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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운대> 단상

2009/08/04 09:37 | Posted by <소문>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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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갈 때마다 해운대에 간다. 그전에는 꼭 그러지는 않았었다.

작년 여름이었던가? 해운대에서 아침을 맞고, 하루 종일 해운대시장, 53사단 본부 입구, 장산공원, 미포 등지를 돌아다니고 새삼 '해운대의 힘'을 깨달았다. 

(92년 가을부터 94년 봄까지 매일 해운대에 '출근' 했었다. 그때는 바다 색깔이 매일, 왜, 달라지는지를 배웠었다. 그럼에도 여름엔 해운대를 피했다. 복잡하니까.)

 

11일만에 400만을 돌파했다 한다. 관객들 중에 50-60대가 많아서 흥행성 높은 영화라는 점을 실감하면서 영화를 봤다. ‘부산성’이라는 지역성을 전면에 내세운 <친구>나, ‘자연’과 한국의 '문화-정치'의 모순을 다룬 <괴물> 같은 흥행작과 비교해볼 요소가 많다고 생각된다.
통상의 ‘재난 영화’라 볼 수 없고, 뭔가 한국적인 ‘재난 영화’ 문법을 구축한 것인데, 곱게 봐주기 어려운 점도 많았다.


* 정밀하지 못한 상상력 :
진짜 쓰나미가 부산에 닥친다면? ‘재난 영화’는 어때야 되는 건가? 뭔가 과학적이어야 하지 않은가? 빈 데가 너무 많지 않은가?

* 수준 이하의 드라마 :
감독의 인간관이 의심스럽다. 1시간 가량 진행되는 서론을 보다가 지친다. 그 서론은 대부분 허접하다.  


* 썰렁한 코미디 :
악다구니와 슬랩스틱을 포함한 수준 이하의 코미디, 그러나 웃어주는 50ㆍ60대 관객


* 발전한 D-CG : 물에 잠긴 미포. 감전사하는 사람들. 재밌다.
바닷물에 깨지는 고층빌딩들. 공중 부감신으로 빅스케일의 해안을 잡아준다.

 

* 해운대 :
미포에서 수영만까지. 그리고 고층 빌딩들. 해운대의 폭이 나름 잘 포착된 듯하다.
해운대는 그 물리적 공간 외에도 경관적 의미가 2000년대에 들어 엄청나게 확장됐다.
노무현 정권과 부산의 신자유주의자들이, 이 유서 깊은 장소를 이전과 다른 '명소'로 주조해냈던 것이다.

신시가지가 생겼고, APEC이 열렸으며, PIFF가 자리를 잡았으며, 광안대교와 고층빌딩이 늘어섰다. 더 많은 사람이 여기를 찾는다. 그 장소는 문화정치에 관한 사유와 영화화의 대상으로서 충분히 값어치 있다. (cf. 그런데 고래불해수욕장 사장도 해운대만큼 크다.)

* <괴물>, 그리고 그 한강과 비교하면? :
아마 <괴물>의 발상법(...에 ...가 산다면? ...에 ...가 벌어진다면?)이 이런 영화를 낳았을 것이다. 그러나 <해운대>는 스케일이 더 크다. <괴물> 못지 않은 좋은 상품이라 흥행할 것이다.
그러나 주제의식과 ‘이야기’에서 <괴물>과 비교될 수 없다. 드라마가 약해서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다. 
감독은 뭘 말해보고 싶었을까? 119 대원을 존경하자? 쓰나미 같은 재난에 미리 대비하자? 해운대만 가지말고 경포대나 고래불도 가자? 머리가 빈 것 같다. 

 

* 진짜 그런 규모의 쓰나미가 온다면 :
영도는 어떻게 되나? 신선대와 남항 부두는 어떻게 될까?


* 광안대교 : 오우... 감독은 왜 이 대교를 끊어버리고 싶었을까? 이제 이 다리는 부산의 ‘좋은’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초기에 그것은 분명 흉물이었다.

* 콘테이너 선박 : 이에 대한 묘사도 굿. 콘테이너 선박과 운반 트럭은 분명 부산의 또다른 상징이다. 감독은 부산에 대해 안다.

* 하지원 아비의 사망일 : 동남아 쓰나미 때 죽은 거 아니었나? 그런데 왜 제삿날은 여름인가? 내가 잘못 본 건가?

 

2>

* 이민기 : 완벽한 부산어, 좋은 표정. 이 영화 최대의 수혜자가 아닐까?

* 하지원 : 참 예쁘지만 항상 뭔가 부족하다. 그런데, 원래 목소리 이랬나? 덜 듣기 싫은 여성용 부산 사투리를 구사한다.

* 이화여대생, 아니 삼수생 : 목소리 정말 듣기 싫네. 감독 탓이다.  

* 설경구 : 욕봤다. 주인공인데 특별한 매력이 없다.

* 엄정화ㆍ박중훈 : 왜 이들이어야 했나? 그들의 안 어울리는 역할이 안쓰럽고, 좋은 배우들인데... 내가 괜히 미안해지더라.


* 김인권 : 좋은 연기자다.

* 그외 조연들 : 부산 사투리를 쓸 수 있는 배우들을 대거 동원했다. 송강호나 조재현은 이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 특별히 이대호 : 굿! 영화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야구장 풍경 묘사는 안 그랬지만) 이대호가 부진할 때 부산 사람들이 어떻게 욕하는지도 나름 리얼했다. 감독은 사직고 출신이다. <해운대>는 <친구> <사생결단>처럼 부산에 관한 영화인 것이다.


3>

* 부산 사람에 대한 묘사 : 도무지 ‘애정이 있나?’ 싶었는데... 감독의 이력을 보니... 좋은 시나리오도 가끔 쓰고 했는데... 쯔쯔. 영화의 부산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 모두 ‘직정’ ‘직입’ 그 자체다. 실제로도 그러할까?

 

* 부산에 대한 사유 :
우리는 이를 어디까지, 어떻게 밀고 나가야 되는가? 나갈 수 있는가? 최근에 "부산 독립선언"이라는 책도 나왔다. 복잡하다. 곽경택의 드라마 <친구>를 보니 더 그렇다. <똥개>까지는 좋았는데, 곽씨의 고착은 너무 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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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

2009/05/13 16:46 | Posted by <소문> 편집실

<비상> 100 분 | 개봉 2006.12.14

감독 임유철 

우연히 <비상(飛霜)>과 <레알(Real)>이라는 축구 영화를 잇달아 보았다.

뒤늦게 본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비상>은 최고의 축구 영화이자 스포츠영화였다.

