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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의 초반은 역시 견디기 힘들었다.

말도 안되는 우연의 연속,

선우환(이승기 분)의 말도 안되는 쓰레기 짓,

백성희(김미숙 분)의 말도 안되는 악한 계모상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문의 영광>이 끝난 것을 통탄하며, 어쩌다 이런 드라마가 후속작인가,

내 주말 밤의 낙은 이제 없나..생각했다.

 

그런데 좀 지난 뒤, 정말 볼 게 없어서 우연히 다시 틀어 보게 된 <찬란한 유산>은

생각보다 '정상'을 찾아 있었다.

 

<1박2일>을 통해 다져진 '건전한 청년' 이미지의 이승기나

<봄의 왈츠> 이후 별다른 주목을 받지 않았음에도

그녀가 가진 외양때문에 늘 '기대주'가 되어왔던 한효주도 물론 매력적이었지만

사실 그 두 사람의 캐릭터는 닳고 닳은, 드라마에서 써먹을 만큼 써먹은

그런 캐릭터였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우는' 고은성(한효주 분)이나

인간 말종에서 차츰 인간다움을 회복해 가는 선우환, 뭐 새로운가?

나쁜 남자가 못되게 굴다가 주인공 캔디 여성에게 빠지고, 그러면서 정신 차리는.

흔하디 흔한 드라마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신선하고 재미있는 것은

승미(문채원 분)과 선우환의 엄마 오영숙(유지인 분), 선우정(한예원 분)의 '인간다움'이다.

그들은 악역이며 은성의 '장애물'이지만 그들 중 누구도 미워하긴 힘들다.

 

영숙과 정은 갑자기 '굴러들어온 돌'인 은성에 의해

할머니의 유산을 모두 빼앗겼다.

그러나 그들이 은성을 미워하는 수준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정도의 미움정도이다.

할머니가 손자 손녀와 며느리를 다 모른척하고

자신의 전 재산을 웬 듣보잡에게 다 주겠다고 유언장을 고쳤다.

누가 그런 듣보잡을 고운 눈으로 볼 수 있겠는가?

그렇게 미워하다가도, 동생 은우를 잃어버렸고, 가스 사고로 아버지를 잃었다는

은성의 개인사 앞에서는 "쟨 왜 인생이 저렇게 기구해?"하며

투덜거리듯 그녀를 딱해한다.

 

그들이 은성을 완전히 내치는 순간은

성희로부터 은성이 할머니에게 고의적으로 접근했으며

은성이란 아이가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않는

무서운 아이라는 모함을 듣고 난 뒤이다.

이들은 너무도 순수해서, 성희같은 지략가의 모략 앞에서

쉽게 넘어갔을 뿐, 뼛속부터 못된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은 은성이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얘기에

소름끼쳐 할 뿐이다.

영숙의 친구인 성희의 말을 굴러들어온 돌 은성의 말보다 믿는 건 당연하니까.

 

한편 승미는, 은성의 안타고니스트이지만 너무나 설득력 있는 악역이었다.

그녀의 목표는 딱 하나이다. 선우환.

그녀는 그를 얻겠다는 생각 하나밖에 없지만 

그러기 위해 그녀가 보여주는 행동의 패턴들은

우리가 흔히 트렌디 드마라들에서 보아왔던 무조건 나쁘고, 유치하고, 바닥까지 드러내는

그런 악역의 행동들이 아니다.

(그녀의 비음 섞인 굵은 목소리에도 끌리고 아직 정돈되지 않은 얼굴선도 사랑스럽다.

<바람의 화원>에서 봤을 때부터, 내가 김아중 이후 남몰래 끌려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엄마 백성희의 끝간 데 모르는 돈과 영달에 대한 욕망을

끊임없이 비난한다. "엄마, 어떻게 그렇게 까지 할 수 있어"라면서.

그런데 그럴 때 백성희의 대응은

"그래, 내가 못된 년이다. 그렇지만, 너, 환이를 생각해봐라. 내 선택을 무조건 비난할 수 있어?"

라는 것이다.

그러면 승미는 아무 말도 못하고 성희가 만들어 놓은 이 악랄한 상황을

그저 눈물흘리며 받아들인다.

 

죽지 않은 아버지를 죽은 것으로 만드는 것, 그럼으로써 사망보험금을 은성 몰래 다 가로챈것,

먼 지방 땅에 은성의 동생(은우)을 버린 것, 은성에겐 단 한푼도 나눠주지 않고 자기네만을 위한 돈을 감춰뒀다가 그럴듯한 아파트를 구해 사는 것...이런 성희의 행동들에 의해

은성은 끝간데 모르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반면 승미는 엄마의 대놓고 하는 악행 덕에 안온한 삶을 유지할 수 있으며,

환과의 관계도 원하는 대로 지속할 수 있다.

그때문에 승미는 정작 엄마의 악행 앞에서 비난과 눈물을 일삼으면서도

결국은 엄마가 만들어 놓은 '비열한' 상황 속에 함몰되고 만다.

 

승미는 차츰 더 악해진다.

왜냐하면 환이 은성에게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를 얻기 위해서, 엄마를 비난하면서도 엄마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던 승미는

그를 얻기 위해서, 엄마와 공조하여 은성을 환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거짓말과 모함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행동 뒤에도 그녀는 너무나 괴로워하고 눈물을 흘린다.

 

누가 승미를 욕할 수 있을까.

그녀의 악행은, 간절히 바라는 한 사람과 그 사람의 마음을 위해 일어난 것들이다.

우리들 모두,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선

그녀 정도의 거짓말과 모함은 충분히 할 수 있다.

(물론 더 많은 사람들이 양심때문에 생각은 해도 실행은 못할테지만.)

그리고 그녀는 우리가 가진 양심 수준으로 끊임없이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괴로워한다.

그래서 그녀를 보며 '저런 못된 년'이라고 생각하긴 힘들다.

 

그녀를 주인공으로 해서 이 드라마를 바라보면

그녀는 한없이 가련하고 불쌍하다.

마음을 주지 않는 한 남자때문에 그녀가 겪는 가슴앓이.

그래서 그녀는 악역임에도 미움을 받기보단 안쓰럽다.

 

이러한 면들 때문에 이 드라마는 초반의 무리수들에도 불구하고

'개연성'이 있는 드라마로 인정받는다.

성희의 돈에 대한 욕망, 승미의 환에 대한 욕망,

세상 물정 모른 채 살던 부르조아 영숙과 정의 단순성은

악역들 어느 하나 무조건 미워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들은, 그야말로 '그럴 만 하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 드라마를 '막장드라마'로 여기지 않게 만든다.

 

 

뱀발)씨X새 주말 드라마는 <가문의 영광>에 이어서

계속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그리려 한다.

'진성설농탕'으로 나오는 '신선설농탕'이

실제로 그렇게 노숙자들, 독거노인 들에게 지속적인 자원봉사를 하고

혈족계승이 아닌 기업이념과 윤리에 따라 기업을 운영할 새로운 후계자를 양성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런 것에 우리가 속는 것은 조심할 일이다.

 

그러나 <가문의 영광>이 그랬듯

<찬란한 유산> 역시 기업과 재벌들을 '계몽'할 수 있다면 좋은 드라마이다.

이 두 드라마에서처럼 유산은 자식, 손자라서 물려주는 것이어선 안된다.

도덕성과 윤리가 기업이윤보다 우선시되는 기업, 재벌이 더 많아져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익을 소외된 우리의 이웃들에게 환원해야 한다.

 

그것이 안된다면 적어도...이런 기업이 좋은 기업이라는 사실, 기업이 이럴 수도 있다는 정도는

이 시대의 수많은 (실제/잠재)노동자들이 이러한 드라마들을 통해 모두 알아야 한다.

회사가 어려우면 회사를 살리기 위해선 노동자를 해고하는 게 당연하다는 식의 논리를

평생 '사측'이 될 가능성이 없음에도 어려서부터 '진리'로 체화해 온 우리들은

이런 드라마를 통해 그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쌍용자동차의 직원, 노동자들이 총고용 보장과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는 것과 같은 일이

당연하다고 여겨지고 그들의 투쟁이 지지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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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시작하는 순간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말에 대해 연인으로부터

"그러게 말이다...근데 변하더라."라는 답을 듣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영원한 사랑'의 '로망'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직 너뿐이야', '사랑해서 결혼했다'와 같은 말을 매우 자랑스럽게 말하곤 한다.

그러나 '연식'이 오래된 인간일 수록

그런 말이 얼마나 허구이며, 무책임한 말인지를 깨달아 가게 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허위의식을 다른 방식으로 극복해

'가족애' 등으로 관계를 재정립해 나가는

지혜로운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좀 잘난 척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비영구성때문에

모든 사랑과 관계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영화 <시간>(김기덕, 2006)에서는

사랑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내포하게 되는 권태에 대한 불안을

자신의 육체를 바꾸는(성형수술) 극단적인 방법으로 극복해 나가려하는 여성이 등장하고,

<엘레지>(이자벨 코이셋, 2009)에서는

사랑의 비영구성을 냉소하면서 연인과 헤어지는 남성이 등장한다.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사랑이 시간과 반비례해서 줄어든다는 사실과

그 과정에서 그 사랑의 소멸, 변화를 야기하는 가장 큰 동인이 육체라는 사실을

매우 잘 (어쩌면 지나치게) 의식하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현실적 진실을 잘 알고 있는 <시간>의 새희(성현하 분)와 <엘레지>의 데이빗(벤 킹슬리 분)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사랑을 회의하고 불안해하며,

그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미리 사랑을 떠나보낸다.

 

그들의 인식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낭만적이지만 허구적인 모토를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한편으론 매우 영리하고 현실직시적이다.

지금 이 순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내 몸이 늙고 병들고 추해졌을 때에도 지금처럼 사랑해 줄 수 있을까?

'아플때나 병들었을 때나',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사랑하고 아끼라는

결혼식 주례사는 얼마나 지키기 힘든 말인가.

 

그러나 그들의 현명함은 한편으론 유아적인 것이다.

그들은 결국 시간을 통해 변하고 퇴색되어 버릴 사랑에 대한 불안 때문에

지금의 사랑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언젠가 버려질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넌 결국 날 떠나게 될거야'라며 한없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선수쳐서 떠나보내기'의 방법으로 극복하려 하는 것은

상대방이 겪을 상처보다 자신의 상처를 먼저 걱정하는 자기방어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불안한가에 대해서를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한다.

그들의 불안은 사실 사랑의 다른 모습이거나 그 일부분이다.

이 세상에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이런 불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 불안으로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퇴색시켜 버린다.

 

영원하지 않을 줄 알면서도 우리는 왜 매번 사랑에 빠지는가?

냉소만으로는 이러한 메커니즘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버려지는 것이 두렵다는 것은 버려지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그만큼 지금의 사랑이 소중하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 이별하게 될 때 자신이 겪게 될 상처를 미리 걱정하고

그 상처를 최소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려 하는, 일종의 이기심이다.

물론 그 '소중한' 사랑은 영원할 수 없을 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그 감정은 강렬한 실재이다.

 

새희와 데이빗은 헤어졌던 연인들과 다시 만난다.

너무 오래 만나 자신의 몸이 지겨워져서 떠날 거라 생각했던 새희는

완전히 바뀐 새로운 육체로 지우(하정우 분)를 유혹하고,

연인이 자신보다 열 다섯살이나 젊어, 결국 늙은 자신을 버리고 젊은 남자에게 떠나버릴 거라 예상했던 데이빗은

암으로 죽어가고 있는 콘수엘라(페넬로페 크루즈)의 병든 육체와 다시 대면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재회'는 무엇인가.

이 영화들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인가.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던 사람이 드디어 영원한 사랑을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유치한(?) 수준의 영화들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의 지나친 자기방어 덕에 다시 시작된 사랑은 이미 빛이 바래 버렸다.

새희는 과연 지우의 사랑을 믿을 수 있을까?

지금 그가 사랑하는 건 성형 수술 전의 새희인가, 성형 수술 후의 새희인가?

데이빗은 과연, 죽음을 앞두지 않았더라도 콘수엘라가 자신에게 돌아왔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들은 연인을 다시 만났지만, 그들의 불안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영화 <시간>은 지우가 과거의 새희를 잊지 못하자, 새희는 자신의 과거 육체에 대해 질투를 느껴야만 하게 되고,

두 개의 완전히 다른 모습의 여자가 모두 새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지우는

성형수술로 자신의 몸을 송두리째 바꾼 뒤 우연한 사고로 급사하는 결말을 그린다.

