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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롭게 묵비권을 행사할 자유

2009/06/04 08:38 | Posted by <소문> 편집실

검찰수사 도중의 ‘자살’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검찰수사가 형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무죄추정의 원칙의 당연한 귀결이다. 그리고 검찰수사가 형벌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영장주의와 자기부죄거부권이 존재한다. 영장주의란 체포, 구속, 압수수색과 같은 개인의 신체적 자유나 사생활의 제약은 수사기관과는 독립된 법관이 ‘범죄수사에의 필요성’이나 ‘죄를 범하였다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 등을 영장을 통해 인정한 후에야 이루어질 수 있다는 헌법적 원리이다.

묵비권은 헌법적 권리
자기부죄거부권이란 피고나 피의자가 수사기관에 의해 자기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않을 헌법적 권리를 말하며 소위 ‘묵비권’으로 불리워진다. 이 권리는 피의자의 신체적 자유나 사생활의 절차상의 보호를 넘어서 훨씬 더 섬세하고 실체적으로 피의자의 자기결정권을 보호한다. 즉 피의자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진술강요도 용납되지 않아 강압적이거나 다른 권리침해가 없어도 불법이 되며 이를 통해 취득된 진술은 증거력이 부인된다. 기실 진술이라 함은 뇌와 입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물리적인 강제를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모든 진술은 자발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요행위가 합법적인 영장에 의한 구금 하에서 이루어졌어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자기부죄거부권도 검찰이 강압적인 신문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규범으로 작용한다. 묵비권의 보호 정도는 나라마다 다르지만 예컨대 미국에서는 피의자가 수사기관에 묵비권을 선언하면 모든 신문은 중단된다. 이때 중단되지 않고 계속된 신문을 통해 취득된 진술은 모두 증거력이 거부된다.
뿐만 아니라 피의자가 묵비권을 행사하였다는 것이 유죄의 증거가 될 수 없음은 물론 피고의 묵비권 행사는 사회적으로도 비난받지 않는다. 입증에 대한 책임은 검찰이 가지고 있고 피의자는 자기파괴에 이르는 입증에 협조하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모든 피의자신문은 피의자가 진정으로 원할 때만 이루어진다. 결국 피고가 검찰에게 진술을 하는 경우는 변호사를 대동하고 검찰과의 협상을 통해 자신의 죄과를 줄이려 할 때뿐이다. 이에 따라 검찰은 전혀 피의자의 진술에 의지하지 않은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증거를 취득해야 한다.
그렇다면 검찰, 법원 그리고 언론이 영장주의와 묵비권을 보장하는 사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검찰은 우선 노대통령의 입을 통하지 않고 ‘포괄적 뇌물죄’의 증거들을 독자적으로 찾아야만 한다. 물론 검찰은 형사소송법 제215조 상의 ‘범죄수사에의 필요성’을 입증한다면 봉하마을 사저에 대한 압수수색 등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노대통령이 받은 정신적 압박의 정점이 된, 김해에서 서울에 이르는 수 시간에 이르는 버스여행 뒤에 다시 새벽 5시에 돌아오는 형벌과도 다름없는 수사는 없었을 것이다.

출두거부도 문제 안돼
물론 검찰이 노대통령이 출두요구에 불응한다면 형사소송법 제200조의2 상의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만한 상당한 이유’를 입증하여 체포와 같은 더욱 강제력 있는 수사도 가능하였을 것이고 (구속영장은 증거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없으므로 발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바로 이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노대통령은 굴욕적인 검찰출두에 동의한 것이다. 하지만 이 가상사회에서는 노대통령은 출두요구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체포영장의 발부가능성이 낮을 것이기 때문이다.
검찰이 실제로 정당하게 영장을 받아낼 정도의 증거를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 필자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유리한 증거는 모두 공개해왔던 검찰의 관행에 비추어 그러한 증거는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노대통령은 출두거부에 대해 아무런 심리적 부담감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고 누구도 이에 대해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검찰이 아무것도 입증하지 않은 상황에서 결자해지해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비극이 ‘명예롭게 묵비권을 행사할 자유’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되길 빈다. 물론 ‘기회’라는 말을 붙이기에 우리는 너무나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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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실씨의 자살(2)-'최진실법'