(반면 <레알>은 최악이었다. 언급을 회피하고 싶다. <비상>을 보면 돈으로 선수를 박박 채집하여 긁어모으는 레알마드리드 같은 구단이야말로 ‘지구방위대’는커녕 지구를 망치는 것 중 하나라는 사실을 좀더 선명하게 알게 된다. <비상>의 주인공인 인천Utd.는 흥미롭게도 ‘시민’ 구단이다.)

 

이 다큐 영화는 한편으로는 전형적인 스포츠영화의 서사구조를 따른다.

무명과 소외로부터 마음과 몸을 다 다쳐 이제는 별로 물러설 데가 없는,

‘찌질한’ 선수들(영화에 직접 나오는 표현으로는 ‘쓰레기’)로 이뤄진 팀이

신념에 찬 멋진 감독을 만나 기적 같은 성적을 거두게 된다는.

 

그런데 이는 인천Utd.라는 신생 팀이 05년 K리그에서 해낸 ‘실제’ 사건이다.

 

영화의 마지막 씬.

05년의 챔피언결정전에서 결국 최강팀 울산에게 6-3(홈엔어웨이 합계)으로 패배했을 때,

덩치 큰 ‘선수’들은 마구 눈물을 쏟는다. 서포터스도 눈물을 흘린다.

영화 관객들 중에도 함께 눈물을 흘린 사람들은 많았을 것이다.

전형적인 스토리지만, 절대적인 호소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다큐는 축구라는 남성 문화의 이면에서 일어나는 일,

이를테면 거기에 걸려 있는 존재들의 내면과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축구 영화로서도 상당히 귀하다.(<천리마축구단> 같은 영화도 기념비적인 축구영화지만, 찾아보면 보석 같은 축구영화들이 더 있지 않을까?)

뿐만 아니라 프로스포츠에서 승리와 패배의 의미, 수없이 많은 무명 선수들의 운명, 라커룸에서 일어나는 일, ‘이주노동자’로서의 용병과의 관계 등 현대 프로스포츠에서의 보편적인 문제들에 대한 통찰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인천은 파란을 일으켰던 06년 이후 그렇게 뛰어난 성적을 얻지는 못했다. ‘기적’은 일상이 아니기 때문이겠다. 장외룡 감독은 현재 일본 오미야 아르디쟈의 감독이다. 몬테네그로 국적의 용병 라돈치치는 부상으로 고생하다가 성남 일화로 이적했고, 임중용은 여전히 주장으로서 인천에서 뛰고 있다. 그는 이제 34세의 할아버지급 선수이다.

 

참고)

http://blog.naver.com/bisangsoccer 비상 공식 블로그

 

http://ko.wikipedia.org/wiki/%EC%9D%B8%EC%B2%9C_%EC%9C%A0%EB%82%98%EC%9D%B4%ED%8B%B0%EB%93%9C

 

http://movie.naver.com/movie/mzine/read.nhn?office_id=140&article_id=0000005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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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 메모 : <오스카 와오의 짧고도 놀라운 인생>

2009/05/13 16:37 | Posted by <소문> 편집실

<고래>의 작가가 근래 읽은 작품 중에서 이 소설이 가장 좋다고 했다. 그래서 읽게 됐는데, 과연 <고래>에 필적할 만했고 그 작가가 좋아할만했다. 2007년 미국은 도미니카 역사와 ‘현대의-판타지’를 가득 담은 이 소설에 퓰리처상을 비롯한 거의 모든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여했다. 작품은 한국에서도 목하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모양이다. 이런 문학은 사랑할만하다. 여전히 ‘문학의 힘’ 같은 문구를 떠올리게 한다. 번역소설인데도 소설의 문장들은 그야말로 ‘즐겁게’ 읽힌다.

> 문학적 글로벌리즘 : 오스카의 면모가 가장 결정적으로 드러내듯, 문화적 글로벌리즘 위에 이 소설의 서사가 펼쳐져 있어 놀랍다. 오스카는 중남미 ‘지역’ 고유의 문제(미국과의 투쟁, 인종 문제, 중남미 나라끼리의 독특한 관계)를 담지한 ‘민족’(도미니카)의 인간이면서, 동시에 미국(과 제1세계)의 온갖 현대적 대중문화와 문학(특히 SF를 필두로 한 장르소설!) 및 또한 일본 문화(아니메와 오타쿠 등)가 만들어낸 세계적이며 현대적인 인간이다.

 

도미니카는 (우리에게는 거의 비가시적일만큼) 불가해한 인종적-문화적 특수성을 가진 고유의 실체인 듯하지만, 기실 이미 그 속에서의 삶은 현대와 자본주의, 그리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체제 속에 있다. (아마도 ‘근대’는 그 이전부터 그것을 가능하게 한 힘이었을 것이다. ‘신세계’가 유럽인들에게 발견된 이래. 그것이 세계문학 및 세계대중문화의 최초의 성립 요건이기도 하다.)

오타쿠이며 숫총각인, 장르와 게임 마니아이자 ‘뚱땡이’인 젊은 남자들은 목하 우리 주변에도 적지 않지 않은가? (오히려 가장 다른 것은 원래적인 도미니칸과 한국인들이다.)이런 존재를 통해 글로벌-하이퍼-모더니티는 ‘아래로부터’(?) 구현된다.

 

> 비유와 문체 : ‘언어적-예술적인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신랄하고 유머러스하고, 세계에 대한 통찰을 담은 문장이다. 한국말로도 잘 옮겨진 이 문장은 우리가 말하는 좋은 의미의 ‘구라빨’(세계와 ‘시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권력에 대한 지극히 풍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내 주변에서 이런 식의 문장 구사력을 가진 이는 딱 두 사람인데, <고래>의 작가와 <현대사 인물의 재구성>이라는 책을 쓴 작가이다. 전자는 새 장편소설 출간을 앞두고 분투중이라 하고, 후자는 근자에 생계와 프로야구 때문에 글을 잘 못 쓰고 있다.

  (그외 :
* 문체/비유의 글로벌리즘 : ‘백만 년만에 만난’ 등의.

* 오늘날 한국소설의 문체 : <완득이> 식 문체가 한동안 유행할 듯. 이 문장체는 과연 미덕이 있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갈까?)  


 

  > 모든 위대하고 중요한 문학이 그러하듯, ‘역사’로부터 <오스카>의 서사는 왔다. 다시 말하면, 시간(역사)에 관한 사유가 이 소설의 스케일이다. <고래>도 <백년 동안의 고독> 등도 그랬듯, 역사에 관한 가장 독특한 방식의 해석과 전유가 소설의 특징이다. 이 소설에 있어 그것은 중남미사+도미니카사이다. 그것은 한편에는 중남미식 군사독재(소설의 허두에 ‘푸쿠’라 칭해지는)와 CIA의 음모,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쿠바혁명과 체게바라와 고난에 찬 민중의 삶이 대칭을 이뤄온 그 역사이다. 또한 그것은 ‘미국으로의-디아스포라’사(史)이다.


