓰겠다고, 그리고 이는 주요한/최남선부터 시작해서 윤동주 등을 거쳐, 기형도, 박노해와 백무산을 찍고, 서태지와 신해철 공일오비 강산에 윤도현 전람회 이적 그리고 핑클과 원더걸스에 이르는 장대한 시사가 될 것이라고 공언하고는 했다. 아니, 서태지나 신해철? 핑클과 원더걸스라니! 죽는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랑, 텔미의 연속성이랄까. 문자 매체와 영상 매체 사이의 간극이라 해도, 우리가 한시들을 시문학사에 넣고, 읊조렸던 시조들과 민요를 시사에 한자리 차지한다면, 우리 성춘향 또래의 젊은 가객들이 공연했던 텔미가 왜, 우리 시사에 자리가 없겠소.

여튼 잡소리 그만하고, 우리 텔미를 들여다봐보자. 이 노래의 매력은 어데 있는지. 이 노래의 계보는 어디서부터 잡아야 할지 말이다. 원래 역사가란, 인과나 영향이 중요한 법. 대충 우겨서 그럴듯하면 이론이요, 많은 이들이 동의하면 학설이요, 주장한 사람이 교수되면 정설인법. 기대하시라 긴님이 교수되는 날, 허무맹랑한 잡설들이 모두 정설이 될 것이니(적어도 내 제자들은 입시랑 논자시에 내 설들을 칭송할 것이니)... 우하하;;;

우선 원더걸스의 가사를 보자.

너도 날 좋아할 줄은 몰랐어/어쩌면 좋아 너무나 좋아/꿈만 같아서 나/내 자신을 자꾸 꼬집어 봐
너무나 좋아

우선 직접적으로 '너'에게 말을 거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계속 좋다고 난리다.

니가 날 혹시 안 좋아할까봐/혼자 얼마나 애 태운지 몰라/그런데 니가 날 사랑한다니/어머 다시 한 번 말해봐/

그 배경으로는, '니가 날 혹시 안 좋아할까봐'그랬다는 것.

Tell me tell me/tell tell tell tell tell tell me/
나를 사랑한다고/날 기다려 왔다고 *

그래서, 그 '사랑한다는 말', '나를 기다려왔다'는 말을 계속 말해달라는 거다. 계속 계속 죽어라고 계속. 왜냐면 '너무나 좋'으니까.

Tell me tell me/tell tell tell/tell tell tell me
내가 필요하다 말해 말해줘요 *

Tell me tell me/tell tell tell tell tell tell me
자꾸만 듣고 싶어/계속 내게 말해줘 *

Tell me tell me/tell tell tell tell tell tell me
꿈이 아니라고 말해 말해줘요 *

어쩜 내 가슴이 이렇게 뛰니/가슴이 정말 터질 것 같아/니가 날 볼 때면/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전기가 올라

얼마나 오래 기다린지 몰라/얼마나 오래 꿈 꿨는지 몰라/그런데 니가 날 사랑한다니/어머 다시 한 번 말해봐

* 후렴 반복

Tell me tell me tell me you/want me want me want me too/Tell me tell me tell me you/love me too love me too

Hit me one time baby 다시한번/tell me tell me/Ok 방금한건 알지만 또 한번/tell me tell tell me/
ye 계속 말해줘 들어도 들어도  듣고싶어/어쩜 이런일이 꿈인가 싶어/어~머나/어머나 좋아서어쩌나

* 후렴 반복

그니까 그게 다다. '그/그녀'가 우리 춘향이 또래 가객들에게 고백했고, 울 원더걸스는 내심 애태우고 있었기에, '어머' 깜짝놀라서 좋아라 한다. 캬. 뭐 이리 간단명료하고 해피메리땡큐한 시츄에이션 베이비! 근데, 뭐가 특이하냐고? 그럼 끝난거 아니냐고? 원래 '대중가요'란 이렇게 생겨먹은거 아니냐고? 노 베이베. 원더걸스 이 노래, 뭔가 특이한게 있다.

원더걸스의 이런 형태의 '2인칭 화자 너'에게 직접 말을 건네는 형식은 공연상, 무대에 있는 원더걸스가 관객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형태로, 관객(너)-원더걸스(나)의 형식이다. 노래내용또한 '팬'의 사랑을 받은 원더걸스라고도 해석된다. 그러면 이러한 계보의 노랫말들을 떠올려보자.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바로 직접적 선배로는 핑클의 '내 남자친구에게'가 있고, 그보다 윗 선배로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너에게'가 있다. 비교해보자.

