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에 반대한다 | 원제 Against Depression (2005)
피터 D. 크레이머 (지은이), 고정아 (옮긴이) | 플래닛
우울증은 정상적 상태의 일부가 아니라 파괴적인 ‘병리’를 지닌 질병일 뿐이라는 사실에 대한 강조가 책의 큰 주제이다. 저자는 이를 우울증의 사회적 ‘은유’(수잔 손택의 개념과 같은 것)와 문화적 신화에 대해 비판ㆍ반대로 구체화한다. 그 과정에서 좀 ‘오바’도 하기 때문에 책은 논쟁적이다.
저자는 매우 풍부한 의학적 지식 외에도 상당히 다양한 인문학 지식으로 서구 문학사 전체를 '들이대며' 자신의 논증을 완수하려 한다. 특히 미국의 생물학과 유전학, 그리고 정신의학과 뇌과학은 지(知)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하는 데 중요한 동력이 되고 있기 때문에, 인문학과 의학적 사고를 결합하고자 하는 이런 책을 읽는 것은 유익하고도 흥미롭다. 부가적으로 사실 매우 만연해있는 질병인 우울증에 관한 여러 지식을 얻을 수 있으며 세계 정신의학계의 동향도 좀 알 수 있다.
상당히 자주 우울해지거나 지나치게 소심하거나 만사에 너무 자주 무기력ㆍ무감각(!)해지는 기질을 갖고 있는, 그래서 고통스러운 사람들은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필요도 있겠다. 우울증을 흔히 ‘마음의 감기’라고들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사실 감기 이상의 치명성을 우울증은 갖고 있다. 실질적인 도움이란 자신의 '우울' 상태를 정시하고, 2주 이상 '심각한 우울'에서 못 벗어났다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는 일이다. 뿐 아니다. 결정적으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계속(!) 못 해내는 사람(예컨대 석사논문을 5년씩 쓰고 있다든가)이나 가족, 친구, 연인 등등 필수적인 인간관계도 모조리 '파토'내고 사는 사람들도 우울증을 겪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의사와 상담한 후, 처방이 내려지면 프로작(1정에 900원 정도. 고가약에 속한다.) 같은 항우울제를 먹어도 좋다고 생각된다. 의사들에 의하면 항우울제가 인생을 진정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꿔줄 수도 있다. '프로작혁명'이라는 말도 있고, 프로작의 별칭은 심지어 Happy Maker(!!)이다.
인정의 조건>
저자가 쓰고 있는 바에 동의할 수 있는 대목이 많고 저자의 진정성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비관과 우울이라 칭해지는 증상과 기분ㆍ인식의 계열을 보다 정밀하게 분리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인간의 본원적 유한성과 그에 대한 직시(이는 비관과 허무에 대한 인식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저자에 의하면 ‘즐거운 은둔’이나 ‘신념으로서의 자살’이 가능할 거 같지 않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였으나 노년에 결국 자살한 프리모 레비 케이스처럼 그것은 우울증의 증례일 뿐), 사회적 비참과 소외와 그에 대한 예민한 통찰(이는 무기력과 비판, 세속적인 것에 대한 거리두기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기분장애와 그에 따른 무기력ㆍ우울증 자체(이는 뇌손상과 직접 연관되는 병리로 규정된다)을 제대로 구별할 수 있는가?(인식과 기분은 서로 다르지만 얽혀있다.) 만약 그 구분이 모호할 수밖에 없고 ‘실금’일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병리학적 엄밀함이 더 필요한 거 아닌가? 즉, 다음과 같은 기분 및 인식 계열의 차이에 대한 구별.