2008/10/07 16:28 | Posted by <소문> 편집실
최진실 씨의 자살과 그에 따른 사회적 파장에 대처하는 여당과 일부 보수 언론의 대응은 한마디로 졸렬하다.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대한민국 국민의 자살률에 대해서는 아무런 실효성 있는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않는) 정부ㆍ여당이 저처럼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최진실 씨의 자살에 따른 사회적 파장을 즐기고 있다. 그 목적은 단 하나다. 인터넷을 통제하여 언로(言路)를 막고 우민정치를 하겠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일부 의원과 보수 언론은 최씨의 자살 원인을 ‘악플’이라 단정하고 있다. 안재환 씨와 결부된 최씨에 대한 소문이 만들어진 곳은 온라인이 아니라, 평소에도 온갖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만드는 증권가라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그들은 그렇게 몰고 가고 있다.

 

자살학에서 가장 어려운 점의 하나는 자살(기도)자의 심리적 동기를 객관적인 사회적 언어로 재구성(프로파일링)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복합적인 인격을 가진 현대의 인간은 단 한 개의 명쾌한 동기나 원인 때문에 자살하지 않는다. 스스로도 모호하고 절망적인 상태에서, 복잡한 이유가 중첩되고 또 그 이유가 반복적으로 자아를 파괴시켜 온 상황에서 자살을 선택한다. 어떤 경우 자살은 충동적으로 선택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도 그 원인은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가진 상식에 비추어 어떤 행위의 동기를 사후적으로만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과학적으로는 급ㆍ만성 우울증과 조울증과 자살행동의 관계에 대한 생화학적ㆍ통계적 상관성이 밝혀져 있을 뿐이다.

 

사회(학)적으로는, 통계적 필요와 ‘예방’을 위한 활동 때문에 자살자의 동기를 분류하고 단순화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타인의 자살(기도)에 대해 조금이라도 구체적이고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쉽게 그 원인과 동기를 단정하는 것은 자살(기도)이라는 실존적 행위에 대한 모욕이며, 자살(기도)자에 대한 예의 있는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관련된 정황을 여러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견지에서 그들은 최진실 씨의 죽음을 모독하고 있다.

 

 물론 타인에 의한 모욕과 자살은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 동서고금에서 자살은 견디기 어려운 모욕을 씻는 방법으로 널리 선택되어 왔다. 또한 모욕은 공격당하는 자아에게 상처를 입히고 결국 자아존중감을 약화시킬 수 있다. 자아존중감의 약화는 자살의 근저적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인신공격은 그 자체로 위험하고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이다.

 

전여옥이라는 국회의원이 최진실 씨가 죽고 난 뒤에 악성댓글이 죽음의 원인이라 단정하고,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닌가 싶다"며 "각박한 세상에 우리에게 꿈과 용기를 그리고 즐거움을 주었던 이들이 이렇게 바쁘게 이 세상을 떠나게 만든 것은 말입니다"라고 글을 올렸다 한다. 싸움닭처럼 남을 공격하는 데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여줬던 이 국회의원 자신이 네티즌들한테 항상 심한 공격을 받아왔다. 밖에 보이는 것과 통상의 감각으로 그녀는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듯’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도 쏟아지는 욕들 앞에서는 힘들었을 것이다. 악플 받는 어려움을 진정 이해한다면, '우리 모두의'를 운운하지말고 이번 기회에 그녀가 그동안 자신이 타인들에게 해왔던 공격들을 사과했다면 어땠을까?

 

 

한나라당이 추진하는 <최진실법>은 전혀 진정성이 없어 보인다. 너무 포괄적이고 모호하다. 법리적으로도 전혀 타당성이 없어 보인다. 한나라당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진심으로 악의를 가진 ‘안티팬’으로부터 연예인들을 보호하고, 스토커나 페니스 파시스트들에게서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 법을 제정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한나라당은 어떤 사람들을 막무가내로 ‘좌빨’ ‘친북’ ‘좌파’ ‘좀비’ ‘절라도’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문화도 함께 사라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을까?

 

한나라당은 원하는 것은 오로지 대통령을 쥐에 비유하고, ‘조선’에 ㅅ받침을 첨가하여 부르는 식의 인터넷 문화가 사라지는 것일 테다. 그런 문화는 잘못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런 인터넷 문화는 우리 민주주의의 기초이다.

