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소와 할배(사람) : 워낭소리

2009/05/07 01:49 | Posted by <소문> 편집실

할배와 소의 모습과 그 (일치된) 삶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런 소재를 굳이 찾아냈다는 것도 훌륭한 ‘기획’임에 틀림없었다.

(감독은 사전에 각지의 농협을 돌며 '죽어가는 소'를 수소문했단다.)

그러나, 어떤 소녀ㆍ청년이 영화의 결말부에서 ‘펑펑’ 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전혀 내 경우는 아니었다.

물론 죽은 소가 포크레인이 판 구덩이에서 포크레인이 뿌리는 흙으로,

그의 몸과 똑같은 색깔의 흙과 하나가 되는 장면은 훌륭했다.


또한 이 다큐에는 '노화'와 죽음에 관한 하나의 진지한 관찰과 묘사가 있다.

그것은 특별하게도 소의 죽음이다. 소는 대상이며 동물이며 주체이다.

그러나 소라서 돼지나 개, 쥐와 조금 다르다.

소는 확연히 ‘얼굴’을 가진 동물이다. (돼지, 개, 쥐들도 '때로' 얼굴을 갖고 있다.)
주로 눈 때문에 그렇다.

소의 죽음을 길게 묘사했다. 소는 천천히 죽는다.

이 천천히-죽음에 관한 기록을 우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 죽는 소의 얼굴도 ‘임종’하는 인간의 얼굴과 비슷한 데가 많았다. 
(그런데 이 소는 왠지 이름이 없다. 할배가 이름을 붙여주지 않은 것? 또는 영화가 빠뜨린 것?)

 

그러나 만약 영화가 '할배의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면 어땠을까?

영화는 극장에서 개봉되거나 ‘히트’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이유들 때문에, 감동은 방해받았고, 중간에 약간 졸았다.

 

0) 인간의 소-됨은 존경스러운 것이었으나,

소의 소-됨은 눈으로 보기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이는 나의 위선일 수 있겠으나,  소의 소-됨에 대해서

할배는 과연 인간다운 '잔인함'과 '컴패션'을 동시에 발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할배는 자신의 '소-됨'은 온전히 인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것이었다.

  

1) 갈등구조가 단순하다. 할매의 푸념과 비판은 그런 점에서 양가적이다.

할매는 ‘현실’을 일깨우며 문제의 모든 측면을 잘 제시한다.

할배의 삶에 대한 동일시를 차단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갈등을 단순화시킨다.

(할매의 마음 전체가 '농민의 마음'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삼자의 관계를 ‘삼각관계’라 표현했다.)


2) 영화는 예정된 결론으로 서사를 몰아가고 있었다.

감동과 해석을 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었다.

삽입된 컷들은 좀 '아름다워서' 수가 ‘얕은’ 것들이기도 했다.

'이 영화를 소들에게 바친다'는 마지막 자막은 가장 어색한 것이 아닐까?

'소는 인간이 아니다'(소는 죽어서야 업에서 벗어난다... 등)는 복잡한 진실을 이 자막은 왜곡한다.


3) 뒤늦게, 스토리를 알고 봤다. 스토리는 단순하고 러닝타임은 짧다.


4) 몇몇 평들이 영화를 보는 과정에 떠올랐다.

특히 관객이 무엇을 영화를 통해 보았을까, 하는 문제와 관련된.

강기갑의 말(‘영화가 농민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다’ - 진짜루?)도 떠오른다... zzz. 

도시민들이 저 영화를 통해 무엇을 소비했는가, 하는 논평이 상기되고 

농업과 흙이란 과연 우리에게 오늘날 무엇인가...... 하는 잘 모르는 질문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졸았다. zzz...

5) 자꾸 경북 봉화 사투리(맞나?)의 어미가 귀에 들리고, 자막이 보인다.

할매는 그 동네에서만 쓰는 ‘-니껴’를 완연히 많이 쓰고

할배는 표준말의 어미와 동일한 ‘-요’도 많이 쓴다.

헌데 이 영화의 자막은 발음대로 인물의 대사를 옮기지 않은,

이상한 직역인 경우가 많았다.
서울사람들을 위해서? (만약 '실제'라면, 저 경상도 할배의 말을 그들은 몇%나 직해할까?)

