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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0을 넘어 새 6.10으로 가자
  [촛불의 소리]6월항쟁세대가 촛불집회에 부쳐
 

뭐가 달라지나요?
 
  촛불집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대학원생이 문득 나에게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다.

"이 촛불집회가 과연 무엇을 실질적으로 바꿔낼 수 있나요? 뭐가 달라지나요?"
 
  '88만원 세대'인 스물 네살 짜리의 냉철하고도 절망적인 질문은, 우리 사회와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본질적 회의를 담은 것이었다.
 
  과연 그러하다. 장관 고시가 철회되면, 혹여 전면재협상이 선언되면, 아름답게만 보이는 저 촛불이 꺼지고 다시 사람들은 일상으로 뿔뿔이 돌아갈 것 아닌가? 저 뜨거운 거리의 10대들과 20대들도 차갑고 끔찍한 경쟁의 나락으로 돌아갈 게 아닐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정치적 불복종과 연대의 첫경험을 아련한 기억으로만 간직한 채 말이다.
 
  이 촛불은 무엇을 바꾸고 남길까? 이미 여러가지를 했다고도 할 수 있다. 12.18(대선)과 4.9(총선), 철옹의 아성을 구축한 줄 알았던 보수우익을 청소년들이 한마디로 일축해버렸다. "너나 쳐 먹어!". 단 3개월만에 한국의 보수우익은 자신의 온알몸을 국민 앞에 폭로당했다. 대중이 보수화된 것이 아니라, '잘 살겠다'는 욕망이 제도정치 속에서 대안을 찾지 못했을 뿐이라는 점도 재차 가르쳐줬다. 그리고, 그야말로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 민주주의를 경험한 젊은세대를 우리는 얻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무엇이 바뀌었는가? 이명박정부는 이제 국민의 눈치를 좀 더 보는 스타일로 바뀔지 모른다. 대운하도 진짜 중단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체제를 떠받치는 불안의 뿌리인 비정규직과 '88만 원' 문제나 이 끔찍한 교육모순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물가고 때문에 서민경제는 더욱 나빠지고, 결국 양극화는 중단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오늘의 저항은 새로 출범한 정권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 잡는 효과는 있다. 그러나 이 정권이 물려받은, 이전 '개혁정권'이 길고도 오래 잘못 든 길과,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주의 10년'이 쌓아온 모순을 고쳐내는 데까지 나갈 수 있을까?
  

▲ 촛불집회가 과연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한달 넘게 계속되고 있는 촛불집회의 의미가 무엇인지 성찰해봐야할 때다. ⓒ프레시안


  촛불과 실질적 민주주의
 
  질문을 받고, 6월항쟁 세대인 나는 20년 전의 그날들을 떠올렸다. 6월항쟁이 만든 그야말로 실질적인 변화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겠지만, 그때의 변화는 무엇보다도 7-8월 노동자대투쟁과 함께 왔다. 그 대투쟁을 통해서, 노예처럼 감시받고 일상적으로 폭력에 시달리며 일하던 노동자도 '인간'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80년대의 고도성장의 과실도 조금이나마 노동자들에게 분배되기 시작했다. 민주노조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연대의 틀이 생겨났다. '실질적 민주주의'는 '독재타도-호헌철폐'라는 정치적 항쟁을 통해 그렇게 느리게 왔었다.
 
  그리고 목졸림을 당해 지난 20년간 서서히 망가졌다. 노조를 공격하고 비정규직을 양산했다는 점에서 노무현정권과 이명박정권은 정확히 동문선배격이다. 아무리 예쁘게 보려 해도, 노무현정권은 교육과 비정규직문제에 대해서 할 말이 없다.
 
  오늘날 '88만 원 인간'도 인간이 아니길 강요받는다. 그들은 아무런 보호 없이 노동하고 해고된다. 그래서 그들은 동료인간에 대한 연대의식과 관심도 차단당한다. 초등학생부터 그렇게 하기를 강요받는다. 오로지 경쟁과 약육강식이 학교와 일터를 지배하고 있다. 이런 데도 불구하고 거리로 나온 10대와 20대는 사실 기적이다.
 
  예쁜 촛불에 온 눈이 팔려 있는 동안에도, 사회는 '양극'으로 빨리빨리 움직이고 있다.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여전히 고공 농성 중이고, 이랜드와 코스콤 노동자도 여전히 거리에 내몰려 있다. '10대의 반란'이 거대한 행진을 촉발했지만, 다시 그들은 신자유주의자들이 만든 감옥 속에 구금되었다. 광우병 쇠고기는 포기될지 몰라도, 촛불과 비정규직 문제는 전혀 무관해보인다.
 
  과연 오늘의 촛불이 우리들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위한 기도를 담고 있을까? 촛불이 내 식탁과 내 '건강권'을 지키자는 것만이면, 그건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쇠고기 문제에 아무리 많은 새 패러다임이 담겨 있어도 그렇다.
 
  87년 체제의 '아래로부터의' 종언
 
  그러나, 인터넷과 거리에서는 연대가 꽃을 피운다. 또 다행스럽게도(?), '정권 퇴진, 대통령 탄핵'의 구호들이 외쳐진다. 뜬금없이 헌법 제1조까지 외쳐진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보수우익은 시위의 배후를 운운하고, 비현실적 정치구호에 대해 일부 지식인들은 비웃음을 보낸다. 하지만, 이 정치구호들이말로 절망을 부르는 경제적 모순과 모순에 가득 찬 정치체제를 한꺼번에 꿰뚫고 있다.
 
  국민의 직접행동은 쓰레기 같은 제도정치와 민중의 열망 사이의 참기 힘든 간극을 폭로하며 또한 메워주고 있다. 한국의 정치학자들은 거리의 10대와 20대에게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해야 한다. 그들의 외침은 여전히 정치가 '최종 심급'임을 웅변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정권 퇴진, 대통령 탄핵'이라는 이 '비현실적'ㆍ'초법적'구호들이야말로 진정한 정치적 상상력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실주의'를 넘어서버린 진리의 목소리이다.
 
  소위 지식인들과 진보진영은 87년체제의 종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눠왔다. 정권이 바뀌자 다시 개헌론도 솔솔 피어오른다. 그런데 오늘의 촛불은 '위로부터' 논의되어온 '87년체제의 종언'에 관한 논의가 아무 의미 없음을 보여준다.
 
  민중의 행복한 삶을 보장하고, 근본적으로 그것을 반영할 정치체제가 아니면 논의는 헛짓이다. 촛불은 위로부터의 체제 재편에 대한 진정한 안티테제이며, 우리가 보듬어 꽃피워야 할 진테제이다. 어찌 18대 국회가, 오합지졸로 패퇴한 야당이 이 진테제를 받아안을 수 있을까?
 
  이미 몸으로 87년식 운동과 통치가 불가능함을 젊은 촛불들은 너무 많이 보여줬다. 87년 체제의 종언은 이미 거리에 있다. 2008년의 6월 10일, 우리는 일단 다같이 촛불을 들고 길이 막히는 데까지, 아니 그 너머서까지 끝없이 행진해야 한다. 거기서 대다수 인간을 위한 새로운 체제의 모습을 그려야 한다.
 
  혹여 우리는 이번에 쇠고기 문제 이외에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다음에 혹 집에 뿔뿔이 돌아가더라도, 마음속의 촛불집회를 이어가야 한다. 5년간 계속 촛불 거리에 있을 각오를 해야 한다. 군정종식도 혁명도 아닌, 거대한 기만이었던 87년의 6.29가 그래도 헌법과 노동을 바꾸게 됐듯이, 이 촛불이 거대한 변화의 초석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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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7 - [Mad for Drama/한국 드라마] - 흥행코드 읽기와 스토리텔링-아류작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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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겨울연가> 탓이다"

현재 한국의 '전형적'인 멜로드라마들을 망쳐놓은 것은,
배용준을, 문화부장관 후보의 갑절이상 부자로 만들어주고
'한류'라는 말을 만들어 낸 <겨울연가>이다.

<겨울연가>가 '멜로드라마'의 공식을 얼마나 잘, 똑부러지게 따르고 있는지는
굳이 또 얘기 안해도 될 것이다.
분명 2002년에 이 드라마는
현재의 '일드'열풍을 일으키고 있듯 우리보다 한 수 위인 일본 드라마시장에까지 먹힐 수 있는
멜로드라마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의 '모범'사례였다.


그러나 '최대치'란, 다시 말해 '정점'을 찍고,
이제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대단한 <겨울연가>는 사실,
<가을동화>의 신선함들을 훨씬 세련되게 포장한 것으로,
이미 <가을동화>의 여러 '상투적' 설정들이 한번 '복제'된 것이었다.
그래서 <겨울연가>는 <가을동화>만큼 한국땅에선 큰 반향을 못일으켰었다.
이것은 4계절 시리즈를 만든 윤석호 감독의
이후 두 작품, <여름향기>, <봄의왈츠>가
모두 '썰렁하게' 막을 내린 데에서 분명해졌다.


반면 일본에서는 <겨울연가>가 먼저 알려졌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보다 신선하게, 그러면서도 세련되게 첫선을 보일 수 있었다.
그 이후 여러 편의 '겨울연가류'의 드라마들이
일본에 우수수 알려지게 되고, 다 그럭저럭 좋은 반응을 일으키며
한류드라마를 형성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본에서도 한국드라마의 그런 '전형'적 설정
-출생의 비밀, 불치병, 첫사랑, 기억상실증, 재벌2세, 장애를 뛰어넘는 사랑...등-은
진부함, 천편일률적임으로 비판받고 있다.
그러니 이미 <겨울연가>에서도 이 진부함을 느끼기 시작했던 한국에서야 오죽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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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한국의 드라마는 '멜로'를 찍기로 하면
일단 '겨울연가류'를 제일 먼저 참고하고 있는 듯 했다.
최근 나온 한국의 '멜로코드' 드라마들 몇개를 살펴보자.
<못된사랑>, <사랑에 미치다>, <푸른물고기>.
이 세 작품은 2007년~2008년 초에 방영된 드라마로
이미연, 고소영, 이요원, 권상우, 박정철, 윤계상 등
우리나라에서 '초특급 스타 배우'로 불릴 만한
그것도 아주 오랜만에 브라운관에 돌아와 제대로 몸값 비싼 티를 낸
배우들이 출연한 '야심작'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다.

이 드라마들은 모두 '극적인 사랑'이야기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자신의 약혼자를 죽인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여자(사랑에 미치다),
옛 남자의 처남이자 재벌2세인 남자와 사랑에 빠진 첼리스트(못된사랑),
부모의 반대로 헤어진 뒤 첫사랑을 기억 못하는 재벌2세 여자가
첫사랑을 다시 만나 사랑하는 이야기(푸른물고기),
일단 설정은 매우 '극적'이지만, 그 다음이 없다.


저 설정에서 더 나올 것이 무엇인가?
자신의 약혼자를 죽인 남자란 사실을 모르는 동안,
자신의 매형과 여자의 관계를 눈치 못채는 동안,
첫사랑이란 사실을 기억못하는 동안,
서로 바보짓 해 가며 사랑놀음, 감정싸움, 삼각 사각관계의 연애를 하는 것 뿐이다.
그러다가 '진실'이 밝혀진 뒤에는
그것때문에 괴로워하는 단계를 지리멸렬하게 그리다가
결국엔 사랑의 승리(?) 나부랭이로 끝을 맺게 된다.
더구나 그렇게도 극적이고 대단한 사랑얘기이지만,
정작 사랑에 관한 본질은 아무것도 통찰하지 못한 채
막연한 낭만적 사랑의 판타지를 피상적으로 그리는 데 그친다.


이런 껍데기밖에 없는 '멜로'는
그들이 그렇게도 '숭배'하는 '사랑', 그 하나조차 제대로 그리지 못했으며
세상엔 사랑 외엔 아무것도 없는 듯 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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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위대하다.
사랑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으랴.
연애는 자기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언제나 인간의 최고의 관심사다.
그러나 사랑은 스카이라운지에서 와인을 마시고,
놀이공원에서 솜사탕을 들고 롤러코스터를 타고,
경치좋은 곳에서 드라이브를 즐기고,
아이스링크를 통째로 빌려 스케이트를 즐기고,
바닷가에서 '나 잡아 봐라'를 외치는 것으로만 설명되어선 안된다.

사랑은 서로 다른 두 명(이상)의 사람들이 만나
많은 차이들을 깨달아가고,
그것을 사랑이라는 더 큰 목표를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조율해가는 과정이며,
드라마가 보여주는 '소비'적 데이트와는 전혀 무관하게도
의외의 장소, 상황, 행동, 말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놀라운 경험들이다.

누구에게나 보편적(일 거라 믿어지는) 감동의 이벤트가 주는 행복은
패밀리레스토랑의 음식 사진과 같은, 미니홈피 전시용 사랑일 뿐이다.
진짜 사랑은 소비되는 물질 속에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연인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맺고 있는 다른 사람들 사이의
복잡하고 어려운 감정, 욕망, 상황, 상처 같은 것들이
'대체로' 행복한 어떤 상태로 고양되고 재구성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드러난다.

진정 '사랑밖엔 난 몰라' 드라마가 되려면
그런 '진짜 사랑' 얘기를 '독하게', '아프게'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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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제대로 보여주는 훌륭한 드라마들도 물론 그동안 여러 편 있었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들을 몇개 꼽으라면,
<네멋대로 해라>, <거짓말>, <거침없는 사랑>,
<발리에서 생긴 일>, <굿바이 솔로>, <연애시대>같은 것들이다.
이 드라마들은, '진부'하다 치부되는 '삼각관계'나, '불륜'이나,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 '불치병'을
그 안에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결코 진부하지 않다.
우리는 사랑을 하면서 자주 남들의 기준에 의해 통속화되지만,
이런 드라마들은 그런 자신을 다독이고 되돌아보게 하는, 참 곱씹을 수록 맛난 드라마들이다.
이 드라마들은 지금 사랑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권해주고 싶은 드라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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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드라마들이 그래서 새롭게 사랑을 성찰할 기회를 준다면,
<못된 사랑>, <푸른물고기>, <사랑에 미치다>는
'통속화'를 부추기는 '남들의 기준'을 공고화한다.
현실에는 부재하는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만들어
실존하는 다양한 사랑들에게 열등감을 안겨준다.
그러나 그 열등감의 실체는 그들의 '위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며
그저 그들의 '위대한 소비', '위대한 고립'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망하길 잘 했다.
대중들은 그렇게도 똑똑하다.
대중들은 앞으로도 철저하게, 이런 드라마들을 응징할 것이다.
이런 드라마들은 절대로 다신 나와선 안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방법은 대략 세 가지다.

하나는, 앞에서 말한 '지독한 사랑의 성찰'을 보여주는 드라마가 되는 길이다.
이것은 보통의 '내공'이 있는 제작진이 아니면 쉽지 않겠지만
가끔 한 편씩 세상에 나와줘서, 이 세상의 힘겨워하는 연인들에게
사랑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두번째는, '말랑말랑' '유쾌상쾌' 로맨틱 코메디로 승부하는 것이다.
비극적 멜로를 저따위 피상적 사랑얘기로 다루기 위해
기억상실증, 불치병, 출생의 비밀, 신분 차이 같은 걸 끌어들이지 말고
차라리 가벼운 사랑은 가벼운 사랑답게, 유들유들한 코메디와 곁들여 내놓는 것이다.
작년의 <커피프린스1호점>이나
몇년전 '겨울연가' 짝퉁 <여름향기>가 죽쑤고 있을 때
의외의 선전을 거둔 <옥탑방 고양이>처럼,
평범한 청춘들의 평범한 사랑 얘기를 '즐겁게' 그리는 것이다.


세번째는, '사랑밖에도 많이 알아'가 되는 것.
이것은 전반적인 한국 드라마가 가야할 방향과도 관계가 있다.
현재의 '미드', '일드'에 열광하는 드라마마니아들의 눈높이에
'사랑밖엔 난 몰라' 드라마는 절대 충족감을 안겨줄 수 없다.
사랑은, 분명 인간들의 최고의 관심사지만, 사랑 말고도 세상엔 흥미진진한 것들이 무척 많다.

현재의 사극열풍이나 의학드라마들의 연이은 성공은
이런 '고급' 드라마시청자들이 드라마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들은 물론 긴 호흡으로 방영되는 동안 주인공들이 '행복한 짝짓기'를 하는 과정에
여전히 관심이 많다.
남의 연애사는 일상 속의 최고의 활력소니까.
그러나 매일같이 '답이 뻔한' 연애문제로 징징대는 친구의 상담역할은 참으로 못할 노릇이듯,
사랑, 연애가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점령하는 드라마는 대중을 지치게 한다.