‘미국으로의’ 디아스포라는 19세기 이래, 미국을 꼭지점으로 한 세계적 모순과 그에 입각한 문화적-상상력의 원천 그 자체이다. 이탈리아계는 <대부> 시리즈와 마피아를, 유태인과 아일랜드계는 미국의 지배력 자체(의 일부)를, 중국계는 미국의 아시아 표상과 차이나타운으로 요약되는 온갖 것을, 일본계는 재패니메이션과 자동차를... 아마도 이 소설은 지금 당장의 미국에게 중요했으리라. 다양한 라티노들이 미국의 ‘하부’를 잠식하게 됐으니까.


글로벌-하이퍼-모더니티는 물론 ‘미국’을 무대로 하여 ‘영어’로 씌어진 것에 의해 펼쳐짐으로써 완수된다.(<고래>가 <오스카 와오>보다 못할 게 뭐가 있나? 하기는 <고래>도 작년 프랑스어로 번역되기도 했지만.) 이는 또다른 ‘제3세계’ 소재의 작품인 <슬럼 독 밀리어네어>의 경우와 비교할만하다. 인도의 뭄바이 빈민가를 배경으로 하고 영국 감독이 만든(영어와 인도어가 반씩 나오는) 이 작품의 젊은 주인공은 또 다른 오스카이다. ‘퀴즈쇼’의 패자(覇者)가 되는 그는, 제3세계 가운데에서도 가장 밑바닥에서 자라난, 비참한 ‘운명’(카스트의 질서나 ‘세계사적’ ‘빈곤’이 한 명의 개인에게 부여하는 운명)의 담지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의 ‘현업’은 휴대폰 회사 텔레마케터이다. 그는 텔레마케팅용 컴으로 형과 연인의 전화번호를 검색해 찾아낸다.

이 작품도 ‘아카데미’를 비롯해서 영화상을 다 휩쓸었다. 오바마 전후(前後)의 미국, 또는 ‘부시 이후’의 미국의 문화담당자들은 제3세계와 ‘유색인’들에 대해 뭔가 굉장히 미안해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우리(?) 제3세계인들은 이 기회를 잘 활용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 미국에서 성공한 도미니칸의 상징일 A.로드.
야구는 이번 WBC에서 잘 나타난것처럼
미국을 중심(정점)으로 한
환태평양+카리비안 대중문화의
중대한 매개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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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 할배(사람) : 워낭소리

2009/05/07 01:49 | Posted by <소문> 편집실

할배와 소의 모습과 그 (일치된) 삶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런 소재를 굳이 찾아냈다는 것도 훌륭한 ‘기획’임에 틀림없었다.

(감독은 사전에 각지의 농협을 돌며 '죽어가는 소'를 수소문했단다.)

그러나, 어떤 소녀ㆍ청년이 영화의 결말부에서 ‘펑펑’ 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전혀 내 경우는 아니었다.

물론 죽은 소가 포크레인이 판 구덩이에서 포크레인이 뿌리는 흙으로,

그의 몸과 똑같은 색깔의 흙과 하나가 되는 장면은 훌륭했다.


또한 이 다큐에는 '노화'와 죽음에 관한 하나의 진지한 관찰과 묘사가 있다.

그것은 특별하게도 소의 죽음이다. 소는 대상이며 동물이며 주체이다.

그러나 소라서 돼지나 개, 쥐와 조금 다르다.

소는 확연히 ‘얼굴’을 가진 동물이다. (돼지, 개, 쥐들도 '때로' 얼굴을 갖고 있다.)
주로 눈 때문에 그렇다.

소의 죽음을 길게 묘사했다. 소는 천천히 죽는다.

이 천천히-죽음에 관한 기록을 우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 죽는 소의 얼굴도 ‘임종’하는 인간의 얼굴과 비슷한 데가 많았다. 
(그런데 이 소는 왠지 이름이 없다. 할배가 이름을 붙여주지 않은 것? 또는 영화가 빠뜨린 것?)

 

그러나 만약 영화가 '할배의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면 어땠을까?

영화는 극장에서 개봉되거나 ‘히트’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이유들 때문에, 감동은 방해받았고, 중간에 약간 졸았다.

 

0) 인간의 소-됨은 존경스러운 것이었으나,

소의 소-됨은 눈으로 보기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이는 나의 위선일 수 있겠으나,  소의 소-됨에 대해서

할배는 과연 인간다운 '잔인함'과 '컴패션'을 동시에 발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할배는 자신의 '소-됨'은 온전히 인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것이었다.

  

1) 갈등구조가 단순하다. 할매의 푸념과 비판은 그런 점에서 양가적이다.

할매는 ‘현실’을 일깨우며 문제의 모든 측면을 잘 제시한다.

할배의 삶에 대한 동일시를 차단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갈등을 단순화시킨다.

(할매의 마음 전체가 '농민의 마음'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삼자의 관계를 ‘삼각관계’라 표현했다.)


2) 영화는 예정된 결론으로 서사를 몰아가고 있었다.

감동과 해석을 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었다.

삽입된 컷들은 좀 '아름다워서' 수가 ‘얕은’ 것들이기도 했다.

'이 영화를 소들에게 바친다'는 마지막 자막은 가장 어색한 것이 아닐까?

'소는 인간이 아니다'(소는 죽어서야 업에서 벗어난다... 등)는 복잡한 진실을 이 자막은 왜곡한다.


3) 뒤늦게, 스토리를 알고 봤다. 스토리는 단순하고 러닝타임은 짧다.


4) 몇몇 평들이 영화를 보는 과정에 떠올랐다.

특히 관객이 무엇을 영화를 통해 보았을까, 하는 문제와 관련된.

강기갑의 말(‘영화가 농민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다’ - 진짜루?)도 떠오른다... zzz. 

도시민들이 저 영화를 통해 무엇을 소비했는가, 하는 논평이 상기되고 

농업과 흙이란 과연 우리에게 오늘날 무엇인가...... 하는 잘 모르는 질문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졸았다. zzz...

5) 자꾸 경북 봉화 사투리(맞나?)의 어미가 귀에 들리고, 자막이 보인다.

할매는 그 동네에서만 쓰는 ‘-니껴’를 완연히 많이 쓰고

할배는 표준말의 어미와 동일한 ‘-요’도 많이 쓴다.

헌데 이 영화의 자막은 발음대로 인물의 대사를 옮기지 않은,

이상한 직역인 경우가 많았다.
서울사람들을 위해서? (만약 '실제'라면, 저 경상도 할배의 말을 그들은 몇%나 직해할까?)