그녀의, 시간을 통해 변질되어 버릴 사랑에 대한 불안은 결국 대상의 죽음을 통해 끝이 나고 마는 것이다.

 

전신성형으로 이제 지우인지도 불분명한, 그러나 지우인 것 같은 주검 앞에서

새희는 어떻게 슬퍼해야 하는가.

완전히 다른 육체가 된 연인에게,

이전보다 아름답고 젊은 육체가 되었건, 싸늘한 시신으로 마주하게 되었건

우리는 과거와 동일한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가.

사랑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육체를 배제한 사랑이 가능한가?

 

영화<시간>은 이처럼 사랑과 시간과 변화와 육체의 상관관계에 대해

비현실적일만큼 극단적인 상황 설정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날카롭게 문제제기하고 있다.

 

 

한편  <엘레지>는 이러한 불안을 영화에서 더이상 보여주지 않은 채 끝을 맺지만

이러한 '열린 결말'을 통해서 영화는 다른 무언가를 더 말하고자 한 듯 하다.

 

그동안 50명이 넘는 여성과 사귀어보았고,  

콘수엘라에 매혹된 자신의 감정이 그녀의 아름다운 육체-특히 그녀의 가슴-에서 비롯된 것이었던 데이빗은

겨우 5명의 남성을 사귀어 보았다는 콘수엘라의 과거(?)에 끊임없이 집착한다.

혼자 쿨한 척은 다하고 콘수엘라를 만나는 동안에도 오랜 섹스파트너도 주기적으로 만나면서도,

시간이 날때마다 콘수엘라의 과거의 남자들에 대해 궁금해하고

그녀에게 다른 약속이 있을 때마다 다른 젊은 남자를 만날까봐 의심하고 전전긍긍해 한다.

 

그러나 사실 자신의 경륜을 근거로

콘수엘라와 자신의 사랑이 얼마 가지 않을 것임을 수시로 강조하는 데이빗보다

훨씬 더 성숙한 존재는 콘수엘라이다.

데이빗이 자신에게 가지는 의심과 집착의 태도와

그러는 한편 종종 보여주는 '너는 조금 있으면 나보다 더 젊고 멋진 남자에게 가게 될거야'라는 말 사이에서

콘수엘라는 그의 자신에 대한 감정이 '장난감에 대한 소유욕' 같은 것이라고 정의한다.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어하진 않지만 감정에 진정성이 부족하다는 것.

언젠간 자신도 가지고 놀다 버릴 것이면서도 빼앗기긴 싫어하는 장난감 같은 것이라는 것.

 

데이빗은 자신의 콘수엘라에 대한 집착을 억누르려고 애쓰지만

그러기 위해 자신의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마저도 포기한다.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마음껏 사랑하는 방법을 그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콘수엘라가 그녀의 졸업 축하 가족파티에 그를 초대했을 때

그는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며 참석하지 않는다.

데이빗은 "나한테 도대체 왜이래요?"라는 콘수엘라의 원망에 아무 답도 내놓지 못한 채

'그래 다 끝났다. 진작에 이렇게 될줄 알았다'며 체념한다.

그리고 곧 자신에게도, 그녀에게도 그들의 사랑은 잊혀질 거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짐작과는 달리 그는 그녀를 2년이 넘도록 제대로 잊지 못했다.

그러다 2년 뒤 그녀에게서 '할 말이 있다. 이 말은 당신에게는 내가 직접 해야 할 것 같아서 연락했다'는 메시지에

새삼 두려움을 느낀다. 그녀의 '할 말'이란 그녀의 결혼 소식쯤이 될거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투병 소식을 듣고 그는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그런 그에게 콘수엘라는 '당신은 늘 내가 너무 젊다고 했는데...지금은 내가 당신보다 더 늙어버린 것 같군요.'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데이빗은 자신의 그동안의 생각의 오류를 깨닫고

뒤늦게 콘수엘라에게 다가가지만, 모를 일이다.

영화는 콘수엘라의 암 진행 정도가 꽤 심각하다는 것을 이야기해주면서도

그녀가 죽는 모습까지는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수술 뒤 병들고 지친 콘수엘라의 육체 앞에 나타난 데이빗이

용기를 내어 그녀의 병상에 자신의 몸을 비스듬히 뉘이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그들의 앞날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당장은 그녀 옆을 지키고 있지만, 그녀의 투병생활이 참혹하거나 지리해지면서

데이빗은 차츰 그녀로부터 떠나게 될 수도 있고

그러기 전에 그녀가 죽어 버려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사랑은 막을 내릴 수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또는 운 좋게 그녀가 완치되어 정말 데이빗보다 훨씬 젊고 멋진 남자에게로 가버릴 수도 있다.

 

그저 우리가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데이빗이 짐작했던 것보다는 그들의 사랑의 유효기간이 길었다는 것.

육체의 노화나 소멸은 단지 통계학적으로만 짐작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사랑이란 감정 역시 경험이나 통계만으로 미리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지나친 허위의식 속에 지금의 사랑을 신성시 하거나 낭만화하는 것도 경계해야 할 일이지만

자신의 지적 통찰력을 믿고 온전히 'fall-in-love'하지 못하는 것도 비겁한 일이라는 것...이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이쯤해서 <엘레지>와 비슷한 설정이지만 

병 앞에서 사랑에 대처하는 태도에 있어서 좀 더 '고수'들을 직접 보여주는 드라마가 하나 떠오른다.

드라마 <네멋대로 해라>(2002)의 훌륭함은 매우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점은

고복수(양동근 분)가 뇌종양에 걸렸다는 사실 앞에서도

전경(이나영 분)과 복수는 자신들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곧 죽을 지도 모르고, 수술을 받은 뒤에 장애가 생길 지도 모르지만

복수와 경은 용감하게 계속 사랑한다.

복수는 이미 자신의 병을 알고 있던 상태에서 경을 만나고,

경은 복수의 병을 알고 난 뒤에 복수에게 청혼을 한다.

물론 복수는 결혼을 하자는 경의 제안을 거절한다.

자신의 육체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어쩌면 아예 소멸해버릴 지도 모르기 때문에

사랑까지는 포기하지 못했어도 결혼까지 할 엄두는 못내는 것이다.

 

그때 경이 말한다.

"우리, 살아있을 때 살고, 죽었을 때 죽어요. 살아있을 때 죽지 말고, 죽었을 때 살지 말아요."

이 얼마나 성숙한 태도이며 쉽지 않은 말인가.

 

몸의 변화와 소멸은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마음까지도 변할 수도,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성숙한 자세는

'그러므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명분 하의

'어떤 것에도 마음을 열지 않는다'는 '쿨함'의 가장이 아니라,

충분히 현재의 감정과, 그 속에 배태된 불안까지 껴안는 것이 아닐까.

 

감정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변할 것을 알면서도 현재의 감정에 충실하는 것.

사랑할 수 있을 때 마음껏 사랑하고,

그러했기 때문에 헤어지게 될 때에는 후회나 미련 한 방울 남기지 않으며  헤어질 수 있는 것.

 

헤어질 때를 걱정하며 사랑하고, 사랑했을 때에 대해 회한을 남기며 헤어지는 것은

똑똑하지만 용기가 부족한 자들의 사랑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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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촌스럽게, '가문'이라니?



SBS에서 주말 10시에 방영했던 <가문의 영광>이 막을 내렸다.

총 54회에 걸친 꽤 긴 호흡의 드라마였는데,

내가 재미를 붙여 보기 시작한 것은 한 중반쯤, 20회 즈음이 넘은 이후였다.



처음에 관심이 안 갔던 이유는 제목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벌집 선남선녀들의 짝짓기 얘기인듯한데

제목까지 '가문'의 '영광'이라니, 이 무슨 시대착오적인 주제를 담으려 하는 것인가...싶었다.



지금, 한국에서 '가문'따위는 결국 부르주아 계층 내부에서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나 동원되는 개념이 아닌가?

재벌들이 모자라든 잘났든 제 자식들에게 어떻게든 자신의 기업을 물려주는 일,

그 안이 썩고 곪았어도 자기끼리는 서로 잘났다며 추켜세우고 감싸주는 일,

그러는 과정에서 그 외부에 대해 그들이 보여주는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가족주의...

뭐, 그런것들밖에 상상이 안되는 어휘였기 때문이다, '가문'이란.



2. 연애를 통해 '재혼'하는 네 커플



주연급 남녀들의 러브스토리도 딱히 새롭지 않다.


대성건설 하사장(서인석 분)의 세 자녀-수영(전노민 분), 태영(김성민 분), 단아(윤정희 분)가


적당한 '갈등', '혼사장애'를 딛고 결혼에 골인하는 이야기이다.



이란성 쌍둥이인 수영과 태영은 둘 다 이혼남이다.

드라마 초반이 하회장(신구 분)의 아버지의 임종에서 시작되는데,

증조부의 장례를 치뤄야 하는 날,

수영은 아내의 불륜으로, 태영은 스스로가 바람을 피우다 들통나서 간통죄로 이혼을 하게 된다.

이후 수영은 자신보다 열 몇살이 어린 고아 아가씨이자 자신의 회사 청소부 직원인 진아(신다은 분)와 사랑에 빠지고,

태영은 자신이 간통죄로 경찰서에 끌려갔을 때 보게 된 가난한집 똑순이 여경 나말순(마야 분)과 티격태격하다 연애를 시작한다.



그들에게 닥치는 혼사장애는 흔한 것들이다.

신분의 차이, 계급의 차이, 나이의 차이.

거기에 태영의 바람기와 불임의 몸인 진아의 '종부'로서의 부족한 (생물학적)자질 정도가 덧붙여진다.

그러나 적당한 갈등과 장애 끝에 그들은 결혼을 결심하고, 결혼에 골인한다.



한편 막내딸인 단아도 결혼 경력이 있다.

그러나 결혼한 날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뒤

과거의 유물과 같은 '청상과부'로, 그녀가 일하는 학교의 박물관에서 늙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졸부 집안의 아들로 카리스마 넘치는 냉혈한,


전형적인 '하이틴 로맨스' 주인공 같은(특히 그의 손발이 오그라드는 '당신, --였군.--였나?'말투, 딱 HR스탈이다^^;)

남자 이강석(박시후 분)과

연극으로 시작된 가짜 연애를 하다 사랑에 빠진다.



이들의 혼사장애는 단아의 '서방 잡아먹을 팔자'.

강석의 부모는 단아가 강석까지 잡아먹을까봐 극구 결혼을 반대하지만,

강석이 자초한 위기의 순간에 목숨을 건 두 사람의 절절한 사랑 덕분에

강석의 부모는 결국 두 사람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내용들은 어떻게 보면 신선할 것 별로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정도는 이미 이 지점에서도 특이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하사장의 세 자녀가 모두 '재혼'을 한다는 설정.



심지어 이 드라마에서는 하사장조차도 재혼을 한다.

30년 전에 상처한 하사장은 같은 회사의 홍보실장이자 후배인 이영인(나영희 분)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미 두 번 이혼한 경험이 있는 영인은 결혼을 두려워했으나

하사장의 아이를 갖게 되고 낙태를 하려하지만

하사장네 가족의 따뜻한 마음에 감복해 그와 결혼을 하게 된다.




3. 새로운 가문, '패치워크' 가족되기



즉, 이 드라마는 네 커플의 재혼이야기이다.

이들이 각각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기까지의 과정은 드라마 트루기적이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이 재혼이기 때문에,

이 하사장네 '가문'은 매우 복잡한 가족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에서

이 드라마만의 독특한 색깔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영인은 갑자기 30대의 자식이 셋이나 생겼고, 손자가 된 동동이보다 9살이나 어린 아이를 낳는다.

태영과 결혼한 말순은 태영의 전처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인 동동으로부터

"우리 아빠, 바람기 많은 건 아시고 결혼할 결심하셨어요?"라는 질문을 받으며 결혼에 골인한다.

종손인 수영은 진아가 불임의 몸이기 때문에 결혼 후 아이를 공개입양한다.



이처럼 이들은 고상하고 족보있는 '장성 하씨 가문'이라고 하기엔 꽤나 '콩가루' 스타일의 가족인 것이다.

족, 순혈주의같은 것은 도무지 지키기 힘든 그런 가족.

그러나 그런 겉으로 보기에 '콩가루'인 이 가족은,

가족간의 연대, 배려, 소통을 통해 그 어느 '혈통 좋은' 가문보다 훌륭하게 '가문'을 이루며 살아간다.