열심히 자기 삶을 살고,
그 속에서도 충분한 희노애락을 구성하면서
그 안에 사랑이 조금 더 희/노/애/락을 심화시키는 이야기.
그런 드라마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이제 리조트의 이사나, 재벌 2세 실장님, 언제 작업하는 지 모르겠는 예술가 대신
수많은 진짜 직업인들이, 진짜 '꾼'들이,진짜 생활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는 일에
앞으로의 드라마들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런 점은 앞서 말한 첫번째, 두번째 대안들도
어느 정도는 지켜나가야 할 덕목이다.
<네멋대로 해라>에도 경이와 복수의 사랑에 관한 통찰 곁에는
언더음악가의 음악에 대한 자부심과 스턴트맨의 성장스토리가 탄탄하게 들어있었다.
로맨틱코메디로서도 이 세번째의 특성을 잘 보여준 것이
<커피프린스1호점>의 '바리스타'라는 직업이고
<내이름은 김삼순>의 '파티쉐'가 아니던가?


각설-
원래, 이 글을 쓸 마음을 먹게 만든 것은 아주 사소한 문제였다.
그것은 바로, 그저께, 드디어 <이산>(49회)에서
송연이가 정조에 대해, 대수가 송연이에 대해
사랑을 인정하고 밝혔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 하나가지고 또 이렇게 길게 주절거리다니...나도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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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사실은 할 수만 있다면 (후궁이 되어서) 그분 곁에서 있어드리고 싶어."
"이제 전하 뒤에서 지켜보는 일 그만하면 안되겠니? 난 안돼?"
라는 송연과 대수의 '엇갈린 사랑'에 대한 고백의 씬은
아주 짧게, 스쳐가듯 등장했다.
둘 다 처음으로 하는 고백이었다.
드라마가 방영되기 시작한 지 6개월만이며, 극중에서 그들이 만난 지 십수년 만이다.
그동안 정조와 송연은 궐에서 마주치면 몇 마디의 농담을 주고받고
상대방에게만은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최고로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나누고
힘들때 '누구보다 당신을 믿는다'는 말을 서로에게 건네는 것만으로
사랑을 표현해 왔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는 현재 월화 드라마의 최고 강자이며,
아예 다른 방송국에서도 이 드라마 종영때까지는
섣부른 '도전'을 할 엄두를 안낼 만큼
쉽게 꺾이지 않을 인기를 얻고 있다.
결국에 송연과 정조의 사랑 얘기는 앞으로 점점 비중이 늘어날테지만
여전히 더 궁금한 것은 둘의 사랑보다 정조의 노론 세력들과의 '파워게임'쪽이다.
사랑은 그 속에서 '순리대로' 감정을 키워나가
주인공들의 사랑 외의 삶을 좀더 풍요롭게 만드는 한 부분이어도
충분히, 이 드라마는 매혹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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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일드광팬 2008/03/07 00:35

    오 쿨야님 글 항상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저도 '연애시대'는 참 재미있게 봤는데, 요즘 드라마는 정말 듣보잡이에요.
    일드 중 쿨야님이 말한 '사랑'이랑 잘 매치되는 것으로 '결혼못하는 남자'라는 드라마 강추입니다.
    일드의 세계에도 진출해서 많은 좋은 평 올려주시옵서서~

  2. BlogIcon coolya 2008/03/07 08:29

    일드광팬님, 감샤함미당~사실 제가 일드 미드의 세계에는 아직 제대로 입문을 못해서, 어떤 드라마를 봐야 할지 감이 없었답니다. 님의 추천 덕분에 또 몰입할 드라마가 하나 생겼네요~^^'결혼못하는남자' 꼭 보겠습니당~보고 난 뒤 이곳에서 또 얘기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언젠가부터 아나운서들이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
이들을 일컬어 '아나테이너(아나운서+엔터테이너)'라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아나테이너들은 '바른 말 쓰기'가 가능한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지식인, 교양인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고
거기에 남다른 끼나 쇼맨쉽까지 지니고 있다면
연예인들보다 더 광범위한 신뢰감과 대중적 호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


거기에 연예인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솟는 현실에서
방송국 사원으로서 받는 월급에 출연료 몇만원의 수당만으로도
연예인 급의 대중적 지지도를 내는 아나테이너들을 확보하는 것은
방송국으로선 제작비를 아낄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다.
강수정이 <여걸식스>에 출연할 당시 출연료가 2만원이라는 얘기는
두고두고 개그소재로 활용될 만큼 놀라운 사실이었다.
비슷한 정도의 일을 하고도 연예인과 아나운서 사이의 인건비에는
엄청난 차등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재벌가로 시집 가 버린 노현정이나
프리랜서 선언 후 연예기획사에 들어간 강수정, 김성주 등의
잘키운 아나운서들의 '배신'은 방송국으로선 입맛만 다실 일이다.
연예인들의 출연료가 몇백만원인 것에 비하면
아나테이너들은 착취를 당하고 있는 게 사실이고,
그런 만큼 좀 크고 나면 이러한 착취구조를 벗어나
제대로 된 몸값을 받으며 일하고 싶은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아나테이너가 주는 '이득'때문에
방송국에서는 결국 '배신'할 줄 알면서도 앞으로도 계속
아나테이너들의 양성소 노릇을 자처할 것이다.


연예기획사들이 연예인 한 명을 키워 스타로 만들기가 힘든 만큼
스타급 아나운서를 만드는 일도 결코 만만치가 않다.
빨리 스타로 키우고 싶긴 하고, 방법은 쉽지 않고...
그래서 요즘은 '아무나 걸려라'식의 아나테이너 '집단양성'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이것은 여러 방송국에서 다 진행중이지만
그 대표적 프로그램 중 하나는 <지피지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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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피지기>에는 메인 MC로 박명수, 현영, 정형돈, 그리고 최근 합류한 조혜련이 있고
서브 MC로 네 명의 여성 아나운서들이 함께 참여한다.
여기에 한 두명의 스타를 초대해 아나운서들이 질문을 하고
그 중 마음에 드는 질문을 채택하여 답변하도록 한다.
최근 들어 모두가 참여하는 게임 형식을 강화하는 등의 개선을 하고 있지만
기본 포맷은 여전히 이 서브 MC들로 기용된 여성아나운서들의 '경쟁'구조이다.


이러한 <지피지기>는 나름 MBC의 간판 오락프로그램들을 연구해
벤치마킹한 흔적도 보인다.
참신한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대한 인터뷰이의 평가를 구하는 방식은
<무릎팍도사>에서 '도사 배틀'의 형태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네 명의 아나운서들에게 경쟁을 하도록 함으로써
여성 아나운서들에 대해 차츰 친근한 이미지를 갖도록 하려는 의도는
<무한도전>의 여섯 남자들의 무한경쟁과 닮은 데가 있다.
또한 MBC는 아니지만, 예전의 <여걸식스>에서의 여성들의 경쟁구도에서도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러나...그 결과는 실패로 보인다.
좀 심하게 말하면, 도무지 <지피지기>에
그 허수아비같은 아나운서 네 명이 왜 필요한지를
전혀 이해하기 힘들다.


<무릎팍 도사>, <무한도전>, <여걸식스>의 형식을 차용했지만
그것들이 인기있는 이유, 본질은 전혀 끌어오지 못했다.

<무릎팍 도사>의 '도사배틀'이 재미있는 것은
정말 솔직하고 '독한' 토크를 주고받는 <무릎팍도사> 프로그램 전체가 주는
아우라의 덕분이며, 출연자의 이야기 듣기에 집중되어 있는
프로그램 포맷의 강렬함 덕분이다.
<지피지기>처럼 총 8명이나 되는 mc들 사이의 산만한 진행으로는 나올 수 없는
내밀한 이야기들이 오고가는 도중에 있는 질문들이기에
<무릎팍도사>의 질문을 두고 벌이는 '도사배틀'도 흥미로운 것이다.


<무한도전>과 <여걸식스> 속 다수 mc의 경쟁포맷이 재미있는 것은
그들 사이의 끈끈한 인간적 애정이 시청자들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짜로 '지네끼리' 신나서 논다.
그 과정에서 경쟁이나 싸움, 격한 벌칙을 나누는 것은
'놀이'라는 게 분명해 보이기 때문에
마음 편히, 유쾌하게 그들의 경쟁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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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지피지기>의 아나운서들은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경쟁에만 목을 매고 있는 듯 보인다.
초반에는 매주, 지난주의 아나운서들에 대한 리뷰 앙케이트 결과를 공개하며
누가 제일 웃겼는지, 누가 제일 호감가는 지 등을 조사, 발표했다.
그 순위에 따라 묘하게 일그러지는 이들 아나운서의 표정을 보는 것도 불편했고,
"다음주엔 꼭 좋은 결과를...!"을 외치며
투지에 불타 서로 끊임없이 탐색전과 경쟁을 벌이는 모습은
오락프로그램으로 즐기기 힘들게 부담스러웠다.

메인mc와의 융화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무식한 이미지'를 주로 보여주는 박명수 등의 연예인mc와
지적이고 고상한 이미지를 잃고싶지 않은 아나운서 mc들 사이에는
서로 섞일 수도 없고, 섞이고 싶지도 않은 듯한
묘한 기류가 감지된다.
(<상상플러스>가 아나운서가 서브MC에 가까운 역할을 함에도
연예인 MC들(이휘재, 탁재훈 등)보다 한 단 높은 데에 자리를 마련해주고
전체의 프로그램 진행의 중심을 잡도록 한 것이
왜 안정감을 주는지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묘한 기류의 원인을 이해하게 된다.
<지피지기>는 진행의 중심을 연예인이 잡고, 아나운서들이 재롱을 떠는
역의 구조를 띄고 있는 것이다. )

게다가 그들은 도무지 웃/기/지/가/않/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토크쇼 중심으로 들어와 끼어들지도 못하고,
재미가 없으니 그들의 출연분은 대부분 편집된다.
그들이 없어도, 아니 없어야 재미있을 것 같은데
도대체 왜 그들을 계속 그런 '허수아비'처럼 세워둬야 하는가?
점점 아나운서들에 대한 '신뢰'의 이미지만 흐뜨러지고 있고
한 명이었으면 주목해 봤을 아나운서조차
네 명이 같이 나오면서 다같이 별볼일 없어 보인다.

<지피지기>가 계속해서 지금의 mc형태를 고집하려면
제일먼저 그 아나운서들끼리, 그리고 박명수, 현영, 정형돈, 조혜련과도
좀 많이 친해지는 일에 더 노력해야 한다.
그들이 무의식중엔 서로 '언니', '오빠'라고 부를 만큼 사적인 친밀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이 어색한 분위기는 탈피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싼값'이더라도 아나운서를 네명이나 불러다가
아나테이너로 키우는 포맷은
그만두는 편이 <지피지기>로서는 더 좋을 것 같다.
초대손님이 좋아서 어쩌다 한번 보았던 나같은 시청자들의
뒷담화, 불평불만을 줄이고 지속적인 시청자로 남게 만들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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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무한도전>이 화제가 될 때에는 시큰둥하다가
최근에 와서야 <무한도전>에 맛을 들였다.

계기는 우연적인 것이었는데,
기분이 울적할 때 마침 TV에서 <무한도전>이 하고 있었고,
멍하고 우울한 기분에 TV를 끄거나 채널을 돌릴 힘도 없어서
그냥 넋놓고 쳐다보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낄낄 웃어버린 경험 한번-그것이었다.
이 우연한 경험은 일종의 '강박장애'처럼,
우울한 기분일 때 <무한도전>을 보면 증세가 나아진다는 자기암시로 이어져
그동안 방영됐던 <무한도전>들을 어둠의 경로로 열심히 다운받아
하루에도 몇개씩 보는 상태에 이르게 했다.

<무한도전>을 통해 '재발견'한 최고의 인물은 단연 박명수.
박명수의 매력과 장점은 따로 한 편의 글을 써야 할만큼
독특하고 복잡하며 중요한 것이라 생각되므로
여기서는 "<무한도전>이라는 시스템의 경계에 서서
나머지 캐릭터들의 '오버'를 균형잡아주는 존재"라는 정도로만 일갈.

물론 박명수의 '오버'가 없다는 것은 아니나
나머지 캐릭터들이 다른 근소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착하고, 감성적이고, 방정맞고, 귀여운 캐릭터를 기본으로 하는 데 반해
박명수는 이들의 오버스런 '착함', 눈물, 체제순응성을
적당히 깨 주면서 일반인들의 '상식'에 약간의 '위악'을 곁들여
<무한도전>의 색채에 균형감을 만들어준다.
그러나 또한 그러한 박명수를 다시 균형잡아주는 유재석의 존재가 있기에
<무한도전>은 사람들에게 '호감', '따뜻함'을 주는 프로그램라는 인상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도 빠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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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찾아 본 <무한도전>은 몇 개의 부류로 다시 나눌 수 있다.

1. 초특급 스타 초대 특집-김태희, 패리스힐튼, 앙리 등 초대

2. 몸개그를 위해 3D의 혹독한 상황에 처하게 하는 특집-무인도, 서울길찾기, 모내기 등

3. 몸이 고되지는 않으나 특이한 상황에 처하게 한뒤 6명에게 정착된 캐릭터에 따른 반응을 보는 특집-노홍철 집 방문, 신입사원 면접, 일본 팬미팅 등

4. '인간갱생'프로그램인양 (자칭)'평균이하'의 6명에게 무언가를 '학습'하게 하는 특집-스포츠댄스, 밴드 콘서트 등

이 그것이다.

그리고 각 경우에 맞춰 중간중간 <무한뉴스>라는 형태로
자신들의 신변잡기에 대한 이야기, 수다를 떨기도 하고,
여러가지 게임으로 편을 나눠 경쟁하게 한 뒤,
이들이 처절한 승부근성과 '무한이기주의'를 보이는 모습들을 보여주는 것이
프로그램의 기본 포맷이다.


1번과 같은 초특급 스타를 초대하는 형태의 경우는
앙리, 효도르 정도의, 한국에선 쉽게 볼 수 없는 정도의
희소성있는 스타가 출연하지 않는 한 사실 큰 흥미를 끌기 어렵다.
<무한도전>의 장점은, <불후의 명곡>이나 <라디오스타>의 MC들과 대비되게
나온 게스트에 대한 '무한한' 경외, 찬양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희귀' 스타들의 경우엔 시청자들도 6명과 거의 동일화되면서 볼 수 있고
그들 6명이 만들어내는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 덕분에
어렵게 모신 '손님 대접'이 흐뭇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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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정쩡한('신비주의'로 몸값만 비쌀 뿐인)국내 스타들을 초대했을 경우에는
<무한도전> 초반에는 의미가 있었는지 모르나
<무릎팍도사>라는 프로그램이 초특급 국내 스타들을 데려다
제대로 '까발기는' 일이 가능해 진 이후에는
6인의 '경외', '찬양'으로 점철된 초대손님 모시기 방식은
초대손님 없이 '평균이하'의 6인들끼리 벌이는 이전투구나 잡담보다도
지루할 때가 많다.

특히 최근에는 패리스힐튼이라는,
나름 '스타'라고 할 수는 있으나 어떠한 방향성을 갖고 '경배'하기엔
많-이 부족한 인물을 초대한 뒤로, 다시는 그런 초대손님 특집은 안했으면 싶을 정도이다.
또 이런 특집은 자체적으로도 많이 하는 편은 아닌듯 하고.

그러므로 나머지 세 가지가 이 프로그램의 주된 포맷이 되는데,
최근들어 이들의 '특집'에 대해
칭찬보다 비판을 보내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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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가장 '이슈'가 된 것은
<용궁특집>이라고 해서, 6명을 두 팀으로 나누어
한 팀은 헬기를 타고 바다 한가운 데에 있는 가스전에 가는 것으로
다른 한 팀은 배를 타고 가서 가스전으로 올라가는 바스켓을 타는 것으로
과제를 주었던 특집이었다.