> 뇌손상 / 기분장애 / 무기력 / 우울함(멜랑콜리) / ... / 소외
사회 비판 ... 냉소주의 ... 허무주의 /
둘째, 의학적 견해의 속화된 생물학적 사회화에 대한 방비가 필요하다. 즉 비판이나 속 깊은 통찰, 사회적 비관주의 전체를 질병이나 유전자 결함으로 간주하는 상식의 출현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는 것. 정치적 유전자주의. 이슬람교와 공산주의를 사고장애로 간주한다든가, 또는 은둔과 자살을 죄악으로 간주한다든가 하는 생체권력은 탄생 가능하다. 또는 거기에 결부된 사회적 책임을 돌보지 않고 개인의 (유전자적) 결함이나 병리로 단순히 치부하는 미국적인 생물학주의는 거부되어야 한다.(한편 그래서 정치적으로 “명랑 좌파”(우석훈)가 필요하다.) 그래서 아예 우울증의 권역에 확실한 기분장애나 무기력이 아닌 것을 걷어내고 서술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저자의 아포리 혹은 망설임은 “심오한 것과 우울한 것 사이에 그어진 실금”(134), “우울증에 전면적으로 대항한다고 해서 소외와 오랜 비탄에 대한 경탄을 멈춰야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던 것 같다.”라고 쓸 때와 “관습적 견해에 따르면, 지성인은 염세주의적 유럽인이다. 그들은 어두운 복합체다. 사회와 불편한 관계에 있고, 내면에서는 악마와 싸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카프카나 키에르케고르가 이런 지성인의 모범이 되었다.”와 같이 말할 때 드러난다. 여기에는 일정한 무지와 미국식 사고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저자는 “(139) 비통에 빠지는 것은 바위의 승리이고 압제자들의 승리이지만, 기쁨을 누리는 것은 시지프스의 승리이고 우리의 승리이다. 우리가 약물 치료를 제대로 받는다면, “탄성을 지니고도, 멜랑콜리에서 벗어나고도, 사람은 소외의 핵심적 문제를 볼 수도 있고 그것을 탐구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중략) 단지 비전을 얻는 데 우울증이 얼마나 필요한지는 분명치 않다고 말하는 것뿐.”이라 말하여 겨우 종합을 이루는 듯하다. 그러나 이 종합이 자주 저자 자신에 의해 흔들린다.
우울증과 여성 젠더>
흥미롭게도 여성 우울증 환자에 대한 남성의 반응을 위주로 기술된다. 여성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남성의 2배이기 때문이다. 모든 우울증 연구는 여성에 더 많이 집중되어 있다. 한데 우울함(증)의 증례는 소극적이고 사려 깊고 조용하다(180)는 ‘여성적’이라는 속성을 지닌다. 즉 우울(증)의 젠더...! 이는 두 가지 차원 즉 에스트로겐과 가부장제의 두 축으로 서술되어야 한다. 에스트로겐에 대한 언급은 없고 여성의 ‘애착’을 위주로 모호하게 이 문제를 기술했다.
즉 우울증은 일단 시작되면 성차이가 없다. 우울증의 성차이는 재발율의 차이가 아니라 최초 발병율의 차이인데 애초에 첫 삽화를 겪을 확률이 여성이 높다. 왜? 첫째 유전적인 이유로, 한달 주기의 호르몬 변화가 스트레스조절 기능에 교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 둘째, ‘인간관계와 관련된 불운을 들여다보면 남자와 여자는 더이상 같지 않다’는 것. 여자들은 다중적 애착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애정의 비용’ 가설.(311) 애정은 사회적 선이나 우울증의 위험인자인 것이라는 점이다.
우울증과 문학사>
학부 때 하버드에서 문학사를 (복수?)전공한 듯(274) 인문적 소양이 깊은 저자는 줄타기를 반복한다. 우울증이 지닌 병리에 대한 의사로서의 고발은 진정성이 있다. 그의 인문적 소양은 경탄할만하다. 저자는 우울증이 한갓 질병일 뿐이라는 명제를 단호하게 말하기 위해, 우울(증)에 결부된 사회문화적ㆍ역사적 ‘상징’들과, 그리고 문학적 전통에 대해 어려운 대결을 시도한다. 고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햄릿> <베르테르>에 이르는 텍스트에 나타난 우울증(멜랑콜리)을 대상으로. 그러나 병리적 산물이 아니라 ‘인류의 유산’으로 간주되는 이런 텍스트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그의 논리는 자주 한계를 갖는다. 다시 말해, 이는 세계와 인간의 조건(‘세계의 비참’은 중단되지 않고 있다)ㆍ정신성의 본연성 자체에 우울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생기는 아포리아이다. 물론 명민한 저자는 이에 대해 자각적이다.