자막이 없었다면 나도 대사를 많이 놓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 번역 자막에는 '폭력'적인 경우도 있었다.

 

6) 이O박이도 봤단다.

왜 쥐는 사람의 양식을 쏠아대는 자기의 일에 몰두하지 않고

소와 사람에 관한 스토리에 관심을 갖나? 그것은 토론거리임에 분명하다.

쥐가 '그 할배는 어떻게 됐나?' 따위를 묻지 않고

'관객이 얼마나 들었나? 제작비가 얼마나 들었나?'

를 물은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Cinema Paradiso > 무슨 영화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해운대> 단상  (0) 2009/08/04
비상  (0) 2009/05/13
소와 할배(사람) : 워낭소리  (0) 2009/05/07
존 레논 컨피덴셜  (0) 2008/07/28
아임낫데어  (0) 2008/03/16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2007, Across The Universe)  (1) 2008/02/28

TRACKBACK | http://somun.info/trackback/134 관련글 쓰기

Comment

1분 뒤의 삶

2007/09/21 07:01 | Posted by 김장철

사용자 삽입 이미지


권기태, <1분 뒤의 삶>  


‘단숨에’까지는 아니지만 하룻만에 다 읽을만한 책이었다. 책의 이야기는 전체가 '실화다. 글을 쓴 사람은 기자 출신의 소설가로, 기자 생활을 하면서 취재했던 내용을 소설 쓰듯 플롯을 만들어 풀어놓았다.

책은 ‘생의 비의’에 관한 재밌는 ‘이야기책’이었다. 책에서 다룬 ‘생의 비의’란 특히 죽음의 의미와 운명에 관한 것이다. 운명과도 같은 뜻하지 않은 사고와 전혀 준비하지 않은 죽음(체험)이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변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책에 나오는 12명의 사람들은 해난, 감전, 산사태, 홍수, 등반, 비행기 여행 때문에 갑자기 사고를 당한다. 심지어 서울 시내 한 가운데에서 술 먹고 길 가다가 맨홀에 빠져 9일간을 지하 하수도에 갇힌 회사원도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임사(臨死) 체험’을 한다. 그러니까 이 책에는 죽음의 순간에 대한 12개의 묘사가 있다.

이 묘사는 흥미롭다. 그리고 유익하다. 죽음에 대한 상상은 생을 진지한 것으로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런 사고를 언제든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수대교에서, 삼풍백화점에서 그리고 고속도로의 수많은 지점들에서 우리는 ‘1분 뒤의 생(사)’을 모른 채 웃으며 삶의 연속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사체험>

‘임사체험’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타인이 죽어가는 순간(임종)을 지켜봐서, 생에서 사로의 그 신비로운 단절이 무엇인지 대략 알고 있다.


가래 끓으며 힘없던 호흡이 어느 순간 정말 멎는다. 정적이 흐른다. 사자가 누운 공간이 조용하고 지켜보는 사람이 집중하고 있다면, 바로 그때 무게가 ‘21그램’쯤 된다는 인간의 영혼이 기(氣)가 되어 솟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자기자신이 죽는 그 절대의 시간을 예상해보거나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임사체험은 있다. “아, 이런 게 죽는 거구나.”하는 막연한 느낌. 그러나 그것이 진짜 ‘자신의 죽음’인 것인지는 모른다. 종합병원의 기계들은, 혈압과 맥박으로, 호흡수와 뇌파로 측정할 수 있어도 말이다.

급박한 사고를 당해 맞는 죽음은 몽롱한 채로 오거나, 의식이 이미 없어진 상태에서 오기 때문이다. 물론 급박하게 맞는 죽음에 대한 자기 인식이나 자기 감각도 여러 차원일 것이다. 그것은 분노와 슬픔 같은 격렬한 감정과, 공포와 고통 혹은 나른함 같은 궁극적인 감각과, 회한과 포기 또는 윤리가 뒤범벅된 상태일 것이다.


삶>

불의의 사고를 당하기 1분 전의 삶과, 사고를 당하고 난 1분 뒤의 삶은 완전히 다르다. 사고당한 사람은 이제 그야말로 살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똑똑히 의식하는 상태에서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들은 인간의 한계와 가능성이 종합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사고라는 임사 체험의 공통성도 흥미롭다. 살아온 삶 전체가 주마등처럼 파노라마로 펼쳐진다고 한다. 그리고 윤리적 성찰의 순간이 온다.