이 특집에서 주로 '겁쟁이' 캐릭터가 많은 6명은
헬기와 바스켓을 타는 것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소리를 고래고래 치는 모습으로
한 시간을 채우는 바람에 사람들에게 원성을 샀다.
"이제 소재 고갈이냐?" "너무 안일하다" 등.
겨우 헬기 타는 것, 바스켓에 올라 고공 상승을 해야 하는 것 때문에
평균나이가 30대 중반인 이 6명이
그렇게 엄살을 떨어야 하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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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문인지, 어제 했던 <무한도전>에서는 <특전사특집>으로
간만에 제대로 혹독한 상황에 6명을 처하게 만들었다.
팬션으로 놀러간다고 꼬신 뒤,
그들을 특전사 부대의 훈련에 참가하게 하여
눈밭에서 구르고 얼차려를 시키고 눈밭에 묻어둔 라면 세개를 찾아
눈을 녹여 끓여먹게 하는 '강한' 3D노동을 굳이 시켰다.

그들이 얼마나 힘든지는
'상식'적인 수준에 가장 근접한 박명수의 반응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박명수는 거의 말도 잘 안하며,
지치고 잔뜩 추위에 언 얼굴로 겨우겨우 이 혹독하고 황당한 시츄에이션을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의문이 들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좀더 가혹한 상황을 만들어주라고 비난을 했던 것일까?
정말 저렇게까지 힘들게 촬영을 하기만 하면
사람들은 계속해서 <무한도전>을 좋아해 줄 것인가?


<무한도전>은 스스로 말하듯 '리얼버라이어티쇼'이다.
6명의 리얼한 캐릭터들, 그것이 다양하고 각기 개성을 가짐으로써 만들어내는
묘한 재미때문에 사람들은 이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 캐릭터들에 애정이 생기지 않은 사람들은 참 참을수 없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왜 저러한 애들의 허접한 짓거리를 보고 있어야 하나...이러한 생각은
나도 앞에서 말한 우연한 기회 전까지는 동일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특전사 특집과 같이 지나치게 혹독한 상황은
오히려 모든 캐릭터들을 동일화해버린다.
모두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는
같은 반응만을 보이기 때문이다.
유재석처럼 '프로'근성이 뛰어난 MC정도만
그 안에서도 가끔 웃음과 농담을 날릴 뿐
대부분은 힘들다, 이게 뭐냐, 미치겠다 등의 불평으로 입을 모을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분명, 별것도 아닌 상황에서
지나치게 오버하며 겁을 내거나, 화를 내거나, 눈물을 흘리는 '엄살'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그러나 이 때의 '별것도 아닌 상황'을 만드는 것은
상황의 혹독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의 목적성, 의도같은 것들이다.
그것이 꼭 '교훈', '계몽성' 같은 것일 필요는 없지만
그들이 무언가에 '도전'을 하는 것을 기본 목표로 하는 프로그램이라면
그 '도전'이 조금은 값진 어떤 것일때 빛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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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3D노동방식의 2번부류였다 해도,
모내기 특집과 같은 경우엔 많은 칭찬을 받았었다.
오락프로그램이기에 그들이 모내기를 직접 체험해 보는 신은
'체험 삶의 현장' 수준의 지속적이고 깊이있는 것은 될 수 없지만
적어도 그들이 저런 일을 체험함으로써
농촌 일에 대해 진심으로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
그리고 그 모습을 통해 역시 시청자들도 비슷한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것은
이 프로그램이 도전해야 할 것들의 방향을 잘 보여주었다.


4번부류 역시 그런 점때문에 사람들은 감동했었다.
스포츠댄스 대회에 실제로 참가하기 위해
한번 얼핏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석달에 걸친 연습을 진지하게 수행해 내는
'평균이하'이지만 참 '열심'인 6명의 모습을 보면
살아가는 것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정말 보잘것 없는 그들이지만, 자기가 맡은 조금은 어려운 과제를
열정적으로 하는 모습은 가짜가 아닌 '리얼'이기 때문이다.


<용궁특집>은 2번과 3번의 경계에 있던 기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도는 3번정도의, 약간 특이한 상황 투입이었으나
모든 출연진들이 2번의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과도한 반응을 보였고
그것을 촬영하는 제작진들조차 그들의 과도한 반응에 몰입해버렸던 듯하다.


그러나 <무한도전>이 좀더 장수하려면 이 2번과 3번 사이에서
자신들의 방향성을 잘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어느쪽이 됐든, '의미부여'가 될 수 있는 상황을 지향하는 것.
그러면서 신선한 소재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가능해야만 이 프로그램이 '한 물 간' 프로그램이 되지 않을 수있다.


"네가 생각해내 봐라. 그게 말처럼 쉽냐?"라고 한다면
나도 하나쯤은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의 '상황'들이 몸이 아프고, 힘들고, 지치고, 무서운 것들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왔고,
6명이나 되는 인물들이 모두 남성이라는 것,
그래서 그들이 아직 도전해 보지 못한 영역들이 여성과 관련된 것에 많이 있다는 것은
별로 의식되지 못한 게 아닌가.


<김장체험>에서도 아줌마들의 우악스런 '세일상품 쟁탈전'의 투지를 보여주긴 했어도
김장을 하는 것이 진정으로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거의 보여주지 못했다.
자기들 생각나는 대로 다 다듬고 정리된 재료들을 재미삼아 섞어서 양념 만드는 일로는
그들의 도전이 감동적이지 않다.


<아빠수업>도 아이가 너무 울자 곧 실패하고 아이를 엄마에게 돌려보내주는 것으로
급하게 마무리된 것 역시 지나치게 도전이 피상적이고 진지하지 못했다.
정말 육아체험을 제대로 하려면,
돌아갈 엄마가 없는 아이들이 사는 고아원에서 하루종일 아이들을 보살피는 정도는 해줘야
진정한 '무한' '도전'이 될 수 있다.


한국의 여성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한 두가지인가?
임신, 출산, 육아, 결혼생활, 명절지내기, 외모'불량'으로 받는 차별과 편견 등
그들 여섯 남자들은 죽어도 모르는 그런 세계의 고민들이 아직도 많고 많다.
그것들 속에서 도전의 과제를 찾는다면
그러한 도전들은 각 캐릭터들의 개성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을 정도의
무조건 힘들기만 한 일이 아닌(힘들어도 회피할 수 없는) 도전이며,
그들의 도전과정에서 보여주는 것들은
다른 수많은 시청자들에게 또 새로운 체험과 의식각성을 도울 수 있는 일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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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5 - [Mad for Drama/한국 드라마] - 왕의 '친구'들-<왕과 나>, <이산>
지난번 글에 썼듯,
월~화 밤 10시는 내게 늘 선택의 순간이었다.
먼저 방영을 시작한 <왕과 나>의 매력에 한참 푹 빠져 있던 터에
<이산>이라는 드라마를 재방송 등으로 뒤늦게 몇번 보면서
둘 다 포기하기 쉽지 않은 매력이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왕과 나>는 녹화로, <이산>은 본방으로 보는 쪽을 택했다.
시청률 측면에서야 <왕과 나>쪽이 손해보는 일이었지만,
내게있어 이 선택은 <왕과 나>를 우위에 두겠다는 의지였다.
즉, 돌발 상황이 생겨 10시에 TV앞에 앉지 못하더라도
<왕과 나> 만은 꼭 챙겨 보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주 부터 <이산>을 예약녹화하는 것으로 급선회했다.
그 몇 주전부터 약간 흔들리다가...결국엔 <이산>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결정을 하고 난 뒤에도
본방조차 <이산>을 보고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이것은 물론 나라는 한 명의 시청자의 의견이기도 하겠지만,
내 판단에 의하면 아마 앞으로도 <이산>의 시청률은 차츰 오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즉 나 뿐 아니라 대중들은 <이산>쪽을 더 많이 선호하게 될 것이다.

왜, <이산>인가?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나의 개인적 '감상'의 수준을 넘어서
드라마에 매혹되는 '법칙'에 관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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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과 나>의 초반

<왕과 나>의 초반은 참 매력적이었다.
그때는 두 부류의 인물 갈등 구조가 생성되어 있었는데,
하나는 아직 작은 크기이지만 아역들,
자을산군(훗날 성종)-윤소화(훗날 폐비 윤씨)-김천동(훗날 김처선)
이 어린 세대들의 계급을 뛰어넘은 우정과 사랑, 삼각관계,
그리고 이들이 앞으로 보여줄 활약에 대한 희망이었다.
이들의 이야기가 소설 <소나기>를 보는 듯한
순수함과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진지한 감정선의 묘사가
꽤나 흥미진진한 볼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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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른 하나는 조치겸(전광렬 분)-예종 사이의 대립을 둘러싼
궁 내부의 갈등이었다.
<왕과 나> 초반의 갈등은 이쪽을 통해 더 첨예하게 전개된다.
수렴청정을 받는 처지이나 국가를 개혁하기 위해
제일먼저 내시부에 손을 댄 예종의 개혁방침은
판내시부사인 조치겸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중 가장 문제가 된 정책은 내시들의 혼인을 금지하는 법안이었다.
내시들의 부정과 비리가, 그들이 '가족'을 만들기 때문에
사리사욕을 갖게 되어 생기는 것이라고 판단한 예종은
내시들의 혼인을 금지하는 명을 내린다.

그러나 내시의 수장인 조치겸은 "내가 내시로 죽을지언정 고자로는 살지 않겠다"며
파무(내시부 파업)를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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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들은 모두들 자신의 육근단지(내시들의 잘린 양물을 보관하는 단지)를 들고
머리를 풀고 나와 국왕에게 금혼령을 거두어달라는 시위를 하게된다.
그리고 모든 내시부 업무를 중단하였다.


이 대목은 <왕과 나>에 매료되는 데에 가장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었다.

<대장금>을 보면서 수랏간 나인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들이 '프로페셔널' 요리사가 되기위해
얼마나 혹독한 트레이닝의 과정을 거치는지
그렇기때문에 그들은 나라와 궁 내에서 아주 한미한 위치임에도
나름의 자부심을 갖게 되는지를 알게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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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궁녀라는 존재들의 힘을 보게 되었었다.
궁에 방문한 청나라 사신에게 겁탈을 당하여
아이를 낳아 그 아이가 다시 궁녀가 될 때까지 길렀던
한 상궁의 에피소드가 그 대표적 예였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남성 관료들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고 묻자
"그게 궁녀들입니다."라고 대답하던 모습, 잊혀지질 않는다.

궁녀들은 궁이라는 큰 집안의 사소하지만 꼭 필요한 일들을 모두 하고 있다.
그들이 없으면 왕은 밥도 못먹고, 옷도 못입고, 자식도 못낳고 기르고, 잠도 못잘 것이다.
그런 궁녀들, 궁에 '예속'되어 있지만,
궁을 모두 '관리'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 커다란 궁 안에서 자신들끼리 연대하면
궁녀가 아이를 몰래 낳을 수도, 그 낳은 아이를 몰래 기를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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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대장금>을 볼 때에도 내시에 대해선 잘 몰랐다.
<대장금>에서 내시로 등장하는 '상선'어른은
가끔 생기는 궁녀, 상궁들 사이의 분쟁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정도와
왕에게 방문자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것 정도밖에는 하는 일이 없어보였다.


그런데 <왕과 나>에서 내시들이 파무를 한 뒤,
그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며칠째 내시들이 일을 안하니, 궐 안이 온통 먼지와 오물투성이로 변했고
왕명을 전달해 신하들을 소집하는 일도 어려워진 것이다.


궁녀와 마찬가지로 내시들 또한
궐 안에서는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들이라는 걸,
<왕과 나>는 이 사건을 통해 제대로 보여준다.
그리하여 이 드라마가 다루고 있는
왕과 내시 사이의 갈등과 화합의 문제가
하나의 드라마 소재로서 가질 수 있는 가치를 입증해주었다.


그래서 좋았다.
늘 그렇듯, 역사 속에 감춰진 존재들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일은
역사드라마를 보는 최고의 재미이다.


더구나 전광렬과 전인화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는
여전히 매혹적이었다.



2. 그러나...아역의 성장 이후.

<왕과 나>는 많은 비판들에 시달린다.
어릴 적 성종, 윤씨, 처선의 역할을 했던 아역배우들에 대한
지나친 사랑과 관심, 기대가
성장후의 모습으로 등장한 세 배우들에 의해 충족되지 않은 탓이다.
외모의 문제라든가 연기력의 문제...이런것들이 일차적이었다.
구혜선이 써클렌즈를 꼈네, 성종 혼자 일찍부터 난 덥수룩한 수염..
이런것들로 불만을 말하는 시청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것들은 드라마의 시청률에 크게 문제가 안된다.
연기력은 차츰 나아질 수 있고, 외모는 시간이 지나면 점점 아역들에 대한 잔상이 지워지면서
다시 적응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래서 이들이 등장하고도 나는 한동안 <왕과 나>에 대한 충성도를 유지했었다.
차츰 나아질 것이라고, 아역과 비교해가며 그들을 단죄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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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들이 등장하고 나서부터 더 문제가 된 것이 있다.
바로 그들의 행동방식이 '매력'이 없다는 것.
조치겸과 한명회, 인수대비 사이에 생긴 대립각이
여전히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갈등고리를 만들어가는 반면에,
성종, 윤씨, 처선의 역할은 어릴 적보다도 미미하고 무기력했다.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조치겸의 양자가 되어 내시부 최고의 권력을 갖고자 했던 야심가 내시인
정한수(안재모 분)가 처선에게 조치겸 양자의 자리를 빼앗긴 뒤
그와 적대세력이 되어 조치겸의 치부 비리내용을
인수대비(전인화 분)와 한명회 측에게 내놓는 대목이었다.

이 일로, 조치겸이 관리하고 있던
비자금 관리처가 발각되게 되는데
이때 양부 조치겸의 심부름으로 이 관리처에 들렀던 김처선(오만석 분)이
인수대비 앞에 잡혀오게 된다.
누가 시킨 일인지, 그게 무엇하는 곳인지를 추궁당하는 처선은
묵비권을 행사하며 양부에 대한 의리를 지킨다.
그래서 피터지게 맞고 감옥에 갇힌다.

조치겸이 부정축재 의혹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성종은
어머니와 할머니 즉, 인수대비와 정희왕후(양미경 분)를 찾아가
조치겸이 그런 일을 했을 리 없다고 말하지만 별무 소득이 없다.


또한 처선이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윤씨는
처선이 있는 감옥에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가슴아파한다.
그리고는 성종을 찾아가 처선이 그랬을 리 없다고 도와달라고 하지만
성종은 내가 아직 수렴청정을 받는 중이라 힘이 없다고 말할 뿐이다.
그날 괜히 성종을 찾아갔다가 인수대비와 맞닥뜨려
그렇잖아도 윤씨를 마땅치 않아 하는 데다
처선과 윤씨의 관계를 의심하는 인수대비에게 찍힌다.


정리하자면,
조치겸과 인수대비를 둘러싼 갈등에서

1. 처선-맞고 감옥에 갇혀 있다.
2. 윤씨-처선을 찾아가 울고 성종에게 말해본다.(소용 없다.)
3. 성종-어머니와 할머니를 찾아가 말해본다.(소용없다.)

와 같은 일밖에 안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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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러는 동안,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되었을까?

조치겸을 몰아내려는 것은 한명회 쪽이다.
한명회는 조치겸이 자신의 권세를 약화시키기 위해
윤씨 같은 후궁을 들이는 일에 앞장섰다는 것에 분노하여
조치겸과 대립하게 된 것이다.


또한 조치겸의 양자가 되고자 했으나
처선에게 그 자리를 빼앗긴 정한수도 시기심에
조치겸과 대립하게 되었다.

인수대비 역시 원칙주의자로서
마땅찮은 윤씨를 통해 성종의 마음이 어지럽혀지는 것도
한명회의 딸인 중전의 입지가 흔들리는 것도 못마땅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주도하고 있는 조치겸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조치겸은 한명회를 찾아가
예전에 예종을 독살하고 성종을 새 군주로 추대한 뒤
한명회에게 성종의 부원군 자리를 차지하게 해주는 대신
내시부에서 쫓겨난 조치겸의 뒤를 봐주기로 한 약정서를 근거로
한명회를 협박한다.
즉 예종을 독살하는 일에 한명회와 조치겸이 공모를 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서가 조치겸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명회는 그동안 정한수를 통해
이 문서를 훔쳐오게 했기 때문에 자신을 꿀릴 것이 없다며 발뺌한다.


여기까지 보면 조치겸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의 조치겸의 활약상이 또한번 빛나주셨다.
분명 한명회가 빼돌린 그 문서가
다시 조치겸의 품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조치겸은 한명회에게 "대감이 가져간 것은 제가 모사해 놓은 가짜입니다."
라고말한다.

