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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롭게 묵비권을 행사할 자유

2009/06/04 08:38 | Posted by <소문> 편집실

검찰수사 도중의 ‘자살’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검찰수사가 형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무죄추정의 원칙의 당연한 귀결이다. 그리고 검찰수사가 형벌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영장주의와 자기부죄거부권이 존재한다. 영장주의란 체포, 구속, 압수수색과 같은 개인의 신체적 자유나 사생활의 제약은 수사기관과는 독립된 법관이 ‘범죄수사에의 필요성’이나 ‘죄를 범하였다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 등을 영장을 통해 인정한 후에야 이루어질 수 있다는 헌법적 원리이다.

묵비권은 헌법적 권리
자기부죄거부권이란 피고나 피의자가 수사기관에 의해 자기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않을 헌법적 권리를 말하며 소위 ‘묵비권’으로 불리워진다. 이 권리는 피의자의 신체적 자유나 사생활의 절차상의 보호를 넘어서 훨씬 더 섬세하고 실체적으로 피의자의 자기결정권을 보호한다. 즉 피의자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진술강요도 용납되지 않아 강압적이거나 다른 권리침해가 없어도 불법이 되며 이를 통해 취득된 진술은 증거력이 부인된다. 기실 진술이라 함은 뇌와 입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물리적인 강제를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모든 진술은 자발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요행위가 합법적인 영장에 의한 구금 하에서 이루어졌어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자기부죄거부권도 검찰이 강압적인 신문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규범으로 작용한다. 묵비권의 보호 정도는 나라마다 다르지만 예컨대 미국에서는 피의자가 수사기관에 묵비권을 선언하면 모든 신문은 중단된다. 이때 중단되지 않고 계속된 신문을 통해 취득된 진술은 모두 증거력이 거부된다.
뿐만 아니라 피의자가 묵비권을 행사하였다는 것이 유죄의 증거가 될 수 없음은 물론 피고의 묵비권 행사는 사회적으로도 비난받지 않는다. 입증에 대한 책임은 검찰이 가지고 있고 피의자는 자기파괴에 이르는 입증에 협조하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모든 피의자신문은 피의자가 진정으로 원할 때만 이루어진다. 결국 피고가 검찰에게 진술을 하는 경우는 변호사를 대동하고 검찰과의 협상을 통해 자신의 죄과를 줄이려 할 때뿐이다. 이에 따라 검찰은 전혀 피의자의 진술에 의지하지 않은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증거를 취득해야 한다.
그렇다면 검찰, 법원 그리고 언론이 영장주의와 묵비권을 보장하는 사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검찰은 우선 노대통령의 입을 통하지 않고 ‘포괄적 뇌물죄’의 증거들을 독자적으로 찾아야만 한다. 물론 검찰은 형사소송법 제215조 상의 ‘범죄수사에의 필요성’을 입증한다면 봉하마을 사저에 대한 압수수색 등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노대통령이 받은 정신적 압박의 정점이 된, 김해에서 서울에 이르는 수 시간에 이르는 버스여행 뒤에 다시 새벽 5시에 돌아오는 형벌과도 다름없는 수사는 없었을 것이다.

출두거부도 문제 안돼
물론 검찰이 노대통령이 출두요구에 불응한다면 형사소송법 제200조의2 상의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만한 상당한 이유’를 입증하여 체포와 같은 더욱 강제력 있는 수사도 가능하였을 것이고 (구속영장은 증거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없으므로 발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바로 이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노대통령은 굴욕적인 검찰출두에 동의한 것이다. 하지만 이 가상사회에서는 노대통령은 출두요구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체포영장의 발부가능성이 낮을 것이기 때문이다.
검찰이 실제로 정당하게 영장을 받아낼 정도의 증거를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 필자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유리한 증거는 모두 공개해왔던 검찰의 관행에 비추어 그러한 증거는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노대통령은 출두거부에 대해 아무런 심리적 부담감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고 누구도 이에 대해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검찰이 아무것도 입증하지 않은 상황에서 결자해지해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비극이 ‘명예롭게 묵비권을 행사할 자유’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되길 빈다. 물론 ‘기회’라는 말을 붙이기에 우리는 너무나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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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온라인글쓰기, 운전만큼 위험한가?