종부인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결혼을 거부하는 진아에게

이 사실을 아는 하회장과 영인, 그리고 수영은 '가문은 꼭 혈통으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며,

손을 낳을 수 없다는 사실때문에 결혼을 할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진아의 그 '진실함'만으로

종부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며 결혼을 적극 추진한다.

그리고는 아이를 공개입양한다.



한편, 영인(나영희 분)은 '쿨한 새로운 종부상'을 제대로 구현한다.

종부가 되었지만 그녀는 집안일보다는 회사일에서 훨씬 두각을 나타내고,

그러나 집안의 대소사에 대해서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정치적 올바름의 감각으로

성별로 등급이 나뉘어져 있던 식사 문화를 세대별로 나눈다거나

집안일에서 남성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끌어내는 등

가문의 고루한 관습을 적당히 개혁하면서도,

가족 구성원들 각자의 노고와 고민을 해결해 주는 등

그 가족 내부의 소통에는 가장 주도적 인물로 역할한다.



또한 그러한 그녀를 가족들은 제대로 이해하고 대우해준다.

아이를 낳은 뒤부터는 집안일을 거들 사람이 부족하니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을때

시아버지 하회장과 남편 하사장은 그녀처럼 유능한 사람을 집에 두는 것도 낭비이며,

아이 낳은 뒤 그녀처럼 일 좋아하는 사람은 집에만 있으면 산후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다며 반대한다.

그러면서 하회장이 며느리 대신 아이를 돌본다.



태영과 말순은 어른스러운 아홉살 짜리 아들 동동이에게서

매일같이 훈화말씀과 반성문 숙제를 받으며 철이 들어가고,

동동은 의로운 경찰인 새엄마가 자랑스러워서 학교에 가면 자랑하기 바쁘다.

새로 태어난 동생도 누구보다 열심히 보살피며, 자신의 적성이 '신생아 돌보기'임을 자처한다.



이처럼 새롭게 맺어진 가족들이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보다 더 훌륭하게 가족을 이루며 사는 모습은(그것도 한꺼번에 네 커플이나!!!)

기존의 드라마들이 보여주지 않던 미덕이었다.



이들 하씨 집안 '가족되기'의 장애는

대부분 사랑과 결혼을 결심하는 당사자들 내부에서 비롯된 갈등이다.

자신이 부족해서, 상대방에게 너무 미안해서, 차마 마음을 못 연다.

그러나 그들이 그 고민을 딛고 결혼을 결심하면 가족들은 그 결정을 무조건 받아들인다.



보통 드라마의 혼사장애는 당사자들 스스로의 갈등이 아니라, 부모세대의 반대에서 비롯된다.

정말 지긋지긋하지 않은가....머리싸매고 드러누워 아들의 결혼을 반대하는 시어머니.

(최근 배우 윤여정이 <여우비>라는 다큐에서 이런 드라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도 그런 시어머니 역할이 나 스스로도 지겨워서 아들에게 그랬어요. 네가 어떤 여자를 데려와도 난 절대로 반대 안하겠다고요.")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는 시대착오적이기는 커녕, 훨씬 이 시대에 걸맞는 가치관을 갖고 있다.

결혼이나 가족맺기에서 제일 중요한 의사결정의 주체는 본인들이라는 것.

그렇게 해서 맺어진 새로운 가족은 서로의 개성과 차이를 인정하고 노력하여 맞춰나간다.

엘리자베트 벡이 말한 '패치워크' 가족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4.판타지라도 어디냐-재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 외에도 이 드라마의 미덕은 아주 많다.

하회장 가족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실현하는 재벌이다.

그들은 강석이 회사를 인수합병하려 했을때, 회사를 양도하는 조건으로 직원들의 고용보장 한 가지만을 요구한다.

또한 하회장은 자신의 재산을, 평생을 자신의 집에서 일한 몸종 할머니 삼월에게만 남겨주고

자신의 자녀들, 손자들에게는 한푼의 재산도 상속시키지 않는다.

자신의 나머지 재산은 모두 회사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내 놓는다.



이러한 하회장 집안의 정신에 동화되어 가는

졸부사돈 이천갑(강석의 아버지, 연규진 분)도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

졸부가 되었지만 넝마주이 출신인 탓에 늘 '가문'과 '족보'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졌던 천갑과

식모 출신으로 허영심 많고 무식하긴 해도 정 많고 순수한 천갑의 처 영자는

그들의 눈에 비친 '족보있는 집안', '뼈대 있는 가문'의 대명사인 하회장 일가에 대해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되면서 돈이면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돈을 제대로 쓰는 법을 차츰 깨달아가는 것이다.



강석이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던 과정에서 자살하게 만든 한 재벌가의 아들 문제로 사회에서 지탄을 받게 되자
자신의 재산을 내놓는다는 걸 발표하면 어떻겠냐는 생각을 아들 강석에게 말하자,

"정말 사회에 환원하고 싶으시면, 익명으로 하세요. 저 구할 생각으로 하지 마시구요."라며 아버지의 생각을 조금 더 교정한다.

천갑은 그러자 "그래, 내가 또 '거래'를 하려 들었구나. 여전히 장삿꾼 기질을 못버렸어."라며 반성한다.






물론 꿈같은 스토리이다. 지나치게 착한 드라마다.

드라마의 막판으로 갈 수록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착해져서 약간은 보기 민망할 지경이었다.

이 세상에 이렇게 욕심없는, 이렇게 착하기만 한 자본가가 있겠는가?

그러나 어차피 꿈을 그리는 게 드라마라면,

재벌이 "내 돈을 거절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라며

내숭9단의 재투성이 아가씨를 선택해

신분상승시켜 준다는 꿈보다는 바람직하지 않은가?



뭐...이 드라마를 과연 재벌들이 봤을까는 의심스럽지만(시청률은 꽤 높아 늘 주말시청률 1~2위를 다퉜다),

봤다면, 분명 자본가들에게 '계몽'이 될만한 드라마임은 분명하다.




5. 하씨 핏줄 아닌 사람들이 성취해 낸 하씨 가문의 영광



그런데...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 드라마의 마지막 반전.

이 드라마는 종반부에 한 가지 더 놀라운 진실을 밝힘으로써

또 한번 '가문의 영광'의 새로운 의미를 구성해냈다.



그것은 바로, 하회장(신구 분)이 사실은 하씨 집안의 자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회장의 모친은 하회장의 아버지가 일제 강제징용에 끌려간 사이

동네의 부랑배에게 겁욕을 당해서 하회장을 임신했던 것.

하회장의 부친은 징용때 끌려가서 불임의 몸으로 돌아왔었다.

몸을 더럽힌 종부인 하회장의 모친은 하회장을 낳은 뒤 자살을 했고,

그런 하회장은 부친의 극진한 사랑으로 자라났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어렸을 때 알게 된 하회장은 '자신은 더러운 피이다. 하씨 집안 사람이 아니다'며

집을 나가려 했지만, 그때마다 부친은 하회장을 붙잡아 안으며 말했다고 했다.

'너는 내가 사랑한 아내의 자식이니 내 자식이다. 내 자식이니 하씨 집안 종손이다.'라고.

그 뒤로 자신은 하씨 집안 사람이라는 사실을 더이상 의심하지 않았다고

하회장은 모든 가족을 불러 앉혀놓고 말한다.

(이러한 '비밀'은 작가가 처음 드라마를 구상할때부터 마련해놓았던 장치였다.

그만큼 처음부터 이러한 주제의식은 작가에 의해 면밀히 의도되고 계획된 것이었다는 점에서 특히 훌륭하다.)



즉,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사실 그 누구도 하씨 집안의 피를 이어받지 않았던 것.

(하회장의 늦둥이 여동생(박현숙 분) 도 물론 업둥이다.)

그들은 그러한 하회장의 말을 엄숙히 듣고난 뒤 충격을 받기는 하지만,

다음날에도 매일 아침 올리던 상식을 올리며 하씨 가문의 조상들에게 예를 다한다.






이처럼 이 드라마는 매우 독특한 가치관을 가진, 정치적으로 올바른 드라마다.

가문, 가족을 이루는 힘이 이처럼 인간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연대의식이라면,

오늘날의 가족주의가 가진 수많은 병폐들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배려한다면 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피로 맺어지지 않아도 훨씬 더 좋은 '가문'으로, '영광'을 누리며 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가 협찬 때문에 거론한다는 혐의는 있음에도

실버타운을 건설해서 그 안에서 노인들이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준 것도 무척 인상깊었다.)




그러니, 이 드라마를 보며 우린 이런 정도의 생각은 기억해 둘 수 있지 않을까?

"가문이란, 그 가문 내부의 사람들을 외부로부터 배타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가 아니라
더 많은 외부의 사람들까지 새롭게 연결하기 위한 끈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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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im 2009/05/05 23:56

    이렇게 신기하고 신통한 드라마도 다 있군요. 저는 제목만 듣고 영화를 드라마로 만든 것인 줄로만 알았지 뭡니까. 요즘 <사랑해, 울지마>를 보면 속이 터져 가고 있던 저로서는 정말 반가운 드라마입니다. 왜 시어머니들, 아니 어머니 세대들은 다 그렇게 비이성적이고, 전제군주적이며, 이기적인 존재들로 그려지는 것일까요. 어머니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는지 정말 궁금하고 동의 안 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신상옥, <무영탑>(1957)

2009/04/11 09:32 | Posted by <소문> 편집실

신상옥, <무영탑>(1957)

현진건의 1938~1939년 동아일보 연재소설 <무영탑>을 원작으로 한 영화. EBS 방영판으로 보았는데, 영화 방영 전에 김영진의 해설을 보여주었다. 그의 해설에 따르면, 이 영화는 “서구 영화에 물들지 않은 1950년대 한국영화의 고유 스타일”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한다. 1950년대의 한국영화는 물론 서구영화의 스타일도 모르는 나로선 딱히 어떤 부분이 ‘고유’ 스타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설명대로 템포가 좀 늦고 연기도 거친 부분이 있다는 것은 느껴졌다.(한 마디로 다소 지루하다는)

 

원작을 훑어본 결과 영화나 소설 모두 아사달-아사녀의 설화를 많은 부분 수정하여 새로운 인물들의 연애구도로 바꾼, 대중성을 의식한 텍스트들이라고 보인다. 설화는 그림자못에 탑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아 실망한 아사녀가 자살하는 이야기로, 무영탑(석가탑)에 얽힌, 즉 예술품으로 소급되는 서사이며, 아사달-아사녀의 사랑이야기만이 중심이다. 반면 소설과 영화에서는 그러한 그림자못의 전설이 허구임이 뚜쟁이의 입을 통해 미리 폭로되고, 오히려 자신의 힘겨운 삶과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는 아사달에 대한 절망으로 자살한다.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아사달의 모습은 그다지 부각되지 않고 있고, 아사달을 사랑하는 두 여성의 애정문제가 중심이 된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구슬아기와 아사녀라는 두 여성의 ‘수난사’가 비슷한 비중으로 다루어진 반면, 영화는 원작에 비해 구슬아기의 비중이 커졌다. 영화에서는 아사녀의 수난사는 매우 간략하고 뜬금없게 다루어져서, 심하게는 그녀가 겪는 시련들이 잘 이해도 되지 않는 수준이다. 아사녀를 노리는 아사녀 아버지의 제자들의 이야기나 그녀가 남편을 찾아 서라벌로 오는 길에 겪는 위험들, 그리고 그녀를 데려다가 좋은 옷과 밥을 준 뒤 어떤 대감에게 팔아버리려 한 뚜쟁이의 이야기 등이 너무 간단히 다루어졌다. 영화의, 아사녀를 흠모하던 팽개의 모략과 남편 소식을 듣고 쓰러진 아사녀에게 갑자기 입을 맞추는 장면은 생뚱맞고, 아사녀의 뚜쟁이의 관계도 이상하다.(과잉 친절을 보이는 뚜쟁이와 그 앞에서 고마워도 안하고 멍하게 있는 아사녀.) 