그리고는 한 괘짝 가득 똑같은 문서들이 들어있는 함을 준다.
여기에도 그 문서들이 있다고.
물론 집에도 얼마든지 있다고.

한명회는 좌절할 수 밖에 없다.
어차피 '진짜'는 어디에도 없다.
조치겸은 이미 그 문서를 받자 마자 원본은 태워없애버렸던 것이다.
그러니 함 가득 있는 모든 문서는 가짜이자 원본이 된다.


아...이 얼마나 멋진가?


이렇게 하여 한명회 문제는 수습했고,
부정축재는, 사실상 왕실의 재정이 어려워
왕실 품위유지를 위해 고리대업을 했던 것이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조치겸은 위기를 모면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처선도 풀려나고
성종과 윤씨는 마냥 기뻐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처럼, <왕과 나>에서는 이제 다 컸으니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해주셔야 할
성종-윤씨-처선이 여전히 '어른'들의 손에 놀아나고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형국이다.
그들은 맨날 울고 짜고 나무 뒤에서 훔쳐보고 쓰러진 걸 업고 가고...
뭐 그런 짓만 한다.
그리하여 조치겸-인수대비를 둘러싼 긴장은 여전히 흥미롭지만
극의 반은 지리하기 짝이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러니...지금 2주째 안보기 시작해서 모르겠지만,
<왕과 나>가 살아나려면
그들 세 사람의 역할이 좀더 능동적이고 유효성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앞으로 얼마나 잘 만들어내는가...에 앞으로 <왕과 나>의 성패가 달려있다.


<왕과 나>는 예전 <여인천하> 팀이 만든 드라마이다.
<여인천하>때의 중전과 후궁들을 둘러싼 팽팽한 권력다툼 이야기는
보는 내내 흥미진진했다.
그 힘이 지금 기성층인 인수대비, 전광렬 등을 통해 다시 재현되고 있다면
이에 반해 젊은층의 삼인방의 이야기는 너무 수동적이어서 힘이 없다.
그들은 맨날 사랑이라는 감정을 빌미로 나약하고 무기력한 눈물만 흘릴 뿐이다.
그들까지도 이 권력다툼 속에서 제대로 역할을 해 줄때에야
<왕과 나>는 계속 시청자들을 매혹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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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coolya 2007/11/09 17:23

    쓰다보니 길어져서...<이산>의 매력은 다음 번에 따로..^^

  2. 맞아요. 저도 왕과나 보다가 너무 유치하고 지지부진해서..
    게다가 님은 참을 만 하다던 그 배우들의 연기력이 너무 봐주기 괴로워서
    이산으로 선회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제 "TV, 대세인 '사극'과 '무한도전'을 따르라?"(스타뉴스10.24)라는
기사가 떴을만큼, 요즘 '사극'이 대세이다.
현재 공중파에서 방영되고 있는 사극이
<왕과 나>, <이산>, <대조영>, <태왕사신기>, <사육신> 등 여러편일 뿐 아니라,
또 그 사극들이 대중들에게 엄청난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다.

오랜 세월에 걸친 '드라마홀릭'자로서 드라마의 트렌드를 열심히 쫓다보면
원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사극도 어떤 타이밍에는 볼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드라마를 만드는 사극은 참 신기하다.
이미 어떤 줄거리로 흘러갈 지가 '뻔한' 정도가 아니라 '명백한' 이야기임에도
왜 사람들은 또 사극을 보고, 또 보는 것일까?
사극이 대세인 이 시절에 그 문제에 대해 여러가지로 생각해 보곤 하는데
참 놀랍고도 오묘하고 답이 쉽지 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최근의 사극을 보면, 왜 사극이 새삼 대중들을 매혹하는지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역사연구에서도 미시적 연구가 '대세'이듯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요즘의 사극은 이 '미시사'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사료에는 거의 기록되지 않은 어떤 인물,
거시사의 관점에서는 보잘것 없어보이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들의 빈틈이 차곡차곡 채워져가고 있는 것.
<대장금>에서 시작된 '궁녀'라는 '한미한' 존재들의 삶부터
<왕과 나>의 '내시', <이산>의 '도화서 다모' 등, 그동안은 관심조차 받지 못했던
그런 인물들이 새삼 역사물의 '주인공'으로 등극하는 데에서
새로운 재미를 선사하고, 역사를 다시 보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순수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 대중들 자신처럼, 또 시대가 흘러 역사 속에는 이름조차 남지 못할 그런 존재들에게도
존재의 가치가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대중들의 자존감을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월-화요일이면 <이산>과 <왕과 나> 사이에서
어떤 드라마를 볼 것인가를 가지고 늘 고민하게 되는데,
(그러나 곧 <이산>쪽으로 마음을 정착하게 될 것 같다.
그 이유에 대해선 다음 기회에 자세히 얘기할 것이다.)
이 두 드라마의 재미가 바로 그런 점에 있다.

그런데 두 드라마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성종, 정조라는 우리가 국사공부할때면 꼭 외우게 되는
조선조의 왕들이 하찮은 신분의 천동이, 송연이, 대수를
"나의 동무들이오"라고 말하는 대목에 있다.
철저한 계급신분 사회에서
가장 높은 신분의 왕과 '친구'가 되는 내시, 다모, 양민이 존재했다는 것,
그들이 감히 왕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함께 모험을 즐기고, 손을 붙잡고 위험을 헤쳐간다는 이야기,그리고 결국 그들의 '우정'이 왕에게 힘을 실어주고, 세상을 손에 얻게 만들어 준다는 스토리는
현재 우리 사회와 대중이 원하는 영웅에 대한 '로망'을 자극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영웅을 원한다.
그러나 나와 전혀 상관없는 영웅이 아니라, 나로 인해 바뀌는, 나와 함께 영웅이 되는
그런 영웅을 원한다.
이것은 곧 자신이 영웅이 되길 바라는 마음의 변형태이다.
내가 영웅이 되고 싶지만 나의 능력과 운명은 거기까진 미치지 못할것 같을 때
나의 작은 힘이 '능력과 운명'을 타고난 영웅에게 개입되어 큰 힘으로 변화하는 것,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목격하고 싶어진 것이 지금 대중, 민중들의 마음이다.

인터넷이 그러한 가능성을 여러 차례 실현시켜 준 탓도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사소하지만 꾸준하고 끈기있는 결집이
자신이 영웅이 되진 못해도 누군가를 자신의 힘으로 영웅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또는 잘못된 영웅을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직접 체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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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와 <이산>에서 아역배우들이 큰 인기를 끄는 것에
그들의 '성인' 못지 않은 연기력 뿐 아니라
성인이 되어 계급차이가 분명해 진 시점보다 훨씬
그들 사이의 그러한 교호작용이 쉽고 분명하게 일어나는 이야기전개에도 있지 않을까?
양민, 천민은 왕과의 연대보다
아비를 잃은 어린 세손이나 사가에 있던 왕족과의 연대가 여러모로 쉽다.
그들이 '어린 아이들', '동무들'로서 작은 위기를 헤쳐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 사이의 연대가 곧 앞으로의 '왕'이라는 영웅을 메이킹하는 데에 작동할 것이란 생각을 하면
사람들은 무한한 그 가능성에 흥미와 기대를 갖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대선때가 되면 사극이 꼭 대선의 구도를 유비한다며 거론되곤 했다.
<용의 눈물>때 김영삼-이회창의 구도가, <태조왕건>이 김대중 정부의 탄생을,
<대장금>은 노무현 정부의 혼란을 예측하고 비유적으로 암시하곤 했다.
이번에도 곧 대선을 앞에두고 역사드라마들이 난무하는 현상은
사회정치적 측면에서도 눈여겨 볼 만하다.


각 대선후보들은 스스로가 난세의 '영웅'이라며
민심에 호소하고 있다.
우리의 경제난, 양극화, 사회 부조리를
자신만이 해결해 줄수 있다고 소리높이고 있다.

그런데 묻고 싶다.
그들 중 우리와 함께 영웅이 되고자 하는 후보는 누구일까?
늘 하던대로, 어디서들 그렇게 똑같은 '똥색'의 점퍼를 구하는지 입고서는
우군우군 사람들을 뒤에 몰고 시장을 돌면서 생선 꼬리를 잡아 들고
"참 싱싱합니다! 우리 재래시장을 살려야 하는데.."같은 입에 발린 소리를 하고
동대문 시장에 가서 괜히 사람들 장사하는 데 방해하며
지게짐을 들어보는 "쇼"를 하는 그런 것 말고,
누가 우리를 진심으로 '동무'로 여겨 함께 영웅이 되고자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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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든 허구이든,
이들 드라마에서의 정조와 성종은 그들이 왕이 되기 위해
양민들과 진심으로 동무가 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국왕 '성종'이 아닌 '자을산군'은
자신의 집에 굿을 하러 온 무당의 자식인 천동을 보자 마자
그에게 담을 같이 넘어 장에 구경을 가자한다.
거기서 만난 왈자패에게 쫓기면서도 둘은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자을산군이 왕이 된 뒤 소화낭자가 걱정한다는 소식을 가지고 찾아온 천동에게
성종은 곤룡포를 입혀주고는 천동의 옷을 입고 궐 밖으로 나가 소화낭자를 만나고 온다.
내시가 된 뒤 성종 앞에 나타난 천동이 자신의 이야기를 믿어달라며 댓돌에 머리를 찧자
달려가 천동의 몸을 일으켜 세우며 자신의 동무라 말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국왕 '정조'가 아닌 세손 '이산'은
9년 만에 만난 그 무식한 '동무' 대수가 도둑인 줄 알고 휘두르는 주먹질에도
눈물을 글썽이며 "나다, 대수야! 너의 주먹은 여전히 맵구나"라며
온 마음을 바쳐 그의 주먹세례를 맞아준다.
언젠가 꼭 무관이 되어 세손저하 곁을 지켜주고싶지만, 자기의 실력이 너무 부족하다며
의기소침해 하는 대수에게 "아니다. 너는 분명 훌륭한 무관이 될 것이다. 내가 태어나서 딱 두번 맞아봤는데 그게 다 대수 너의 주먹이 아니더냐"라는 농으로 격려할 줄 아는 세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들이 이처럼 '민중'과의 '동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과거에 그들이 진정한 민중과 동무를 맺고 우정을 쌓았기 때문이다.
하루 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다.


대선후보가 된 뒤에 동무인 척 하는 사람들 말고,
그 이전부터, 오랜 세월동안 진정으로 민중과 동무를 맺어온 후보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힘으로 자신이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그런 후보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그런 후보가...있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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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0/26 10:45

    오.. 성종과 정조라.. 조선의 제일 멋있는 왕들 (세종은 놀랍고!)이네요.

    헐.. 박근혜가 나왔으면 선덕여왕 다루었을려나?.. 선덕여왕을 사극으로 만드는 것은 참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네요.. 김춘수 김유신도 나오고, 헌화가 같은 로맨스(?)도 있고 ㅋㅋ
    근데.. 요즘은 모두 단재의 후신들인지 신라보다는 고구려가 대세라.. 쩝;;

    여튼 잘 봤습니다. 기대되네요~ 이산 평 :)

  2. 2007/10/26 10:45

    저도 우연히 '왕과 나' 한 에피소드 봤는데..
    '내시'들을 보는 것은 약간 공포에요.. 거세불안증인가.. 쩝;;
    그래서 보기 불편해요;; 헐..

  3. 근데요. 2007/10/31 18:07

    이 드라마를 잘 안 봐서, 궁금해서 질문을 드리는 것인데요.
    그 왕들은 동무들과 친구가 되어주는 것 외에 그 동무들을 친구로 둚으로써 양민들의 삶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나요? 개인적으로 누군가가 낮은 신분임에도 친구가 되어준다는 것 말고 그것이 그들의 성인 이후의 정치관에 결정적 영향을 주게 되었나요?( 혹은 될 것인가요?)
    높으신 분들이 평민들과 동무가 되어준다는 것은 좋지만 그게 뼈 속 깊이, 그리고 실질적으로 통치에 결정적인 기능을 하지 않는다면, 그냥 인간성 좋았다 포용력이 있었다, 소박하시다...이런 건 넘 허무해요.
    뒷부분에 대선후보들의 지게쑈와 시장행차부분을 읽다보니 불현듯 든 생각이랍니다.

  4. BlogIcon coolya 2007/11/01 16:05

    음, 좋은 지적이심미다~^^감샤합니다~

    지금 이 두 드라마들의 주인공은 아직 정치를 하고 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둘 다 힘없는 국왕(수렴청정), 힘없는 세손으로서 자기 '생존'을 위해 싸우는 중이죠. 그래서 자신들의 정치관을 통해 정치를 하고 백성을 대하는 것이 전면적으로 나타나진 않습니다, 아직(글고 제가 이번주부터 <왕과나>를 버리고 <이산>에 정착해버려서..<왕과나>는 특히 잘 모르겠습니다ㅎㅎ).

    그러나...<이산>의 경우, 그러한 조짐이 좀 보이고 있습니다.

    역사상 정조가 그림을 사랑했다는 점은 원래 좀 알려져 있지요?
    전 역사에 워낙 약한 터라 그 이상의 자세한 것들은 잘 모릅니다만.
    이 드라마에선 그 점이 많이 부각되는데요, 그 이유가 송연이 때문입니다.
    도화서 다모인 송연이는 그림에 재주가 있는데, 다모이기 때문에 '화원'이 될 꿈은 꾸지도 않고, 화가 가문 자식이지만, 춘화에는 천재적 재능이 있으나 다른 그림에 있어서는 도통 재주가 없는 이천(지상렬) 대신 몰래 그림을 그려주곤 합니다.

    즉 여성이기 때문에
    자신의 재주를 다른 남성에게 빌려주는 것 외에는 드러내지 않는 거죠.
    그랬는데, 이산은 송연에게 청나라에서 사온 화집을 하나 선물합니다.
    그림의 필세가 섬세하고 특이하다며 그림을 보고 있는 송연에게
    '여화원이 그린 그림이라서 그럴 것이다'
    하면서 송연에게도 여화원이 되어달라고 말합니다.

    "여자라서 화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낡은 생각이다. 내가 바꿀 것이다.
    내가 세상을 바꿀것이니 너는 그림을 그려 너의 재주를 마음껏 펼쳐라."
    라면서 말이지요.


    또 한가지 에피소드는,
    최근 궐 안이 큰 역모사건에 휘말렸을 때,
    사도세자의 익위였던 사람들이 역모 주동자로 몰려 잡혀옵니다.
    그들이 영조를 비난하고, 사도세자를 기리며, 세손 이산을 추종한다는 모함을
    이산의 적대세력들이 조작해서 만든것이지요.
    그 사건의 최종 배후가 이산이라는 모함과 함께.

    그런데 이 사건의 추국을 이산에게 맡김으로써
    영조는 이산에게 한번 기회를 줍니다.
    그들을 이산이 직접 추국하고,
    그들로부터 이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자백을 받아내기만 하면
    이산은 결백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빠져나갈 여지를 준 겁니다.

    그러나 그 신료들은 사실 아무 죄가 없기 때문에
    이산은 살아남더라도 그들은 무고한 죄로 죽게 되는 것이었지요.
    그러자 이산은 추국을 거부합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호위하고 옹호하다, 결국 재야에 묻히게 되었던
    예전 아버지의 충신들을 희생시켜가면서 살고자 하진 않는 것입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달려와서 이산에게
    "그들이 아니라 저(홍씨)를 죽여서라도 살아남으셔야지요!"하며
    추국을 종용합니다.
    그랬더니 이산이
    "살고자 이러는것입니다 어마마마.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고자 그러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죽여서라도
    세손은 이 모함에서 빠져나가셔야 한다는
    그 전 익위들에게도
    "살아주십시오. 살아남으셔서 제게 힘이 되어 주십시오."라며
    그들을 자신이 끝까지 지켜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생존도 위태로운 상황에서 말이지요.


    아직 세상을 바꿀 힘이 부족한 세손이지만, 이런 말과 행동들이 모이고 모이면
    좋은 정치를 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더 두고봐야겠지만.

  5. 아..
    저는 이산도 좀 밋밋한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왕과나의 어이없음에 비할까 싶네요.
    왕과나는 유승호!! 어린이 아니 청소년으로 정말 왕다운 왕 보여주면서
    잘 출발하더니 왜 그렇게 삐걱거리는지...

    고주원 성종-_-;; 정말 아무 생각 없어보이고, 연기도 못하더군요.
    한마디 한마디 어색 그자체!!!