2009/05/13 16:50 | Posted by <소문> 편집실
구글이 유튜브의 게시 기능을 없애면서까지 실명제 적용을 거부하였다. ‘익명성이 웹의 정신’이라는 말은 틀렸다. 많은 카페나 웹사이트들이 이용자들 사이의 자발적인 약속에 따라 실명제로 운영되고 있다. 이번에 확대실시된 실명제는 강제적이라서 문제이다.

국민은 자신의 개인정보를 국가에게 공개하지 않을 사생활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국가는 형법 215조와 같은 “범죄수사에의 필요성”과 같은 특별한 공익이 있는 경우에만 사생활 및 사적인 정보의 공개를 강제할 수 있다. 신원 공개도 마찬가지다. 불심검문은 경찰관직무집행법 제3조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어떠한 죄를 범하였거나 범하려 하고 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떳떳하면 왜 실명 등록을 못하는가’라고 다그치는 실명제 찬성자들도 길거리를 걷는다는 이유만으로 신원 공개를 요구당하면 ‘내가 뭘 잘못했는데?’라고 불쾌해할 것이다. 인터넷실명제 반대자들의 심정이 바로 그런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전기통신사업법 54조에 따라 포털들이 모든 게시글에 붙어 있는 실명을 영장도 없이, 게시자에 대한 고지도 없이 수사기관들에 넘겨주고 있어, 실명이 스크린에 떠 있지만 않을 뿐 글쓰기를 할 때마다 실명을 국가에 등록하는 ‘순수 실명제’라고 봐야 한다.

물론 강제적 실명제가 필요할 때도 있다. 부동산실명제와 금융실명제는 사기 및 탈세의 위험성 때문이다. 자동차에 번호판을 달도록 하는 것은 자동차의 파괴성과 이동성 때문이다. 청소년 유해물을 보는 사람에게 성인 인증을 위해 주민번호를 강제하는 것도 이를 청소년이 보았을 때의 유해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글쓰기가 자동차 운전, 금융거래처럼 위험한 행위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에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익명의 글쓰기는 도리어 사상의 전파라는 공익적 구실을 수행해 왔기 때문에 ‘위험’이 있더라도 보호되어 왔다.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정권 시절 탄압을 피해 독립과 자유를 주장한 수많은 익명의 글들을 보라. <폭풍의 언덕> 저자 에밀리 브론테는 여성 작가들에 대한 편견을 피하기 위해 ‘Acton Bell’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이 밖에도 시대의 편견과 권력의 탄압을 피하여 자유로운 비평과 예술활동을 한 필명 사용자들은 ‘몰리에르’, ‘볼테르’, ‘졸라’, ‘트로츠키’, ‘조지 오웰’ 그리고 벤저민 프랭클린, 사드 백작, ‘오 헨리’, ‘조르주 상드’, 심지어는 아이작 뉴턴도 있다.

온라인 글쓰기라고 다를까? 온라인의 글은 수십만 수백만 명이 볼 수 있거나 퍼 나를 수 있지만, 이것은 게시자의 통제 밖의 일이며 방송과 달리 독자들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다. 독자의 반응이 폭발적이라고 하여 실명 등록의 부담을 지우는 것은 어떤 장르의 책이 잘 팔린다고 해서 갑자기 그 장르의 저자들은 모두 실명 등록을 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터무니없다.