자막이 없었다면 나도 대사를 많이 놓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 번역 자막에는 '폭력'적인 경우도 있었다.

 

6) 이O박이도 봤단다.

왜 쥐는 사람의 양식을 쏠아대는 자기의 일에 몰두하지 않고

소와 사람에 관한 스토리에 관심을 갖나? 그것은 토론거리임에 분명하다.

쥐가 '그 할배는 어떻게 됐나?' 따위를 묻지 않고

'관객이 얼마나 들었나? 제작비가 얼마나 들었나?'

를 물은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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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

2009/04/11 09:19 | Posted by <소문> 편집실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는 <카탈루니아 찬가> <인간의 조건> 같은 20세기의 위대한 소설을 연상하게 한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 인간해방을 위해 길을 떠났던 20세기의 수많은 젊은 휴머니스트들은, 불가해한 위력 때문에 영혼과 목숨을 모두 희생당했다.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까? 그리고 그 희생의 값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김연수는 20세기 ‘인간의 조건’과 ‘혁명’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또한 ‘성공작’인가에 무관하게 민생단 사건과 간도공산당을 다루었다는 점 자체도 작품을 고평하게 만들 요인이다. 오늘날 한국문단에서 누가 그런 문제를 쓸까.
http://blog.daum.net/hongmeilove/13207302

아마 이 작품에 나오는 이야기는 <주권과 순수성> 같은 작품이 제대로 된 입지를 갖고 있는가를 검증할 자료가 될 것이다. 만주는 분명 한편으로는 ‘민중의 만주’이자 ‘소수민족의 만주’로 다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민생단 사건은 어떤 서사로써 다뤄져야 하는가? ‘난생 처음 사랑에 빠졌다 혁명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순진한 청년’의 이야기는 적당한 장치였는가? 문장은 왜 이렇게 모호하고 거친 데가 많나? (김훈의 악영향마저 뵈는 것 같다.)

소설 속의 ‘나’는 김연수의 다른 소설들과 심지어 <청춘의 문장들>에 나오는 ‘소년’들과 유사하다. 김연수는 다른 ‘젊은’ 작가들에 비할 수 없이 큰 ‘시야’를 지녔고 김O하에 비하면 정말 진지하지만, 그의 ‘순진한 청년’은 1989년 스무 살에서 성장이 딱 멈춰 있다. 민생단 사건을 겪고,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고도 그렇다.

 

그래서 그의 소설 자체 보다 ‘촛불’을 거론한 ‘후기’가 차라리 더 좋았다. '후기'는 어떻게 이 소설이 결국 그렇게 마무리될 수 있었나를 설명하고 있다. ‘후기’의 ‘열망 문제’도 미성숙의 한 지표이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쯤은 그런 ‘미성숙’에 기대어 살고 있다고 인정할 수도 있다. 그리고 소설의 ‘사랑’보다는 실제의 ‘춤’이 훨씬 더 나은 매개인 듯하다. 이 점이 사실 매우 중요하다. 과연 작가는 알까? ‘후기’는 문장도 더 아름답다.(짧으니까)

 

* 소설이 환기해 준 여전히 해결 안 된(될) 문제들;

- 코민테른과 조선공산당.

: 1920-30년대 조선에서의 ‘운동’을 이해하는 것은 거개 여기 달려 있다... 어떤 ‘독자성’과 ‘연대’가 가능했을까? 내가 당시 그 운동의 한 사람이었다면? 좌든 우든, ‘종파’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는 ‘식민지’ ‘약소민족’ 운동의 비애와 무관하지 않고, 그래서 다음의 문제와도 연계된다.

 

- 한홍구가 주장하는 ‘북한 정권의 트라우마’라는 것.

: 한홍구가 북한을 ‘내재적’으로, 그리고 ‘동정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장치가 민생단 사건이다. 한홍구가 미국에서 ‘민생단과... 김일성’으로 박사를 받고 막 귀국하고 난 뒤에 어디서 강연을 했다. 그때 들어 나도 처음 민생단 사건에 대해 알게 됐다. 그의 강연은 깊은 설득력이 있었다.

: 그런데 ‘사건’은 벌써 두 세대 전. 오늘의 북한(의 지도부)은 처음의 ‘트라우마’와 무관한 괴물이다. 그들은 ‘3세’를 ‘지도자’로 옹립할지 모른다. 그러면 북한은 세계사회주의운동사에 더 큰 오점일 것이다.

 

- 종파와 그에 대한 처리 방식

'동지'들끼리의 '잔혹'은 어디에서 비롯됐는가? 그것은 단지 '스탈린주의'의 문제인가? 제국주의라는 거악 탓인가? 또는 (전공투까지 포함한) 동아시아 공산주의 운동의 어떤 특징인가? 좋게 이해할 때 그 '잔혹'은 목숨 걸어 운동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 잔혹의 문화는 여전히 남아 있다 보인다. 진보정당 사이트에 들어가봐도 금방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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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실씨의 자살(2)-'최진실법'

2008/10/07 16:28 | Posted by <소문> 편집실
최진실 씨의 자살과 그에 따른 사회적 파장에 대처하는 여당과 일부 보수 언론의 대응은 한마디로 졸렬하다.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대한민국 국민의 자살률에 대해서는 아무런 실효성 있는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않는) 정부ㆍ여당이 저처럼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최진실 씨의 자살에 따른 사회적 파장을 즐기고 있다. 그 목적은 단 하나다. 인터넷을 통제하여 언로(言路)를 막고 우민정치를 하겠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일부 의원과 보수 언론은 최씨의 자살 원인을 ‘악플’이라 단정하고 있다. 안재환 씨와 결부된 최씨에 대한 소문이 만들어진 곳은 온라인이 아니라, 평소에도 온갖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만드는 증권가라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그들은 그렇게 몰고 가고 있다.

 

자살학에서 가장 어려운 점의 하나는 자살(기도)자의 심리적 동기를 객관적인 사회적 언어로 재구성(프로파일링)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복합적인 인격을 가진 현대의 인간은 단 한 개의 명쾌한 동기나 원인 때문에 자살하지 않는다. 스스로도 모호하고 절망적인 상태에서, 복잡한 이유가 중첩되고 또 그 이유가 반복적으로 자아를 파괴시켜 온 상황에서 자살을 선택한다. 어떤 경우 자살은 충동적으로 선택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도 그 원인은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가진 상식에 비추어 어떤 행위의 동기를 사후적으로만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과학적으로는 급ㆍ만성 우울증과 조울증과 자살행동의 관계에 대한 생화학적ㆍ통계적 상관성이 밝혀져 있을 뿐이다.