이것봐 나를 한번 쳐다봐/나 지금 이쁘다고 말해봐/솔직히 나를 반하게할 생각에/난생 처음 치마도 입었어/수줍은 내 입술을 보면서/모른척 망설이지 말아줘/어제 본 영화에서처럼/날 안고 입맞추고 싶다고 말해봐

날 봐 언제나 너의 눈 속에/아직은 어린 내 모습/사랑한다 말하기엔 어색한 건 사실야/하지만 나 너의 마음속에서/어느샌가 숙녀가 되어버린 걸/내 사랑 이제 눈을 뜬거야 날 봐

Call me call me call call give a call/내 모든걸 원한다면 너에게 줄께/기다려왔던 나의 사랑은/
너를 위한거야 (너를 위한거야)/Call me call me call call give a call/내 모든 걸 원한다면 너에게 줄께/지금 이대로 너의 품속에/나를 데려가줘 (나를 데려가줘)*/난 니꺼야

Shimmy shimmy ya'll shimmy shimmy yah/2mc's bout to bring it to yall/It's the P to the I'N to the K(uh)/So so ket it be haha/want you do need is a cup of water/Take a big sip bet ya it will sooth ya/My baby love can't you see yo mine/bottom line yo mine

늦은 밤 헤어지게 될때면/아쉬운 너의 맘을 털어놔/무작정 나의 손을 잡고/어디든 달아나고 싶다고 말해봐/알아 너 역시 서툰 나에게/조급히 다가서기엔/내마음이 다칠까봐/조심스러워 하는걸/있잖아나 언제까지 너에게/단 하나의 그녀가 되고 싶어/그러니 이제 내맘 가져가

*후렴반복
Call me call me call call give a call/기다렸던 나의 사랑 니꺼야 이젠 언제까지/네 작은 마음속에 나를 맡길꺼야(나를 맡길꺼야)/널 사랑해 이대로 영원히

그렇다. 일견 다르다. 우선 '스토리'가 있다. 이 노래를 보면 우리는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텔미처럼 2인칭 대화체이고 핑클(나)-관객(너)라는 구조를 갖지만, 우리는 '나'에 대해서 그리고 '너'에 대해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우선 '남자친구'이고, '치마'를 처음 입었던 데이트에 대해서도 상상해 볼 수 있고 낭만적인 영화도 같이 보았을 것이다. 이 '나'도 꽤나 어리다는 것, 그럼에도 '모든 걸' 주겠다는 약속도 할만큼 당차기도 하다는 걸,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Tell me의 직접 선배는 Call me라는 후렴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래도 여기에는 '스토리'가 있었다. 연극으로 치자면 전사(前事/前史)가 있는 것이다. 공연 중의 스토리는 공연 전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일어난다. 그런데 한정된 공연 시간 안에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없기에 '전사'를 암시하는 테크닉이 필요한 것이다.

사실, 현대 대중가요는 '시'보다 '연극'에 가까운 면이 많다. 한 무리의 가객들이 율동을 하면서 제한된 시간에 서사와 감정고백을 한다. 이 '내 남자친구에게'에서 우리는 우리 앞에서 춤추는 가객들의 로맨스를 짐작해볼 수 있고, 어떤 남정네랑 어떤 소녀가 두근두근 썸띵이 있겠는지를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원더걸스의 텔미는 거두절미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녀가 그래서 '몬들 주겠어' 약속을 했는지, 그와 '영화'는 봤는지, 그가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남자'인지, 나는 '그를 만나기 100미터 전'부터 설레이는지 등. 단지 '현재'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냥 예전에도 설렜는데, 지금 좋아한다고 하니, 열라 좋다 이거다. 순수한 현재 심정에 집중. 전사가 없기에, 완전히 현재 현현하는 그들은 직접 우리에게 말을 건다.

다시 말해, 이러한 특징은 오히려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명료함으로 나타난다. 핑클의 '내 남자친구에게'는 관객-핑클의 구도이지만, 관객(내 남자친구)-(가사속 나)핑클로, 남자친구라는 내포관객의 이미지와 가사 속 나라는 내포가객이 있다. 즉, 노랫말 속에 상정하고 있는 화자의 모습과 청자의 모습이 일정 정보량이상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텔미는 그렇지않다. 최소한 정보량을 가사 속에 넣음으로서 원더걸스(=가사 속 나)-관객(=가사 속 너)의 연결이 가능하다.