한편, 그런 인터넷정치 문화와 연예인 누군가의 용모, 행동, 언행을 인신공격하는 사적인 ‘배설’이 같은 차원의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나라당과 일부 보수 언론은 이런 것들을 구분할 능력과 의사가 없다고 보인다. 누가 악플러이며, 어떤 것이 악플인지? ‘모욕’의 상대성ㆍ주관성의 문제를 누가 판단할 수 있는지? 기초적인 법리조차 처음부터 토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덧) 마지막으로 하나 덧붙이자. 한국의 높은 자살률은 10대에서 70대 노인까지 전세대에 걸쳐있다는 점. 그리고 한국의 높은 자살률은 소위 ‘민주정부’ 약 10년 간 달성된 것이라는 점. 이 사이에 한국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IMF가 있었고, ‘양극화’가 심화되었고, 비정규직은 늘어났다. 한마디로 개인들 사이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사람들은 더욱 외로워졌다. 한국에서 어린이건 노인이건, 누구나 살기 어렵다. 누구나 팍팍한 삶을 살기 때문에 자살률이 높다. 그리고 팍팍한 삶을 살기 때문에 여리고 약한 희생양을 찾아낸다. 만약 자살률이 해당 사회 성원의 행복 문제와 관련된 것이라면, 지난 10년 간의 소위 민주정부는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자살률이 무려 2배로 높아졌다. 그들은 자랑스런 ‘대한민국’에 복속된 개인들의 행복을 전혀 증진시켜 주지 못했다. 과연 이명박 정권은 어떨까? 입만 아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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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실씨의 자살(1)

2008/10/07 16:11 | Posted by <소문> 편집실

최진실 씨 자살사건은 또 하나의 ‘국가대표급’ 자살이다. 모든 세대와 계층이, 경력 20년의 ‘톱스타’인 그녀를, 또는 그녀의 인생을 알고 있다. 이는 안재환 씨 자살사건과 그 충격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났다. 이 자살은 그 파급효과에 있어서도 가장 넓고 강력하고 지속적일 것이다.


최진실 씨는 입지전적 인물의 하나다. 그녀는 ‘가난하고 못 배운’ 또순이이자 ‘소녀가장형’ 인물이었다. 몸뚱아리와 강한 의지(또는 욕망) 외에 가진 것이 없었던, 그리고 그것으로 세상과 상대해 온 인물이었다. 그녀의 인생은 한국에서 상상할 수 있는(아니, 그것을 초과하는) 가장 통속적이고 드라마틱한 ‘여자의 일생’을 구현했다.

 

행복을 평범ㆍ소박하고 조용한 삶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 간주할 때, 생의 화려함과 불행(험난함)은 서로 배치(背馳)되는 것이다. 화려한 생은 불행할 가능성이 더 높다. 화려한 것을 추구하는 생은 실패할 확률이 높다. 따라서 자살할 확률도 높다. 미니멀한 삶이 훨씬 안전하다. ‘단순하게 살아라’... 모든 ‘뉴에이지’적인 것이 가르치는 바가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ㆍ인기ㆍ권력 등으로 표상되는 생의 화려함(일상의 용어로는 ‘잘 나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추구하지 않는 생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돈ㆍ인기ㆍ권력이 없는 생이야말로 불행한 것 아닌가. (우울증론자들은 그것을 필요한 만큼 추구하지 않는 것도 ‘우울’의 징후라 생각한다. <우울증에 반대한다>를 보라.)


모험을 걸어 ‘화려함’을 추구하는 것, 거기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래서 자아의 작용, 즉 자아의 ‘기술’은 개인에게 닥치는 이 거대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작동(해야) 한다. 안분(安分)의 논리는 그래서 동서고금을 통해 계발되어 왔다. 그러나 안분은 패배와 자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초월과 다르다.

 

최 씨가 세상을 뜬 날, 한국에서 열리는 가장 화려한 행사의 하나인 PIFF 개막제가 열렸다. 레드카펫 위에 가장 비싼 옷을 입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저 여자 ‘스타’들을 보라. 그리고 그 생과 자아를 상상해보자. 10대에 벌써 전국적인 인물이 된 저런 소녀의 삶은 무엇일까? 하지만 모든 여배우들이 최진실처럼 살지는 않는다. 그들 모두가 ‘연예’라는 현대 대중문화의 기제를 통해 소비되지만, 그녀의 생과 육체의 전체를 갈취당하지는 않는다. 이런 면에서 최진실은 ‘근대적 연예인’, ‘여배우’이다. 생득적 계급ㆍ계층의 문제가 여기에도 관련된다.