 

반면에 구슬아기의, 아사달과 그녀를 흠모하는 ‘난봉꾼’ 금시중의 아들 한림학사, 그리고 그녀의 정혼자 경신이라는 세 남성 사이에서의 연애구도는 매우 자세하게 다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말괄량이’ 같은 귀족 여성 구슬아기의 매력이 부각되고 있으며, 경신의 젠틀함과 쿨함, 무용(武勇)의 뛰어남, 금시중 부자의 방탕하고 사악한 모습도 드러난다. 그에 비하면 구슬아기의 마음을 사로잡은 아사달의 매력은 잘 드러나지 않는 듯하다. 그가 석가탑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고뇌하고 예술가로서의 진정성을 지녔는지는, 기껏해야 중들이 모여 그의 밤낮 없는 작업의 열정을 얘기하는 도중에 잠깐 비칠 뿐이며, 그의 구슬아기와 아사녀에 대한 애정도 친절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수동적이고 ‘허수아비’같기까지 하다. 아사녀의 죽음 소식을 들었을 때나 물속에서 헤매고 있는 아사달에게 구슬아기가 찾아왔을 때에도 그저 멍한 모습으로 끝끝내 그의 능동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신상옥이 최은희라는 여배우의 매력에 너무 '풍덩' 빠져있었던 탓일까? 그러나 ‘얼큰이’ 최은희가 말괄량이에 귀여운 여성, 여러 남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구슬아기라는 역에 어울리는지도 나로서는 잘 이해가 안 갔다. 이 시대의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기준이 지금과 달라서인지...최은희에게 너무 많은 이미지의 스펙트럼을 허용해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아사녀 한은진도 너무 심술 맞아 보이는 입매와 볼살이 순정파 아사녀 역을 하기에는 적절해 보이지 않았다. 

 

그 외에 영화에서 소설과 달라진 부분은 마지막 결말 부분. 소설에서는 구슬아기가 불에 뛰어들자, 이를 경신이 구해낸다. 소설 줄거리를 써놓은 네이버 백과사전에 따르면 구슬아기가 죽은 것이라는데, 죽은 것인지는 분명치는 않고, 거의 숨이 끊어질 상황에서 정신을 차리고 경신에게 아사달을 찾는 헛소리를 하고, 이를 보며 경신은 그녀의 사랑에 대한 감탄과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아사달은 두 여자들의 비극을 겪은 뒤 탑에 그녀들의 모습을 새기는 내용이 소설에는 있으나 영화에선 그냥 물에 빠져 죽는 것으로 끝난다. 이 점에서 영화가 소설보다 더 아사달의 예술가로서의 면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고 보인다.

원작이 있는 영화들을 보면서 종종 느끼는 것은, 영화가 원작을 자신들의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했다는 느낌보다는, 원작을 참조해서 영화를 보라는 식의 불친절함이다. 영화에서는 잘 납득이 안가는 인물들의 감정선이나 행동들이 종종 눈에 띄고, 그러한 것들은 원작을 읽어야만 이해가 된다. 이 영화도 그러한 축에 속했다. 물론 구슬아기의 이야기들에서는 그녀의 서사를 중심에 놓고자 하는 감독의 시선이 뚜렷이 드러나지만, 그 외의 많은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원하시면 원작을 참고하세요"라고 말하는 듯 충분한 설명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 감독 역량의 한계인가, 아니면 원작 각색 영화의 운명인가?

 

여성의 수난사는 언제나 그대로다. 1930년대 후반의 이 소설에서도, 1950년대 후반의 이 영화에서도 여성들이 겪는 수난의 에피소드는 1900년대의 신소설에서 별반 벗어나지 않고 있으니. 이 아사달-아사녀-구슬아기의 이야기에서 형식-영채-선형이라는 <무정>의 구도도 보였다. 이 영화는 당시에 흥행에 성공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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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나는 이 드라마의 작가인 홍자매님들의 <태릉선수촌>을
격하게 아꼈던 시청자임을 미리 밝혀둔다.
또한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를 연기하는 김명민씨(및 강마에)에 대한 무한한애정과 믿음도
결코 변치 않음도 밝혀둔다.

 <베토벤 바이러스>는 현재 <태릉선수촌>때와는 비교도 안되는 인기와 화제를 모으고 있지만
그럼에도, <태릉선수촌>에 비하면, 참으로 질나쁜 드라마이다.
하고 싶은 얘기는 너무도 많으나...글을 쓰다, 쓰다, 다 버리고 간략하게만 말하련다.
구구절절 말하려니 내 입만 아파서리.
그런데 왜 굳이 쓰냐고? 또 안쓰기엔 속터지는 내 심정을 털어놓을 데가 없어서리.

 1. 갈등의 요인과 해결의 요소가 모두 '외부'에 있다.

 처음의 '똥덩어리'같은 실력 없는 연주자들을 모아 교향악단을 만들어
그들이 연주에서 성공하는 스토리를 기획한다 했을때
충분히 승산있다고 보았다.
<공포의 외인구단>류의 이야기는 언제나 대중들이 좋아하는 '매력적'인 스토리이니까.
약간의 <노다메 칸타빌레>삘도 났으나, 직접 드라마가 시작하고 보니 표절의 차원으로 보이기보단
역시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토리가 또 하나 한국판으로 탄생하는구나 정도로 여길만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항상 좋아하는 "보잘것 없는 사람이 열심히 해서 성공한다"는
'재투성이 아가씨의 왕비간택' 스토리 류를 만들때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이다.
못난 주인공이 마지막엔 성공하게 되리란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있는가?
그 과정이 중요하다.
그 과정이 중요하단 건 무엇인가?
매번 그 과정으로 선택된 것이 새로운 소재여야 하는 것이다.
야구로 <공포의 외인구단>을 만들고, 커피로 <커피 프린스 1호점>을 만들듯
<베토벤 바이러스>는 음악으로 그걸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음악은 거의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처음의 '똥덩어리'라는 설정이 출신, 계급, 직업, 학벌등을 통해서이거나
건강상의 문제, 그리고 (가장 그나마 직접적인) 강마에의 실력이 엉망이라는 평가 등을 통해 드러나지만
막상 이들이 교향악단이 된 이후, 강마에의 가르침(영화 <미션>비디오 보여주며 느낌을 살려보라는)
한번 받더니 그 뒤로는 음악적 성장에는 하나의 걸림돌도 없어보인다.
매번 연주때마다 참 잘도 성공적으로 마치니 말이다.
(특히 13회때에는 갑자기 작은 건우가 바꾼 차이코프스키 음악을 '초견'에서부터
CD틀어놓은 수준으로 하는 코미디까지)

 
좋다...이 부분을, 그들이 그동안 출신, 계급, 직업, 학벌 등 때문에
그들 자신의 천재성을 발휘할 기회가 없어서 그랬던 거라 치고,
그들의 훌륭한 음악적 성장이 생각보다 '스피디'하게 성취된 거라고 넘어가주자.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 드라마가 아직도 10 여회나 남아있었다는 데 있다.
이 남은 분량의 드라마를 무슨 '역경'으로 채울 수가 있겠는가?
음악적으로 이들은 아무런 장애나 고뇌가 없는데말이다.(특히 작은 건우는 진짜'천재'다!!!ㅡ.ㅡ;)

 

그래서 동원된 것이 이들의 '성공'적인 연주를 막는 외부적 사건들이다.
연구단원과 정식단원들, 합창단원들 사이의 학벌, 매너 관련 다툼이나,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수재민이 들이닥쳐 시비를 건다거나,
강마에의 진심을 모를 수가 없을 만큼 많은 강마에의 '애정'과 '배려'를 받은 단원들(특히 연구단원)이
새삼스레 강마에의 '말뽄새'를 가지고 오해하고, 격렬히 싸워가며 사과요구를 한다거나,
공금횡령문제로 이들을 내쫓으라는 시장의 종용이나,
두루미를 두고 강마에와 작은건우의 삼각관계,
그리고 강마에와 작은건우의 말도 안되는(이건 뒤에서 더 얘기하자) 자존심대결.
(솔직히 두루미나 김갑용 할아버지의 병도 외부적이라서 그닥 맘엔 안들지만,
이건 처음부터 그들이 가진 음악적 성공에의 결정적 장애라는 점에서 인정해 줄수 있다.)
이런 것들이다.

 

 음악적 완성은 없다.
그들은 강마에가 지휘할때는 초반에 몇번 혼나고 연습좀 하면 어느틈에 완벽한 연주를 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강마에가 그들을 성장시키는 스토리도 없다.
강마에는 그들을 음악적 재능 성장을 위해 트레이닝을 하는 일은 거의 없고
그야말로 '정신교육'을 하거나,
그들의 법적, 제도적, 노동자적 지위를 보장해주는 일에 힘을 써줄 뿐이다.
우리는 그들 단원들이 어떡하다가 똥덩어리에서 금덩어리 연주자가 되었는지
도무지 알길이 없다.

 

 2. 두루미-강마에-작은건우의 연애담

 이거...정말 썰렁하기 그지없다.
일단, 왜 이들 사이에 연애담이 필요한지도 잘 모르겠지만,
앞서 말한 바,  다른 얘기로는 도무지 채울 수 없는 드라마의 분량상
누구나 다 예상 가능한 양념으로서의 로맨스 코드가 드라마에 삽입되었다고 인정하자.
 

문제는, 그 다음이다.
작은건우가 두루미를 좋아했고, 두루미도 약간 그런듯이 비쳐졌다.
둘이 사귀는 분위기였고, 이를 알게된 강마에는 자꾸 의식적으로 둘을 묶어 말했고,
그러다가 두루미는 이런 강마에의 말을 못견뎌 강마에에게 사랑고백을 했다.
강마에는 두루미에게 말도 안되는 독설을 퍼부어 그녀를 내친다.
그녀가 떠나자 강마에가 그녀를 찾아가 둘이 껴안고 사랑을 확인했다.
교향악단의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강마에도 욕하고 두루미도 흉본다. 끝.

 
싱겁기 그지없는 러브라인이었다.
게다가 역시 너무 일찍 둘이 감정을 확인하면서
그 다음부터 할 일이 없어졌다.
괜히 작은 건우와 강마에 사이의 팽팽한 신경전만 생겼을 뿐
강마에와 두루미의 이야기는 할 것이 없다.
둘이 도서관에서 책보다가 두루미가 산책하러가자고 졸라 산책하는 거. 뭐 이런게 다다. 

 
물론 앞으로 두루미가 청력을 잃게 되면서 강마에가 '한건'해주시겠지만,
사실은 '드라마공학'적으로 봤을 때 강마에는 두루미가 청력을 잃게 된 뒤에 감정을 드러내는 편이
훨씬 더 극적이고 흥미진진해졌을 것이다.
그 전까지는, 선생님으로서 그가 청력을 잃어가고 있는 제자에 대해 해 줄 수 있는
여러가지 음악적 조언이나, 새롭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거나, 트레이닝을 시키는 게 더 적절했다.
지금의 이 맥빠지는 상황, 어떡할 것인가?
이미 둘이 서로의 감정을 알고 있는 한,
두루미의 청력상실은 당연스러운 공동과제가 되어버렸다.
두루미가 힘들 때 강마에는 '반드시' 그녀 곁에 있어야 하는 의무를 지니게 되어버렸다.
그럼 두루미의 청력 상실로 만들 수 있는 '갈등'이 별로 없잖을까?

 

 그녀는 그동안에도 자신이 곧 그렇게 될거라는 걸 알았고 각오하고 있었다.
또한 두루미는 너무나도 철썩같이 자신에 대한 강마에의 마음을 믿는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청력을 잃게 되면, 갑자기 충격을 받을 것도 아니고
차분히 준비하고, 강마에와 함께 그러한 장애를 이겨나가게 될 것이다.
뭐, 더 할 얘기가 있겠는가말이다.
두루미와 강마에 사이에선 더 생길 갈등이 없다. 아니, 갈등이 생겨선 안된다.
그러면 우리의 강마에가 병든 애인을 나몰라라 하는 나쁜 '애인'이 되고 마니까.

 

그러지 않으면서, 이 둘 사이에 계속 긴장관계를 만들려면
다음 회 예고에서 나오듯, 뭔가 미리 둘이 다시 틀어지는 수밖에 없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강마에가 두루미에게 호통을 치고 그녀의 선물인지 뭔지를 짓밟더라)
그래서 다시 틈이 생긴 뒤에, 오해와 엇갈림을 거듭하다가
귀가 들리지 않게 될 즈음 다시 그의 사랑이 확인되지 않겠는가?
 

억지로 또 독설을 퍼붓고 위악적으로 굴 강마에를 생각만해도 지겹고
(이 드라마에서 도대체 강마에는 얼마나 자주 '위악'을 부렸으며
알고보면 다 사람들을 위해서 했던 위악임에도 사람들은 얼마나 또 바보스럽게 그 위악에 넘어가
그를 매도하고 오해하고 원망해 왔던가!!!)
그런 말도 안되는 오해로 어긋난 채 질질짜게 될 두루미의 청승맞은 표정도 보기 두렵다. 

 

3. 니들이 음악을 알아?