중요한 것은 거기서 인간이 성숙을 향해 비약한다는 것이다.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온 뒤 그들은 삶에 대한 다른 태도를 갖게 된다. 도(道) 하나를 제대로 얻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다시 구별하게 된다. 삶의 ‘연속됨’을 채우고 있는 것들의 부당한 권력을 깨닫게 된다. 물론 이러한 새 통찰이 과거로부터 이어진, 연속된 존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오류를 범하는 것일 테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을 통해 분명 비약하게 된다. 잠시나마.


특히 재밌었던 것은 물에 빠진 사람과 등반가들의 이야기였다. 자연이 그들을 살해한다.

책을 읽으면 사람이 물에 빠지면 어떻게 되는지, 수영을 정말 잘하는 선원들도 바다에 빠지면 왜 몇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죽는지 잘 알 수 있다. 북해 같은 찬 바다에 빠지면 수영을 잘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곧 온몸이 얼어 죽는다.(타이타닉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책 첫 번째 이야기에 그려진 대로 2월의 인천 앞바다에 빠진 40대의 선장은 20대의 견습선원보다 빨리 죽는다. 인도양 같은 따뜻한 바다에 빠질 경우 수영을 잘 할수록 더 오래 버틴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의 순간이 더 길어진다는 뜻도 된다. 결국 ‘탈진’이나 상어 같은 큰 물고기의 공격으로 죽게 되므로. 그래서 바다에서의 죽음은 별로 바람직스럽지 못한 듯하다.


한편, 등반가들의 이야기는 아주 낯설다. 산을 전혀 모르는 나는 여전히 그들이 잘 이해가 안 된다.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거기 왜 올라가는지?


등반가들의 경우는 '사고'라 하기 어렵고, 그들은 결코 평범한 사람들도 아니다. 그들은 사고를 자초하는 것 아닌가?  그들은 스스로 거기 가서 죽음과 자연에 도전한다. 등정에 성공하면 또 더 위험한 빙벽과 더 높은 산을 찾아간다. 생명체가 거의 없고 공기도 희박한 해발 7-8000미터의 산에서 일어난 눈사태와 크레바스의 균열이 과연 말 뜻 그대로 의외의 사고인가?


34세의 등반가 이현조 씨는 2005년, 8120m 낭가파르바트 루팔 빙벽에서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등정에 성공했다. 같이 사고를 당한 이씨의 친구는 부상을 당했다. 한 사람의 부상은 전체 등정대의 위험을 초래한다. 그래서 그는 다른 동료들을 위해 자일을 스스로 끊고 죽으려 했다.

그러나 이현조 씨는 그 친구까지 구하고 살아 돌아왔다. 그의 친구와 이현조 씨는 한국 등반계의 전설이 되었다. 그러나 이현조 씨는 올해 5월 16일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 결국 목숨을 잃었다. 또 눈사태라는 사고를 만난 것이다.  

(월간 <산>에 실린 이현조의 실화.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94&article_id=0000000529&section_id=103&menu_id=103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측에 사람 좋게 생긴 이가 이현조. 옆은 에베레스트에서 함께 하늘로 간 동료.)




기독교라는 악순환

모든 에피소드들이 좋은데, 죽음 앞에 다가섰던 인간들이 결국 기독교의 신에게 귀의하는 결말은 흥미롭지 않았다. 심지어 수니 무슬림이었던 한 우즈베키스탄인 여성이 한국에서 비행기 사고를 당한 후 기독교로 개종한다는 이야기는 매우 우울했다.

극한 체험을 했던 사람들이 삶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갖게 되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초월적 힘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니, 극한 체험을 안 했더라도, 개별 인간은 한 없이 약하여, 마음이 순두부처럼 무르고 죄의식에 고통스러워한다. 유한자인 거의 모든 인간에게는 성스러운 힘과 절대적인 의지처와, 특히 ‘지금 당장’의 위로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왜, 도대체 왜? 기독교 방식? 왜 하필 그 하느님?