 

소위 ‘공인’, 그중에서도 특히 ‘연예인’의 자아는 매우 위태로운 것임을 최씨의 자살이 보여준다. 그들은 ‘늘 노출된 상태’에서 지낸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언제나 감시(cf. 파파라치)와 ‘평가’의 대상이 된다. 특히 연예인에 대한 세인의 평가란 실로 놀라운 것이다. 전국의 남녀노소가 언제나 그(녀)에 대해, 그리고 그(녀)의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육체의 세세한 모든 것과 연애ㆍ결혼경력과 사고방식은, 그야말로 ‘소비’된다.


그러나 ‘소비’라는 말은 매우 무책임하고 둔탁하다. 평가하는 세인(수용자)의 관점에서 볼 때에도 이 ‘소비’는 그저 껌 한번 씹고 버리는 그런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특히 여성과 청소년에게 있어) 자아와 욕망의 투사이자, 표상행위이다. 이는 심각한 ‘수행’이다.

 

그런데 이 평가와 소비는 오늘날, ‘인터넷’이라는 공간 덕분에 새롭게, 더욱 신경증적으로 제도화되어있다. 평가받는 쪽은 어떨까? 이건 과히 상상을 초월한다. 타인의 평가, 세인의 평이라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바로 여기에서 자살할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주어져있다.)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주목-받기(인정받기)’가 행복의 경계와 맺는 함수가 어디까지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그 상대적 작용을 거의 조정하지 못한다.

(계속)

 [출처] 최진실 씨의 경우 (1) |작성자 마포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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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에 반대한다(1)

2008/01/13 08:05 | Posted by 김장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울증에 반대한다 | 원제 Against Depression (2005)

피터 D. 크레이머 (지은이), 고정아 (옮긴이) | 플래닛

  우울증은 정상적 상태의 일부가 아니라 파괴적인 ‘병리’를 지닌 질병일 뿐이라는 사실에 대한 강조가 책의 큰 주제이다. 저자는 이를 우울증의 사회적 ‘은유’(수잔 손택의 개념과 같은 것)와 문화적 신화에 대해 비판ㆍ반대로 구체화한다. 그 과정에서 좀 ‘오바’도 하기 때문에 책은 논쟁적이다.

저자는 매우 풍부한 의학적 지식 외에도 상당히 다양한 인문학 지식으로 서구 문학사 전체를 '들이대며' 자신의 논증을 완수하려 한다. 특히 미국의 생물학과 유전학, 그리고 정신의학과 뇌과학은 지(知)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하는 데 중요한 동력이 되고 있기 때문에, 인문학과 의학적 사고를 결합하고자 하는 이런 책을 읽는 것은 유익하고도 흥미롭다. 부가적으로 사실 매우 만연해있는 질병인 우울증에 관한 여러 지식을 얻을 수 있으며 세계 정신의학계의 동향도 좀 알 수 있다.

상당히 자주 우울해지거나 지나치게 소심하거나 만사에 너무 자주 무기력ㆍ무감각(!)해지는 기질을 갖고 있는, 그래서 고통스러운 사람들은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필요도 있겠다. 우울증을 흔히 ‘마음의 감기’라고들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사실 감기 이상의 치명성을 우울증은 갖고 있다. 실질적인 도움이란 자신의 '우울' 상태를 정시하고, 2주 이상 '심각한 우울'에서 못 벗어났다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는 일이다. 뿐 아니다. 결정적으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계속(!) 못 해내는 사람(예컨대 석사논문을 5년씩 쓰고 있다든가)이나 가족, 친구, 연인 등등 필수적인 인간관계도 모조리 '파토'내고 사는 사람들도 우울증을 겪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의사와 상담한 후, 처방이 내려지면 프로작(1정에 900원 정도. 고가약에 속한다.) 같은  항우울제를 먹어도 좋다고 생각된다. 의사들에 의하면 항우울제가 인생을 진정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꿔줄 수도 있다. '프로작혁명'이라는 말도 있고, 프로작의 별칭은 심지어 Happy Maker(!!)이다.   