인터넷 실명제 아래서는 불법 게시물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까? 어차피 의도적으로 불법 게시물을 올릴 사람들은 자신의 실명과 번호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의도하지 않고 불법 게시물을 올리는 자들은 어차피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합법적인 게시물을 쓰려는 사람들의 글쓰기가 줄어들 것이라는 사실이다. 감시를 받기 싫어서이다. 자제의 미덕이 아니라 강제된 위축이다. 자발적인 실명제 사이트에서 명예훼손이 적은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길거리 범죄를 막겠답시고 길을 걷는 사람들 모두에게 명찰과 주민번호를 달고 다니도록 강제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을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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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수첩 수사 '법대로' 하라

2009/05/03 12:41 | Posted by <소문> 편집실

이종걸 의원실 주최로 지난 4월 14일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장자연 사건에서 바라본 국민의 알권리와 명예훼손' 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박경신 고려대 교수


체포·압수·구속·수색·압류·징역·손해배상 등은 모두 사법부가 그와 같은 기본권 제한의 타당한 사유를 인정하였을 때 허용된다는 것은 법치주의 국가의 기본원리이다. 국가가 범죄수사 목적으로 개인 소유 정보를 압수수색할 때도 역시 사법부의 결정인 영장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하며 사법부가 이렇게 결정하기 위해서는 '왜 그 사람에 대한 압수수색이 타당한지'에 대한 입증이 선행되어야 한다.

 

불심검문의 예를 들자면, 경찰관직무집행법 제3조에 따르면 경찰관은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어떠한 죄를 범하였거나 범하려 하고 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자 또는 이미 행하여진 범죄나 행하여지려고 하는 범죄행위에 관하여 그 사실을 안다고 인정되는 자"만을 정지시켜 질문할 수 있다.

 

형사소송법 제7조와 제201조에 따르면 "피고인이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만 구속할 수 있다. 형사소송법 제200조의 2항도 마찬가지. "피의자가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만 체포될 수 있다.

 

이에 따라 형사소송법 215조는 "검사는 '범죄수사에 필요한 때에' 영장에 의하여 압수, 수색을 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이 조항에서 "범죄수사에 필요한 때"를 단순히 형식적인 요건이라고 해석하는 형사소송법 학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요건은 국민을 국가의 자의적인 사생활 침해로부터 보호해주는 실체적인 내용을 가진 요건이다.

 

진실을 밝혀보자고 주장하는 것이 사회적 담론의 시작

 

그러나 <PD수첩> 수사에서는 검찰이 취득하고자 하는 취재원본의 '범죄수사에의 필요성'이 입증되지 않았다. 이번 사건에 적용될 수 있는 죄목은 '허위에 의한 명예훼손'과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이다(이번 보도는 공익성이 명백하여 '진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만이 적용될 수 있다). 그렇다면 검찰은 다른 소송들과 마찬가지로 '허위' 및 '위계' (이하 '허위')를 입증해야 한다. 물론 허위의 입증 자체는 재판에서 해도 되지만 우선 영장을 신청할 때 허위가 무엇인지 제시를 하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취재원본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작년 중간수사발표를 통해 공개된 검찰 스스로의 주장과 자료들에 따르면 그러한 '허위'는 없다. 'CJD가 의심된다'를 'vCJD인지 의심된다'로 바꾼 것은 현지 언론보도를 분석해보면 당연한 조치였다. 주저앉는 소(다우너)를 '광우병 의심소'로 지칭한 것은 허위도 과장도 아니다. 미국인의 먹거리 불안감 여론조사의 조사방법 등을 생략한 것은 허위가 아니다. 사물의 어느 측면을 언급할지는 순전히 견해의 영역이며 법적 규제의 밖에 있다.

 

"94% 발병률", "발병율이 다른 나라에 2∼3배" 등등 과학자들이 특정한 조건들을 가정한 상황에서 불완전한 정보에 근거하여 수립한 가설들을 그대로 옮긴 것이며 누구에 의해서도 허위라고 입증된 바가 없다.