 앞에서 이 드라마가 음악 전문 드라마이기는 애시당초 포기했음은 얘기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기본적인 '에티켓'은 있어야 한다.
이 드라마를 보는 음악하는 사람들의 기분은 어떠할까?
난 음악에 대해 아는 게 일천한 사람이지만, 이런 내가 봐도 화가 나는데 말이다.
 

그러한 '만행'은 12~13회에서 일어났다.
우리도 뭐, 드라마 전반에서의 작은건우가 절대음감을 가졌고, 천재라는
설정에 대해선 불만이 없다.
(사실 이것도 웃긴 거다. 물론 아주 뛰어난 절대음감, <미제레레>를 듣고 채보하는 실력이란
훌륭한 재능이겠지만 웬만큼 음악 하는-안하는 애들도-애들, 절대음감 숱하게 많이 가졌다.
예전에 무슨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인가에서 봤었다.
예고 음악과 학생들 대부분이 절대음감 가진다. 당연하지. 시창 청음 시험을 보는데...
어느정도는 타고난 애들이 있지만, 훈련으로도 절대음감 가질 수 있다고 나오더라.
그런다고 그들이 다 작은 건우처럼 천재취급받았다면, 우리나라엔 온통 음악천재들이게?)
드라마야 언제나 천재, 영웅을 원하는 법이니까.
오히려 흥미로운 소재였다.
천재가 살리에리 스타일의 지휘자 선생에게서 배워 청출어람을 실현한다는 건.

 

그러나, 그렇다해도 너무하다.
악보 볼 줄 알게 된 거나, 지휘 시작한지 3개월인지 6개월인지밖에 안된 작은 건우가
강마에와 지휘대결이라니.
음악을, 지휘를 너무 우습게 생각하는 것 아닌가? 

 

또한, 작은 건우의 음악적 지향 자체도 납득하기 힘들다.
악보의 크레센도를 자기 맘대로 피아노로 연주시킨다거나...연주를 최대한 자유롭게 한다니.
지금 재즈나 R&B나 힙합 연주 하는줄 아는가?
(문외한인 내가 생각하기엔)클래식이 할 수 있는 새로운 곡 해석은,
악보에 적힌 작곡가의 음표, 부호 등을 자기 멋대로 바꾸는 게 아니라
그것들에 어떤 '기분'을 싣는가, 어떤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곡이 그렇게 흘러갔다고 해석할 것인가
뭐 그런 정도 아닐까?
그 외에는 말 그대로 '클/래/식'이다.
있는 그대로 충실한 연주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달랑 몇 개월 배운 초짜 지휘자가, 제멋대로 연주를 하겠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런 작은건우에게 강마에가 호통을 치는 것은 매우 정당했다.
따라서 작은 건우가, 두루미 사건때문이건, '겉멋'때문이건 자유로운 연주 운운했던 것은 '틀렸'고,
그에게 호통을 치는 강마에는 '맞다'는 것을 그 이후 스토리가 보여주어야 했다.
즉, 작은건우의 방식은 음악계에게서 혹평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평론가 등이 그 음악을 신선하다며 당장에 인정해주는 그 '닭살 쫙 끼치는' 장면.
 

예고로 봐서는 앞으로는 더더욱 제대로 두 건우가 부딪힐 듯 보인다.
ㅎㅎ참....쉽다.
절대음감좀 가졌다고 당장에 세계적인 마에스트로와 동급이 되다니.
음악하는 수많은 분들, 힘좀 빠지시겠다. 

 

천재가 등장하는 드라마, 물론 재밌다.
그러나 사람들은 천재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천재이면 재미없어한다.
천재인데 천재인줄 모르다가 하나씩 발견해나가거나 성장해 나가서 그 천재성을 완성해야
재미가 생기는 것이다.

  

<대장금>의 장금이라고 천재가 아닌가?
그녀는 절대음감대신 절대 미각을 가졌었다.
그런다고 그녀가 하루 아침에 한상궁보다 요리를 잘했다면?
생각시 시절부터 한상궁과 요리대결을 펼쳤다면?
그럼 그 드라마 그런 인기, 시청률, 호평 절대 못받는다.
절대미각은 가졌지만, 아직 음식의 본질, 정도, 정신 등을 몰랐고, 미숙해서
한상궁이라는, 장금이보다 천재성은 떨어지나 정신적으로 훨씬 훌륭한 스승의 도움으로
천재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렇게 '제멋대로' 할거면서,
작은건우는 도대체 왜, 강마에 밑에 있냐말이다.
그럴 거면 독립하면 되고,
강마에에게 와서 제자로 삼아달라고 했으면
제대로 뭔가 배우고 가야하지 않겠는가?
 

 이 드라마는 그 점에서 한참 스토리의 방향을 잘못 짚었다.
 

(강마에의 왕팬인 친구와 토론끝에 내린 결론인데)
이 드라마가 제대로 재미있게 흘러가려면,
지금, 시점에서 생겼어야 하는 강마에와 작은 건우 사이의 갈등은
강마에를 무조건 <모방>만 하는 작은 건우의 지휘 스타일에
강마에가 호통을 치고 내쫓고 해가면서 "네 스타일을 찾아"라고 해야 한다.
몇개월 밖에 안된 지휘자가 세계적 마에스트로를 스승으로 두었다면,
게다가 그가 자신이 좋아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기까지 했다면
그가 가지게 되는 심리는 <모방욕망>인 것이 정상적 아닌가?
자기를 잃고, 그저 강마에의 지휘를 그대로 따라하는 데에서
강마에가 그를 깨우쳐주고, 그걸 극복함으로써
강마에보다 한단계 뛰어난 지휘자가 될 발판을 마련했어야
이야기는 훨씬 더 재미있어진다.

 
 ......

간단히 쓰겠다 마음먹고 마음먹었는데,
또 이렇게 길어지고야...그만 줄여야 겠다.
음...하튼, 이 세 가지가 내가 생각하는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한 작가와 제작진들의 반성과 점검이 필요하다.
 

특히 세번째 문제의 경우
그들이, 단지, 강마에의 팬이기때문에 작은건우에게 강마에가 지는 꼴을 보기 싫어하는 것은 아님을
제작진들은 좀 냉정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지난주 <베토벤 바이러스>를 본뒤에 분개하던 수많은 팬들의 원성을 잦아들게 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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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달님 2008/10/29 01:06

    너무나 잘 지적 주셨습니다. 전 음악 전공자입니다. 베바 포스터 보는 순간 저걸 보면 내가 미치겠구나.....그래서 안봅니다. 아니 볼 수가 없습니다. 내용은 안봐서 모르지만 간간히 들려오는 소리 지나가는 장면이 다 어이없습니다. 여주의 악기들은 엉성한 폼,어쩌다 보게 된 서브 남주의 지휘모습, 김명민씨 너무 좋아하지만, 이번은 흉내를 내고있다는 느낌, 너무 역력합니다. 작가가 너무나 음악에 대해 공부를 안하셨습니다. 절대음감, 정말 너무나 많습니다. 정말 모르십니다.

    • coolya 2008/10/29 08:48

      아, 그렇군요...역시, 음악전공자들에게는 '상처'가 되는 드라마군요. 참 안타깝습니다. 이 작가님들이 <태릉선수촌>때에는 꽤 열심히 자료조사해서 드라마쓴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말이죠.

  2. 행복한 기억 2008/10/30 01:20

    님, 이런 주옥같은 글을 이제서 보다니...퍼가도 될까요?
    마이클럽과 텔존에 옮겨도 될까요? 아님 주소만 올릴까요?
    구구절절절절절절 다 동감입니다. 아고 속시원합니다.

    • BlogIcon coolya 2008/10/30 09:01

      감사합니다.역시 베바 보면서 속터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저 혼자만은 아닌가봐요. 퍼가셔도 되는데요, 기왕이면 링크쪽이 감사하겄슴미당..^^

  3. 이채린 2008/10/30 22:57

    전 큰건대 작건이 제일 어이가 없더라구요.
    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솔직히말해서 30년과 1년도 안된 초짜가 대결이 됩니까?
    자유로운 스타일이요?
    네,그거 좋죠.너무 엄격하기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크레셴도와 피아노의 차이는 좀 심하잖아요!
    정말 뭘 모르는 것 같아요.

    • BlogIcon coolya 2008/11/03 08:48

      이제 아무래도 음악적인 면은 포기하고 봐야할라나 봅니다...^^;;

  4. 아무나 2008/10/31 13:59

    구구절절 제대로 말씀하십니다.
    관점이 다른 부분은 있어도 제대로 보신 것 같습니다.
    엠비시 시청자 게시판에서는 이런 비평조차도 악플로 매도 당하더군요.
    내가 좋으면 남도 좋아야한다는 건지.
    "나는 이어이러한 관점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러이러한 부분은 이렇게 본다"는 것이 그렇게 이해하기 쉽지 않은가봅니다.
    사족하나
    모차르트가 아무리 천재라해도 어릴 때 부터 아버지(이미 훌륭한 음악가였죠)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면 그 나이에 그만한 성취를 도저히 이룰 수 없었겠지요. 그런데 작은 건우는 천재성(=가능성)만 있다는 건데 배우는 과정도 없이 어느새 거장 행세를 하고 남들도 그러려니 하는건 도저히 납득이 안가는군요. 음감이 있는거 하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거 하고는 전혀 다른이야기인데 말이죠. (저는 음악 하는사람 아닌데도 그럴 것 같습니다)

    • BlogIcon coolya 2008/11/03 08:50

      그렇던가요?(제가 엠비씨에 글을 올린적은 없는데-)하여간 뭐..관점이야 다 다를 수 있는거죠.^^다만 제작진이 그 다양한 목소리 속에서 다양한 진실을 간파할 수 있어야할텐데요...자뻑에 그치지 말고.

2007/06/27 - [Mad for Drama/한국 드라마] - 흥행코드 읽기와 스토리텔링-아류작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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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겨울연가> 탓이다"

현재 한국의 '전형적'인 멜로드라마들을 망쳐놓은 것은,
배용준을, 문화부장관 후보의 갑절이상 부자로 만들어주고
'한류'라는 말을 만들어 낸 <겨울연가>이다.

<겨울연가>가 '멜로드라마'의 공식을 얼마나 잘, 똑부러지게 따르고 있는지는
굳이 또 얘기 안해도 될 것이다.
분명 2002년에 이 드라마는
현재의 '일드'열풍을 일으키고 있듯 우리보다 한 수 위인 일본 드라마시장에까지 먹힐 수 있는
멜로드라마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의 '모범'사례였다.


그러나 '최대치'란, 다시 말해 '정점'을 찍고,
이제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대단한 <겨울연가>는 사실,
<가을동화>의 신선함들을 훨씬 세련되게 포장한 것으로,
이미 <가을동화>의 여러 '상투적' 설정들이 한번 '복제'된 것이었다.
그래서 <겨울연가>는 <가을동화>만큼 한국땅에선 큰 반향을 못일으켰었다.
이것은 4계절 시리즈를 만든 윤석호 감독의
이후 두 작품, <여름향기>, <봄의왈츠>가
모두 '썰렁하게' 막을 내린 데에서 분명해졌다.


반면 일본에서는 <겨울연가>가 먼저 알려졌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보다 신선하게, 그러면서도 세련되게 첫선을 보일 수 있었다.
그 이후 여러 편의 '겨울연가류'의 드라마들이
일본에 우수수 알려지게 되고, 다 그럭저럭 좋은 반응을 일으키며
한류드라마를 형성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본에서도 한국드라마의 그런 '전형'적 설정
-출생의 비밀, 불치병, 첫사랑, 기억상실증, 재벌2세, 장애를 뛰어넘는 사랑...등-은
진부함, 천편일률적임으로 비판받고 있다.
그러니 이미 <겨울연가>에서도 이 진부함을 느끼기 시작했던 한국에서야 오죽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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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한국의 드라마는 '멜로'를 찍기로 하면
일단 '겨울연가류'를 제일 먼저 참고하고 있는 듯 했다.
최근 나온 한국의 '멜로코드' 드라마들 몇개를 살펴보자.
<못된사랑>, <사랑에 미치다>, <푸른물고기>.
이 세 작품은 2007년~2008년 초에 방영된 드라마로
이미연, 고소영, 이요원, 권상우, 박정철, 윤계상 등
우리나라에서 '초특급 스타 배우'로 불릴 만한
그것도 아주 오랜만에 브라운관에 돌아와 제대로 몸값 비싼 티를 낸
배우들이 출연한 '야심작'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다.