인정의 조건>
저자가 쓰고 있는 바에 동의할 수 있는 대목이 많고 저자의 진정성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비관과 우울이라 칭해지는 증상과 기분ㆍ인식의 계열을 보다 정밀하게 분리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인간의 본원적 유한성과 그에 대한 직시(이는 비관과 허무에 대한 인식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저자에 의하면 ‘즐거운 은둔’이나 ‘신념으로서의 자살’이 가능할 거 같지 않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였으나 노년에 결국 자살한 프리모 레비 케이스처럼 그것은 우울증의 증례일 뿐), 사회적 비참과 소외와 그에 대한 예민한 통찰(이는 무기력과 비판, 세속적인 것에 대한 거리두기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기분장애와 그에 따른 무기력ㆍ우울증 자체(이는 뇌손상과 직접 연관되는 병리로 규정된다)을 제대로 구별할 수 있는가?(인식과 기분은 서로 다르지만 얽혀있다.) 만약 그 구분이 모호할 수밖에 없고 ‘실금’일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병리학적 엄밀함이 더 필요한 거 아닌가? 즉, 다음과 같은 기분 및 인식 계열의 차이에 대한 구별.

  > 뇌손상 / 기분장애 / 무기력 / 우울함(멜랑콜리) / ... / 소외
                   사회 비판 ... 냉소주의 ... 허무주의 /

  둘째, 의학적 견해의 속화된 생물학적 사회화에 대한 방비가 필요하다. 즉 비판이나 속 깊은 통찰, 사회적 비관주의 전체를 질병이나 유전자 결함으로 간주하는 상식의 출현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는 것. 정치적 유전자주의. 이슬람교와 공산주의를 사고장애로 간주한다든가, 또는 은둔과 자살을 죄악으로 간주한다든가 하는 생체권력은 탄생 가능하다. 또는 거기에 결부된 사회적 책임을 돌보지 않고 개인의 (유전자적) 결함이나 병리로 단순히 치부하는 미국적인 생물학주의는 거부되어야 한다.(한편 그래서 정치적으로 “명랑 좌파”(우석훈)가 필요하다.) 그래서 아예 우울증의 권역에 확실한 기분장애나 무기력이 아닌 것을 걷어내고 서술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저자의 아포리 혹은 망설임은 “심오한 것과 우울한 것 사이에 그어진 실금”(134), “우울증에 전면적으로 대항한다고 해서 소외와 오랜 비탄에 대한 경탄을 멈춰야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던 것 같다.”라고 쓸 때와 “관습적 견해에 따르면, 지성인은 염세주의적 유럽인이다. 그들은 어두운 복합체다. 사회와 불편한 관계에 있고, 내면에서는 악마와 싸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카프카나 키에르케고르가 이런 지성인의 모범이 되었다.”와 같이 말할 때 드러난다. 여기에는 일정한 무지와 미국식 사고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저자는 “(139) 비통에 빠지는 것은 바위의 승리이고 압제자들의 승리이지만, 기쁨을 누리는 것은 시지프스의 승리이고 우리의 승리이다. 우리가 약물 치료를 제대로 받는다면, “탄성을 지니고도, 멜랑콜리에서 벗어나고도, 사람은 소외의 핵심적 문제를 볼 수도 있고 그것을 탐구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중략) 단지 비전을 얻는 데 우울증이 얼마나 필요한지는 분명치 않다고 말하는 것뿐.”이라 말하여 겨우 종합을 이루는 듯하다. 그러나 이 종합이 자주 저자 자신에 의해 흔들린다.

  우울증과 여성 젠더>

흥미롭게도 여성 우울증 환자에 대한 남성의 반응을 위주로 기술된다. 여성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남성의 2배이기 때문이다. 모든 우울증 연구는 여성에 더 많이 집중되어 있다. 한데 우울함(증)의 증례는 소극적이고 사려 깊고 조용하다(180)는 ‘여성적’이라는 속성을 지닌다. 즉 우울(증)의 젠더...! 이는 두 가지 차원 즉 에스트로겐과 가부장제의 두 축으로 서술되어야 한다. 에스트로겐에 대한 언급은 없고 여성의 ‘애착’을 위주로 모호하게 이 문제를 기술했다.