 

혹자들은 94% 발병률이 진실이라고 입증된 바도 없다고 하면서 '정부비판도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회적 담론들은 정보가 불완전한 상황에서 형성된다. 진실인지 아닌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진실을 밝혀보자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담론의 시작이다.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발생 가능성이 그런 사례다. 광우병인지 여부를 확신하지 않더라도 '의심이 드니 조사해보자'는 말은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진실을 근거로 하지 않았다고 비판하지 말라는 건 아무것도 비판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더욱이 작년에 이번 형사사건의 수사의뢰인인 농림수산부가 제기한 <PD수첩>보도에 대한 정정 및 반론보도재판에서 법원은 '과장됐다', '근거가 불충분하다', '편파적이다' 라고 판시했을 뿐 '명백히 허위'라고 판단한 것은 없다. '... 이라고 단정할 수 없어 정정해야 한다'는 등의 판시가 있을 뿐이다.  '과장'이나 '근거 불충분'은 '허위사실의 적시'와는 완전히 다르다. 민사재판에서도 허위가 밝혀지지 않은 이상 입증책임이 훨씬 높은 형사재판에서 '범죄수사에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허위'의 입증은 더욱 요원해보인다. 

 

법치주의에는 성역이 없다

 

검찰은 <PD수첩> 측이 '진실이라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원본제출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PD수첩> 측이 입증해야 할 위법성조각사유이지 검찰이 입증할 것이 아니다. 즉 검찰이 허위를 특정하면 <PD수첩>측이 '허위이기 하지만 우리는 진실이라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으니 면책된다'고 할 일이지 지금 검찰이 나설 일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강간사건에서 피고가 자신이 발기불능이라거나 성전환자라는 주장을 하지도 않았는데 검찰이 피고가 밝히길 원치 않는 자신의 발기능력이나 성정체성에 대한 검증을 하려는 것과 같다.

 

물론 '범죄수사의 필요성' 여부는 법원이 결정하며 이번 수사에서 법원이 영장을 발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영장의 요건인 '범죄수사의 필요성'이 소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발부된 영장은 불법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압수수색 영장의 위법성을 다툴 수 있는 제도가 없다. 압수수색영장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장집행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영장의 거부는 실정법 위반이기는 하지만 압수수색영장에 대한 항고를 할 수 없는 현재의 제도에 대해서는 헌법적 판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헌법적 판단을 받기 위해서라도 공무집행방해죄로 감옥에 가는 것이 원본제출하는 것보다 낫다.

 

법치주의에는 성역이 없다. 압수수색, 구속 등의 모든 기본권의 제한은 공정한 사법적 절차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며, 공정한 사법적 절차란 기본권 제한의 수용자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함이 기본이다. 구속에 대해서는 피의자가 영장실질심사와 구속적부심을 통해 두 번이나 이의제기를 할 수 있다. 그런데 검찰과 법원만이 참여하는 절차를 통해 발부된 압수수색영장에 대해 절대성을 인정하는 것은 성역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박경신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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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보수’는 환상이다

2009/04/11 09:12 | Posted by <소문> 편집실
 “보수는 가치 추구 세력이 아니라 기득권을 지키려는 집단”
»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방한한 2008년 8월5일 오후,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뉴라이트전국연합 등 300여 개 보수단체가 참가한 가운데 ‘나라사랑 한국교회 특별기도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 한겨레 이종찬 기자

우리는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한탄하며 ‘진정한 보수’의 출현을 기다려왔다. 2005년 11월 ‘뉴라이트’가 출현했을 때, 2007년 말 과거 군사 쿠데타 세력을 지지 기반으로 하고 있던 박근혜를 누르고 이명박이 승리했을 때, ‘수구보수’가 아닌 ‘실용보수’의 출현으로 우리도 ‘우아한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는 두 번 다 여지없이 무너졌다.

보편적 경제발전 원하지 않아

그리고 2009년 들어 우리는 다시 한번 “합리적인 보수와 책임 있는 진보가 협력해… 일종의 거국 체계를 구성해야” 한다는 백낙청 교수의 요청을 듣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합리적인 보수를 기다려온 데는 이유가 있다. 진정한 정치는 공동체가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하는가에 대한 투쟁이지 이익집단들 간의 싸움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치의 주 전선은 식민지와 독재정권의 역사 속에서 유래한, 특권을 지키려는 집단과 특권을 무너뜨리려는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었지 여러 가치들 간의 투쟁이 아니었다. 2009년 2월 촛불시위를 지켜본 한 자칭 보수 네티즌의 말이다. “현재 상황은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아니다. 수구와 합리적 보수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싸움이다. …쇠고기 반대집회를 반대했던 이른바 ‘보수’라는 단체는 거칠게 이야기해서 친미매판 수구세력이다. …어느 나라 보수단체가 자국의 국기와 다른 나라 국기를 (함께) 들고 집회하는가.”