 

사회(학)적으로는, 통계적 필요와 ‘예방’을 위한 활동 때문에 자살자의 동기를 분류하고 단순화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타인의 자살(기도)에 대해 조금이라도 구체적이고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쉽게 그 원인과 동기를 단정하는 것은 자살(기도)이라는 실존적 행위에 대한 모욕이며, 자살(기도)자에 대한 예의 있는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관련된 정황을 여러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견지에서 그들은 최진실 씨의 죽음을 모독하고 있다.

 

 물론 타인에 의한 모욕과 자살은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 동서고금에서 자살은 견디기 어려운 모욕을 씻는 방법으로 널리 선택되어 왔다. 또한 모욕은 공격당하는 자아에게 상처를 입히고 결국 자아존중감을 약화시킬 수 있다. 자아존중감의 약화는 자살의 근저적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인신공격은 그 자체로 위험하고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이다.

 

전여옥이라는 국회의원이 최진실 씨가 죽고 난 뒤에 악성댓글이 죽음의 원인이라 단정하고,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닌가 싶다"며 "각박한 세상에 우리에게 꿈과 용기를 그리고 즐거움을 주었던 이들이 이렇게 바쁘게 이 세상을 떠나게 만든 것은 말입니다"라고 글을 올렸다 한다. 싸움닭처럼 남을 공격하는 데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여줬던 이 국회의원 자신이 네티즌들한테 항상 심한 공격을 받아왔다. 밖에 보이는 것과 통상의 감각으로 그녀는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듯’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도 쏟아지는 욕들 앞에서는 힘들었을 것이다. 악플 받는 어려움을 진정 이해한다면, '우리 모두의'를 운운하지말고 이번 기회에 그녀가 그동안 자신이 타인들에게 해왔던 공격들을 사과했다면 어땠을까?

 

 

한나라당이 추진하는 <최진실법>은 전혀 진정성이 없어 보인다. 너무 포괄적이고 모호하다. 법리적으로도 전혀 타당성이 없어 보인다. 한나라당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진심으로 악의를 가진 ‘안티팬’으로부터 연예인들을 보호하고, 스토커나 페니스 파시스트들에게서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 법을 제정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한나라당은 어떤 사람들을 막무가내로 ‘좌빨’ ‘친북’ ‘좌파’ ‘좀비’ ‘절라도’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문화도 함께 사라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을까?

 

한나라당은 원하는 것은 오로지 대통령을 쥐에 비유하고, ‘조선’에 ㅅ받침을 첨가하여 부르는 식의 인터넷 문화가 사라지는 것일 테다. 그런 문화는 잘못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런 인터넷 문화는 우리 민주주의의 기초이다.

한편, 그런 인터넷정치 문화와 연예인 누군가의 용모, 행동, 언행을 인신공격하는 사적인 ‘배설’이 같은 차원의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나라당과 일부 보수 언론은 이런 것들을 구분할 능력과 의사가 없다고 보인다. 누가 악플러이며, 어떤 것이 악플인지? ‘모욕’의 상대성ㆍ주관성의 문제를 누가 판단할 수 있는지? 기초적인 법리조차 처음부터 토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덧) 마지막으로 하나 덧붙이자. 한국의 높은 자살률은 10대에서 70대 노인까지 전세대에 걸쳐있다는 점. 그리고 한국의 높은 자살률은 소위 ‘민주정부’ 약 10년 간 달성된 것이라는 점. 이 사이에 한국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IMF가 있었고, ‘양극화’가 심화되었고, 비정규직은 늘어났다. 한마디로 개인들 사이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사람들은 더욱 외로워졌다. 한국에서 어린이건 노인이건, 누구나 살기 어렵다. 누구나 팍팍한 삶을 살기 때문에 자살률이 높다. 그리고 팍팍한 삶을 살기 때문에 여리고 약한 희생양을 찾아낸다. 만약 자살률이 해당 사회 성원의 행복 문제와 관련된 것이라면, 지난 10년 간의 소위 민주정부는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자살률이 무려 2배로 높아졌다. 그들은 자랑스런 ‘대한민국’에 복속된 개인들의 행복을 전혀 증진시켜 주지 못했다. 과연 이명박 정권은 어떨까? 입만 아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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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실씨의 자살(1)

2008/10/07 16:11 | Posted by <소문> 편집실

최진실 씨 자살사건은 또 하나의 ‘국가대표급’ 자살이다. 모든 세대와 계층이, 경력 20년의 ‘톱스타’인 그녀를, 또는 그녀의 인생을 알고 있다. 이는 안재환 씨 자살사건과 그 충격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났다. 이 자살은 그 파급효과에 있어서도 가장 넓고 강력하고 지속적일 것이다.


최진실 씨는 입지전적 인물의 하나다. 그녀는 ‘가난하고 못 배운’ 또순이이자 ‘소녀가장형’ 인물이었다. 몸뚱아리와 강한 의지(또는 욕망) 외에 가진 것이 없었던, 그리고 그것으로 세상과 상대해 온 인물이었다. 그녀의 인생은 한국에서 상상할 수 있는(아니, 그것을 초과하는) 가장 통속적이고 드라마틱한 ‘여자의 일생’을 구현했다.

 

행복을 평범ㆍ소박하고 조용한 삶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 간주할 때, 생의 화려함과 불행(험난함)은 서로 배치(背馳)되는 것이다. 화려한 생은 불행할 가능성이 더 높다. 화려한 것을 추구하는 생은 실패할 확률이 높다. 따라서 자살할 확률도 높다. 미니멀한 삶이 훨씬 안전하다. ‘단순하게 살아라’... 모든 ‘뉴에이지’적인 것이 가르치는 바가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ㆍ인기ㆍ권력 등으로 표상되는 생의 화려함(일상의 용어로는 ‘잘 나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추구하지 않는 생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돈ㆍ인기ㆍ권력이 없는 생이야말로 불행한 것 아닌가. (우울증론자들은 그것을 필요한 만큼 추구하지 않는 것도 ‘우울’의 징후라 생각한다. <우울증에 반대한다>를 보라.)


모험을 걸어 ‘화려함’을 추구하는 것, 거기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래서 자아의 작용, 즉 자아의 ‘기술’은 개인에게 닥치는 이 거대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작동(해야) 한다. 안분(安分)의 논리는 그래서 동서고금을 통해 계발되어 왔다. 그러나 안분은 패배와 자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초월과 다르다.