    진정한 동무...와 정치인의 쇼라는 글의 주제와는 다른 댓글을 달게 되어 죄송해요~

  6. 위에 댓글에 "거세 공포증"이 있네요.ㅋ

    남자들은 정말 저런 게 있나봐요???
    그래서 중성화되는 동물들한테 그렇게 거품물고 반대하는건가.

몸의 역사

2007/09/23 13:20 | Posted by coolya
 

강신익, <몸의 역사-의학은 몸을 어떻게 바라보았나>(살림, 2007)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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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익 선생님의 이 책과 <몸의 역사, 몸의 문화>를 사면서 처음 든 생각은  “한 발 늦었다”  였습니다. 물론 접근의 출발점이 의학과 문학이라는 점에서 많이 다르지만, 몸을 가지고 역사와 문화를 말해보고 싶은 저에게 강신익 선생님의 이 책은 큰 도움이 되는 한 편, 저 같은 의학의 문외한으로서는 말할 수 없는 부분들까지 상세히 설명되어 있는 책이라는 사실 때문에 좌절감을 안겨 주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근대에 들어 한국 땅에서 몸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달라졌으며, 그것이 한국의 문화를 어떻게 바꾸어놓았는가’에 관심이 있는 저는, 선생님의 이 두 권의 책들을 통해 제 의문에 대한 의학적인 측면에서의 많은 영감과 지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점, 먼저 감사드립니다.


1. 저는 병원에 가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TV나 영화에서 사람의 몸에 주사바늘을 꽂는 장면도 섬뜩해하는 편이라, 웬만하면 주사 맞고 피 뽑고 하는 일은 안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의사·간호사들과의 그런 물리적인 접촉, 치료 과정이 싫어서 뿐 아니라, 제 몸이 ‘부끄러워서’라도 저는 병원에 가는 것이 꺼려집니다. 말하고 싶지 않은 내 몸의 경험이나 비밀을 그들은 환히 꿰뚫어 보고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의사라는 존재들은 내가 아님에도 나를, 나의 몸을 더 잘 알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으로 나를 평가하고 통제하려 들 것만 같아 그들이 ‘두렵습니다.’ 그들이 저의 차트에 적는 그 알아보기도 힘든 ‘꼬부랑글씨’의 진단과 처방 내용도 마땅치 않습니다. 내 몸에 대한 판단에서 그들은 나를 소외시킵니다. 또 쏟아지듯 나오는 의학 관련 기사들 사이의 모순들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의학적으로 ‘건강’해지는 길인지도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선생님의 이 책에서는 저와 같은 의학 앞에서 평생 ‘환자’의 입장으로만 살아야하는 사람들(선생님께서도 <몸의 역사 몸의 문화>에서는 ‘대중’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고 계시듯 이러한 존재를 여기서는 잠정적으로 ‘대중’이라고 규정하겠습니다.)이 가지는 몸과 의학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에 대해서 의학의 ‘진보’가 가져온 ‘대가’라고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각종 영상장비를 통해 우리 몸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외과수술의 영역도 그만큼 넓어졌다. 심지어는 칼을 대지 않고도 몸속 깊숙이 자리한 병소를 도려낼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진보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내가 간직한 비밀스런 영역이던 몸이 이제는 X-ray, MRI 등 각종 검사의 다양한 의학의 시선에 노출되고, 그렇게 노출된 내 신체정보가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넘겨지고 공유함으로써,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게 되었다.”(64쪽)


의학의 ‘진보’는 몸에 대한 사유를 바꾸어 놓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선생님께서 <몸의 역사 몸의 문화>에서 더 상세히 논하고 계시는 의철학이라든가 의학과 사상의 연관관계에 대해 읽어보면 그 과정을 보다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몸 담론, 몸에 얽힌 문화의 변동과정에 관해 진단하고 반성하려 할 때 역시 의학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의학자의 입장에서 의학(의 역사)을 반성하려 하는 시도 역시 저처럼 의사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고맙고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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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의학은 인식과 방법의 폭력에서 벗어나 생생한 삶의 현장 위에 다시 세워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근거 없는 무병장수의 환상을 퍼뜨릴 것이 아니라, 앎과 삶이 하나였던 과거를 되짚어가며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눈으로 지금의 앎과 삶을 바라볼 수 있다.”(8쪽)


“내가 말하려는 의학사 역시 세계를 이해하는 앎의 체계와 그에 따른 삶의 방식에 대한 것이다. 특히 그런 체계와 방식이 몸에 대한 관점을 어떻게 바꾸는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몸에 대한 과거의 관점을 적절히 받아들여 현실과 비교하는 것이 의학사를 공부하는 까닭이며 내가 이 책을 쓰는 목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과학을 보편과 합리에 근거한 지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먼저, 그 보편과 합리를 구분하는 잣대가 무엇인지 검토해야 한다....과학이 스스로 씌운 문화의 폭군이라는 혐의를  벗으려면 과학이 내세우는 보편과 합리라는 가치를 논리와 도덕과 문화로 정당화할 수 있어야한다.“(4쪽)


“보편성과 합리성의 기준에서 보면 동양의학은 벌써 사라졌어야 마땅하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20세기말부터 동양의학의 영향력이 훨씬 더 커졌는데, 이것은 모든 것의 바탕이던 과학(서양의학)의 보편성이 심각하게 도전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서양의학의 보편성과 합리성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수천 년에 걸쳐 몸에 쌓인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의학의 역사는 이렇게 앎과 삶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과정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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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런데 바로 이점, 의학자가 의학을 반성하며, 그것을 대중(의사가 아닌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님으로써, 이 책은 약간 혼란스러워지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때때로 ‘우리’라는 표현으로 의학이 가져온 몸 정체성의 혼돈 속에 둘러싸여있는 대중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부분에서는 의사들을 ‘그들’이라고 표현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인간 염색체의 DNA를 구성하는 30억 쌍의 염기 서열을 모두 알게 되었지만, 이런 지식이 우리의 삶과 어떻게 연관되었는지 생각해보면 그저 막연할 뿐이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구조 그 자체로만 보고, 왜 그런 구조이며 그 구조가 우리가 살아가는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따져보지 않았기 때문이다.”(8쪽)


“그들(의사-인용자 주)은 사람을 몸과 정신으로 나눠 정신에 상처를 남기지 않고, 몸만 실험 도구로 쓸 수 있다는 말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그렇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우리들도 거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해부학 실습실에서 죽은 몸을 열어 보면서 그것을 물질의 덩어리로만 여기지는 않는가? 내 몸의 일부를 기계나 다른 사람에게서 얻은 장기로 바꾸면서 내 몸을 하나의 기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가?“(9쪽)


“우리는 쉽게 몸을 앎과 삶의 결합 또는 그것의 결과물로 생각하지 못한다. 그것은 한가한 철학자가 즐기는 사유의 모험이나 이상일 수는 있어도 바쁜 현대인에게는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책에서 이 같은 현실에 도전해 보려고 한다.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상식마저도 어느 정도는 역사와 문화의 산물임을 보여주고, 우리의 상식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지 그리고 우리의 의학은 변해가는 상식의 흐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생각해 볼 것이다.”(13쪽)


그런데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위의 인용부분들에서 말하는 ‘우리’가 정말 의학자가 아닌 ‘우리’, ‘대중’일까요? 이를테면, DNA의 염기서열의 구조를 발견했다는 사실은 의학자가 아닌 ‘우리들’의 삶에는 그다지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학문, 전문지식에 대한 ‘대중’들의 태도이지요. 그들이 아는 ‘상식’과 그 상식에 의거한 ‘삶’은, 애초부터 학문적인 ‘앎’과는 분리되어 있거나 그것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재구조화한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식물에서 ‘대중’들은 외우기도 힘든 외국어로 된 무슨 성분이 들어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사실은 대중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식물을 먹으면 숙면을 취할 수 있다든가, 암을 예방할 수 있다든가 하는 식의 지식은 급속도로 대중들에게 확산될 수 있지요. 그렇듯 DNA의 염기서열 구조를 발견한 사실 앞에서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대중’이라는 ‘우리’들이 아니라, 의학자들이 아닌가요? 그리고 ‘우리’는 굳이 그것의 구조가 우리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따져볼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요? 그 연결고리를 만들어주어야 하는 것은 의학전문가들의 몫이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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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우리’의 입장에서 “내 몸의 일부를 기계나 다른 사람에게서 얻은 장기로 바꾸면서 내 몸을 하나의 기계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저는 대부분 아닐 거라고 생각됩니다. 내 몸의 일부를 기계나 다른 사람의 장기로 대체해야 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존재들입니다. 그런 시술을 하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르는, 즉 내 몸이 소멸되어버릴지도 모르는 위협의 상황에서 현대(서구)의학이 발명해 낸 기계와 장기이식술에 의존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나 자신의 몸에 대해 치열하게 감각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겐 그런 수술을 받는 자신의 몸이 기계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몸에 이식되는 기계와 다른 사람의 장기마저 자신의 몸으로 받아들여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 기계 삽입, 장기이식을 물질적으로만 바라보는 이는 그 수술을 하는 의사들일 뿐 아닐까요?

이러한 대목들에서 ‘우리’는 그러므로 의학의 문외한인 대중들이라기보다는 의학자들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글 몇 군데에서는 바로 ‘의사’로서의 정체성과 ‘의사’의 범주를 넘어선(넘어서고자 하는) 존재로서의 정체성이 혼란스럽게 섞여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의사인 ‘그들’과 의사가 아닌, 잠재적 ‘환자’인 ‘우리’ ‘대중’들 사이를 명확히 구분하시고자 한 것인지요, 아니면 양자를 아울러 얘기하고자 하신 것인지요?

이 문제는 결국 이 책의 목적인 현재의 의학과 몸에 대한 인식을 반성할 주체가 누구이며, 그 주체들이 취해야 할 행동의 방향, 대안에 대한 물음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의학자·의사와 일반인들이 지금-여기의 몸에 관한 질문들에 동일한 방식으로 답하고 동일한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요? 현재의 의학이나 기계로서의 몸 인식에 대한 맹신, 과잉적용의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로 접근하는 일이 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의학자와 그 지식의 ‘적용’을 받게 될 일반인 사이에는 조금 달라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예를 들면, 루키즘(Lookism)이 팽배한 이 시대에, 성형수술을 하려고 상담을 받으러 온 성형중독자에게 의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내 몸은 마음이고 마음이 내 몸이다. 몸은 물질이면서 정신이고 추상이면서 눈에 보이는 현실이다. 그래서 몸은 하나의 문화 공간이 된다. 몸은 육체와 정신으로 나뉜 것이 아닌, 그저 ‘몸’일 뿐이다.”(13쪽)라는 선생님의 입장에 의거할 때, 몸을 고치는 일은 마음을 고치는 일일 수 있기 때문에 성형수술이 필요할 수도 있고, 몸은 물질이 아닌 정신, 추상이기도 하므로 몸을 고치려하지 말고 마음을 다스리라고 권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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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 질문과 관련하여 더 말씀 드리면, 선생님께서 이 책에서 논의하실 때 전제하시는 사실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의학의 ‘진보’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마치 몸의 비밀은 이제 거의 다 풀린 듯 보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몸을 다 볼 수 있게 되었고, 몸에 관한 탐구가 유전자라는 최소물질단계에까지 이르러서, 이제는 인간 몸의 신비가 거의 다 밝혀졌다고 전제하시는 듯 보입니다. 다만 우리(그것이 의학자든, 일반 대중이든)가 반성해야 할 것은, 거의 다 드러난 이 몸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의 문제에만 있다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몸은 이제 신성한 불가침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몸의 어떤 부분도 첨단 진단장비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없고, 장기에서 세포에 이르기까지 몸은 변형·대체·보충·재생의 대상이 된다. 몸은 세포와 조직과 장기의 수준에서 분리 가능한 부품의 집합이다...인공보형물, 장기이식, 인공수정, 대리모, 생식의학, 재생의학 등의 발달로 몸의 정체성은 더욱 심각한 혼란에 빠진다. 나는 누구이고 내 몸은 무엇인가?”(64~66쪽)


그러나 사실 의학은 엄청난 ‘진보’와 ‘발전’의 이면에, 여전히 미지의 영역들이 무한히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의 ‘말씀’이고 ‘마이더스의 손’인 줄 알았던 의사선생님들도 수많은 실수와 오류를 범합니다. 각종 의료사고와 오진, 의약업계의 이해관계에 따른 분쟁 등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 역시 신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불완전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제가 ‘문학박사’임에도 문학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듯, 그들도 사람의 몸에 대해서, 의학에 대해서 통달한 존재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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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의문에 대해 Atul Gawande라는 의사의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Complications)>(김미화 역, 도서출판 소소, 2003.)을 보면서 저 역시 좀 더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현대의학이란 여전히 ‘불확실성’의 영역에 속해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의사에게는 너무나도 막강한 재량권이 주어지는 현실을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 그 책의 기본 태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의사·의학자가 현재의 몸 담론에 대해서 취해야 할 태도와 일반인들이 취해야 할 태도가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몸의 정체성, 나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은 혹시 그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의학이 몸에 관한 비밀의 많은 부분을 밝혀냈고, 몸에 생기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이면에 여전히 풀리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 거기에서 (특히 의학자들의) 몸에 관한 정체성 혼란은 더 심화되는 것이 아닐까요?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4. 한편으로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몸을 의학(기술)으로 ‘고치려’는 욕구와 관련된 성찰을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그 해결이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비르쇼가 세포들의 공화국으로 그린 몸이 우생학에 이르자 정치권력의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가 현대에 오면 일부 사이비과학이 만들어낸 관념의 희생양이 된다. 내 몸에서 뽑은 정보를 나도 모르게 저장하고 가공하며 때로는 상품으로 만들어 팔기도 한다. 사회문화가 만든 몸의 이미지에 따라 내 몸을 바꾸려는 욕구에 휘둘려 마치 마약에 빠지듯 다이어트 열풍과 성형중독에 빠져들기도 한다. 나는 이제 내 몸의 주인이 아닌 것이다.”(75쪽)


제가 준비하고 있는 책에서도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의문을 여전히 풀지 못했는데요, 몸짱·얼짱이 되고자 하는 인간들의 욕망은 ‘나쁜 것’입니까?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한 노력(성형수술, 다이어트)을 하는 것은 결국 내가 ‘내 몸의 주인이 아닌 것’이 됩니까? 데카르트식으로 말하자면, 몸을 ‘다듬는’, ‘고치는’ 노력을 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닌지요? 왜 몸을 고치고자 하는 것이 내 몸을 잃는 일일까요?(덧붙여, 엊그제 성형중독, 몸짱중독에 빠져드는 것도 ‘뇌 기능 이상’이라는 연구결과가 뉴스에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성형중독-몸짱중독’은 뇌기능 이상」, 뉴시스, 2007.7.2 기사) 이런 것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선생님께서 이 책의 말미에 가서 일종의 ‘대안’의학으로 말씀하신다고 보이는 ‘면역학’과 ‘진화의학’을 참조하더라도 저는 이 의문이 잘 해결되지 않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외부와 접촉을 통해 새로워진 내가 적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변하지 않는 나를 지키는 것으로 믿었던 면역세포가 사실은 끊임없이 나를 바꾸면서 외부와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내 정체성은 나를 끊임없이 바꿈으로써 비로소 지킬 수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이처럼 면역학에서 몸은 나와 남과의 수많은 관계들로 구성된다. 이전까지 의학이 변치않는 실체인 몸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었다면, 면역학에서는 수많은 관계를 통해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것이 된다.”(86쪽)


“몸을 기계로 보는 근대의 관점을 거부하고 수천만 년에 이르는 진화의 관점에서 몸을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진화의학 또는 다윈의학이다. 진화의학에서 질병은 몸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고, 진화적응의 부작용일 뿐 고장 난 몸이 아니다. 진화는 우리 몸속에 수많은 오류를 만들고 또 그것을 수정한다. 질병은 오류를 수정하기 전 몸의 상태다. 그렇지만, 수정의 과정이 완벽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진화는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통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질병은 진화의 과정에서 흔히 나타날 수 있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질병은 정복해야 할 적이 아닌 순간 적응해 나가야 할 조건일 뿐이다.”(88쪽)


면역(학)에 대한 선생님의 설명을 보며 참 많은 시사점을 얻었습니다. ‘수많은 관계를 통해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몸에 대한 면역학의 새로운 설명은 몸의 정체성에 대한 어떤 출구를 보여주는 듯하여 반가웠습니다. 진화의학 역시 몸의 ‘다양성’의 측면을 밝혀주고, 또한 몸을 시간의 연결망 속에서 이해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또다시 생긴 의문은, 면역학이나 진화의학의 관점에서도 현재의 ‘몸 가꾸기’에 대한 인간들의 열망은 일종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것’일 수 있고, ‘진화’의 과정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내 몸이 나의 것이 아니게 되는’ 어떤 비극의 종착점이 아니라, 또 그러한 ‘중독’들마저도 몸에 대한 다양성, 정체성 구성의 과정으로 ‘포용’해줄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권선징악’이 아니라 ‘권미(美)징추(醜)’가 시대의 가치관이 되어버린 것에 대해 사람들은 쉽게 개탄하고 비판하지만, 왜 비판받아야 하는가, 왜 문제인가에 대해서, 근본적인 성찰은 안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몸이라는 것이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데 있어 엄청나게 중요해졌다는 사실은 분명한데, 왜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 사회문화에 ‘적응’하려고하는 노력이 잘못된 것인지, 그리고 이를 ‘교정’하고자 한다면 누가 바뀌어야 하는지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퍼슨웹 북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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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2007/09/24 22:28

    오~ 잘 읽었습니다. 의사 친구들에게 사주어야 (현대의학을 고발한다 포함) 하겠어요. ㅎㅎ

    제 생각에 루키즘의 문제는 우선, 쉽게 계급의 문제로 치환될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빈/부가 추/미라는 가치론적 영역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외모를 가꿀 여가/비용의 문제. 이를 문제시하지 않고, 미를 권하는 사회는 그 미가 '노력'의 문제로 바꾸는 것. 기실 외모는 노력하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것 + 부의 문제가 상당분 있는데, 이를 무능력으로 규정하는 것.