1997년에 출간된 <보수주의자들>(삼인 펴냄)이라는 책은 김대중·이건희·김문수 등 10인에 대한 평가하고 ‘한국에 보수주의는 없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과연 합리적 보수는 존재하는가? 보편적으로 세계의 보수 진영들이 내세웠던 가치는 전통·국가·가족·자유·경제발전·생명·법질서 등이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자원개발이 전통 생활양식의 파괴를 수반하게 될 때, 보수 진영은 항상 전통의 반대편에 섰다. 가족은 혈연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혈연관계의 성립과 유지를 위해서는 국가의 출산 지원 등 사회보장제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를 축소하려는 세력 역시 어느 나라에서나 보수 진영이다. 보수 진영은 자유를 중요시하는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표현의 자유를 탄압했던 쪽은 항상 보수 진영이었고, 도리어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의 표현의 자유까지 보호하기 위해 싸웠던 사람들은 미국시민자유연합(ACLU)과 같은 진보 진영이었다.

세계사 속에서 보수 진영은 절대로 보편적인 경제발전을 원하지 않았다. 초기 사회주의에 대한 반대의 이유는 효율성이 아니라 기득권의 유지였다. 저임금 노동력을 제공할 불법체류자들 없이는 미국 경제가 망할 것을 알면서도 선거철만 되면 미국의 보수적 정치인들은 불법체류자 추방을 외치며 보수표를 집결시켰다. 보수 진영은 사형제를 요구해왔고 기아 선상의 사람들에게도 인색했다. 보수 진영이 생명을 중시할 때는 낙태와 존엄사같이 자신의 우주관과 가치관에 따른 인간다운 삶과 죽음을 선택하려는 개인을 위선에 굴종하도록 억압하려 할 때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법질서에 대해서는 신영철 대법관의 사퇴를 요구하지 않는 보수 진영의 모습을 지적하고만 넘어가자.

가치들을 지향하는 순수한 ‘보수적 개인들’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는 역사적 우연이 아니라 보수주의의 본질이다. 보수주의가 세력을 형성할 때 그 리더들은 항상 원래 내세웠던 가치를 포기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앞세운다. 보수주의는 하나의 가치를 추구하는 세력이 아니라 동시대에서 획득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일 뿐이다.

‘합리적 보수’라는 개념은 진보 진영이 현재의 정치를 ‘이익 다툼’이 아닌 ‘가치의 투쟁’으로 해석해 만들어낸 환상으로 보인다. 가치 지향으로서 보수주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데 조금 더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진보 진영은 그런 ‘조금 더 양심적인 사람들’이 협상 파트너가 되길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익집단의 다툼으로 만들려는 사람들

‘합리적 보수’를 더 이상 기다리지 말자. 자신의 지위에서 눈치 보지 말고 ‘가치의 투쟁’을 벌여야 한다. 현재의 정치는 ‘가치 투쟁’도 ‘이익 다툼’도 아니며 현실정치를 가치의 투쟁으로 만들려는 사람들과 현실정치를 이익집단의 다툼으로 만들려는 사람들 간의 투쟁이다. 필요하면 불복종을 선언해야 한다. 또 진보집단 스스로가 ‘가치 투쟁’이 아니라 ‘이익 다툼’에 빠져 있지 않은지 되돌아봐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거나 부자들에게서 무엇을 빼앗아오는 것이 진보는 아니다. 구태여 도식화하자면 부자들이라는 ‘지위’ 자체를 없애는 것이 진보다. 이를 망각한 진보는 지금까지의 싸움으로 얻어낸 지위에 연연할 수밖에 없다. 그 지위는 임금으로 또는 정원제로 나타날 수 있다. 이에 대한 미련은 정치를 ‘이익집단의 다툼’으로 만들고 이 다툼으로의 진입 자체가 패배다.