이 드라마들은 모두 '극적인 사랑'이야기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자신의 약혼자를 죽인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여자(사랑에 미치다),
옛 남자의 처남이자 재벌2세인 남자와 사랑에 빠진 첼리스트(못된사랑),
부모의 반대로 헤어진 뒤 첫사랑을 기억 못하는 재벌2세 여자가
첫사랑을 다시 만나 사랑하는 이야기(푸른물고기),
일단 설정은 매우 '극적'이지만, 그 다음이 없다.


저 설정에서 더 나올 것이 무엇인가?
자신의 약혼자를 죽인 남자란 사실을 모르는 동안,
자신의 매형과 여자의 관계를 눈치 못채는 동안,
첫사랑이란 사실을 기억못하는 동안,
서로 바보짓 해 가며 사랑놀음, 감정싸움, 삼각 사각관계의 연애를 하는 것 뿐이다.
그러다가 '진실'이 밝혀진 뒤에는
그것때문에 괴로워하는 단계를 지리멸렬하게 그리다가
결국엔 사랑의 승리(?) 나부랭이로 끝을 맺게 된다.
더구나 그렇게도 극적이고 대단한 사랑얘기이지만,
정작 사랑에 관한 본질은 아무것도 통찰하지 못한 채
막연한 낭만적 사랑의 판타지를 피상적으로 그리는 데 그친다.


이런 껍데기밖에 없는 '멜로'는
그들이 그렇게도 '숭배'하는 '사랑', 그 하나조차 제대로 그리지 못했으며
세상엔 사랑 외엔 아무것도 없는 듯 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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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위대하다.
사랑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으랴.
연애는 자기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언제나 인간의 최고의 관심사다.
그러나 사랑은 스카이라운지에서 와인을 마시고,
놀이공원에서 솜사탕을 들고 롤러코스터를 타고,
경치좋은 곳에서 드라이브를 즐기고,
아이스링크를 통째로 빌려 스케이트를 즐기고,
바닷가에서 '나 잡아 봐라'를 외치는 것으로만 설명되어선 안된다.

사랑은 서로 다른 두 명(이상)의 사람들이 만나
많은 차이들을 깨달아가고,
그것을 사랑이라는 더 큰 목표를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조율해가는 과정이며,
드라마가 보여주는 '소비'적 데이트와는 전혀 무관하게도
의외의 장소, 상황, 행동, 말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놀라운 경험들이다.

누구에게나 보편적(일 거라 믿어지는) 감동의 이벤트가 주는 행복은
패밀리레스토랑의 음식 사진과 같은, 미니홈피 전시용 사랑일 뿐이다.
진짜 사랑은 소비되는 물질 속에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연인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맺고 있는 다른 사람들 사이의
복잡하고 어려운 감정, 욕망, 상황, 상처 같은 것들이
'대체로' 행복한 어떤 상태로 고양되고 재구성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드러난다.

진정 '사랑밖엔 난 몰라' 드라마가 되려면
그런 '진짜 사랑' 얘기를 '독하게', '아프게'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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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제대로 보여주는 훌륭한 드라마들도 물론 그동안 여러 편 있었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들을 몇개 꼽으라면,
<네멋대로 해라>, <거짓말>, <거침없는 사랑>,
<발리에서 생긴 일>, <굿바이 솔로>, <연애시대>같은 것들이다.
이 드라마들은, '진부'하다 치부되는 '삼각관계'나, '불륜'이나,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 '불치병'을
그 안에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결코 진부하지 않다.
우리는 사랑을 하면서 자주 남들의 기준에 의해 통속화되지만,
이런 드라마들은 그런 자신을 다독이고 되돌아보게 하는, 참 곱씹을 수록 맛난 드라마들이다.
이 드라마들은 지금 사랑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권해주고 싶은 드라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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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드라마들이 그래서 새롭게 사랑을 성찰할 기회를 준다면,
<못된 사랑>, <푸른물고기>, <사랑에 미치다>는
'통속화'를 부추기는 '남들의 기준'을 공고화한다.
현실에는 부재하는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만들어
실존하는 다양한 사랑들에게 열등감을 안겨준다.
그러나 그 열등감의 실체는 그들의 '위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며
그저 그들의 '위대한 소비', '위대한 고립'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망하길 잘 했다.
대중들은 그렇게도 똑똑하다.
대중들은 앞으로도 철저하게, 이런 드라마들을 응징할 것이다.
이런 드라마들은 절대로 다신 나와선 안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방법은 대략 세 가지다.

하나는, 앞에서 말한 '지독한 사랑의 성찰'을 보여주는 드라마가 되는 길이다.
이것은 보통의 '내공'이 있는 제작진이 아니면 쉽지 않겠지만
가끔 한 편씩 세상에 나와줘서, 이 세상의 힘겨워하는 연인들에게
사랑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두번째는, '말랑말랑' '유쾌상쾌' 로맨틱 코메디로 승부하는 것이다.
비극적 멜로를 저따위 피상적 사랑얘기로 다루기 위해
기억상실증, 불치병, 출생의 비밀, 신분 차이 같은 걸 끌어들이지 말고
차라리 가벼운 사랑은 가벼운 사랑답게, 유들유들한 코메디와 곁들여 내놓는 것이다.
작년의 <커피프린스1호점>이나
몇년전 '겨울연가' 짝퉁 <여름향기>가 죽쑤고 있을 때
의외의 선전을 거둔 <옥탑방 고양이>처럼,
평범한 청춘들의 평범한 사랑 얘기를 '즐겁게' 그리는 것이다.


세번째는, '사랑밖에도 많이 알아'가 되는 것.
이것은 전반적인 한국 드라마가 가야할 방향과도 관계가 있다.
현재의 '미드', '일드'에 열광하는 드라마마니아들의 눈높이에
'사랑밖엔 난 몰라' 드라마는 절대 충족감을 안겨줄 수 없다.
사랑은, 분명 인간들의 최고의 관심사지만, 사랑 말고도 세상엔 흥미진진한 것들이 무척 많다.

현재의 사극열풍이나 의학드라마들의 연이은 성공은
이런 '고급' 드라마시청자들이 드라마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들은 물론 긴 호흡으로 방영되는 동안 주인공들이 '행복한 짝짓기'를 하는 과정에
여전히 관심이 많다.
남의 연애사는 일상 속의 최고의 활력소니까.
그러나 매일같이 '답이 뻔한' 연애문제로 징징대는 친구의 상담역할은 참으로 못할 노릇이듯,
사랑, 연애가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점령하는 드라마는 대중을 지치게 한다.

열심히 자기 삶을 살고,
그 속에서도 충분한 희노애락을 구성하면서
그 안에 사랑이 조금 더 희/노/애/락을 심화시키는 이야기.
그런 드라마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이제 리조트의 이사나, 재벌 2세 실장님, 언제 작업하는 지 모르겠는 예술가 대신
수많은 진짜 직업인들이, 진짜 '꾼'들이,진짜 생활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는 일에
앞으로의 드라마들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런 점은 앞서 말한 첫번째, 두번째 대안들도
어느 정도는 지켜나가야 할 덕목이다.
<네멋대로 해라>에도 경이와 복수의 사랑에 관한 통찰 곁에는
언더음악가의 음악에 대한 자부심과 스턴트맨의 성장스토리가 탄탄하게 들어있었다.
로맨틱코메디로서도 이 세번째의 특성을 잘 보여준 것이
<커피프린스1호점>의 '바리스타'라는 직업이고
<내이름은 김삼순>의 '파티쉐'가 아니던가?


각설-
원래, 이 글을 쓸 마음을 먹게 만든 것은 아주 사소한 문제였다.
그것은 바로, 그저께, 드디어 <이산>(49회)에서
송연이가 정조에 대해, 대수가 송연이에 대해
사랑을 인정하고 밝혔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 하나가지고 또 이렇게 길게 주절거리다니...나도 병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 사실은 할 수만 있다면 (후궁이 되어서) 그분 곁에서 있어드리고 싶어."
"이제 전하 뒤에서 지켜보는 일 그만하면 안되겠니? 난 안돼?"
라는 송연과 대수의 '엇갈린 사랑'에 대한 고백의 씬은
아주 짧게, 스쳐가듯 등장했다.
둘 다 처음으로 하는 고백이었다.
드라마가 방영되기 시작한 지 6개월만이며, 극중에서 그들이 만난 지 십수년 만이다.
그동안 정조와 송연은 궐에서 마주치면 몇 마디의 농담을 주고받고
상대방에게만은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최고로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나누고
힘들때 '누구보다 당신을 믿는다'는 말을 서로에게 건네는 것만으로
사랑을 표현해 왔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는 현재 월화 드라마의 최고 강자이며,
아예 다른 방송국에서도 이 드라마 종영때까지는
섣부른 '도전'을 할 엄두를 안낼 만큼
쉽게 꺾이지 않을 인기를 얻고 있다.
결국에 송연과 정조의 사랑 얘기는 앞으로 점점 비중이 늘어날테지만
여전히 더 궁금한 것은 둘의 사랑보다 정조의 노론 세력들과의 '파워게임'쪽이다.
사랑은 그 속에서 '순리대로' 감정을 키워나가
주인공들의 사랑 외의 삶을 좀더 풍요롭게 만드는 한 부분이어도
충분히, 이 드라마는 매혹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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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일드광팬 2008/03/07 00:35

    오 쿨야님 글 항상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저도 '연애시대'는 참 재미있게 봤는데, 요즘 드라마는 정말 듣보잡이에요.
    일드 중 쿨야님이 말한 '사랑'이랑 잘 매치되는 것으로 '결혼못하는 남자'라는 드라마 강추입니다.
    일드의 세계에도 진출해서 많은 좋은 평 올려주시옵서서~

  2. BlogIcon coolya 2008/03/07 08:29

    일드광팬님, 감샤함미당~사실 제가 일드 미드의 세계에는 아직 제대로 입문을 못해서, 어떤 드라마를 봐야 할지 감이 없었답니다. 님의 추천 덕분에 또 몰입할 드라마가 하나 생겼네요~^^'결혼못하는남자' 꼭 보겠습니당~보고 난 뒤 이곳에서 또 얘기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언젠가부터 아나운서들이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
이들을 일컬어 '아나테이너(아나운서+엔터테이너)'라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아나테이너들은 '바른 말 쓰기'가 가능한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지식인, 교양인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고
거기에 남다른 끼나 쇼맨쉽까지 지니고 있다면
연예인들보다 더 광범위한 신뢰감과 대중적 호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


거기에 연예인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솟는 현실에서
방송국 사원으로서 받는 월급에 출연료 몇만원의 수당만으로도
연예인 급의 대중적 지지도를 내는 아나테이너들을 확보하는 것은
방송국으로선 제작비를 아낄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다.
강수정이 <여걸식스>에 출연할 당시 출연료가 2만원이라는 얘기는
두고두고 개그소재로 활용될 만큼 놀라운 사실이었다.
비슷한 정도의 일을 하고도 연예인과 아나운서 사이의 인건비에는
엄청난 차등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재벌가로 시집 가 버린 노현정이나
프리랜서 선언 후 연예기획사에 들어간 강수정, 김성주 등의
잘키운 아나운서들의 '배신'은 방송국으로선 입맛만 다실 일이다.
연예인들의 출연료가 몇백만원인 것에 비하면
아나테이너들은 착취를 당하고 있는 게 사실이고,
그런 만큼 좀 크고 나면 이러한 착취구조를 벗어나
제대로 된 몸값을 받으며 일하고 싶은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아나테이너가 주는 '이득'때문에
방송국에서는 결국 '배신'할 줄 알면서도 앞으로도 계속
아나테이너들의 양성소 노릇을 자처할 것이다.


연예기획사들이 연예인 한 명을 키워 스타로 만들기가 힘든 만큼
스타급 아나운서를 만드는 일도 결코 만만치가 않다.
빨리 스타로 키우고 싶긴 하고, 방법은 쉽지 않고...
그래서 요즘은 '아무나 걸려라'식의 아나테이너 '집단양성'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이것은 여러 방송국에서 다 진행중이지만
그 대표적 프로그램 중 하나는 <지피지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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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피지기>에는 메인 MC로 박명수, 현영, 정형돈, 그리고 최근 합류한 조혜련이 있고
서브 MC로 네 명의 여성 아나운서들이 함께 참여한다.
여기에 한 두명의 스타를 초대해 아나운서들이 질문을 하고
그 중 마음에 드는 질문을 채택하여 답변하도록 한다.
최근 들어 모두가 참여하는 게임 형식을 강화하는 등의 개선을 하고 있지만
기본 포맷은 여전히 이 서브 MC들로 기용된 여성아나운서들의 '경쟁'구조이다.