    둘째, 외모에 따른 호불호는 문화를 매개로한 인간 본성이라 할 수 있을터이지만, 이것을 절대시화하는 문화는 우선 태생적인 조건에 한계지어지고 후천적인 노력(부에 기반한)을 할 수 없는 사람입장에서는 일종의 계급같이 작동하기 때문에, 평등이라는 가치상 우려할 부분이 큰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계속 딴지를 걸었던, 이쁜 사람만 드라마 나오는 것의 문제점은 이 외모-계급의 고착화를 낳는게 아닐까요?

    이의 해결방안. 비연예인의 외모를 갖은 이들이 대동단결. Tv에서 비연예인스러운 외모가진이들의 쿼터제 실시. 그 이유. 미란 절대적 기준이 아니고, 노출정도에 따라서 정이 들기도 하기 때문에, 우리 일반인과 비슷한 외모를 지닌 이들의 노출빈도를 높이고, 이들이 긍정적 역할을 맡도록 함으로서, 대중에게 일반인 외모를 어필할 수 있는 권리. 즉 드라마 제작시, 해당 역할마다 통계학적으로 안면윤곽 눈크기 코높이 등등을 직업군마다 조사해서 '전형성'이 있는 얼굴, 체형, 외모를 중시할 것. (새로운 파시스트 등장. 외모의 '전형성' 논란!)

    Tv라는 매체의 파급력을 고려하고, 그 '공공성'을 인정한다면, 일반인 다수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일반인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연예인'과 유사한 외모를 가진 소수 특권 계급의 전파 독점에 대한 투쟁...

    "외모론"에 대해서 써봐야겠네요. 역시.. 또 말뿐인 것이지만.... -_-;

  2. 2007/09/24 22:30

    역시.. 저 "외모론"의 저자 정군을 기반으로, 연예인포비아 관련 소설을 써야되는데.. 외모지상주의도 비꼬면서, 파시스트적 네티즌의 행태도 비판하면서, 이에 대한 일부 지식인의 발광도 비난하면서, 연예인들도 비웃어주면서 말이죠.

    헐..

화려한 휴가

2007/08/06 20:34 | Posted by 짐씨네
 

화려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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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힘은 무섭다. 결코 잊혀질 수 없을 것 같은 상처들도 현재성을 상실하면 균질한 과거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경험한 이에게는 너무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고통과 실감의 순간들은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세대들의 감각 속에서 의미와 개념으로 전환되어 버린다. 모든 현재는 과거가 될 운명을 거부할 수 없기에 조금이라도 앞서 태어난 이들은 자신이 경험한 어떤 것들이 사장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발버둥쳐야만 한다. 과거를 어떻게 현재로 소환할 것인가, 역사를 어떻게 지금-여기와 관련시킬 것인가의 문제는 기억을 갖고 있는 자들, 지울 수 없는 사건을 몸속에 각인하고 있는 이들의 소명이다. 기억을 어떤 방식으로 서술할 것인가는 지금 이 자리에 어떻게 서 있을 것인가와 긴밀하게 연관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꽃잎>이 광주 금남로에 피를 뿌렸던 원혼을 어린 소녀의 몸을 통해 은유적으로 살려내며 지식인적 사유와 죄의식을 이야기한 영화였다면, <화려한 휴가>는 좀 더 직접적이고 대중적인 코드로 현재와 접속하려고 한다. 이 영화가 광주에 다가가려고 했던 그 길 위에서 이성욱의 글처럼, 대중의 죄의식이 자본을 위해 소비되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지만, 과연 형식의 대중성은 언제나 위험한 것인가. 그런 의문에서 이 글은 시작한다.



지적인 성찰을 피해 도청에 이르는 길


<화려한 휴가>의 기본적인 설정은 <태극기를 휘날리며>와 상당히 유사하다. 의좋은 두 형제가 있고, 큰 형은 실질적 가장으로 동생의 보호자임을 자처한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형제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인이 있다. <태극기를 휘날리며>의 나약하고 불쌍했던 어머니는, <화려한 휴가>에서는 혈연적인 연결은 아니나 심정적으로 모든 이의 어머니상처럼 작용하는 눈 먼 어머니 나문희로 대체된다. 6.25와 5.18 이전 두 가족의 낯간지러울 정도로 화목하고 끈끈한 유대감이 전시되지만 이러한 풍경은 깨지기 위한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어떠한 정서적 공명도 자아내지 않는다. 그들의 모습은 비극적인 사건이 없었으면 언젠가 도달할지도 모르는 (실제로는 도달 불가능하지만, 도달할 수 있다는 환상을 자극하는) 가상이며 주인공으로 하여금 훼손된 과거를 회복하기 위한 어떤 희생도 불사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김지훈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그날의 금남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이끈 것은 독재 정권의 폭력적인 정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라기보다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누군가에게 자행된 실제적 폭력에 대한 거부반응 때문이었을 것이다. 택시운전기사 민우(김상경)는 신애(이요원)와의 첫데이트를 방해하는, 극장 안으로 파고든 최루가스나 눈앞에서 시민을 폭행하는 공수부대의 모습을 목도하고도 어떤 저항감도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그저 빠른 달음박질로 피해 달아나야할 상황일 뿐, 저항정신을 자아내는 충격적인 광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 시대에 폭력은 일상화되어 있었고, 민중들에게 그런 모습은 고통스럽지만 감내해야 하는 현실이었다. 보통 사람들의 감내와 순응이 저항으로 전화되기 위해서는 좀 더 강렬하고, 직접적인 상실의 경험이 필요하다. 진우(이준기)는 절친한 친구의 죽음때문에 거리로 나왔고, 진우를 만류하던 민우가 총을 잡게 된 것은 진우를 잃음으로써 동생의 상실감을 스스로 체감하게 되었기 때이다. 이런 정서의 연쇄 반응, 슬픔의 도미노가 숨죽이던 민중을 폭력에 대항하여 일어서게 만든다.


지식인 주인공을 최대한 배제한 <화려한 휴가>에도 정부와 민중의 대립에 대해 직접적으로 발화하며 비판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인물은 존재하는데, 그것은 시민군의 대장인 박흥수(안성기)와 김신부(송재호)이다. 전역 장교인 박흥수는 민중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것은  ‘진정한 군인’의 태도가 아니라며, 대항전선을 형성하는 구심점이 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진정한 군인’이 과연 무엇인가는 매우 추상적이며 모호하므로, 그것은 그저 눈앞에 펼쳐진 폭력을 부정하는 것에 그칠 뿐 군대/정부의 작동방식 그 자체에 대한 근원적 반성이라고 보기 힘들다. 김신부는 정신적 지원자의 역할을 하며 외신의 보도를 시민군에게 전달해주면서 독려하지만 그의 비판적 발언은 독백이나 탄식에 가깝다. 이 작품이 켄 로치의 혁명 영화들과 차별성을 이루는 지점은 이 두 인물의 역할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전남도청의 지하실에서 시민군은 미군의 개입에 대해 두 인물의 분리된 견해를 잠시 맞이하지만 그것은 어떤 토론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일주일 뒤의 종말이라는 박흥수의 논리에 쉽게 손을 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분명 당대에 민주주의 수호자로 표상된 미국의 이중성과 당시의 정부의 지배논리를 어떤 방식으로 돌파해야할 것인가라는 전망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계기를 차단한다. 아마도 그러한 전망이 존재했더라면 영화 속에서 그날의 광주가 더 많은 현재성을 획득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날의 도청은 무고한 민중의 집단 장례터가 되는데 그치지 않고 지금-여기를 위한 무엇이 될 수 있는지까지 말할 수 있는 사유의 장소로 형상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미 규정되지 않은, 형성되는 주체로서의 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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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화려한 휴가>는 5.18의 혁명성의 실체를 지적 논의를 통해 형상화하는 길을 피해나간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정서적 반응을 최대화하면서 그것을 관객에게 그대로 이양한다. 그것을 위해 금남로를 물들인 선혈을 보여주는 데 인색하지 않으며, 공수부대가(폭력의 근원이 누구였는지를 애매하게 암시하며 악의 화신처럼 형상화된 공수부대의 대장만을 보여주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비극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관객이 영화 외적인 지식을 통해 메워 넣지 않으면 안 된다)자행한 폭력을 극적으로 제시한다. 비극의 근원을 극렬하게 파헤치기보다 비극에 처한 인물의 상황만을 최고조로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비극적이기보다 멜로드라마틱하다. 비극은 주인공이 표상하는 정의가 실현불가능함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필연성을 통해 제시하지만, 멜로드라마는 지적, 심리학적 필연성보다 그들이 처한 상태의 비장미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멜로드라마는 보는 이에게 견고한 사유를 촉구하지 않고 정서적 동화를 자아낸다. 이러한 효과는 바로 대중성과 쉽게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이 장르가 갖고 있는 양날의 칼이 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사회를 지배하는 보편적 논리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그 논리로 인해 파생되는 삶의 폭력성을 과잉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지적성찰이 가득한 영화들은 현상에 거리를 두고 비판적 자의식을 통해 분석해내지만, 그 과정에서 대중과의 호흡을 잊어버리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멜로드라마는 말랑말랑한 외피를 통해 대중의 정서 속으로 깊이 침투하고 현실의 균열된 지점들을 드러낸다. <화려한 휴가>는 80년대를 지배했던 폭력적인 정치의 핵심으로 다가서지는 않지만, 그것의 외현을 대중이 가장 소화하기 쉬운 형태로 제시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주요 캐릭터 가운데 유일한 여성인 신애이다. 그녀는 이미 과거속의 혁명에 참가할 수 없는 현재의 관객들이 정서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동화될 수 있는 인물이다. 간호사인 신애는 총을 잡는 대신 총에 맞고 쓰러진 시민들을 치료하는 역할을 한다. 앰뷸런스를 타고 총격전의 한가운데로 침투한 그녀는 사람을 살리러 갔다가 죽이고 마는 아이러니한 체험 속에서 분열된 자아를 경험한다. 이것은 5.18의 시민군이 총격전을 통해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했던 것을 비난하는 설익은 비폭력주의가 그날의 시민들에게 불가능했음을 설득하는 대목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옳음을 폭력을 통해 시위했다기보다 그것 외에는 자신의 혹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지키는 일이 불가능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들이 그 과정에서 겪었을 심리적 혼란상을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이미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녀가 도청을 빠져 나와 지프차를 위에서 불 꺼진 광주시내를 돌며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외치는 것은 실상 이 영화의 주제이자,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거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당시의 광주에서 도청의 시민군과 집안에서 숨죽이고 있는 이들은 그들과 우리로 분리될 수 없는 심정적 상태였을 것이니 말이다. 그녀가 확성기를 통해 말을 거는 이들은 6.25나 광주나 동일한 비극적 역사라며 무차별적 과거로 몰아넣는, 인식의 어두움 상태에 있는 오늘날의 관객인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혼란 속에서 대중의 힘을 처음 보았던 구스타프 르 봉은 그들이 가진 방향성 없는 힘과 감성본위의 태도에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감정의 충동질에 의해 움직이는 군중을 폄하하며 대중이란 무지로 똘똘 뭉쳐진 거대한 타자로 규정했던 그도 그들 안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큰 힘이 도사리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대중이란 언제나 동일한 정서에 반응하고 무자각적 행동을 양산해내는 확고불변한 대상이 아니라 매번 다른 방향성을 갖고 운동하며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되는 집단 주체이다. 그러므로 대중적 양식을 차용하고 그들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한다는 것 그 자체가 <화려한 휴가>의 치명적 약점이라고 보아서는 곤란하다. 이 영화가 대중의 시선을 어디로 향하게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이 작품은 ‘5.18의 광주와 죽음을 각오하고 그들이 지켜내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매우 충실하며 대중을 자극할 수 있는 영화적 장치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물론 해석을 포기하고 기억을 선택한 이 영화가 의의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은 ‘5.18’의 민중을 전면적, 직접적으로 제시한 첫영화라는 영화사내에서의 위치적 특수성 때문이며 이런 면죄부는 이 작품까지만 유효하다. 한국관객은 앞으로 더 많은 광주를, 80년대에 대한 더 깊은 성찰을 만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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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모>는 내가 키운다!-‘다모 폐인’의 Interactiv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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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작용성(interactivity)이란 디지털 미디어의 발달로 수용자가 미디어, 영상 텍스트의 내러티브, 내용에 개입하고 영향을 줄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 상호작용성은 쌍방향 텔레비전, TV시청자게시판, 게임의 하이퍼텍스트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다모>의 드라마 제작진과 매니아 시청자들의 열광적인 반응 사이의 상호작용성은 그 자체가 드라마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1년여의 제작기간, 편당 2억원의 제작비 등 다른 드라마에 비해 파격적인 ‘대우’를 받아온 <다모>는 첫 방송에 앞서 시청자 700명을 초청해 공개 시사회를 갖기도 했다.
이때부터 <다모>의 시청자들과 <다모> 게시판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다른 드라마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드라마를 즐겨보는 시청자들의 일상적 행동 정도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은 좀 달랐다. 그들이 올리는 시청자 게시판의 내용은 단순히 ‘드라마가 재미있었다’ 수준의 시청소감이 아니라, 자신이 감명받은 장면들을 편집해 하나의 뮤직비디오로 만들어 동영상을 링크하고, 극중 대사를 모으고, 각 인물들의 구도를 표로 만들고, 감초역할의 조연들까지 동원한 다모 패러디물로 넘쳐났던 것이다. 차츰 이들은 스스로를 ‘다모 시청자’ 정도가 아닌, ‘다모폐인’이라고 지칭하며 적극적으로 이 드라마에 반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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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인”이란 어휘의 첫 유래가 ‘DC 인사이드’라는 모 디지털카메라 관련 인터넷 사이트였듯, ‘다모폐인’들은 단순한 드라마의 시청자라기보다는 자신들이 본 드라마의 새로움에 열광하고 적극적으로 개입 수용하는 모습으로 이 드라마에 대해 지지를 보내었다. 자신들이 본 신선한 화면들, 영화 못지않은 웅장한 스케일의 앵글들에 대해 열렬한 환호를 보내며, 이것을 끊임없이 ‘복제’하고 ‘패러디’함으로써 재생산해내었다. <한성좌포청신보>등의 <다모>신문까지 만들어내며 이제 <다모> 시청자게시판을 넘어서서 <다모> 전문 홈페이지, 사이트를 제작하는 데에까지 나아갔다. 그리하여 언론까지도 ‘다모 폐인’들의 존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사이트에서는 숱한 다모 패러디물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다모>의 대사들은 유행어가 되기 시작했으며, 폐인들의 말투는 하나같이 <다모>의 등장인물들의 그것을 따라해 지금은 아예 ‘다모폐인’만이 아니라 온라인상의 대화에서 흔히 사용하는 하나의 보편적 말투로까지 자리잡았다. 총 14회가 방영된 드라마에서 200만건이 넘는 게시수를 기록한다는 것, 그 자체가 이 드라마의 팬들의 숫자와 열성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 방식은 수동적인 ‘반응’의 차원을 넘어서서 자신들 스스로 드라마에 개입하고 드라마의 전개와 분량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제목

이 표지판의 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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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원밖으로 발을 내놓지 마시오.