 

최 씨가 세상을 뜬 날, 한국에서 열리는 가장 화려한 행사의 하나인 PIFF 개막제가 열렸다. 레드카펫 위에 가장 비싼 옷을 입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저 여자 ‘스타’들을 보라. 그리고 그 생과 자아를 상상해보자. 10대에 벌써 전국적인 인물이 된 저런 소녀의 삶은 무엇일까? 하지만 모든 여배우들이 최진실처럼 살지는 않는다. 그들 모두가 ‘연예’라는 현대 대중문화의 기제를 통해 소비되지만, 그녀의 생과 육체의 전체를 갈취당하지는 않는다. 이런 면에서 최진실은 ‘근대적 연예인’, ‘여배우’이다. 생득적 계급ㆍ계층의 문제가 여기에도 관련된다.

 

소위 ‘공인’, 그중에서도 특히 ‘연예인’의 자아는 매우 위태로운 것임을 최씨의 자살이 보여준다. 그들은 ‘늘 노출된 상태’에서 지낸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언제나 감시(cf. 파파라치)와 ‘평가’의 대상이 된다. 특히 연예인에 대한 세인의 평가란 실로 놀라운 것이다. 전국의 남녀노소가 언제나 그(녀)에 대해, 그리고 그(녀)의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육체의 세세한 모든 것과 연애ㆍ결혼경력과 사고방식은, 그야말로 ‘소비’된다.


그러나 ‘소비’라는 말은 매우 무책임하고 둔탁하다. 평가하는 세인(수용자)의 관점에서 볼 때에도 이 ‘소비’는 그저 껌 한번 씹고 버리는 그런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특히 여성과 청소년에게 있어) 자아와 욕망의 투사이자, 표상행위이다. 이는 심각한 ‘수행’이다.

 

그런데 이 평가와 소비는 오늘날, ‘인터넷’이라는 공간 덕분에 새롭게, 더욱 신경증적으로 제도화되어있다. 평가받는 쪽은 어떨까? 이건 과히 상상을 초월한다. 타인의 평가, 세인의 평이라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바로 여기에서 자살할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주어져있다.)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주목-받기(인정받기)’가 행복의 경계와 맺는 함수가 어디까지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그 상대적 작용을 거의 조정하지 못한다.

(계속)

 [출처] 최진실 씨의 경우 (1) |작성자 마포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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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0을 넘어 새 6.10으로 가자
  [촛불의 소리]6월항쟁세대가 촛불집회에 부쳐
 

뭐가 달라지나요?
 
  촛불집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대학원생이 문득 나에게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다.

"이 촛불집회가 과연 무엇을 실질적으로 바꿔낼 수 있나요? 뭐가 달라지나요?"
 
  '88만원 세대'인 스물 네살 짜리의 냉철하고도 절망적인 질문은, 우리 사회와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본질적 회의를 담은 것이었다.
 
  과연 그러하다. 장관 고시가 철회되면, 혹여 전면재협상이 선언되면, 아름답게만 보이는 저 촛불이 꺼지고 다시 사람들은 일상으로 뿔뿔이 돌아갈 것 아닌가? 저 뜨거운 거리의 10대들과 20대들도 차갑고 끔찍한 경쟁의 나락으로 돌아갈 게 아닐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정치적 불복종과 연대의 첫경험을 아련한 기억으로만 간직한 채 말이다.
 
  이 촛불은 무엇을 바꾸고 남길까? 이미 여러가지를 했다고도 할 수 있다. 12.18(대선)과 4.9(총선), 철옹의 아성을 구축한 줄 알았던 보수우익을 청소년들이 한마디로 일축해버렸다. "너나 쳐 먹어!". 단 3개월만에 한국의 보수우익은 자신의 온알몸을 국민 앞에 폭로당했다. 대중이 보수화된 것이 아니라, '잘 살겠다'는 욕망이 제도정치 속에서 대안을 찾지 못했을 뿐이라는 점도 재차 가르쳐줬다. 그리고, 그야말로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 민주주의를 경험한 젊은세대를 우리는 얻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무엇이 바뀌었는가? 이명박정부는 이제 국민의 눈치를 좀 더 보는 스타일로 바뀔지 모른다. 대운하도 진짜 중단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체제를 떠받치는 불안의 뿌리인 비정규직과 '88만 원' 문제나 이 끔찍한 교육모순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물가고 때문에 서민경제는 더욱 나빠지고, 결국 양극화는 중단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오늘의 저항은 새로 출범한 정권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 잡는 효과는 있다. 그러나 이 정권이 물려받은, 이전 '개혁정권'이 길고도 오래 잘못 든 길과,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주의 10년'이 쌓아온 모순을 고쳐내는 데까지 나갈 수 있을까?
  

▲ 촛불집회가 과연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한달 넘게 계속되고 있는 촛불집회의 의미가 무엇인지 성찰해봐야할 때다. ⓒ프레시안


  촛불과 실질적 민주주의
 
  질문을 받고, 6월항쟁 세대인 나는 20년 전의 그날들을 떠올렸다. 6월항쟁이 만든 그야말로 실질적인 변화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겠지만, 그때의 변화는 무엇보다도 7-8월 노동자대투쟁과 함께 왔다. 그 대투쟁을 통해서, 노예처럼 감시받고 일상적으로 폭력에 시달리며 일하던 노동자도 '인간'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80년대의 고도성장의 과실도 조금이나마 노동자들에게 분배되기 시작했다. 민주노조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연대의 틀이 생겨났다. '실질적 민주주의'는 '독재타도-호헌철폐'라는 정치적 항쟁을 통해 그렇게 느리게 왔었다.
 
  그리고 목졸림을 당해 지난 20년간 서서히 망가졌다. 노조를 공격하고 비정규직을 양산했다는 점에서 노무현정권과 이명박정권은 정확히 동문선배격이다. 아무리 예쁘게 보려 해도, 노무현정권은 교육과 비정규직문제에 대해서 할 말이 없다.
 
  오늘날 '88만 원 인간'도 인간이 아니길 강요받는다. 그들은 아무런 보호 없이 노동하고 해고된다. 그래서 그들은 동료인간에 대한 연대의식과 관심도 차단당한다. 초등학생부터 그렇게 하기를 강요받는다. 오로지 경쟁과 약육강식이 학교와 일터를 지배하고 있다. 이런 데도 불구하고 거리로 나온 10대와 20대는 사실 기적이다.
 
  예쁜 촛불에 온 눈이 팔려 있는 동안에도, 사회는 '양극'으로 빨리빨리 움직이고 있다.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여전히 고공 농성 중이고, 이랜드와 코스콤 노동자도 여전히 거리에 내몰려 있다. '10대의 반란'이 거대한 행진을 촉발했지만, 다시 그들은 신자유주의자들이 만든 감옥 속에 구금되었다. 광우병 쇠고기는 포기될지 몰라도, 촛불과 비정규직 문제는 전혀 무관해보인다.
 