또 이러한 최소한의 정보량은 공연시 춤과 표정에 관객으로 하여금 더 집중하게 한다. 솔직히 노랫말은 '너도 나 좋아한다고? 진짜 와 열라 좋다. 계속 말해봐(환호해!)'로 요약된다. 그들의 매력은 깜찍하고 섹시한 춤, 가사마다 부합되는 그들의 표정, 댄스타임의 매번 바뀌는 맴버의 댄스로 집중된다. 대중가요는 시보다는 'show'라는 것을 원더걸스는 극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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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어머'같은 가사에 저런 표정을 한다. 이거야말로 백마디 가사보다 더 뭍 남정네들의 맘을 흔든다. 복잡한 가사가 아니라 단순명료(무식?)가사이기에 이런 표정이 잘 부합된다.)

요즘 원더걸스의 가창력이 문제시되고 있지만, 뭔 소리인가. 원더걸스에게 노래는, 춤을 추고 귀여운 표정을 보여주기 위한 매개일 뿐이다. 가창력이 문제되는 것은, 노래말의 전달력 표현력, 그리고 노래 자체의 미 때문일 터인데, 원더걸스의 노래 자체는 이를 목표로 하고 있지 않다. 내가 지금 씨니컬한 거냐고? 오 노! 원더걸스는 원더플이다. 다만, 모든 한국 대중가수가 원더걸스처럼 된다면 짱나겠지만, 이제 트랜드다. 앞으로 보라, 이제 가사는 최소의 정보량만을, 표정, 안무, 외모에 스포트라잇을! JYP는 대중가요가 show임을, 그리고 이를 위한 노래를 만들 줄 안다. 사실 박진영의 노래들은 동시간대 노래들에 비해서 이러한 '현재성'이 강했다. 그의 히트곡들은 대부분 서사가 없고, 현재 자신의 심정만을 간단 명료히 반복하는 경향이 강하다. '날 떠나지마', '엘레베이터 안에서'같은 댄스곡은 물론이고 '너의 뒤에서' '10년이 지나도'같은 애절한 '발라드'도 사실은 '발라드'가 아니다. (발라드의 어원에 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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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예를 들어 텔미 때는 저렇게 귀에 손을 댄다. 뭐야 이거! 사실 텔미는 머리-어깨-무릎-발 식의 노래다. 어머는 놀란 표정, 텔미는 귀에 손대고. 수화-노래식. 여튼 이런 것이 텔미의 공연성을 뒷받침하고 그의 전제는 간단명료한 가사와 노래구조에 있다. 이는 'show'세대의 노래가사의 진화(?)와 박진영스러움의 조화를 보여준다. 소희양의 저 깜찍한 표정을 보라 ㅋㅋ)

결국 이 글에서는 텔미와 '내 남자친구에게'의 간략한 비교를 통해서 텔미만의 특징을 부각해보았다. 간단명료 그리고 show를 위한 현재강조. 다음에는 효리누님의 '5minutes'나 요즘 심히 괴로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아이비양의 '유혹의 소나타'등과의 비교도 기대하시랍! 2007년도 빅히트 여자가수들 노래의 계보에는 묘한 공통점이 발견되는데, 이는 개념화를 시킨다면 '당당한 꼬시기 주체/꼬심당한 객체의 즐거움'등 여튼 '꼬셔/꼬심'이고, 2인칭의 활용을 통해 대화식 구조 등의 공통성이 있는데, 이런 노래들의 문화/사회/정치경제학적 배경을 뒤벼볼지는 모르겠다만, 우짜됬든 이 공통점을 살펴보겠다.

또 그 다음 글에서는 서태지의 '너에게', '전람회'의 '취중진담', 유희열의 '좋은 사람'과 같은 노래와 비교해서 원더걸스 '텔미' 노래의 파격성을 더 고찰해볼 것이다. 이는 백석-임화로 연결되는 전통 '발라드'의 계보와 일인칭 서정시의 계보에 가까운 원더걸스 텔미의 비교로 나아갈지도 모른다. 이는 사실 공연성과 서사성의 대립, 감정토로와 서사적 깊이의 추구라는 두가지 대비되는 길로 지맘대로 단순화시켜 비교하게 될지도 모른다. 뭐, 어찌됬든, 항상 계획은 원대하게, 실행은 소박(?)하게가 나의 모토!