즉 우울증은 일단 시작되면 성차이가 없다. 우울증의 성차이는 재발율의 차이가 아니라 최초 발병율의 차이인데 애초에 첫 삽화를 겪을 확률이 여성이 높다. 왜? 첫째 유전적인 이유로, 한달 주기의 호르몬 변화가 스트레스조절 기능에 교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 둘째, ‘인간관계와 관련된 불운을 들여다보면 남자와 여자는 더이상 같지 않다’는 것. 여자들은 다중적 애착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애정의 비용’ 가설.(311) 애정은 사회적 선이나 우울증의 위험인자인 것이라는 점이다.

  우울증과 문학사>

학부 때 하버드에서 문학사를 (복수?)전공한 듯(274) 인문적 소양이 깊은 저자는 줄타기를 반복한다. 우울증이 지닌 병리에 대한 의사로서의 고발은 진정성이 있다. 그의 인문적 소양은 경탄할만하다. 저자는 우울증이 한갓 질병일 뿐이라는 명제를 단호하게 말하기 위해, 우울(증)에 결부된 사회문화적ㆍ역사적 ‘상징’들과, 그리고 문학적 전통에 대해 어려운 대결을 시도한다. 고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햄릿> <베르테르>에 이르는 텍스트에 나타난 우울증(멜랑콜리)을 대상으로. 그러나 병리적 산물이 아니라 ‘인류의 유산’으로 간주되는 이런 텍스트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그의 논리는 자주 한계를 갖는다. 다시 말해, 이는 세계와 인간의 조건(‘세계의 비참’은 중단되지 않고 있다)ㆍ정신성의 본연성 자체에 우울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생기는 아포리아이다. 물론 명민한 저자는 이에 대해 자각적이다.

다시 아포리아는 여기서도 멜랑콜리, 기분장애, 우울증을 구분하지 않거나 못하고, 또는 (문학자들의) 성격 자체를 문제삼기 때문에 발생한다. (생물학적으로도 이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 염세주의자나 비판가들의 뇌는 다르다?) 다시 말해 저자가 모호하게 말하는 “멜랑콜리의 어떤 판본”(우울의 역사문화적 전개)이라는 표현은 멜랑콜리 개념ㆍ담론의 역사적 진화(“그러나 광증이나 치질이 분리돼 나가면서 고결한 멜랑콜리에는 쾌감결여, 소외, 과거반추, 슬픔만이 남았다.”)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그것의 구별되는 원인과 증례를 정확히 개념화하려 하지 않는(못하는) 것을 드러낸다. 특히 이 장의 서술과정에서 자주 멜랑콜리와 (텍스트에서 독해가능한) 우울(증?)을 동일시한다.

소외와 우울증>

결미의 이 대목에서는 매우 웃고 말았다. 저자는 자신이 ‘소외’를 잘 이해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기가 겪은 삶(저자는 독일계 유대인)과 그 속에서의 소외 회고담을 쓰고 있는데, 전혀 ‘소외’스럽지 않고 오히려 저자가 얼마나 잘 주류의 삶을 살아왔는가를 보여줬기 때문. “내게 소외를 말하지 마라. 나는 소외가 만개한 60년대의 하버드에 살았고, 거기에서조차 어두운 아웃사이더였다.(328)” 저자는 ‘소외’에 대해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를 갖고자 하나 매우 한계가 많은 것이다.

또한 저자가 쓰고 있는 ‘소외’라는 말은 사실 그 자체가 매우 뭉툭한데, 이는 미국적 인문주의의 한계인지 저자의 한계인지? 저자는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겪을 수밖에 없었던 또는 당장 치명적인 빈곤과 가부장제의 침해를 받은 환자들을 많이 알고 있을 것인데, 왜 이 정도? 이 대목에서는 혹 이 의사가 보는 환자들은 대부분 백인 중산층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소외를 존중한다. 하지만 그것이 우울증과는 분명히 다른 상태인지 증명할 것을 요구한다.(332)”는 말은 저자 본인에게 돌려야 할 것이 아닌가. 오히려 독자는 이를 기대했지만 끝내 책에 나오지 않았다. 이 책에 전반적으로 부족한 것은 정치적ㆍ사회적 상상력이다. 이는 우울증의 여성성을 다룰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 저자는 양심적이며 학제적인 것을 추구하는 학자이다.