박경신 고려대 교수·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소장 [한겨레 2009.04.03 제7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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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비밀보호법 개정을 반대하는 이들은 ‘휴대폰 감청 불가’를 외치고, 찬성하는 쪽에서는 ‘감청이 어려운 휴대폰이야말로 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다’며 필요성을 주장한다. 현행법상 휴대폰 감청은 법적으로 가능하나 기술적으로 어려워 통신사업자들에게 협조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이번 개정안의 핵심이다. 필자는 휴대폰 감청의 필요성에는 공감하나 사법부의 독립이라는 기본 전제가 확립되기 전까지는 감청 범위의 확대에 반대한다.

통신비밀보호법은 독재정권 시절 횡행하였던 국가기관에 의한 불법 감청을 막기 위해, 모든 감청에 헌법상의 영장주의-즉 수사기관으로부터 독립적인 사법부가 범죄 발생의 개연성을 서면으로 인정하였을 때만 압수/수색이나 구속이 허용된다는 원리-를 적용하자는 취지로 1994년에 탄생한 ‘좋은 법’이다. 특히 피감청자가 모르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감청은 ‘수색’ 의사가 공지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일반 수색보다 훨씬 프라이버시의 침해가 크기 때문에 법원 허가의 요건도 더 엄격하고 피감청자에게 별도의 통지 의무도 규정하고 있다. 반대로 어떤 번호 또는 아이피(IP)와 언제 통신했는가 등의 정보(통신사실 확인자료)는 통신의 내용을 포함하지 않음은 물론 통신의 연결 및 진행을 위해서는 통신자가 어차피 통신사업자에게 ‘공개’해야 하는 정보이므로 일반적인 수색의 경우보다 수사기관이 더욱 쉽게 취득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 사법부가 감청을 허가함에 있어 감청 대상자들의 프라이버시를 수호하는 독립적인 구실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불분명하다. 2000년대 들어 감청 신청 기각률은 평균 2%대이고 통신사실 확인자료 취득 신청의 기각률은 1% 미만이다. 우리나라는 감청 허가에 대한 판례가 없어 낮은 기각률에 대한 평가도 불가능하다. 미국은 감청이 기각된 판례가 많이 있다. 우리나라는 수색 및 감청영장이 발부된 뒤에 그 영장 발부의 불법성을 다투는 절차가 없어 기본적으로 피의자는 수사기관들의 수색 및 감청에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다.

또 통신사실 확인자료의 취득 허가 요건이 너무 느슨하며, 감청 기간이 2개월 내지 4개월로서 미국이 테러 및 총기사건 등의 위험까지 고려하여 정한 30일에 견줘 너무 길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피감청자 통보 시점이 기소나 불기소 결정 이후라서 수사가 길어지면 아주 오랫동안 감청 사실을 모르게 된다. 미국의 통신비밀보호법(ECPA)은 감청 허가가 기각되거나 인용되면 무조건 통지하도록 하고 있어 감청이 신청만 되어도 감청 대상자는 통보를 받는다.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휴대폰 등으로 감청 범위가 넓어지는 것은 반대한다. 같은 취지로 개정안이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정보를 통신사실 확인 자료에 포함시켜 훨씬 더 쉽게 취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반대한다.

더욱이 지피에스 위치 정보는 통신자가 통신을 위해 통신사업자에게 ‘공개’한 정보가 아니므로 통신사실 확인 자료도 아니다. 공공장소에서의 미행은 영장 없이 시행될 수 있지만 사적 공간으로의 ‘미행’은 일반적인 영장을 필요로 한다. 이번 개정안이 상정하고 있는 지피에스 정보는 5m 이내까지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사적 공간으로의 미행이다.