여튼 소희양 넘 귀여워요 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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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후후 2007/11/13 11:41

    앗..긴님 마음을 빼앗기신 건가요? 저는 아무리 봐도 예쁜 구석이 없는 <원더걸스>와 <소녀시대>에 실망을 금치 못하고, <빅뱅>을 들어봐야 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긴님의 가사 분석을 읽어보니, 역시 <원더걸스>는 남성청중을 '타겟'으로 삼은 거군효. 여성청중을 맘놓고 소외시키는 저들.ㅋㅋ (적어도 '<핑클>의 '내 남자친구에게'는 여자들이 그런 마음으로 남자친구를 떠볼 구석이나 남겨놓은 가사를 담고 있었는데, <원더걸스>의 가사는 그런 여지가 전혀 없네요.)

  2. 2007/11/13 21:36

    네 ㅋ 소품종 대량생산에서, 이제 각기 소비자 층 공략의 시대로! ㅋㅋ
    (맥락없나 -.-;) 뭐 한 성별이라도 다 잡으면 된 거죠.
    근데 진짜, 원더걸스 텔미 내용없죠. 내포관객도 완전 남자죠.
    아님 이반 여자분들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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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은 http://cyplaza.cyworld.com/story/bbs/bbs_view.asp?BBSCode=37&ItemNum=15010188에서)

도시의 낯선 곳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혼자였고, 성인이 된 후에 '길을 잃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어디론가 길을 재촉하고 있었고, 이리저리 발이 닿는대로, 걸음을 옮겼다. 네온사인, 기분 좋아보이는 취객들의 비틀거림, 젊은이들의 말소리, 한편에 공사중인 우중충한 철근 콘크리트, 낡은 공중전화박스. 도시의 낯선 곳에서 길을 잃고, 그 도시의 밤풍경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어지러웠다. 하늘에 걸린 달이 유독 커보였다. 비틀대며 걸었다. 도시의 낯선 면모들, 수많은 형형색색의 가면들. 황홀했다. 길을 다시 찾으려는, 어디론가 가야겠다는 생각을 접고, 도시에 취했다.

나희덕의 아래 시를 읽으며, 다시 밤도시의 낯선 풍경, 그 매혹에 취해본다.


육교 위의 허공    -나희덕

좁고 가파란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빛나는 마천루가 있었지
육지와 육지를 잇는 다리 위로
밤길을 건너는 밤길,
허공을 건너는 허공,
신호등이나 건널목이 없이도
그 길을 따라 다른 세계로 건너갈 수 있었지
지상에서는 잡을 수 없는 두 손이
때로 어두운 허공 위에서 놀란 듯 만났지
새로운 지평선이 펼쳐지고
6차선 도로가 오선지처럼 출렁거리고
두근거리는 도시의 동맥 속으로
차들은 피톨처럼 점점이 빛을 뿌리며 흘러갔지
그러나 경적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어
두 손에 든 허공을 놓아주고 싶지 않아서
다만 숨죽이고 있었으니까, 심해의 물고기처럼,
시냇가의 반딧불이처럼, 거기가
도심의 누추한 육교라는 것도 잊은 채
좁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와야 하는 것도 잊은 채
하염없이 공중그네를 타고 있었지
육지와 육지를 잇는 다리 위로
밤길을 건너는 밤길,
허공을 건너는 허공,
지상에서는 잡을 수 없는 두 손이
어두운 허공 위에 또하나의 길을 내고 있었지



서울에는 야경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값비싼 식당(아니 '레스토랑')이 몇군데 존재한다. 와인이나 샴페인을 기울이며, 높다란 '스카이라운지'에서 야경을 즐길수도 있겠다. 유리로 가로막혀 밤의 찬공기와는 무관하게 적정하게 관리된 온도와 습기에 둘러쌓여서, 풍경을 타자화하는 높이와 편안한 의자와 부드러운 음악과 함께. 어두운 야경에 유리창은 밝은 레스토랑 안을 반쯤은 투과하고, 반쯤은 밖이 보일터이다.

