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허진호 감독은 남녀간의 사랑이 시작되고 깨어지는 미묘한 감정의 순간들을 포착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 데뷔작이었던 <팔월의 크리스마스>는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 남자와 너무도 건강하고 해맑은 여자 사이에 호감이 연애 직전까지 발전되어 가는 과정을 다뤘다. 미래가 없는 남자는 여자를 일정한 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남자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여자는 그의 태도가 원망스럽다.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그 끝을 예감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 사이의 마음 아픈 관계는 이후 그의 작품에서 계속 변주되는 모티프이다. <봄날은 간다>의 여주인공인 은수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상우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줄 수 없었지만, 마음마저 지울 수 없는 것이기에 돌아왔다 떠나기를 반복한다. 상우는 은수와의 이별이 한번 두번 쌓여갈수록 마음속의 미련들을 조금씩 털어내고, 결국 그들의 사랑은 한없이 아름답지만 덧없는 ‘봄날’처럼 아스라히 사라져간다. 각자 서로의 배우자들이 저지른 외도 때문에 만나게 되었던 <외출>의 두 주인공들의 관계는 이미 여러 한계들로 답답하게 막힌 출발선에서 시작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예감하면서도 따듯한 봄날에 갑작스럽게 내린 눈(April snow-외출의 영어 제목)같은 감정의 폭풍 속에서 잠시 길을 잃는다.
그의 새 영화 <행복>의 모든 이야기는 영화의 첫 씬에서 영수(황정민)가 틀어놓은 라디오 DJ 멘트 안에 다 담겨있다. ‘처음 만난 날의 설레임으로 사랑한다면, 첫 출근하는 각오로 일을 한다면, 병이 나은 날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그렇다면 날마다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겠죠?’ 영화는 이 멘트와 정반대 지점에 있는 영수의 상황에서 시작된다. 그는 애인 수연으로부터 결별을 확인받고, 자신이 경영해 오던 클럽을 친구에게 팔아넘겨야하는 경제적 상태이며 간경변으로 인해 건강을 잃은 상태에서 요양원 ‘희망의 집’에 도착한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아무것도, 심지어 웃음마저도 잃은 영수는 요양원에서 폐가 사할밖에 기능을 못한다는 중증 폐질환자인 은희(임수정)를 만나면서 조금씩 웃음을 되찾아가기 시작한다. 영수보다 더 심각한 병을 앓고 있지만 이상할 정도로 담담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녀의 건강함이 그를 조금씩 물들이게 된다. 그들은 사랑에 빠지고, ‘우리 같이 살래요?’라는 은희의 제안에 영수가 한다발의 들꽃으로 응답함으로써 행복한 동거가 시작된다.
그러나 인간이 느끼는 행복이란 감정은 언제나 시간과 그것에 동반하는 변화들에 무력하다는 치명적 약점을 갖는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영수에게 주어진 소박한 행복은 그가 잃은 것들을 조금씩 회복해나가면서, 즉 수연이 그를 다시 욕망하기 시작하고 친구는 새로운 사업을 제안하고 결정적으로 그를 시골에 묶어두었던 병든 간이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빛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이제 영수에게 고즈넉한 시골의 풍경은 한없이 지루한 것이 되어가고, 소박한 은희의 성품은 궁상맞은 것처럼 느껴진다. 이제 그의 행복은 은희가 없는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때는 분수처럼 쏟아지던 행복의 근원이었던 은희가 행복을 가로막는 방해물처럼 여겨지면서, 그는 자기만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조차 부담스럽게 여겨지기 시작한다. 함께하기를 갈구하는 은희를 자신의 삶에서 밀어내고 싶은 영수가 그녀에게 들려줄 말이라고는 “미안하다”는 한마디뿐인 것이다.
감독은 이 작품에서 ‘행복’에 대한 아주 오래된 우화 ‘파랑새 이야기’를 현대적 멜로드라마로 재해석한다. 행복을 꿈꾸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영수의 눈길은 언제나 자기가 있지 않는 곳을 향한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무엇을 갖고 있는가를 보려하지 않는 이는 끝없는 결핍의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결핍은 어딘가 다른 곳에 숨어 있을 것 같은 행복을 찾아 끝없이 방황하게 만든다. 이 영화에서 후반부에 계속해서 반복되는, 행복한 미래를 위해 마련해야 하는 노후자금 ‘4억 7천’은 현대인들이 무엇을 위해 무엇을 포기하고 하찮게 여기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없는 먼 미래를 위해 지금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을 무시하고 쉽게 스쳐지나가 버리며 행복의 순간들을 끝없이 유보해버리는 것. 영수가 은희를 떠나서 추구하는 삶은 고작 그런 것이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말로 포장된 허상들을 추구하기 위해 초래된 지금의 고통을 술과 담배와 같은 말초적인 자극들로 마비시키며 살아가는 것이 결국 현대인의 삶이다. 한번 굴러가기 시작하면 도저히 몸을 빼낼 수도, 달음박질을 멈출 수도 없는 거대한 수레바퀴같은 삶으로 돌아간 영수가 행복과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은희가 그보다는 조금 더 충만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더 현명하거나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언제라도 닥쳐올 수 있는 죽음 때문에 살아있는 순간들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길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행복>은 행복한 삶을 추구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가 얼마나 행복으로 더 멀어지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행복은 어쩌면 그것에 무심할수록 우리에게 더 가깝게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이토록 단순하면서도 실천하기는 힘든 행복의 아이러니가 도시와 농촌이라는 이분화된 공간 안에서 대조적으로 펼쳐지는 남녀의 연애를 통해 현실적으로 그려진다. 이를 통해 사랑하는 이를 통해 자아는 어떤 욕망이 충족되기를 원하고 그것은 삶을 어떤 방식으로 추동해나가는가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이 작품은 허진호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이 유머러스해졌지만 그렇다고 더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사랑 안에서 진동하던 감정의 울림들이 삶으로 더 많이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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