쩌어비이

앞에 두글자는 please don't로 번역이 되오. 뒤에 두 글자는 모르겠소.

허..

나체로 소리치며 뛰지마시오?

꼬장

욕설금지 아니옿?

펭귄

입만뚫린사람 출입금지. 귀,눈,코,입이 모두 있을 것.

여름반바지

칭 위 쉬엔 후아 - 애새끼들 뛰고, 떠들고, 장난치지 마랏~!

넝너카게

칭 위 쉔 화 : 소란 피우지 말아주시오.

때놈

칭 우 쉬엔 화 : 깝치지 말것

여름반바지

칭 우 쉬엔 후아 : "우"가 맞네요...^^;;

잉여인간

젓가락을 던지지마시오

받칟왕

행복하십니까?

dd

간단하네... 사진처럼 따라하지 마라..

개마왕

예! 저뒤에 계신분은 저희 어머니가 확실합니다!!

                          (이하 생략)...



위의 방식(출처: http://dcinside.com/)이 바로 폐인 문화의 전형적인 예이다. 하나의 수수께끼에 대해 하나의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더 다양한 답을 만들어내느냐가 그들에겐 더 중요하다. 남이 못본 부분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해내고 반응해내는 것에 열중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자신들의 ‘재미’와 ‘웃음’을 찾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그 웃음의 텍스트를 다시 비틀어 보고 패러디하며 숨겨진 부분을 찾아내려고 애쓴다. 그들이 왜 그러한 일을 하는가? 자신의 하루에서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가며 왜 그렇게 <다모>의, <다모>에 의한, <다모>를 위한 “폐인”이 되었는가? 그 대답은 허무하게도 “그냥”이다. 어떠한 목적이나 이익을 위해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그냥 즐기고 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를 ‘폐인’이라고 지칭했다. 자신들의 행위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원리와는 꽤 동떨어져 있다는 것. ‘무목적적’이라는 것. 그런 점에서 그들은 ‘폐인’이며 그 사실을 당당하고 유쾌하게 즐긴다. 그들은 누구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도, 개인적인 욕심을 위해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판단은 날카롭고 정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문화콘텐츠의 취향에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이 콘텐츠들을 판단하는 가장 명확한 기준은 바로 “재미”이다. 그들에게 재미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리고 자신들의 마음에 든 콘텐츠에 대해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목숨을 걸고 홍보하고 전도(?)한다. 그 방법으로 사용되는 것이 인터넷이라는 디지털 미디어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전파 속도는 엄청나다. <다모>가 동시간대에 방영되었던 <야인시대>라는 강적을 만났음에도 매니아층들에 의해 20%가 넘는 시청률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폐인’들의 ‘무목적적 문화 즐기기’, 그리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의 덕분이다. 그들은 가장 예민하게 문화콘텐츠들에 반응하며, 그 느낌을 자기에게서 그치지 않고 타인들에게까지 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문화적 코드를 파악하여 그에 맞는 콘텐츠를 개발한다면, 그 콘텐츠가 성공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럼, ‘다모폐인’들은 왜 <다모>에 열광했을까? 사실 <다모>가 완벽한 드라마였다고 할 수는 없다. 신인 연출가와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만큼 허술하고 서툰 면도 많다. 특히 드라마의 후반 이후 이야기와 연출이 갈피를 못잡고 많이 흔들렸다. 그럼에도 왜 <다모>를 말하는가? 초짜 감독과 작가, 시청자층의 폭이 한정되어 있는 역사 드라마의 한계, 캐스팅 배우들의 낮은 지명도, 동 시간대의 경쟁 드라마(<야인시대>)의 우세한 선점(先占) 등의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를 성공으로 이끈 힘, 그것을 밝혀내는 일은 일개 드라마에 대한 감상이나 분석이 아니라 ‘다모 폐인’이라는 문화적 현상에 대한 탐구이기 때문이다.


2.  <다모>, 숨겨진 과거를 추적하다!

<다모>는 역사드라마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크게 히트를 친 역사 드라마들의 특징은 우리의 과거를 왕실과 귀족 속에서 찾아보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왕족과 사대부관료들의 세력다툼, 이를 위한 분당과 정쟁의 역사는 중고교시절 지루한 국사 교과서에서 배울 만큼 배웠던 것이다. 게다가 <장희빈>에서와 같이 이러한 권력쟁탈전의 뒤에는 ‘베겟머리 송사’로 남자를 뒤흔드는 ‘요부(妖婦)’들이 있다는 식의 남성과 여성에 대한 정형화되어버린 캐릭터설정에도 식상할 만큼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의 역사에 흥미를 느끼지만 이제는 새로운 방식의 역사를 보고 싶어했다. 이러한 시청자들의 욕구를 잘 파악해서 만들어진 역사 드라마들이 <허준>이나 <상도>, <여인천하>와 같은 드라마들이었다. <허준>이나 <상도>와 같이, 왕실과 사대부의 세계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다루든가, <여인천하>와 같이, 남성중심의 정치를 탈피한 이야기를 다룸으로써 시청자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이들은 왕조실록에는 감춰져 있던 역사, 중심이 아닌 주변부의 역사를 ‘미시적(微視的)으로 그리는 드라마들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역사 드라마들이 조금씩 진화를 해오고 있었던 시점에 등장한 드라마가 <다모>이다. 그런데 <다모>는 엄밀히 말해서 정통사극은 아니다. 역사드라마는 보통 정사극, 야사극, 창작역사극의 세가지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정사극이란 시대, 사건, 인물이 역사적 사실인 드라마로, 보통 왕조실록이나 역사적 기록서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정통사극이다. 그리고 야사극은 시대, 사건은 정사이지만 픽션과 허구의 인물을 가미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창작역사극은 사건과 인물 모두가 픽션인 역사드라마로 시대적 배경만을 과거에서 가져온 경우이다. <조선왕조 오백년>이나 <용의 눈물>, <태조 왕건>과 같은 드라마는 실재(實在)했던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만든 정사극이고, 최근에 만들어진 <허준>이나 <대장금> 등 기록된 역사적 사실이 많지 않은 역사적 인물을 중심으로 허구적 요소를 많이 가미하여 만든 역사드라마는 야사극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다모>는 실존했던 인물이 아닌, 당대의 상황과 사회구조의 틀만을 가져와 순수하게 창작해 낸 드라마라는 점에서 창작역사극이라고 할 수 있다.

<허준>이나 <대장금>은 그나마 실존했던 인물들이기 때문에, 허구적 요소가 태반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역사의 접혀 있던 페이지를 펼치는 일 정도의 의의는 있지만, <다모>를 보고 우리가 국사 공부에 도움을 받기는 영 어렵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를 통해 우리는 또 한번 우리의 과거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가부장제 사회질서에 의해 여성의 사회진출이 불가능했던 조선시대에 “茶母”라는 직업여성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다모'(茶母)=============================================== 


“다모”(茶母)란?

조선에는 '다모'(茶母)라는 여자 형사의 역할을 한 직업 여성이 있었다.

'식모'(食母), '침모'(針母)와 더불어 관가나 사대부 집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던

천민 신분의 사람에게, 그것도 여성에게 '수사권'이라는 직업적인 책임을 부여했다는 점은 의외의 일이다. '다모'라는 여성들은 규방 사건의 수사, 염탐과 탐문을 통한 정보 수집, 여성 피의자 수색 등 잡다한 수사 권한을 가졌음은 물론 톡톡히 제 몫을 해냈다고 하며, 나아가 궁궐에서 일했던 한 '다모'는 역모 사건의 해결에 일조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줄거리>

 ‘다모(茶母)’는 조선시대의 여형사로, 방학기의 만화 <다모>를 원작으로 하여 만들어진 드라마이다. 역모죄에 휘말려 집안이 풍비박산되는 바람에 관비로 전락, 다모가 된 채옥(하지원)과 서자 출신의 포도청 종사관 황보윤(이서진),혁명을 꿈꾸는 화적 두목 장성백(김민준)이 중심인물이다.

드라마는 세 남녀의 비극적인 운명을 씨줄로, 차 심부름하는 관비이면서 여형사 역할을 하는 ‘다모’와 포도청 포교들이 펼치는 조선시대 형사의 활약상을 날줄 삼아 촘촘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낸다.

좌포도청 다모(茶母)인 채옥은 여인들이 관련된 사건의 조사를 맡은 포청 소속 관비이다. 양가집 별당 아씨 살해 사건은 채옥의 기지로 범인이 가려지지만 수사에 무리가 있었다며 종사관인 황보 윤(이서진)은 오히려 채옥을 나무란다. 나라의 근본을 흔드는 위험한 범죄, 위조엽전인 사주전이 시중에 돌자 포청이 은밀히 수사에 들어간다. 채옥은 남장을 하고 경기도로 기찰에 나서고 전국 방방곡곡에 포교들이 잠행에 나서는데 이 과정에서 채옥은 장성백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사랑을 느끼지만 장성백은 채옥이 어릴 적 헤어진 오빠이다. 장성백과 황보윤 사이에서 갈등하는 채옥, 그리고 역모를 둘러싼 쫓고 쫓기는 관계, 첨예한 대결 등에 의해 이 드라마는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그러나 채옥을 살리려다 죽임을 당하는 황보윤, 황보윤의 복수를 하려고 장성백을 죽이는 채옥, 장성백이 죽으면서 남긴 말에 그가 자신의 오빠임을 알고 역시 죽게 되는 채옥. 이 세사람의 운명은 그렇게 비극으로 끝난다.


주요등장인물


- 좌포청 다모 (하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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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포도청 소속 다모. 포도 종사관(종6품) 황보윤의 심복.

어려서 익힌 검과 권법에 18반까지 수련하면서 여성으로는 상당한 수준의 무도에 올라 있으며 특히 반팔 길이의 단도(短刀) 두 자루를 잘 다룬다. 위급하거나 여러 명을 상대할 때 사용하는 표창솜씨도 일품이다.

 

- 좌포청 종사관(종6품) 황보 윤 (이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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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포도청 포도 종사관. 황해도 신천 현감을 거쳐 평양부 서윤을 지낸 아버지와 개성상인이던 남편을 여읜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첩으로 시집을 오게 된 어머니 오씨 사이에서 태어나‘명문가의 서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자랐다.








 

- 화적 장성백 (김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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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의 고수로 알려진 백검이 장성백이다. 전라도 남원의 관노로 살다가 멍석말이를 당해 반죽음이 된 채 시체 더미 속에 버련진 어린 성백... 시구문 밖 초병에게 수수 서말을 건넨 나환자 황씨 부부에게 팔린다. 자식을 갖고 싶어하던 황씨 부부의 손에 자랐다. 열 다섯 살 되던 해 문둥이 마을에 찾아 온 육십 노인의 손에 이끌려 마을을 떠난 뒤, 스무 네살이 되도록 민가에 내려오지 못하고 산채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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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역사는 사실 사대부들의 늑장부리는 팔(八)자 걸음걸이처럼 굉장히 정태적이다. 늘 침략당하기만 한 역사, 공격이 아닌 수비밖에 못한 국력, 변화를 두려워했던 정치, 당파싸움에만 몰두했던 사대부계층...이러한 것이 우리가 우리의 과거에 대해 자주 떠올리던 이미지였다. 물론 이러한 이미지를 만든 데에는 우리의 실제 역사보다도 일본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식민사관의 탓이 클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입견을 뒤집어 엎을만한 증거로서의 새로운 역사 발굴이나 교육이 그 동안은 다소 부족했다.
그런데 최근의 역사드라마들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조금씩 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드라마 <허준>을 보며 시청자들은 한의학의 과학성과 전문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상도>를 보며 중농주의 정책만을 고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던 조선시대에 음지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던 상업의 모습을 체험하게 되었으며, 같은 궁궐 내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여인천하>는 왕비와 후궁들이 단지 왕의 ‘총애’를 얻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모함’을 하였던 것이 아니라, ‘권력’을 잡기 위해 스스로 ‘정치’를 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역사를 보게 했으며, <대장금>을 통해 기존의 왕족 이야기 중심의 사극에서 엑스트라적 존재였던 궁녀들이 각자의 분야에 있어서 엄청난 ‘프로페셔널’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삶은 결코 정적(靜的)이지 않았다. 오히려 현대 사회 못지 않은 활력과 역동성이 존재하는 동적인 세계였던 것이다.

<다모>는 조선시대 여성이 범죄현장에서 사건을 해결하고 범인을 수색하는 활동을 했음을 보여주고, 사랑방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공자왈 맹자왈이나 읊는 선비가 아닌 하늘을 날고 칼을 휘두르는 역동적인 조선시대 사람들을 그렸다. 이 드라마에서의 황보윤(이서진 분)의 직위였던 ‘종사관’도 이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주목받은 조선시대의 직책중 하나이다. <다모>가 등장하기 전까지 포도청에 포도대장말고 종사관이라는 직책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한국인이 얼마나 있었을까? <다모>이후에 방영되어 더 큰 인기를 얻었던 <대장금>에서 민정호(지진희 분)의 초반 직업 역시 ‘종사관’이었다는 사실도 그런 점에서 재미있는 대목이다. 그 전까지 우리가 역사드라마에서 남성 주인공의 멋진 벼슬은 ‘정승’ ‘판서’ 등의 최고위 관리이거나, 고을에 선정(善政)을 베풀고 억울한 사람들의 누명을 벗겨주는 ‘원님’이거나, 탐관오리를 벌하는 ‘암행어사’ 정도였다. 그러나 <다모>에서 황보윤이 보여주었던 문무를 겸비한 젊은 남성의 활동적인 직업으로서의 ‘종사관’은 <옥탑방 고양이>나 <겨울연가> 등에서 이현우, 배용준 등이 맡았던 ‘실장님’과 같은 ‘젊은 남성주인공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직업’의 대명사처럼 생각되어졌다.

이것은 정사(正史)에서 관심을 두어왔던 부분들이 아니다. 중심에 왕실과 사대부 관료들의 권력투쟁이 있었다면, 이러한 역사는 그 중심에서 한발 물러나 있는 주변부의 역사인 것이다. 그런데 중심이 아닌 주변부에 대한 관심, 바로 이것이 ‘폐인’들을 들끓게 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앞서 보인 ‘폐인’들의 사고 패턴처럼, ‘폐인’들은 한가지의 답만을 찾아내는 것을 싫어한다. 감춰진 사실, 중심에서 비껴나 있는 것들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서 새로운 흥미를 찾아내기. 이것이 ‘폐인’들의 문화행위방식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모>가 서 있는 주변부의 역사, 감춰진 과거 찾기라는 위치는 ‘폐인’들의 입맛에 딱 맞는 것이었다.


3.  ‘중세’에 대한 ‘현대’적 스토리텔링


이러한 새로운 역사드라마는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기존의 정사극과는 다른 무언가를 보여줄 수밖에 없다. 정사극은 역사적 사실들에 충실하여 스토리의 윤곽을 만들고, 단지 각 사건들을 보여주는 대사와 장면들을 어떻게 만들것인가 정도에만 상상력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사극들의 경우 시공간과 몇가지 중요한 사실이 과거의 것일 뿐, 그 안의 내용물은 모두 상상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 그 과정에서 역사드라마들은 정사극보다도 더 열심히 그리고 디테일하게 역사를 공부해야 했다. 즉, 과거 속에서 현대의 세계를 유추해 낼 만한, 우리의 현실과 무척 다르면서도 닮은 그런 세계를 발굴해내는 일이 새로운 역사 드라마의 중요한 과제였던 것이다. 그래야만 시청자들은 흥미롭게 역사드라마를 볼 수 있다. 젊은층들이나 여성시청자들의 경우 사극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는 젊은이들이나 여성들이 역사를 이해못한다거나 지겨워하는 능력미달의 인간들이어서가 아니라, 그 역사 자체가 지겨운 내용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모>에 열광하는 부류는 앞서 말했듯 가장 젊은 신세대들이었다. 그들이 역사극을 보게 되었다는 것은 이것이 고리타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모>가 고리타분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화려한 액션과 신선한 카메라워크, HD TV의 고화질 화면 등의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 스토리텔링이 현대물 트렌디 드라마들 못지 않은 모던함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David Howard가 말하는 잘 짜여진 좋은 스토리의 기본 요건은 다음과 같다.1)



1. 관객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누군가(somebody)'에 관한 스토리이다.