철저히 격리되어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적당한 거리로 인해 낭만적이지만, 때문에 그렇게 매력적이거나 어지럽고 환상적이지는 않다. 나희덕은 육교 위에서 바라본다. 높이, 소음, 추위... 모두 야경 속에 있으면서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풍경과 단절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바라볼 수 있는 자리. 그 곳에서 시인은 취한다.

'신호등이나 건널목'없이도 '다른 세계'로 가게 하는 다리. '밤길을 건너는 밤길/허공을 건너는 허공'
그 곳에서의 '새로운 지평성', 그 아래로 지나는 '6차선 도로'는 '오선지'처럼 출렁이고, 나를 향해 다가오다가 멀어지는 차들은 '피톨처럼 빛을 뿌리고' '두근거리는 도시의 동맥'으로 사라진다.
시인은 심해의 물고기, 시냇가의 반딧불이 되어 '공중그네'를 타는 기분으로 육교 위에 서 있다. 도시에 취해, 시인도 빛을 내며.

밤이란 검다. 검기 때문에 작은 빛들이 환하다. 밤에 도시는 심해의 물고기떼, 시냇가의 반딧불 무리들로 살아난다. 차들은 빛을 내며 사라진다. 공중그네를 타는 것 같다. 어지럽다. 기분 좋은 나른한 어지러움. 취한다.

육교. 밤길을 건너는 밤길, 허공을 건너는 허공, 마주 잡은 두 손, 허공 위의 길, 여기서 밤에, 도시에, 밤 도시에, 낯선 밤 도시에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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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izabeth Kay, The Divide, Chicken House, 2003.

이 작품이 시장에서 당장 반응을 얻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의 상정 독자인 초등학교 고학년~중학생 남성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한국 판타지 시장의 시장 잠재성은 높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이 시장 독자들을 형성시키는 기획의 일환으로는 번역 소개하는 것이 의미있는 작품으로 판단된다.

주지하듯이, 한국 판타지 시장은 무협 시장과 겹쳐진 영역, 일본 게임 애니메이션 시장과 겹쳐진 영역, 그리고 서양 고전 판타지 영역으로 나뉜다.(김남훈, 「드래곤과 마법사, 한국」, <<판타스틱>> 2호, 2007. 6.) 무협지와 같이 강한 주인공의 성장담은 전형적인 영웅서사의 형태를 따르는 판타지를 도출했고, 일본 게임 애니메이션 시장과 겹쳐진 영역은 로도스 전기 류의 애니메이션 식 마법들과 주인공 파티의 대결 구도를 따르는 분야를 낳았다. 그리고 서양 고전 판타지는 최근에서야 비로소 3대 판타지 소설인 <반지의 제왕>, <어스시의 마법사>, <나니아 연대기>가 번역되어 나왔고 대중적 반응도 <반지의 제왕>을 제외한다면 그 명성에 비해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물론 <반지의 제왕>의 인기는 영화의 인기에 힘입은바 크다.

이러한 시장 상황은 서구 판타지 번역물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이다. 특히 이처럼 현지에서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생을 대상독자로 한 작품은, 보통 몸이 약하고 공부(과학이나 역사학)을 좋아하는 남학생을 주인공으로 한 성장담이라는 공통된 특질을 갖고 있다. 이는 작가나 제작자가 상정하고 있는 판타지 독자의 이미지 상이기도 하다. 본래 서구 판타지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모험심과 탐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한국의 판타지는 고전 영웅소설담이라는 기원을 갖는다. 이 둘을 이미지화해본다면 콜럼버스 대 홍길동이라는 구도로 표현할 수 있다. 이는 근대 이후 동서양 역사 전개과정에서 비롯된 대중들의 욕망의 차이에서 비롯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서구 판타지가 신대륙을 찾아서 모험을 떠나고 그 ‘미지의 개척지’를 전유하려는 제국주의적 욕망을 표상한다면, 동양 판타지는 지배 계급을 전복하려는 민중의 열망을 자신들을 대변해주는 영웅에 투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동서의 기존 장르적 문법은, 현대 장르소설의 문법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현대 서구 판타지가 한국에서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이 책은 서구 판타지의 이러한 문법을 충실하게 구현하고 있다. 주인공 Felix은 중학생 정도로 심장병을 앓아서 몸이 허약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소년이다. 항상 병원을 들락거리고 입원도 자주하기에 친구는 없지만, 머리가 좋고 과학책 읽기를 좋아하는 소년이다. 과학을 좋아하는 그를 코스타리카라는 천연 밀림이 잘 보존된 중남미 국가에 부모가 데리고 간다. 코스타리카는 지구에서 유일하게 대서양과 태평양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장소가 있는 나라이다. 그래서 제목이 ‘DIVIDE'(분리)이다. 여기는 코스타리카의 산으로, 동쪽으로 물이 떨어지면 대서양으로가고 서쪽으로 물이 흐르면 태평양으로 흐르게 되는 지점이다. Felix은 이 ’divide'에서 순간 기절을 하고 일어나보니 환타지 세계였던 것이다. 이 환타지 세계에서 Betony라는 엘프 소녀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함께 모험을 겪고 이 세계의 마법을 이용해서 건강해 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스토리이다.