그것이 한국의 풍토이자 문화이다. 마치 영화 <밀양>에서 아들을 잃고 절망과 죄책감에 빠진 전도연에게 이웃의 기독교인이 찾아오듯이, 사고 후 육체적 고통과 ‘외상후스트레스장애’에 빠진 우즈베키스탄 여인에게도 한국의 기독교도가 재빨리 다가왔던 것이다. 어찌나 동작이 신속ㆍ정확한지, 그들의 고통과 생에 대한 대면을 냉큼, 기독교의 영토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왜 다른 공동체와 다른 위안과 다른 극복은 없거나 태부족인가? 기독교의 공격적 전도를 이겨낼 다른 무엇인가는 없는가? 왜 그런가?

<밀양>에서 전도연이 나중에 깨닫듯이, 그것이 쉽게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유일자에 기댄 용서와 화해가 단지 내적으로 쉬울(안일할) 뿐만 아니라, 이웃에 그(것)들이 있기 때문에 간편하다. 산사나 선원(禪院)보다 흔하고 안전하고, 언어와 노래가 단순명쾌하며, 그럼에도 노하우가 잘 확립되어 있고, 경비마저 덜 들기 때문이다. 이 모두는 한국적 악순환인 것이다.


 관련해서 또 하나 더 덧붙인다. 기독교도인 등반가들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에서는, 해발 7-8000미터의 산에 올라가서 스스로 죽음 앞에 다가가고, 반복적으로 죽음에 도전하는 등반가들은 결코 기독교스러운 신을 찾지 않는다는 것. 그들은 오로지 자연, 그리고 같이 등반하는 동료에게 기댄다는 사실.

그렇게 하여 등반가들은 최고의 인간됨을 실현한다. 좀더 알아보기 위해서 라인홀트 매스너의 책도 찾아 읽을 생각이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Books > 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성이 쓴 중세 기사 이야기  (2) 2007/09/24
몸의 역사  (2) 2007/09/23
1분 뒤의 삶  (0) 2007/09/21
자살로 인간을 이해하기 ver 0.3  (4) 2007/09/10
여름 여행 길에서 읽은 책... <현산어보를 찾아서>  (1) 2007/08/12
Jodi Picoult, 대중소설의 공식  (1) 2007/08/04

TRACKBACK | http://somun.info/trackback/59 관련글 쓰기

Comment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랑>이란 단어는 참 어렵다.

사랑한다고 말을 해도, 또 사랑한단 말을 아껴도,
어느 쪽도 <사랑>이라는 기표에 온전히 다다르는 것 같지 않다.
사랑이란 말은 아무 힘이 없기도 하고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감정에는 처음부터 너무 이율배반적인 것들이 들어있기 때문일까?
사랑한다는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굉장하고 특별한 어떤 감정처럼 보이기 때문에
사랑은 무언가 운명적이고 영원해야 할 것만 같은데,
사실 사랑은 대체로 우연적이며 일시적이다.

그래서 사랑한단 말을 하는 사람과
사랑한단 말을 하지 않는 사람, 어느쪽도 모순적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랑이 유일하고, 영원하며, 그렇게 숭고한 것이라면
함부로 사랑을 말해서도, 듣고자 기대해서도 안된다.
또 사랑이란 결국 흘러가버리는 것이고 별로 대단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순간적인 감정일지라도 좀더 쉽게 사랑한단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실은 사랑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끊임없이 사랑을 말하고 듣길 갈구하며
사랑이란 말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은 굳이 사랑이란 단어를 꺼내지 않는다.
"당신은 사랑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
"당신은 사랑한다고 말하는 쪽인가, 아니면 말을 아끼는 쪽인가?"


<눈물이 주룩주룩>에서는 부모의 재혼에 의해 남매가 된 남녀가 서로 사랑했다는 사실을
남자가 죽은 뒤 남긴 것들, 편지를 통해 아련히 깨닫게 된다.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는 육체적으로 성장을 하면 병도 함께 커져 죽게 되는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여자'가 되고 싶어서 성장억제제를 먹지 않음으로써 죽고,
그 사실을 죽은 뒤 그녀가 남긴 사진과 편지를 통해 알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두 영화를 보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영화는 <러브레터>였다.
세 영화의 공통점은 모두 사랑을  '죽음'을 통해, 죽은 뒤에야 말한다는 것이었다.