가장 결정적으로 감청 협조 의무가 부과되는 대상은 접속서비스 제공자뿐만 아니라 포털이나 웹호스팅 업체와 같은 ‘부가통신사업자’까지 포함하고 있는데, 군소업체들을 포함하는 이렇게 많은 사업자들이 타인들 사이의 대화 및 통신 내용을 국가에 넘겨줘야 한다면 이 법은 ‘통신비밀보호법’이 아니라 ‘통신비밀공유법’이라는 이름이 어울린다.

박경신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소장 (한겨레신문, 20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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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나 변호사가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당신들이 법을 만듭니다"


시드니 루멧 감독의 영화 <평결(Verdict)>의 후반부에서 폴 뉴먼이 맡은 의료과오소송의 원고측 변호사는 최종변론에서 배심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 한국에서 출시된 비디오 제목은 <심판>

폴 뉴먼은 이 영화로 다시 한번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데 바로 이 대사가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영화가 변호사를 이렇게 멋지게 그려낸 영화는 없다, 그래도 폴 뉴먼은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이는 원고 변호사가 배심원들에게 영화가 관객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법을 실제 사건의 사실에 적용하여 그 사건에 합당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일을 '사법작용(adjudication)'이라고 한다. 사법작용은 그 사건에 또는 그 사건의 해결에 적용되어야 할 실체적, 절차적 법리가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법률심과 그 사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판단하는 사실심으로 나뉜다. 배심제는 사실심을 일반인들에게 맡기는 제도이다.

"판사나 변호사가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폴 뉴먼은 영화의 중심줄거리를 이루는 소송의 최종변론에서,사법작용의 반(半)을 배심원들이 맡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면서, 한편으로는 판사나 피고측 변호사가 엉뚱한 법리를 적용하라고 요구하더라도 정당한 법리를 적용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 소송에서 판사와 피고측 변호사들이 부당하게 주도권을 장악한 사법시스템은 힘없고 외로운 원고가 투쟁해야 할 대상이었고, 이 싸움에서 원고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배심원들뿐이었던 것이다.

폴 뉴먼이 변호하는 원고는 출산을 위해 피고측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분만을 위해 피고 마취의사로부터 마취를 받던 중 구토를 일으키며 산소부족으로 무의식상태가 되어 버린 한 여성. 그리고 이 여성을 대신해 실제 폴 뉴먼을 선임한 가난한 동생 내외이다. 폴 뉴먼 측에는 자신의 일을 도와주는 한 명의 사립탐정이 있을 뿐이고, 변호사 보수도 선금을 한 푼도 받지 않았음은 물론 모든 비용을 변호사가 우선 책임지는 성공보수계약을 하였을 뿐이다.

이에 비해 소송의 피고는 보스톤 지역의 실력있는 가톨릭재단이 운영하는 병원과 마취학 교과서를 저술했을 정도로 저명한 마취의사이다. 피고들은 그 재력과 명성에 걸맞게 지역 최고의 로펌을 선임하고 그 로펌은 10여명의 변호사들로 무장하여 맞선다.

원고 변호사 폴 뉴먼은 알코올중독 전력이 있는 '응급차 쫄쫄이'(안경환의 'ambulance chaser'에 대한 번역)이다. 영화 첫 장면에서 폴 뉴먼이 사건을 수임하기 위해 영업행위를 하는 장면은 냉혹하다. 폴 뉴먼은 바에서 양주 샷을 들이키며 신문의 부고 난을 하나하나 체크해나간다. 사고사를 당한 사람들의 장례식에 찾아가 조문객을 가장하여 명함을 돌리는 것이다.