이 세계는 과학이 지배하는 현실세계와 거울쌍을 이룬다. 현실세계에 인간들이 산다면 환상세계에는 엘프들이 살고, 인간은 과학을 사용한다면 엘프들은 마법을 사용한다는 식이다. 그리고 각자의 세계에는 서로의 세계에 대한 신화나 전설들이 있어서 환상세계에서는 인간이나 과학 같은 것이 신비스러운 존재로 그려진다. 이러한 설정은 한편으로는 손쉬운 설정이지만, 주인공들로 하여금 두 공간을 쉽게 오갈 수 있게 하며, 또 현실 세계에 대한 알레고리적 비판이나 교훈을 독자에게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장치로서도 기능한다. 예를들어 그리폰 남성은 수학자 여성은 역사가로 그려져, 이 그리폰 동료들의 도움으로 역사적 문헌 속에서 심장병 치료 마법을 찾고, 수학적으로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차원 공식을 계산하는 것을 통해서 지식, 공부의 중요성을 아이들에게 일깨워준다. Felix또한 병이 낳고 나서는 과학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또 전체적으로 환타지 세계가 역사적으로 수렵기에서 농업혁명이 일어나는 신석기 시대와 중세가 혼합된 체계로 그리고 있고, 그 와중에 인체실험을 거치지 않은 약품을 판매하는 요정을 악당으로 그림으로써, 암시적으로 유전자 조작 약품 등의 위험성 등을 경고한다.

이렇게 현실세계를 너무 쉽게 떠올리게 하는 장치는, 성인 독자에게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반감시킨다. 작가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면서 고려했을 요소들에 대한 흥미나,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알아나가면서 느끼게 되는 지적 호기심은 거의 전무하다시피하다. 그저 현실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환상세계’라는 장치를 통해 서술하는 우화적인 거울세계라는 느낌이 더 많이 드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성인 독자나 본격 환상문학 독자들의 흥미를 끌만한 요소는 그다지 많지 않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청소년에게 환상 문학이라는 장르를 소개한다는 점에서의 장점들을 갖고 있고, 현대적 메시지도 강하지 않게 서사적으로 잘 구조화되어 있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한국 청소년 환상 문학 시장을 구축하려는 기획의 일환으로는 괜찮은 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궁극적으로 한국 문학시장을 다양하고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청소년 장르문학 시장을 키우고, 이들에게 장르문학의 즐거움, 책읽기의 ‘즐거움’ 자체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면, 이러한 책들이 장기적 기획의 일환으로 소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청소년 장르문학은, 한편으로는 청소년(특히 소년)이 성인 대중문학으로 나아가는 매개가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장르문학과 본격문학의 매개역할을 한다. 현재 본격문학 독자의 대부분이 여성인 이유는, 소녀시절 장르문학과 본격문학을 매개해주는 하이틴 로맨스 문학의 영향력도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장르문학이 단기적으로 시장에서 큰 반향을 끌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해리포터의 전세계적 성공 이후, 한국 출판계에서 청소년 장르문학을 기획해보려는 시도가 많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되지만, 해리포터의 예외적이고 일시적인 인기와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물론 해리포터의 열풍 이후에 독자들이 장르문학의 문법에 덜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장점은 분명하기에, 지금이 청소년 장르문학 시장에 장기적인 기획으로 뛰어들기에 적합한 시점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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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머리들처럼    -나희덕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을 보며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입 끝을 집어올린다.
자, 웃어야지, 살이 굳어버리기 전에.