  과연 오늘의 촛불이 우리들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위한 기도를 담고 있을까? 촛불이 내 식탁과 내 '건강권'을 지키자는 것만이면, 그건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쇠고기 문제에 아무리 많은 새 패러다임이 담겨 있어도 그렇다.
 
  87년 체제의 '아래로부터의' 종언
 
  그러나, 인터넷과 거리에서는 연대가 꽃을 피운다. 또 다행스럽게도(?), '정권 퇴진, 대통령 탄핵'의 구호들이 외쳐진다. 뜬금없이 헌법 제1조까지 외쳐진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보수우익은 시위의 배후를 운운하고, 비현실적 정치구호에 대해 일부 지식인들은 비웃음을 보낸다. 하지만, 이 정치구호들이말로 절망을 부르는 경제적 모순과 모순에 가득 찬 정치체제를 한꺼번에 꿰뚫고 있다.
 
  국민의 직접행동은 쓰레기 같은 제도정치와 민중의 열망 사이의 참기 힘든 간극을 폭로하며 또한 메워주고 있다. 한국의 정치학자들은 거리의 10대와 20대에게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해야 한다. 그들의 외침은 여전히 정치가 '최종 심급'임을 웅변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정권 퇴진, 대통령 탄핵'이라는 이 '비현실적'ㆍ'초법적'구호들이야말로 진정한 정치적 상상력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실주의'를 넘어서버린 진리의 목소리이다.
 
  소위 지식인들과 진보진영은 87년체제의 종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눠왔다. 정권이 바뀌자 다시 개헌론도 솔솔 피어오른다. 그런데 오늘의 촛불은 '위로부터' 논의되어온 '87년체제의 종언'에 관한 논의가 아무 의미 없음을 보여준다.
 
  민중의 행복한 삶을 보장하고, 근본적으로 그것을 반영할 정치체제가 아니면 논의는 헛짓이다. 촛불은 위로부터의 체제 재편에 대한 진정한 안티테제이며, 우리가 보듬어 꽃피워야 할 진테제이다. 어찌 18대 국회가, 오합지졸로 패퇴한 야당이 이 진테제를 받아안을 수 있을까?
 
  이미 몸으로 87년식 운동과 통치가 불가능함을 젊은 촛불들은 너무 많이 보여줬다. 87년 체제의 종언은 이미 거리에 있다. 2008년의 6월 10일, 우리는 일단 다같이 촛불을 들고 길이 막히는 데까지, 아니 그 너머서까지 끝없이 행진해야 한다. 거기서 대다수 인간을 위한 새로운 체제의 모습을 그려야 한다.
 
  혹여 우리는 이번에 쇠고기 문제 이외에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다음에 혹 집에 뿔뿔이 돌아가더라도, 마음속의 촛불집회를 이어가야 한다. 5년간 계속 촛불 거리에 있을 각오를 해야 한다. 군정종식도 혁명도 아닌, 거대한 기만이었던 87년의 6.29가 그래도 헌법과 노동을 바꾸게 됐듯이, 이 촛불이 거대한 변화의 초석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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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고 삶고 볶고 튀기기 - 헝그리플래닛

2008/03/01 10:00 | Posted by 김장철

원츄~! 펴자마자 이 책에 ‘쎄게’ ‘꽂혀’버렸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 책을 읽어보라 권하고 있다. 그가 대식가이든 미식가이든, 여성이건 남성이건, 채식주의자건 비만인이건... R선생처럼 먹는 일 자체를 경멸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빼고. 먹거리(먹기+먹는 파티+먹는 곳+요리하기+여행하며 먹기+누군가에게 해 먹이기...)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소장할 만하다.
*
‘요리 기행’류의 글을 누구나 쓰고 싶어하고 또한 쓸 수 있다. 세상의 수없이 많은 블로그는 어설픈 ‘맛집’ 탐방기와 아마추어 사진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또한 이미 황석영ㆍ성석제처럼 글재주 좋은 많은 작가들이 음식에 대한 책을 썼다. 그런 글들은 주로 기억과 개인적 취향을 주제로 한다. 한편으로 <헝그리 플래닛-세계는 지금 무엇을 먹는가>는 세상의 그러한 글쓰기와 사진 찍기의 궁극에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 그런 류들과는 완전히 다른 주제를 가지고 있다.

무엇을 잡아먹거나 사먹는가, 그리고 거기에 얼마나 돈을 쓰고 어떻게 요리하는가? 또한 누구와 같이 먹으며, 먹고 나서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는 개인적 차원을 넘는다. 먹는 일을 둘러싼 관계만 ‘문화-정치’를 드러낼 수 있다.

세계 24개국, 30가족(주로 중하층이라 설득력있다.)의 600끼니를 직접 탐방하고 유머러스한 기행기와 질 높은 사진으로 담은 이 책은
‘굽고 삶고 볶고 튀기’는 잡식동물로서의 인류에 대한 가장 훌륭한 보고서임에 분명하다. 또한 먹는 일을 둘러싼 모든 민감한 가장 정치적이며 동시에 문화적인 현안을 대부분 담고 있다.

그것들은 글로벌 자본주의와 세계정치, 역사와 문화전통, 세대와 계급의 문제이다. 이 책을 통해 패스트푸드 제국주의, 육식의 윤리성, 당뇨와 식품자본, 바다 윤리 등과 같은 핵심적인 정치적 사안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수십년 간의 경력을 바탕으로 하여 수년간에 걸친 ‘프로젝트’로서 씌어진 이 책은 그래서 외국에서 이미 여러 가지 상을 받았을 것이다.
**
‘지금’, 그러나 완전히 서로 다른 공간에서 서로 다른 역사적 전통 하에서 살아가는, 그러나 점점 비슷해지고 있는 세계의 ‘인간’들이 무엇을 어떻게 먹고 있는가 하는 이야기(글+사진)는 꽤 충격적이기도 했다. ‘타인의 삶’이 거기 확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가자미를 미역국에 넣고 끓이는가 아닌가, 김장김치에 갈치를 넣어도 되는가 아닌가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화해’가 쉽지 않은 차이도 거기 있다.

에콰도르와 그린란드의 가족들은 내가 평생 절대 못 먹어볼 거 같은 희귀한 음식들을 먹는다. 기니피그 훈제 고기와 바다표범 스튜, 북극곰 고기 등. 해마, 염소불알, 불가사리 튀김 같은 중국 음식들은 그래도 멀지 않은 미래에 먹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영국과 인도의 어떤 가족들은 이미 알고 있지만 별로 먹고 싶지 않은 것들을 주로 먹는다. 쌀을 먹지 않고 빵으로만 탄수화물 섭취원을 삼는다거나 브라만계급이라는 이유로 고기는 전혀 먹지 않는다.