2. 그 누군가는 어떤 일(something)'을 하려고 대단히 노력한다.


3. 그 어떤 일은 성취하기가 어렵다(difficult)'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4. 그 스토리는 최대한의 정서적 임팩트(emotional impact)'와 관객의 참여(audience participation)'를 끌어낼 수 있는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5. 그 스토리는 만족스러운 엔딩(satisfactory ending)'으로 맺어져야 한다(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해피엔딩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러한 스토리의 요건에 따라 잘된 콘텐츠들을 분석해보면, 잘된 콘텐츠일 수록 이 요건을 정확하게 지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살인의 추억>과 같은 경우, “각자 개성 있고 인간적인 형사들이(somebody), 연쇄살인범을 잡으려고 치열하게 노력하지만(something), 그 일은 성취하기가 대단히 어렵다(difficult). 사건추리 과정에서 한 명의 유력한 용의자를 찾아내어 관객들은 흥분하지만(audience participation), 당시의 여러가지 여건상의 어려움과 증거불충분으로 그를 놓아주게 되어 형사들과 함께 관객들도 분노와 절망을 느낀다(emotional impact). 결국 이 연쇄살인사건은 실제 이 사건이 그러했듯 미결상태로 묻혀져 추억이 되어버린다(satisfactory ending)”는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앞의 3요건, “누군가가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매우 어렵다”는 조건은 모든 서사적 콘텐츠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요소이다. <다모>에서는 황보윤, 채옥, 장성백의 세 명이 각자 위의 요건을 충족시킨다.



황보윤: 채옥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걸 버릴 수 있는 멋진 남자 황보윤은, 역적들을 소탕하고 채옥과 함께 행복해지려 하지만 그것이 모두 매우 어렵다.


채옥: 여성의 활동과 역할이 미미했던 조선시대에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당찬 다모 채옥은, 황보윤의 앞길에 짐이 되지 않으려 하고, 장성백을 돕고 싶지만 두 가지 일 모두 매우 어렵다.


장성백: 자신의 목숨을 걸고 동지들과 의리를 나누는 역모 무리의 우두머리 장성백은 부패한 나라를 뒤집어 개혁하고, 채옥의 사랑을 얻고자 하지만 그것이 매우 어렵다.


이러한 세 주인공의 서로 다른 욕망이 상대방에게 영향을 끼치고 충돌하면서 <다모>의 이야기는 첨예한 갈등을 만들며 전개된다. 시청자들은 이들 세 사람 각각의 입장과 감정에 충분히 공감하면서 그들의 목표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들 세명 모두가 함께 행복해지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한 명이 행복해지는 길은 역으로 다른 한명이 불행해지는 길인 것이다. 특히 국가와 채옥이라는 두 가지의 소중한 가치를 두고 대립하는 황보윤과 장성백의 긴장관계는 이 드라마의 스토리텔링을 이끌어나가는 가장 큰 힘이다. 결국 세 사람은 함께 행복해질 수 없어서 모두 불행해지는 쪽을 택하게 되고, 시청자들은 그럴 수 밖에 없는 세 사람의 비극적 운명을 이해한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세 명이 만들어 내는 팽팽한 갈등상황을 굉장히 빠른 속도로 전개해 나간다. 극 후반부에 가서 세 사람의 사랑 얘기가 다소 지지부진해지는 경향이 있기는 하나, 극 중반까지 세 명과 세명을 둘러싼 사람들의 대립구도가 박진감있게 펼쳐지고, 각 인물들의 캐릭터설명 부분도 압축적인 영상으로 보여주어 기존 역사 드라마들의 느린 템포와 차별화했다. 보통 사극의 경우 기본적으로 50회 이상의 대하드라마로 기획하기 때문에 주요 인물들의 출생부터 성장과정을 매우 상세하고 차근차근하게 보여준다. <허준>의 경우나 <대장금>의 경우처럼, ‘허준’과 ‘장금’의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의 이야기가 극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막상 의원(醫員)이 되는 것은 극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이다. 그러나 <다모>는 1-2회 때에 이미 과거의 이야기가 모두 끝났을 뿐 아니라 그 중의 절반은 현재의 상황 설명으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1-2회만으로도 각각의 주요 캐릭터들에 대해 모든 파악이 가능하고, 갈등구조가 명백해져 있다. 이러한 속도감 있는 이야기의 전개 역시 <다모>의 현대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다모>의 시청자들이 첫회를 보고 감탄했던 이유가 바로 이러한 박진감 있는 구성과 스펙터클한 영상이 ‘TV드라마’가 아닌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4.  디지털이다!

처음 영화라는 영상매체가 발명되었을 때 영화는 스펙터클에 대한 집착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분야였다.2) 초기 영화관객들은 이미지를 사실로 착각하지는 않았지만 영사되는 움직임이라는 새로운 환영을 통한 변형에 경악했다. 즉 초기 영화는 볼거리의 미학이고 스펙터클 형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920-30년대부터 영화는 서사중심의 영화로 변모되면서 초기 영화의 스펙터클과 자극의 영역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초기 관객들은 영화 장비에 매료되었지만 이제는 익숙해졌다. 영화의 핵심은 서사였으며, 대부분의 관객은 일정한 유형의 이야기를 수용하고 관람하면서 등장인물의 행동이나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에 점차 빠져들었다.

그런데 오늘날 대중오락 분야에서는 이 스펙터클의 요소가 다시 부활하고 있다. 특수효과의 부흥과 관련된 영화가 개발되고 늘어나면서 새로운 이미지 조작 기법으로 제작되는 자극, 충격, 놀라움이 선호되고 서사적 요소는 쇠퇴한다. 관객은 너무나 이루어질 수 없는 장면에서 고도의 표면 정확성을 만들어내는 방식에 경탄을 금치 못하면서 초기 영화의 관객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디지털 영상문화의 형식은 대중오락의 초기 전통과 문화적으로 동일한 공간을 공유한다. 스펙터클적 오락의 전통. 이런 과거와 현재, 옛것과 새것을 구분하는 것은 바로 디지털 기술이다.

이러한 변화가 이제 TV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다모>에서는 디지털 기술이 브라운관 화면에 강력한 흡인요소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스펙터클”이었다. 다양한 영상기법과 HDTV의 고화질 화면을 통해 <다모>는 기존 TV 드라마와는 ‘볼거리’의 측면에서 확연한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회당 2억원 이상을 투자하여 만들었으며 독특한 카메라 앵글이나 계속 이어지는 와이어 액션등은 이 드라마가 사극이기는 하지만 매우 현대적인 감각의 드라마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이 드라마를 ‘누가’ 즐겨야할지를 가르쳐 주었다. 몰입할 만한 매력적인 캐릭터에, 리얼한 비쥬얼, 스타일리쉬한 카메라기법. 젊은층이 빠져들 만한 요소는 모두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디지털세대, 특히 ‘폐인’들에게 이 드라마가 크게 어필하게 만든 가장 결정적 요인일 것이다. 그들은 <다모>에서 자신들이 즐겨하던 게임과, 자신들이 즐겨 보던 블록버스터 영화와, 자신들이 즐겨 만들던 디지털 영상기법을 발견했던 것이다.

드라마 <야인시대>가 인기를 끌 수 있었던 데에는 남성 시청자들을 끌어들이는 격투대결신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매회 새롭고 점점 더 강한 적수와 싸우고,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김두한을 보며 시청자들은 ‘스트리트 파이터’ 류의 아케이드 게임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다모>역시 아케이드 게임 형태의 무협 결투신을 만들어냈다.특히 작품 초반 계속되는 대결씬은 등장인물간의 갈등요소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야인시대>가 2-D의 ‘스트리트 파이터’라면 <다모>는 3-D의 ‘철권’이나 ‘버추얼 파이터’처럼 그래픽 차원에서의 업그레이드를 성취해내었던 것이다. <다모>가 끝난 직후 시작한 <왕의 여자>의 무협신이 허술하게 보인 것은 바로 <다모>를 본 시청자들의 한 차원 높아진 눈높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지금 또다시 <야인시대>와 같은 드라마가 만들어진다면 이번엔 지난번과 같은 시청률을 얻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다모>는 액션에 있어서 기존 TV드라마의 한계치를 훌쩍 뛰어넘은 작품이며, 앞으로 만들어질 액션 중심의 TV드라마들의 새로운 기준점이 될 것이다.



5.  ‘옛 것’ 속에서 ‘새 것’ 찾기-결론을 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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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ong time ago in a galaxy far, far, away..."

<스타워즈>의 시공간적 배경이 “아주 먼 옛날, 머나먼 은하계”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L. 보제로가 <스타워즈> 클래식 3부작의 모든 시나리오 원고들을 비교 대조한 

<STAR WARS: The Annotated Screenplay>에 따르면 <스타워즈>가 처음에 기획될 때에는 우리가 쉽게 짐작할 수 있듯 ‘아주먼 미래(33세기)’로 설정되었었다고 한다.1) 그러나 이 기획안을 수정해가는 과정에서 제작진들은 ‘미래’대신 ‘과거’로 이야기의 공간을 바꾸었다. 왜일까? 왜 가장 첨단의, 현 21세기에도 도래하지 않은 ‘우주전쟁’의 시대를 다룬 영화가 오히려 고대의 공간으로 회귀해버렸을까? 그것은 바로 ‘상상력의 자극’을 위해서이다.

미래 세계이건 고대의 신화적 세계이건 현실이 아니라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어차피 ‘우주의 전쟁’이라는 컨셉트는 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즉, <스타워즈>라는 영화를 보러 오는 관객들이 이 영화에게서 바라는 것은 ‘현실’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문명과 과학이 얼마나 더 발달했을지 상상조차 안 되는, 혹은 그 상상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는 막연한 ‘미래’의 공간보다는,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워 온 고대의 문명과 문화의 모습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과거’의 공간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더 흥미로울 수 있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이런 가정을 한번 해보자. 33세기에, 우리 인간들은 지금처럼 생겼을까? 지금과 같은 방식의 하루일과를 살고 농사를 짓고 사냥을 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사랑을 하고 자손을 낳고 죽을까? 글쎄. 지금까지의 의학과 과학 문명의 발달만 보아도, 앞으로 13세기나 지난 뒤의 우리의 미래는 도통 점쳐지질 않는다. 오히려 수많은 ‘종말론’이 그 시기에 대해 비관적인 상상만 하게 만들 뿐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살아있을 수 있을지도, 살아있다고 해도 지금과 같은 생활방식을 살고 있을지도 전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고대라는 공간의 생활방식을 상상하면 이야기는 좀 쉬워진다. 어떤 부분은 가장 미래적으로, 어떤 부분은 가장 고대적으로 그려도 모든 것이 용서된다. 대신에 이 지구라는 행성 위의 사건이 아니면 된다. 그리하여 <스타워즈: 에피소드4>(1977)에서 보이듯, 루크는 한편으로는 유능한 우주비행선 조종자이고 한편으로는 땅에 씨를 뿌리고 농작물을 재배하는 농사꾼이다. 광선 하나로 우주선도 끌어들일 수 있는 강력한 레이저와 광선의 기술이 발달된 시점에 루크와 다스베이더는 총이 아닌 검으로 싸운다. 평상시의 옷은 고대 그리스의 의복과 비슷하고 전투시에는 사이버틱한 우주복을 입는다. 이처럼 <스타워즈> 안에는 정 반대의 것들이 교묘하게 섞여 새로운 상상 속의 시공간을 창출해내는 것이다. 좋은 이야기는 이 세상의 본질적인 자질에 속하는 모호성, 가변성을 포괄하며 다분히 문제적이고 때로는 역설적이기도 한 모든 현상들에 대해 생생한 암시를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과학문명이 발달된 우주 전쟁의 드라마가 ‘옛날 옛적, 머나먼 은하계’에서 일어났다고 설정되는 것은 보다 깊이있는 상상력의 자극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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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스타워즈>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다모> 역시 과거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이 뒤섞여서 시청자의 상상력을 자극한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다모>는 그 배경이 되는 시공간(조선왕조체제)과 인물간 갈등의 원인(중세적 신분질서), 에피소드의 소재(사주전, 역모) 등은 중세적인 반면, 스토리의 구도나 전개 속도, 배경음악과 액션, 카메라와 편집기술 등은 최첨단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과거지향적인 이 역사 드라마를 즐겨본 주도적 시청자층이 가장 미래지향적인 디지털세대들이라는 점 역시 역설적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양 극단의 성격이 오히려 시너지효과를 발휘했던 것이다. 이 드라마가 구태의연한 이야기틀과 캐릭터를 가졌더라면? 중세의 액션이라고 해서 초등학생들 주먹질 수준의 소박한 몸동작만을 보여줬더라면? 새로운 소재 발굴에 소홀했더라면? 그랬다면 <다모>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옛 것 속에서 새 것을 찾아내었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그것도 젊은 디지털세대들이 열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시장의 타겟으로 삼고 있는 층이 젊은이일 경우, 우리는 혹시 영화와 드라마, 특히 게임이 지나치게 ‘미래’로만 나가고 있지는 않은가? 이는 지금 개발하고 있는 영화나 드라마, 게임 콘텐츠들의 방향성에 대한 물음이다. 즉, 디지털 세대들이 반드시 ‘미래’에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특히 SF물의 경우, 이러한 측면에서의 근본적 검토가 필요하다. 작년 개봉되었던 우리나라의 SF영화 <내추럴시티>와 막대한 투자를 해 만든 SF애니메이션 <원더풀데이즈>의 실패를 돌이켜 보자. 그 속에 우리 민족, 한국이 있었나? 국적 불명의 생경한 이름들(시몬, 제이, R, 노마, 시온, 리아 등), 이국적인 거리의 모습, 등장인물들의 서구적 외모 등 이 두 작품에는 외국 SF물에서 보았음직한 장면과 구도들로 채워져 있고, ‘한국적인 것’은 거의 없다. 두 작품의 제작자들에게 묻고 싶다. 그렇다면 결국 한국적인 미래 전망은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한국의 미래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는가? 아마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그들은 “미래=서구적인 것”이라는 막연한 선입견을 가졌을 수 있다. 그리고 기존에 있던 외국의 SF물에서 많은 힌트를 얻었기 때문에 한국적인 것을 간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헐리우드적인 SF물이라면 굳이 투자액수에서부터 비교도 안되는 우리나라의 열악한 제작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한국의 SF를 볼 이유가 있을까? 훨씬 더 스펙타클한 헐리우드 영화들이 넘쳐나고 있는데.

물론 그렇다고 우리는 미래 이야기는 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 식의 공상과학물을 지속적으로 개발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환상성’을 만들어 내는 공간을 우린 지나치게 미래에서만 찾으려고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현실을 떠나 만들어내는 ‘상상’의 공간은 꼭 미래에만 있지는 않다. 우리는 현재에 살고 있기 때문에 미래를 모르는 만큼 과거에 대해서도 모른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이라고 할 때, ‘과거’라는 공간은 ‘미래’만큼이나 매력적일 수 있는 것이다. 허술한 미래세계를 상상해내는 것보다는, 감춰져 있던 우리의 과거세계를 재현해 내는 것이 더 흥미로울 수 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흔한 말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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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BlogIcon Gore 2007/06/27 20:57

    이런, 누나 글 사진 링크가 깨진 게 좀 있네요.
    수정해 주세요 : )

  2. coolya 2007/06/27 22:55

    엣...내 눈엔 없는딩..깨진 사진..우예된길까..?

  3. BlogIcon Gore 2007/06/28 04:32

    하하, 알았다!
    'file:///C:/DOCUME~1/이영아/LOCALS~1/Temp/UNI0000095019b6.gif' 이런 식으로 사진 주소가 누나 컴퓨터로 직접 링크되어있어서 그래요. (그러니깐 누나가 볼 땐 안깨져 보이지요.) 다른 컴퓨터에서 보시면 사진 안나올 거에요.

    해결책은.. -_-; 잘 모르겠는데; 아마 사진을 일일이 다시 업로드 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_=

  4. BlogIcon coolya 2007/06/28 08:34

    아..그런 거였고나..^^지금 고쳤는데, 이젠 잘보이는고?

  5. 짐씨네 2007/06/28 10:37

    아...깔끔하니 잘 보여요.

  6. BlogIcon 2007/06/28 14:20

    옹 잘 보여요 ^^ 역시 종민! 굿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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