새벽 자갈치시장, 돼지머리들을
찜통에서 꺼내 진열대 위에 앉힌 주인은
부지런히 손을 놀려 웃는 표정을 만들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웃어야지, 김이 가시기 전에.

몸에서 잘린 줄도 모르고
목구멍으로 피가 하염없이 흘러간 줄도 모르고
아침 햇살에 활짝 웃던 돼지머리들.

그렇게 탐스럽게 웃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적당히 벌어진 입과 콧구멍 속에
만 원짜리 지폐를 쑤셔 넣지 않았으리라.

하루에도 몇 번씩 진열대 위에 얹혀 있다는 생각,
자, 웃어, 웃어봐, 웃는 척이라도 해봐,
시들어가는 입술을 손가락으로 잡아당긴다.

아--- 에--- 이--- 오--- 우---
그러나 얼굴을 괄약근처럼 쥐었다 폈다
숨죽여 불러보아도 흘러내린 피가 돌아오지 않는다.

출근길 백미러 속에서 발견한
누군가의 머리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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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질의 시들을 꾸준하게 쓰고 있는 나희덕. 2008 소월시문학상 작품집에서.
참 좋은 시다라는 감탄보다는, 처연하게 지쳐가는 나희덕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그녀의 시력도 이제 근20년이 되어간다. 그녀가 90년대 초중반 썼던 시들을 기억한다.
세상에 지친, 외로운, 쓸쓸한 이들을 처연하게 바라보다가도 따스하게 감싸던 시선.
어쩌면 그 시선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지침, 외로움, 쓸쓸함을 외부 존재에게 전가시키고 오히려 자신은 편한 마음을 유지했을지도 모른다.

기실, 그녀도 지치고, 외롭고, 쓸쓸하다. 예전 그녀는 지치고 외롭고 쓸쓸한 외적 존재로 인하여, 그들을 그리면서 그 지침, 외로움, 쓸쓸함을 견디고 이겨냈다고 한다면, 이제 그것도 포기한다. 실상 지치고 외롭고 쓸쓸한 것은 자신이었음을. 출근길 백미러 속에서 발견한, 40대 시인...

그녀의 93년 창비 여름에 실린 시를 다시 본다.

못 위의 잠     -나희덕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 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 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그 마음'을 '알 것도' 같던 20대 후반의 시인, 자신의 마음을 사물과 함께 공감하는 40대 초반의 시인. 시인이 건너온 삶들과 함께, 흐르는 시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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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2007/09/21 20:30

    아아... 사진 올려주신 분 감사드립니다.. :)

    그나저나, 사진의 그 즉물성에 압도되네요.. 가슴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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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뜬금없지만, 나름 기다려왔던 '본 얼티메이텀'을 기다리며 3년 전 영화를 보고 썼던 글을 되돌아본다. 캬. 영화 시리즈를 기다린 것은 처음인 듯! 결말이 정말 궁금하다. 본 얼티메이텀을 보기 전에, 기억을 되살릴 겸 해서 올려본다. 최근에 본 '미드' DEXTER를 보고 문득 생각이 나기도 했고 ^^


새로운 슈퍼맨의 등장이다. 이 영화는 자아 정체성에 대한 고독한 물음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본'은 홀로 다친 몸을 이끌고 걸어가며 카메라는 거대한 아파트를 비춘다. 인간소외, 군중, 익명성, 고독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이 말은 단지 직장을 가지고 가족 안에 존재해야 하는 경제적, 성적 필요성을 지칭하는 것을 넘어서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자아는 관계를 통해, 타자를 통해서 자기를 확인 받고 구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사회적' '존재'인 것이다.

주인공 '본'은 사고로 인해 기억을 상실했고 혼자이다. 많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기억상실증'환자를 다루었지만, 그들은 항상 그들의 기억을 채워넣으려는 주위 사람들로 둘러쌓여있다. (예외적으로 '메멘토'라는 영화의 단기기억상실증은 과거의 자기 자신이 늘 자신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본은 완전한 의미에서의 혼자이다. 기억이라는 자아 정체성을 구성하는 인자는 물론, 이를 구성하게끔 하는 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고 직장 상사, 부하 마저도 없다. 그는 군중 속을 걸어가지만 그 곳은 무인도이다. 그에게는 '그' 마저도 없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물을 수 밖에 없다. 'who was I?' 현재의 관계를 통해서 확인 받지 못한다면 과거의 기억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받아야만 한다. 아니면 '나'라는 것은 없다.