한 사람에게 사랑이 유일한 경우는 드물지만
죽음은 누구에게나 딱 한개씩밖에 주어져 있지 않다.
그리고 죽는 사람은 죽음 이후에는 더이상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죽음을 통해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말한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죽음과 함께 말해진 사랑이란
어쨌거나 유일하고 영원한 사랑으로 '완성'될 수 있으며,
그 사랑에 대한 더 이상의 회의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래서 이 영화들은 숭고한 사랑을 믿고 싶은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판타지를 제공하는 듯 하다.
그러나 죽음이란 상황이 또 지나치게 '극적'이며,
모든 것을 '미화'시킨다는 점 때문에
여전히 이 사랑들에서도 냉소의 여지는 남아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질문을 다시 해보자.
"당신이 1분 뒤 죽는다면, 당신은 그 사람에게 사랑했단 말을 남길 수 있는가?"
의외로 이 질문에서 긍정의 답을 망설이는 사람은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


그렇기때문에 이 세 영화의 사랑은 한편으로 비겁하다.
죽음이 사랑을 미화시키고 완성시키기 위한 '효율적'인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
이것은 그 외의 방법으로 사랑을 말하는 것에 비해 너무 쉽다.
우리가 실제로 이런 고백을 듣는다면,
그 순간 감격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물론 나는 그 감동도 결국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허구 속의 이 방법은 이미 너무 진부한 '장치'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


이 영화들은 관객이라는 제3자의 시선이 존재하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말하지 못한 그 사랑을 살아남은 자에게 전달, 완성시킬 수 있다.
그러나...그것은 어디까지나 제3자에게만, 남의 사랑을 얘기하는 선에서만 그렇다.
이미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 사이에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세계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그 둘에겐 사랑은 끝난 것이다.
다만 죽은 자는 그와 함께 삶도 끝냈기 때문에,
산 자는 그 뒤의 삶을 영화속에서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완성처럼 보일 뿐이다.


살아남은 자가 죽어버린 자의 마지막 고백에 감동하고 눈물을 흘린다 해도
이것은 죽은 자의 사랑의 완성일뿐, 살아남은 자의 사랑은 여전히 '움직인다'.
결국 살아남은 사람은 또 살아나가게 되고,
그 고백을 서서히 잊게 되고, 또 다른 사랑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들은 죽은 자의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살아남은 자의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장치들을 활용하고 있다.
살아남은 자가 죽은 자의 사랑에 흠뻑 감동하도록 만듦으로써
살아남은 자의 마음 속에 남은 사랑을 그리려고 한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눈물이 주룩주룩' 나고 "오겡끼데스까"를 하염없이 외치도록.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는 어느쪽인가 하면, 사랑한단 말은 아끼지 않아야 한다는 쪽이다.
결국 그 감정이 변해버릴 지라도, 사랑은 살아있을 때 하고, 말해지는 게
더 행복한 것이라고 믿는 편이다.

죽어버린 사람의 사랑고백은 값진 것이기는 하지만
더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허망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살아있는 자가, 사랑이란 말을 아끼면
결국 그 사랑이 끝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돼 버렸을때
지난 사랑을 사랑이었다고 추억하지조차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사랑이란 것이 영원하고 유일무이하다는 환상과 기대를 조금 덜어낼 필요는 있지만,
그럼에도 사랑이 현재로서는 '실재'한다면
그 순간에는 사랑하노라고 말해두는 편이
그 순간을 더 행복하게 만들고
그 이후에 더 행복한 기억으로 남게 만든다고
나라는 1/n의 한 사랑은 생각한다.
(물론 (n-1)/n개의 사랑들에게 이것을 강요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된다.)
그래서 나는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눈물을 '주룩주룩' 흘릴 수는 없었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 http://somun.info/trackback/56 관련글 쓰기

Comment

  1. 2007/09/17 09:13

    잘 읽었습니다. 산타클러스가 없다는 것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문득 깨달았던 것처럼, 대문자 '사랑'이라는 것도 20대에 몇번 사랑을 경험하고 난 후부터, 문득 깨닫게되는 것 같습니다. 효~ 이렇게 나누는 것도 순전히 '재미'를 위해서이기는 하지만, 30대에는 쫌 더 자유롭고 유쾌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