한편 차드와 부탄의 가난한 가족들은 너무 못 먹는다. 수단에서 쫓겨난 차드 피난민들이 먹거리를 위해 쓰는 돈은 일주일에 1,120원이고(나머지는 유엔지원으로 나오는 배급품) 부탄에서는 4,620원이다.

미국과 멕시코의 어떤 사람들은 반대 방향으로 너무 못 먹는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질 낮지만 가장 효율적으로 대량생산되어 급하게 칼로리를 공급하는 맥도날드ㆍKFCㆍ버거킹ㆍ타코벨에서 만든(또는 배달한) 치킨과 피자, 코카콜라를 ‘일용할 양식’으로 먹는다. 미국인들이 패스트푸드에만 쓰는 돈은 부탄 사람들 전체 식비의 10배나 된다. 배운 중간층인데도 그렇다. 미국인들의 식생활은 너무도 강력한 식품자본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어서, 자신들의 끔찍한 식생활과 그 결과(소아 당뇨비만, 성인병 등등)를 알면서도 고치지 못한다.

***
먹는 일의 평등과 불평등은 정확히 주변부와 중심의 차이, 그리고 지역 내부의 계급적 격차를 반영해내는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의식주에 결부된 일상문화가 얼마나 큰 정치적 문제를 품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슬로우푸드와 거리 음식, 가정요리, 채식 등의 앞날은 어둡다.

미국식 식문화에 저항하는 일, 그것은 매우 어렵지만, 마치 스크린쿼터문제처럼 ‘문화다양성’ 문제의 핵심일 수 있다. 이는 비단 ‘좋은 차이’를 보존하는 중요한 일뿐 아니라, 자본이 삶의 모든 것을 규율하는 미국식 삶에 반대하는 것과 연관이 깊다. 그러나 그 문제는 아직 잘 안 보인다. 그것이 개인에게는 죽고사는 문제(건강)와 바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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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1)
우리는 지금 무엇을 먹고 있는가? 지금 먹고 있는 것을 성찰해보고 낯선 음식문화에 융통성을 갖는 일은 중요한 도전적 과제가 될 듯하다. 책을 죽 읽어보니 내가 먹는 것과 가장 비슷한 것은, 일본과 독일의 중간층 가족이다. 그들도 한편으로는 글로벌자본주의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지만, 전통 때문이든 ‘건강담론’ 때문이든, 생선이 끊이지 않는 식사를 선호하며 유기농스런 음식도 좀 추구한다. 물론 상당한 양의 술과 함께(^^).

덧2)
과테말라와 일본의 술꾼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이미 알콜중독자병원이나 간질환 병동에 입원해버린 분들 말고, 세계의 술꾼들을 찾아 탐방하여 누구와 함께 왜 그렇게 마셔대며 사는지를 찍고 써서 <써스티(thirsty, 목마른; 술을 좋아하는.) 플래닛>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그로써 뭐가 드러날까? 순치된 디오니소스월드와 가부장제의 그늘 같은 것? 또는 사랑의 전말과 점진적 자살 같은 실존 문제? 이런 프로젝트는 돈이 엄청나게 많이 들겠고 무엇보다 사진을 배우는 게 우선이다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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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얼굴 있는 음식'들, 즉 포유류 육식에 특히 불편해할 수 있다. 그림의 기니피그나 바다표범처럼. 둘은 그린란드와 에콰도르에서 중요한 먹거리, 즉 단백질 섭취원이다. 인간에게 별로 거부감 없는 귀여운 얼굴을 가졌을 때 특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음식'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하물며 개처럼 자주 접하는 얼굴에랴! 개고기는 맛있다. 개를 먹음으로써 더욱 나는 '인간'임이 확연해진다. 그래서 문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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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er에서 펌, '그냥 오년동안' 놀이도 마찬가지.
네티즌들은 예민하게 '영어'문제에 반응하고 있는데, 벌써 '이명박탄핵' 사이트가 있더라는;
이명박디스토피아는 10년을 갈까, 아니면 1년을 갈까?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가올 총선에서 딴나라당은 대략 200-250석 예상.
박근혜 일당의 탈당을 저지해서 제2, 제3의 딴나라당이 생기는 걸 막아야 됨.

가장 재미난 댓글은

"그냥 오년동안 집에서 심시티나 하게 내 컴퓨터 빌려 줄께...ㅎㅎ
"그냥 오지헌이 대통령했으면 .."
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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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숙 위원장, '영어사랑' 논란

제목 숙의 하루
조회 1094
공감 82 비공감 0
작성일시 2008.02.01. 00:18
아이디 daystoheaven


오늘은 기자들과 이러뷰가 있는 날이다.
요즘 날 갈구는 미개한 한글사용인이 많아서 이러뷰하기 너무 스케어슬리하다.
이러뷰장으로 갔더니 기자들이 포로라인에 좍 서있다.
가슴이 뛴다. 오늘은 또 어떤 스퓌치로 이들을 서프롸이즈 하게 할까.
아마 오늘은 나의 스큘인 쑥명유리버시리에 도움이 되기위해 테쏠을 권장할 생각인데
쉐크리터어리가 옆에서 다시 생각하라고 난리도 아니다.
왜? 테솔이야 말로 마이 라잎최고의 명작인데 이럴때 안쓰면 언제 쓴단 말이냐.
안돼겠다 오늘은 나의 인글리이쉬로 기자들에게 나의 실력을 보여주고 난 뒤에
그들의 마우쓸 클로우즈 시켜야 겠다. 아... 테쏠.... 너무 러블리해..... 오륀지 보다 더~

~~~~~~~~~~~~~~

그냥... 오년동안 놀아만 줬으면...
그냥 오년동안 테니스만 쳤으면....
그냥 오년동안 국밥만 드셨으면....
그냥 오년동안 개머리판에 얼굴 붙이기만 하셨으면....
그냥 오년동안 데쓰락만 하셨으면....
그냥 오년동안 자기집이나 삽질했으면
그냥 오년동안 집에서 심시티나 하게 내 컴퓨터 빌려 줄께...ㅎㅎ
그냥 오년동안 교회에 갇혔으면........
솔직히 영어발음은 변선생이 낫다!(........)
그냥 오년동안 혼자 삽들고 운하만 퐈줬으면...
그냥 오년동안 나는 나이 안먹고 2메가바이트만 나이 다섯 처드셨으면...
그냥 오년동안 청계천에서 물장구나 치셨으면
그냥 오년동안 틔레브링 더 워얼드 하면서 대한민국엔 안들어 왔으면...
그냥 탄핵 먹었으면......여기 서명 운동 ㅋㅋ http://www.sorrykorea.com/
탄핵도 가끔식.. 가끔식...
그냥 오지헌이 대통령했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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