이러한 <지피지기>는 나름 MBC의 간판 오락프로그램들을 연구해
벤치마킹한 흔적도 보인다.
참신한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대한 인터뷰이의 평가를 구하는 방식은
<무릎팍도사>에서 '도사 배틀'의 형태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네 명의 아나운서들에게 경쟁을 하도록 함으로써
여성 아나운서들에 대해 차츰 친근한 이미지를 갖도록 하려는 의도는
<무한도전>의 여섯 남자들의 무한경쟁과 닮은 데가 있다.
또한 MBC는 아니지만, 예전의 <여걸식스>에서의 여성들의 경쟁구도에서도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러나...그 결과는 실패로 보인다.
좀 심하게 말하면, 도무지 <지피지기>에
그 허수아비같은 아나운서 네 명이 왜 필요한지를
전혀 이해하기 힘들다.


<무릎팍 도사>, <무한도전>, <여걸식스>의 형식을 차용했지만
그것들이 인기있는 이유, 본질은 전혀 끌어오지 못했다.

<무릎팍 도사>의 '도사배틀'이 재미있는 것은
정말 솔직하고 '독한' 토크를 주고받는 <무릎팍도사> 프로그램 전체가 주는
아우라의 덕분이며, 출연자의 이야기 듣기에 집중되어 있는
프로그램 포맷의 강렬함 덕분이다.
<지피지기>처럼 총 8명이나 되는 mc들 사이의 산만한 진행으로는 나올 수 없는
내밀한 이야기들이 오고가는 도중에 있는 질문들이기에
<무릎팍도사>의 질문을 두고 벌이는 '도사배틀'도 흥미로운 것이다.


<무한도전>과 <여걸식스> 속 다수 mc의 경쟁포맷이 재미있는 것은
그들 사이의 끈끈한 인간적 애정이 시청자들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짜로 '지네끼리' 신나서 논다.
그 과정에서 경쟁이나 싸움, 격한 벌칙을 나누는 것은
'놀이'라는 게 분명해 보이기 때문에
마음 편히, 유쾌하게 그들의 경쟁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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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지피지기>의 아나운서들은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경쟁에만 목을 매고 있는 듯 보인다.
초반에는 매주, 지난주의 아나운서들에 대한 리뷰 앙케이트 결과를 공개하며
누가 제일 웃겼는지, 누가 제일 호감가는 지 등을 조사, 발표했다.
그 순위에 따라 묘하게 일그러지는 이들 아나운서의 표정을 보는 것도 불편했고,
"다음주엔 꼭 좋은 결과를...!"을 외치며
투지에 불타 서로 끊임없이 탐색전과 경쟁을 벌이는 모습은
오락프로그램으로 즐기기 힘들게 부담스러웠다.

메인mc와의 융화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무식한 이미지'를 주로 보여주는 박명수 등의 연예인mc와
지적이고 고상한 이미지를 잃고싶지 않은 아나운서 mc들 사이에는
서로 섞일 수도 없고, 섞이고 싶지도 않은 듯한
묘한 기류가 감지된다.
(<상상플러스>가 아나운서가 서브MC에 가까운 역할을 함에도
연예인 MC들(이휘재, 탁재훈 등)보다 한 단 높은 데에 자리를 마련해주고
전체의 프로그램 진행의 중심을 잡도록 한 것이
왜 안정감을 주는지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묘한 기류의 원인을 이해하게 된다.
<지피지기>는 진행의 중심을 연예인이 잡고, 아나운서들이 재롱을 떠는
역의 구조를 띄고 있는 것이다. )

게다가 그들은 도무지 웃/기/지/가/않/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토크쇼 중심으로 들어와 끼어들지도 못하고,
재미가 없으니 그들의 출연분은 대부분 편집된다.
그들이 없어도, 아니 없어야 재미있을 것 같은데
도대체 왜 그들을 계속 그런 '허수아비'처럼 세워둬야 하는가?
점점 아나운서들에 대한 '신뢰'의 이미지만 흐뜨러지고 있고
한 명이었으면 주목해 봤을 아나운서조차
네 명이 같이 나오면서 다같이 별볼일 없어 보인다.

<지피지기>가 계속해서 지금의 mc형태를 고집하려면
제일먼저 그 아나운서들끼리, 그리고 박명수, 현영, 정형돈, 조혜련과도
좀 많이 친해지는 일에 더 노력해야 한다.
그들이 무의식중엔 서로 '언니', '오빠'라고 부를 만큼 사적인 친밀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이 어색한 분위기는 탈피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싼값'이더라도 아나운서를 네명이나 불러다가
아나테이너로 키우는 포맷은
그만두는 편이 <지피지기>로서는 더 좋을 것 같다.
초대손님이 좋아서 어쩌다 한번 보았던 나같은 시청자들의
뒷담화, 불평불만을 줄이고 지속적인 시청자로 남게 만들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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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무한도전>이 화제가 될 때에는 시큰둥하다가
최근에 와서야 <무한도전>에 맛을 들였다.

계기는 우연적인 것이었는데,
기분이 울적할 때 마침 TV에서 <무한도전>이 하고 있었고,
멍하고 우울한 기분에 TV를 끄거나 채널을 돌릴 힘도 없어서
그냥 넋놓고 쳐다보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낄낄 웃어버린 경험 한번-그것이었다.
이 우연한 경험은 일종의 '강박장애'처럼,
우울한 기분일 때 <무한도전>을 보면 증세가 나아진다는 자기암시로 이어져
그동안 방영됐던 <무한도전>들을 어둠의 경로로 열심히 다운받아
하루에도 몇개씩 보는 상태에 이르게 했다.

<무한도전>을 통해 '재발견'한 최고의 인물은 단연 박명수.
박명수의 매력과 장점은 따로 한 편의 글을 써야 할만큼
독특하고 복잡하며 중요한 것이라 생각되므로
여기서는 "<무한도전>이라는 시스템의 경계에 서서
나머지 캐릭터들의 '오버'를 균형잡아주는 존재"라는 정도로만 일갈.

물론 박명수의 '오버'가 없다는 것은 아니나
나머지 캐릭터들이 다른 근소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착하고, 감성적이고, 방정맞고, 귀여운 캐릭터를 기본으로 하는 데 반해
박명수는 이들의 오버스런 '착함', 눈물, 체제순응성을
적당히 깨 주면서 일반인들의 '상식'에 약간의 '위악'을 곁들여
<무한도전>의 색채에 균형감을 만들어준다.
그러나 또한 그러한 박명수를 다시 균형잡아주는 유재석의 존재가 있기에
<무한도전>은 사람들에게 '호감', '따뜻함'을 주는 프로그램라는 인상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도 빠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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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찾아 본 <무한도전>은 몇 개의 부류로 다시 나눌 수 있다.

1. 초특급 스타 초대 특집-김태희, 패리스힐튼, 앙리 등 초대

2. 몸개그를 위해 3D의 혹독한 상황에 처하게 하는 특집-무인도, 서울길찾기, 모내기 등

3. 몸이 고되지는 않으나 특이한 상황에 처하게 한뒤 6명에게 정착된 캐릭터에 따른 반응을 보는 특집-노홍철 집 방문, 신입사원 면접, 일본 팬미팅 등

4. '인간갱생'프로그램인양 (자칭)'평균이하'의 6명에게 무언가를 '학습'하게 하는 특집-스포츠댄스, 밴드 콘서트 등

이 그것이다.

그리고 각 경우에 맞춰 중간중간 <무한뉴스>라는 형태로
자신들의 신변잡기에 대한 이야기, 수다를 떨기도 하고,
여러가지 게임으로 편을 나눠 경쟁하게 한 뒤,
이들이 처절한 승부근성과 '무한이기주의'를 보이는 모습들을 보여주는 것이
프로그램의 기본 포맷이다.


1번과 같은 초특급 스타를 초대하는 형태의 경우는
앙리, 효도르 정도의, 한국에선 쉽게 볼 수 없는 정도의
희소성있는 스타가 출연하지 않는 한 사실 큰 흥미를 끌기 어렵다.
<무한도전>의 장점은, <불후의 명곡>이나 <라디오스타>의 MC들과 대비되게
나온 게스트에 대한 '무한한' 경외, 찬양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희귀' 스타들의 경우엔 시청자들도 6명과 거의 동일화되면서 볼 수 있고
그들 6명이 만들어내는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 덕분에
어렵게 모신 '손님 대접'이 흐뭇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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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정쩡한('신비주의'로 몸값만 비쌀 뿐인)국내 스타들을 초대했을 경우에는
<무한도전> 초반에는 의미가 있었는지 모르나
<무릎팍도사>라는 프로그램이 초특급 국내 스타들을 데려다
제대로 '까발기는' 일이 가능해 진 이후에는
6인의 '경외', '찬양'으로 점철된 초대손님 모시기 방식은
초대손님 없이 '평균이하'의 6인들끼리 벌이는 이전투구나 잡담보다도
지루할 때가 많다.

특히 최근에는 패리스힐튼이라는,
나름 '스타'라고 할 수는 있으나 어떠한 방향성을 갖고 '경배'하기엔
많-이 부족한 인물을 초대한 뒤로, 다시는 그런 초대손님 특집은 안했으면 싶을 정도이다.
또 이런 특집은 자체적으로도 많이 하는 편은 아닌듯 하고.

그러므로 나머지 세 가지가 이 프로그램의 주된 포맷이 되는데,
최근들어 이들의 '특집'에 대해
칭찬보다 비판을 보내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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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가장 '이슈'가 된 것은
<용궁특집>이라고 해서, 6명을 두 팀으로 나누어
한 팀은 헬기를 타고 바다 한가운 데에 있는 가스전에 가는 것으로
다른 한 팀은 배를 타고 가서 가스전으로 올라가는 바스켓을 타는 것으로
과제를 주었던 특집이었다.


이 특집에서 주로 '겁쟁이' 캐릭터가 많은 6명은
헬기와 바스켓을 타는 것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소리를 고래고래 치는 모습으로
한 시간을 채우는 바람에 사람들에게 원성을 샀다.
"이제 소재 고갈이냐?" "너무 안일하다" 등.
겨우 헬기 타는 것, 바스켓에 올라 고공 상승을 해야 하는 것 때문에
평균나이가 30대 중반인 이 6명이
그렇게 엄살을 떨어야 하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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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문인지, 어제 했던 <무한도전>에서는 <특전사특집>으로
간만에 제대로 혹독한 상황에 6명을 처하게 만들었다.
팬션으로 놀러간다고 꼬신 뒤,
그들을 특전사 부대의 훈련에 참가하게 하여
눈밭에서 구르고 얼차려를 시키고 눈밭에 묻어둔 라면 세개를 찾아
눈을 녹여 끓여먹게 하는 '강한' 3D노동을 굳이 시켰다.

그들이 얼마나 힘든지는
'상식'적인 수준에 가장 근접한 박명수의 반응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박명수는 거의 말도 잘 안하며,
지치고 잔뜩 추위에 언 얼굴로 겨우겨우 이 혹독하고 황당한 시츄에이션을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의문이 들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좀더 가혹한 상황을 만들어주라고 비난을 했던 것일까?
정말 저렇게까지 힘들게 촬영을 하기만 하면
사람들은 계속해서 <무한도전>을 좋아해 줄 것인가?


<무한도전>은 스스로 말하듯 '리얼버라이어티쇼'이다.
6명의 리얼한 캐릭터들, 그것이 다양하고 각기 개성을 가짐으로써 만들어내는
묘한 재미때문에 사람들은 이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 캐릭터들에 애정이 생기지 않은 사람들은 참 참을수 없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왜 저러한 애들의 허접한 짓거리를 보고 있어야 하나...이러한 생각은
나도 앞에서 말한 우연한 기회 전까지는 동일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특전사 특집과 같이 지나치게 혹독한 상황은
오히려 모든 캐릭터들을 동일화해버린다.
모두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는
같은 반응만을 보이기 때문이다.
유재석처럼 '프로'근성이 뛰어난 MC정도만
그 안에서도 가끔 웃음과 농담을 날릴 뿐
대부분은 힘들다, 이게 뭐냐, 미치겠다 등의 불평으로 입을 모을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분명, 별것도 아닌 상황에서
지나치게 오버하며 겁을 내거나, 화를 내거나, 눈물을 흘리는 '엄살'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그러나 이 때의 '별것도 아닌 상황'을 만드는 것은
상황의 혹독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의 목적성, 의도같은 것들이다.
그것이 꼭 '교훈', '계몽성' 같은 것일 필요는 없지만
그들이 무언가에 '도전'을 하는 것을 기본 목표로 하는 프로그램이라면
그 '도전'이 조금은 값진 어떤 것일때 빛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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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3D노동방식의 2번부류였다 해도,
모내기 특집과 같은 경우엔 많은 칭찬을 받았었다.
오락프로그램이기에 그들이 모내기를 직접 체험해 보는 신은
'체험 삶의 현장' 수준의 지속적이고 깊이있는 것은 될 수 없지만
적어도 그들이 저런 일을 체험함으로써
농촌 일에 대해 진심으로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
그리고 그 모습을 통해 역시 시청자들도 비슷한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것은
이 프로그램이 도전해야 할 것들의 방향을 잘 보여주었다.