다시 아포리아는 여기서도 멜랑콜리, 기분장애, 우울증을 구분하지 않거나 못하고, 또는 (문학자들의) 성격 자체를 문제삼기 때문에 발생한다. (생물학적으로도 이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 염세주의자나 비판가들의 뇌는 다르다?) 다시 말해 저자가 모호하게 말하는 “멜랑콜리의 어떤 판본”(우울의 역사문화적 전개)이라는 표현은 멜랑콜리 개념ㆍ담론의 역사적 진화(“그러나 광증이나 치질이 분리돼 나가면서 고결한 멜랑콜리에는 쾌감결여, 소외, 과거반추, 슬픔만이 남았다.”)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그것의 구별되는 원인과 증례를 정확히 개념화하려 하지 않는(못하는) 것을 드러낸다. 특히 이 장의 서술과정에서 자주 멜랑콜리와 (텍스트에서 독해가능한) 우울(증?)을 동일시한다.
소외와 우울증>
결미의 이 대목에서는 매우 웃고 말았다. 저자는 자신이 ‘소외’를 잘 이해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기가 겪은 삶(저자는 독일계 유대인)과 그 속에서의 소외 회고담을 쓰고 있는데, 전혀 ‘소외’스럽지 않고 오히려 저자가 얼마나 잘 주류의 삶을 살아왔는가를 보여줬기 때문. “내게 소외를 말하지 마라. 나는 소외가 만개한 60년대의 하버드에 살았고, 거기에서조차 어두운 아웃사이더였다.(328)” 저자는 ‘소외’에 대해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를 갖고자 하나 매우 한계가 많은 것이다.
또한 저자가 쓰고 있는 ‘소외’라는 말은 사실 그 자체가 매우 뭉툭한데, 이는 미국적 인문주의의 한계인지 저자의 한계인지? 저자는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겪을 수밖에 없었던 또는 당장 치명적인 빈곤과 가부장제의 침해를 받은 환자들을 많이 알고 있을 것인데, 왜 이 정도? 이 대목에서는 혹 이 의사가 보는 환자들은 대부분 백인 중산층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소외를 존중한다. 하지만 그것이 우울증과는 분명히 다른 상태인지 증명할 것을 요구한다.(332)”는 말은 저자 본인에게 돌려야 할 것이 아닌가. 오히려 독자는 이를 기대했지만 끝내 책에 나오지 않았다. 이 책에 전반적으로 부족한 것은 정치적ㆍ사회적 상상력이다. 이는 우울증의 여성성을 다룰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 저자는 양심적이며 학제적인 것을 추구하는 학자이다.
요컨대 우울을 찬양할 필요는 없으나 우울증에는 반대해야 하고, 우울증을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소외에 더욱 열심히 반대해야 한다... 이들은 역으로 흥미로운 테제들이다. 왜냐하면. ‘지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서 낙관한다’ㆍ‘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 마셈’은 우리의 명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덧) 정신성의 결여ㆍ문화의 피상성에 대한 (인)문학주의자들의 시대착오적 한탄, 그리고 좌파의 무능(‘비판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다, 우울하고 칙칙하다’)도 우울 만유주의자에 의하면 우울증의 증상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오히려 (젠더) 철학 등에서 ‘우울’이 주요한 키워드로 부각되는 경향도 있다. 지배를 비껴가는 정신의 (여성적ㆍ소극적) 저항으로 이를 읽는 듯.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엘피, 2007)ㆍ<환상의 돌림병(지젝의 문화읽기)>을 상기해보라.
덧2) 우울증에 관한 책이 꽤 많다. 소위 메이저 출판사에서 2007년에 발간된 책도 여러 종이다. ‘우울증’이 새로운 대중적 관심 분야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