이 영화의 미덕은 변호사를 하나의 직업으로만, 의뢰인들을 고객으로만 생각했던 바로 이런 형편없는 변호사가 자신의 의무를 깨닫고 의뢰인을 한 명의 인간으로 느끼며 작은 영웅으로 재탄생하는 장면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의뢰인 vs. 사람

이같은 변화의 한 지점은 폴 뉴먼이 재판 전 최종협상을 앞두고 피고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있는 원고의 사진을 찍는 장면이다. 1분 정도의 테이크가 침묵 속에 진행되지만, 폴 뉴먼이 아마도 생전 처음 자신의 클라이언트를 대하면서 겪게 되는 심리의 변화는 명징하다. 자신에게는 단지 하나의 클라이언트였던 "진짜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중환자실이므로 간호원들이 들어와 나가달라고 요구할 때 폴 뉴먼은 너무나도 명백했지만 이제야 느끼게 된 자신의 실체와 이에 따르는 의무를 말한다. "나는 이 여자의 변호사요(I'm her lawyer)." 이 빛나는 장면은 존 트라볼타 주연의 씨빌액션(Civil Action)에서도 오마쥬된다.

조금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피고측의 부당한 괴력은 재판 진행과정에서 나타나게 된다. 폴 뉴먼은  '피해자의 구토는 마취를 잘못한 것이 원인'이라는 증언을 해 줄 의사를 확보하지만, 피고측은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 의사가 재판 시작 전날 카리브해 휴양지로 전격 휴가를 떠나도록 만든다.

결국 원고측의 유일한 증인이었던 의사도 없이 폴 뉴먼은 재판을 시작해야 한다. 폴 뉴먼은 어렵사리 외지의 마취의를 증인으로 불러오지만 급히 구한 사람이라서 준비도 덜 되어 있고 의술보다는 증언을 직업으로 사는 사람이라서 파괴력도 떨어진다. 게다가 애초 피고 편이었던 판사는 원고측 증인을 자신이 스스로 신문하면서 피고측에 과실이 없었다는 점을 배심원들에게 강조한다. 이대로 간다면 원고는 당연히 질 수 밖에 없다.

막판 뒤집기, 그러나. . .

그러나, 폴 뉴먼은 마취가 잘못된 이유는 마취의가 실수로 식사를 하고 얼마 되지 않은 피해자에게 마취를 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실제로 원고에게 환자병력 등을 물어보는 역할을 하였던 입실수속 간호사(admitting nurse)를 백방으로 찾는다. 병원 입실과정에서 물어보는 것 중 하나가 언제 식사를 했는가이기 때문이다.

간신히 찾아낸 간호원이 재판 최종일에 나와 증언한다. "환자는 1시간 전에 식사를 하였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러나 본인이 작성한 기록에는 환자가 9시간 전에 식사를 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사고가 터진 후 마취의가 나에게 1자를 9자로 바꾸라고 말했다."

피고 변호인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반대신문을 하러 나온다. 당신 병원기록에 스스로 9시간이라고 써넣고 서명까지 하였는데 지금 하는 말을 왜 믿어야 하죠? "혹시 나중에 쓸 일이 있을 지 몰라서 9자로 고치기 전에 복사를 해놓았어요. 여기 가지고 있어요."


'우리들의 재판'은 가능한가

보통의 법률영화들은 여기서 끝마쳤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제목이 <평결>인 이유는 바로 배심원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싶어서였으리라(참고로 판사의 결정은 판결이라 하고 배심원의 결정은 평결이라고 한다).

판사는 절차적인 그러나 나름대로 정당성 있는 이유들을 들어 간호사의 증언 자체를 증거에서 배제할 것을 배심원지시(jury instruction)을 통해 배심원들에게 명령한다. 그러므로 간호사는 증언대에 서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간호사의 증언을 끝으로 재판은 끝나고 배심원의 평결을 기다려야 한다. 이대로라면 원고는 져야 한다.

피고측도 그렇게 믿고 있고 재판을 관람했던 피고병원의 임원은 피고병원의 수장인 추기경에게 이렇게 보고한다. "간호사의 증언이 있었지만 배심원은 그 증언을 무시하도록 지시를 받았습니다." 추기경은 묻는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간호사 말은 믿었나요?"

그렇다. 여기에 배심제는 판사와의 견제와 균형 속에서 "우리들의 재판"을 가능하게 하는 간극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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