언제나 슈퍼 히로들은 고독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실제로 자기 자신인 슈퍼 히로적 정체성을 숨기고 현실 생활에 살아갔기 때문이다. 그들을 '알아주는'이가 없고, 그들의 삶은 분열되어 있다. 그러기에 외로울 수 밖에 없다. 슈퍼맨의 붉은 빤스와 파란색 타이즈, 베트맨의 가면 등은 그 코스튬으로 가려야만 하는 그들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아니, 그들의 '일상'생활이 바로 그들의 코스튬이고, 그들의 가면이다. 클락 켄트의 안경이나 웨인의 턱시도는 '참' 모습을 가린다. 그럼에도 그들은 슈퍼 히로일 때의 삶에서의 위안과, 일상 생활에서의 즐거움(오 그 미녀들! 007 본드걸만 욕하지 마라... 기실 모든 슈퍼히로의 원형은 이런 '스파이' 또는 '비밀 요원'일지 모른다. 본도 또한 '비밀요원'이다.)을 동시에 누리기도 했다. 그리고 항상 그 슈퍼히로들의 '본드걸'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알아간다는 사실 또한 떠올려보자.

이렇게 '행복한' 슈퍼히로에 비해, 우리의 '본'은 그렇지 않다. 그의 '여인'조차 1탄의 중반 이후에 등장해서 2탄의 초반에 죽어버리고 만다. 일상 생활이 없고, 관계도 없다, 또 기억도 없다. 그는 끊임없이 '나는 누구였는가?'를 묻는다. 그는 '과거'를 바탕으로 자신을 재구할 수 밖에 없다. 유일하게 그를 타인과 구별해주는 것은 '살인기술' 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는 과거에 킬러였다, 그리고 킬러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

2편은 그의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과 그 여인이 죽는 것으로 이 영화는 시작한다. 이 여인과 그녀와의 관계가 '본'의 핵심이다. 비록 그녀가 기억상실 이후 본이 짧게 만난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만이 '본'과 관계를 맺는 사람이다. 영화의 가장 마지막에 CIA 관찰관이 그의 과거를 말해주려고 할때, 본이 거부 하는 것은 상징적이다. 그는 이제 'who I was'를 묻지 않는다. 본은 분명 킬러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여인과의 관계를 통해 이를 극복한다. 그녀는 죽기 직전 본에게 그가 킬러'였음'과 상관없이 그는 지금 '그'임일 수 있음을 말한다. 그 당시 본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는 간절히 본을 바라보고 있다. 여기에 대답이 있다. 본은 이제 그녀가 사랑하는,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나'로서 위치를 규정할 수 있고 여기서부터 출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 그녀의 간절한 눈빛은 한발의 총성과 함께 흐려진다.

'적'들에게 '본'은 아직도 킬러이다. 이제 '그녀'의 사랑으로 위치시킬 수 있는 그녀가 사라진 이상, '본'이 가장 쉽게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방법은 적들의 호명 -킬러로서의 본-에 응답하는 길이다. 그러나 '본'은 CIA관찰관이 자신의 과거를 말해주는 것을 듣기 거부한채, 다시 자신이 누구인지를 물으러 나선다.

그러면 이제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 선택의 폭은 적다. 그가 그임이 그녀와의 관계와 그 추억에 의해서 확인되었지만, 그 기억은 점점 옅어질 것이다. 본은 타인과의 관계를 가져야만 한다. 그 관계 속에 '내'가 있다. 그러나 그 관계는 자신의 기억을 부정한채, '일반인'으로의 위장 잠입의 형태로 될 것인가. 이는 기존의 슈퍼 히로의 이중현실과 마찬가지의 패턴이 될 것이다. 그들은 두 현재를 살지만, 본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단절로.

아니면, 다시 본은 어떠한 경로로든 자신의 '적성'과 '과거'를 살려 킬러가 될 것인가. 그러나 이는 애써 정립했던 그녀의 애인으로서의 '나'를 부정하는 것이고 그녀와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떨쳐내는 일이 될 것이다.

어떤 것이든 쉽지 않은 행로이다. 이제 그 대답을 하게 될, 3편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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