요컨대 우울을 찬양할 필요는 없으나 우울증에는 반대해야 하고, 우울증을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소외에 더욱 열심히 반대해야 한다... 이들은 역으로 흥미로운 테제들이다. 왜냐하면. ‘지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서 낙관한다’ㆍ‘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 마셈’은 우리의 명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덧)   정신성의 결여ㆍ문화의 피상성에 대한 (인)문학주의자들의 시대착오적 한탄, 그리고 좌파의 무능(‘비판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다, 우울하고 칙칙하다’)도 우울 만유주의자에 의하면 우울증의 증상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오히려 (젠더) 철학 등에서 ‘우울’이 주요한 키워드로 부각되는 경향도 있다. 지배를 비껴가는 정신의 (여성적ㆍ소극적) 저항으로 이를 읽는 듯.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엘피, 2007)ㆍ<환상의 돌림병(지젝의 문화읽기)>을 상기해보라.

덧2) 우울증에 관한 책이 꽤 많다. 소위 메이저 출판사에서 2007년에 발간된 책도 여러 종이다. ‘우울증’이 새로운 대중적 관심 분야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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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로 인간을 이해하기 ver 0.3

2007/09/10 21:45 | Posted by 김장철

자살로 인간을 이해하기 ver 0.3
: Kay Redfield Jamison/이문희 역, <자살의 이해>, 뿌리와 이파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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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가와 예술가들이, 혹은 어떤 철학서와 예술작품이 자살에 낭만적이거나 신비한 외피를 입힌다. 반 고흐, 어네스트 헤밍웨이, 마야코프스키, 실비아 플러스, 버지니아 울프, 발터 벤야민, 질르 들뢰즈, 아리시마 다케오, 미시마 유키오, 다자이 오사무, 그리고 전혜린, 김광석. 이런 인간들의 죽음이 자살에 대한 후광을 더한다.


하지만 자살은 극단적인 고통과 병적인 혼미,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절망 속에서 선택된다. 그것은 낭만적이고 예술적인 충동과 거리가 멀다. 자살자는 인간된 마음을 지켜주는 유머감각과 따뜻함, 자존감이 모두 너덜너덜 헤어지고 박살난 상태에서, 멍해진 채로 그 길을 택한다. 그리고 자살자 옆에 남겨진 사람에게도 엄청난 아픔을 남긴다. 자살은 가장 독성이 강한 고통이다.


  자살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이 인간 행위의 극한에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생의 의지, 혹은 자기보존본능은 자동적이며 일상적이다. 태어나는 순간 우리 모두는 그것을 소지하게 되고 지속적으로 훈련한다. 그리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는 ‘본능적인 것’ 이상으로 강하게 된다.

그러나 자살은 이 모두를 뛰어넘는다. 그래서 자살은 문제적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겪는 개인적인 고통과 사회적인 모순이 자살이라는 현상에 결절한다. 자살을 통해서 ‘살아나감’과 살아있음의 어울림, 즉 사회에 대해 다시 사유할 수 있다.


  그래서 서구에서는 ‘자살학(suicidology)’이 발전해왔다. 존스홉킨스 의과대학 정신과 여성 교수인 케이 레드필드 재미슨(Kay Redfield Jamison)이 쓰고(원제 ‘Night Falls Fast’) ‘뿌리와 이파리’에서 번역 출간한 <자살의 이해>에 의하면 지난 30년간 1,500여건의 과학 및 임상논문들과 수백 권에 달하는 저서와 전공논문들이 발표됐다 한다. 이중 몇 권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었는데, 사회학적 자살론의 교과서처럼 여겨지는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을 제외할 때 <자살의 이해>는 자살에 대한 가장 깊은 통찰을 제공해준다.


  자살은 인간의 복잡성이 야기해내는 가장 문제적인 행동인 탓에, 자살의 원인과 기제는 특정한 요인들로 환원되어 설명되지 못한다. 개별 자살자들에 대해 행해지는 과학적인 ‘심리 부검’으로도 자살에 이른 한 인간의 마음과 생을 다시 조립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살에 대해 말할 때, 인간을 신경전달물질과 DNA에 의해 지배받는 한갓 동물로 보지 않고, 동시에 형이상학적 행위로 미화하기 않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자살에 관한 책들을 보면 균형잡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살에 대해 쓰는 사람들은 때로 턱없이 자살을 미화하거나, 자살 사례를 말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풍자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감상에 젖는다.


균형을 잡고 있으면서 새롭고 믿을만한 의학ㆍ자연과학의 성과가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 책의 큰 미덕이다. 저자의 공식적인 태도는, 자살이 맞서기 힘든 강적이지만 예방하고 치료해야 할 ‘병’이라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자살이 우울ㆍ조울ㆍ분열증ㆍ인격장애와 같은 정신질환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자살을 병으로 취급하는 객관적 입장에 다소 불만을 느낄 수 있겠지만 저항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저자 자신, 임상경험이 많은 정신과 의사이면서 스스로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는 조울증 환자라는 사실이 신뢰를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인이 어디에 있든, 저자는 진정한 연민으로 자살자와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덧> 자살에 관한 책이 꽤 많이 번역됐지만, 한국인 저자가 자살에 관해 쓴 책은 거의 없다. 왜 그럴까? 근대가 시작된 이래, 엄청나게 많은 남/녀/노/소가 (골고루)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근자에는 매일 하루 30명이 넘는 사람이 야만스러운 경쟁의 밀림에서 ‘자진탈락’ 하고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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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9/10 21:58

    전 자살하면, 김소월과 커트 코베인이 떠올라요. 저도 석사때 자살에 관심이 생겨서 이 책 읽었는데, 그닥 감명받은 기억은 없네요. 왜 1910년~20년 희곡 텍스트에서 유닥 자살이 많이 결말로 등장하는가의 문제는, '자살'의 본질을 캐는 것보다는, 당대 상황과 희곡이 공연되었을 때의 가장 드라마틱한 결말, 당대 시대적 상황, 드라마투르기의 한계, 선전선동의 필요성 등으로 결론을 내렸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제가 관심을 가졌던 2.8 선언 직전 동경유학생 집단의 크리스마스 공연장에서 연행되었던 희곡에도 자살로 연극이 끝나는 것이 있어서, 그런 해석으로 도달하게 되었던 기억이 불연 나네요 ^^ 그 와중에 읽었던 책들..
    대학원 과정때, 어떻게든 '해답'을 찾으려고 나만의 해석을 내려보려고, 책과 자료를 뒤지고 발표문 썼던 것들, 돌이켜보면 즐거웠어요. ㅎㅎ

  2. BlogIcon 하이腦 2007/09/10 22:07

    실비아 플라스 신드롬이 있을 정도로, 자살한 문인(을 포함한 예술가)들이 갖고 있는 오라는 실로 대단한 것 같아요. 소재로서도 늘 신선하게 자극적이니까요. 몇 달 전 사다놓고 고이 모셔둔 뒤르켐의 Suicide를 읽어야 겠단 생각이 드네요. (홋-범생 긴君의 자랑;;)

  3. BlogIcon Gore 2007/09/11 02:02

    http://blog.naver.com/icarus6/120013388754

    자료 자체의 신빙성은 조금 의심이 가지만, 상당히 많은 양의 '자살' 자료가 정리되어 있습니다. 노약자 및 임산부, 심장이 약한 사람은 링크를 클릭하시기 전에 한 번 생각해 주세요 =_=;

    (대체적으로 마르탱 모네스티에의 <자살>에서 많은 내용을 가져온 것 같네요.)

  4. BlogIcon 김장철 2007/09/11 06:53

    저 블로그는 <자살의 역사와 기술>에서 임의로 발췌한 거네요. 저 책도 봤는데 상당히 풍자적인 톤으로 씌어져 있습니다... 1920년대 신문을 보면 온통 자살 기사로 넘쳐나죠. 긴 군이 찾은 '원인'은 뭐였는지? 나중에 제것과 비교해봅세다... 커트 코베인이 죽은 날(과연 자살인가? http://www.cobaincase.com),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들었는데 경악하던 배씨의 음성이 아직도 생생... 김광석이나 <남경에서의 강간> 저자인 아이리스 장의 '자살'도 의혹이 제기됐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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