4번부류 역시 그런 점때문에 사람들은 감동했었다.
스포츠댄스 대회에 실제로 참가하기 위해
한번 얼핏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석달에 걸친 연습을 진지하게 수행해 내는
'평균이하'이지만 참 '열심'인 6명의 모습을 보면
살아가는 것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정말 보잘것 없는 그들이지만, 자기가 맡은 조금은 어려운 과제를
열정적으로 하는 모습은 가짜가 아닌 '리얼'이기 때문이다.


<용궁특집>은 2번과 3번의 경계에 있던 기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도는 3번정도의, 약간 특이한 상황 투입이었으나
모든 출연진들이 2번의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과도한 반응을 보였고
그것을 촬영하는 제작진들조차 그들의 과도한 반응에 몰입해버렸던 듯하다.


그러나 <무한도전>이 좀더 장수하려면 이 2번과 3번 사이에서
자신들의 방향성을 잘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어느쪽이 됐든, '의미부여'가 될 수 있는 상황을 지향하는 것.
그러면서 신선한 소재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가능해야만 이 프로그램이 '한 물 간' 프로그램이 되지 않을 수있다.


"네가 생각해내 봐라. 그게 말처럼 쉽냐?"라고 한다면
나도 하나쯤은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의 '상황'들이 몸이 아프고, 힘들고, 지치고, 무서운 것들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왔고,
6명이나 되는 인물들이 모두 남성이라는 것,
그래서 그들이 아직 도전해 보지 못한 영역들이 여성과 관련된 것에 많이 있다는 것은
별로 의식되지 못한 게 아닌가.


<김장체험>에서도 아줌마들의 우악스런 '세일상품 쟁탈전'의 투지를 보여주긴 했어도
김장을 하는 것이 진정으로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거의 보여주지 못했다.
자기들 생각나는 대로 다 다듬고 정리된 재료들을 재미삼아 섞어서 양념 만드는 일로는
그들의 도전이 감동적이지 않다.


<아빠수업>도 아이가 너무 울자 곧 실패하고 아이를 엄마에게 돌려보내주는 것으로
급하게 마무리된 것 역시 지나치게 도전이 피상적이고 진지하지 못했다.
정말 육아체험을 제대로 하려면,
돌아갈 엄마가 없는 아이들이 사는 고아원에서 하루종일 아이들을 보살피는 정도는 해줘야
진정한 '무한' '도전'이 될 수 있다.


한국의 여성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한 두가지인가?
임신, 출산, 육아, 결혼생활, 명절지내기, 외모'불량'으로 받는 차별과 편견 등
그들 여섯 남자들은 죽어도 모르는 그런 세계의 고민들이 아직도 많고 많다.
그것들 속에서 도전의 과제를 찾는다면
그러한 도전들은 각 캐릭터들의 개성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을 정도의
무조건 힘들기만 한 일이 아닌(힘들어도 회피할 수 없는) 도전이며,
그들의 도전과정에서 보여주는 것들은
다른 수많은 시청자들에게 또 새로운 체험과 의식각성을 도울 수 있는 일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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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왕창-

내 인생에서 '경제'관념이라는 걸 처음 일깨워 준 계기는
초등학교 2학년때쯤이던가...어머니가 대학병원에서 소매치기를 당한 사건이었다.
하필 그 전날 곗돈으로 탄 꽤 큰 액수의 돈을 핸드백에 넣고 있었던 어머니는
병원에서 접수를 하려고 줄을 서있다가 지갑을 통째로 털렸다.
돈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감각은 모호한 나이었지만
엄마, 아빠의 망연자실해하던 표정이 너무도 심각해서
그때부터 돈은 참 무서운거구나...사람을 저렇게 절망스럽게도 만드는 구나
하고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었다.

하필 가족들이 몸이 안좋아 병원에 왔을 때 큰 돈을 잃은 것은
소매치기를 당한다는 일이 주는 '타격'의 크기를 실감하게 하긴 했다.
그러나 소매치기를 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적개심은 사실 못가졌다.

이 세상에 나의 돈을 불법적으로, 부당하게 빼앗는 자들이
어디 소매치기 뿐이던가?
세상엔 그들보다 더 잔인하고 뻔뻔스럽게 남의 돈을 빼돌리는 자들이
너무도 많다.
그나마 소매치기는 뭔가...'약자'가 택한 '호구지책'이라는 느낌을
완전히 지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드라마 <네멋대로 해라>에서도, 고복수(양동근 분)가 소매치기범 출신이라는 사실은
불우한 청년이 어쩔 수 없이 지녀야했던 그냥 한때의 '어두운 과거' 쯤으로밖에 안보였다.
계속 재범을 저지르는 복수의 후배 소매치기도
"오죽하면..."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 드라마에 존재하는 소매치기들은 하나같이 불쌍해보였다.
물론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지만, 생계형 범죄 중 하나라고 여겨지는 마음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복수나 복수같은 소매치기들보다도,
그를 계속 의심하고, 복수를 이용해 소매치기 일당을 다 잡아들이려는
박형사가 더 잔인하고 못되게 보였었다.

그만큼 소매치기라는 범죄에 대한 '악'함에 대한 감도는
살인, 강도, 강간 등의 강력범죄에 비해 좀 약하다.
그 흉악범들을 꼭 잡아 감옥에 쳐 넣어야 한다, 식의 생각이
나에겐 사실 잘 안드는 것이다.
소매치기범을 쫓는 형사의 이야기인 영화 <무방비도시>는
그래서 처음부터 몰입이 잘 안됐다.

<무방비도시>는 소매치기 조직의 '사장'인 백장미(손예진 분)와 그의 일당이
그녀의 조직을 소탕하고자 하는 형사집단, 그리고 그 중 한명인 형사 조대영(김명민 분)과
대치되는 상황을 다룬 영화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허술하기까지 해서, 그렇잖아도 몰입이 잘 안되는
'소매치기 소탕'이라는 소재에 더더욱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1. A: 소매치기단 백장미파(삼성단)의 조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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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첫 '소매치기'장면은
일본에서 벌어지는데, 맥빠지게도, '첫판'부터 '실패'다.

백장미가 어떤 여자 핸드백에 칼집을 내고 있는데
하필 그때 핸드백 속 휴대폰이 울려 백을 쳐다본 핸드백 주인이
그녀를 발견하고 소리를 지른 것이다.
그러자 백장미의 '안테나'(발각 시 칼 등의 무기를 이용해 도주로를 확보하는 역할)가
자신들을 잡으려는 한 시민의 팔을 칼로 자르고 도망간다.
백장미는 눈을 부릅뜨고는 "겁대가리들은 많아가지고.."라고 비웃는다.

이 장면은 백장미의 오른팔인 안테나의 잔인함을 보여주긴 하지만,
소매치기로선 참 '무능한' 백장미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갸우뚱하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소매치기들의 우두머리인 백장미의 '소매치기'장면이
처음부터 이런 '어이없는' 실패로 돌아가게 해서
도대체 이 영화는 뭘 보여주고자 하는걸까?

이것은 '소매치기'라는 것만으로는 안타고니스트의 '악한' 느낌이 덜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저들을 꼭 잡아야한다는 감정이입을 하게 만들기가 쉽지 않아서
이런 '잔혹'한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감정을 유발하려 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의 첫장면인 만큼
백장미의 '능력' 증명이 아니었을까?
즉, 백장미는 '초장부터'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냥 '하수' 소매치기처럼 보였던 것은
영화의 실수다.(나는 그래서, "아, 나중에 '훈련'을 받고 '보스'가 되는
백장미의 '피래미' 시절을 보여주는 건가보다"라고 짐작하기도 했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적잖이 당황했다.)

관객에게 이러한 '출발'은
백장미를 비롯한 이들 소매치기단에 대한 '경이감'이나 '신뢰'를 주기엔
여러가지로 부족하다.

그 이후 그녀의 '능력 증명'은
기껏해야 새로 영입한 바람잡이(소매치기할때 바람잡는 사람)가
"내가 당신(백장미)의 능력을 어떻게 믿냐?"고 묻자
자연스런 손동작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듭으로 묶어
바람잡이 양복의 윗주머니 만년필을 순식간에 꺼내는 모습으로 행해진다.
이 '기술'에 반해 바람잡이는 단번에 장미의 수하로 들어간다.

그러나...이 정도 기술은
관객에게 그녀의 능력을 믿게 할 정도라고는 보기 어렵다.
약간 방심한 바람잡이의, 겉으로 드러나 있는 양복주머니에서
만년필 하나 꺼내는 일은, 나라도 조금만 연습하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의 소매치기일당의 우두머리 정도라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정도의 '쓰리' 실력은 보여줘야하는데
그것이, 이 영화에선 좀처럼 보여지지 않는다.

장미가 모시고 싶어하는 최고의 '기계'인 강만옥(김해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녀가 전설적인 쓰리꾼이었는지를 우리는 확인하기 전에
(장미의 제보로 출동한-이 부분도 도통, 뭘 의도한 '제보'인지 알기 힘들다) 경찰들에 의해
그녀 역시 출소후 개과천선해서 살려던 마음을
(아들때문에)어렵게 버리고 '개시'한 첫날부터 발각되어 죽고 만다.

또한 백장미파는 백장미와 '기계'(소매치기 작업꾼) 한 명,
'바람' 한명, '안테나'를 하는 백장미의 보디가드 한 명
이렇게 4명이 전부이다.
어떤 '조직'이라 하면, 마피아, 조폭 등에 익숙해진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관객들에게
달랑 4명으로 조직된 '단체'는 '소꿉장난'같아 보인다.
그들의 범죄가 소매치기 외의 문제(마약, 폭력, 도박 등)와
연루가 되어 있지도 않아서 극악무도한 집단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자신들이 훔친 돈이 한 아이의 병원수술비라는 사실을 알고는
도로 갖다주는 '선행'까지 하니...이건 뭐하자는 플레인지?)

이런 허술하고 빈약한 조직의 보스(장미)가 일본까지 건너가서 '국제적'인 소매치기는
어떻게 했는지도 이해가 안되고,
또 그런 국제적 소매치기단이
왜 또 더 좁고, 자기네 영역도 없고, 경찰들에게 잡힐 위험도 훨씬 큰
한국에 다시 건너왔는지도,
그리고 그렇게 위험천만하게 한국으로 와서 겨우 몇 탕 해먹고는
왜 도로 일본으로 도망가기 위해 '생쑈'를 하는지도 납득이 안간다.

경찰들에게 <삼성단>이 검거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백장미가 소매치기 전과가 상당하다는 점도 노출되어 있었고,
그녀의 소재지도 분명하며, 경찰들과의 왕래까지 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 중반, 그녀가 곧 일본에서 활동했던 소매치기단의 일원이었다는 점도
일본쪽에서 보내온 CCTV를 보고 금세 파악된다.
조직망이 복잡한 것도 아니고,
장미의 '보스'로서의 능력도 '불완전'해 보이고,
이미 너무 많이 경찰쪽에 노출되어 있고....
이들 조직은 금방 허물어질 것이 틀림없었다.

이렇듯 <삼성단>은
보스의 영웅성이 약한 점,
조직망이 지나치게 단촐하고 허술한 점,
일본이라는 큰 '시장'을 두고 귀국해서 다시 회사를 차렸는지가 불분명한 점 등으로 인해
영화의 (악한) 한 축으로서의 강력함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2. B; 광역수사대의 목표 불확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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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러한 허술한 <삼성단>을 검거하고자 하는 경찰은
"한국의 FBI"라고까지 자칭하는 최고의 수사대로서
지나치게 '조직적'이고 의욕이 충천해 있다.
그들은 '강력범죄'만 맡는 아주 특수한 경찰들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관객의 눈에(적어도 내 눈에는) '소매치기'는
강력범죄로 보일 만큼 그렇게 극악하지도 않은 데다가
영화에서도 '안테나'의 한 두번의 잔인한 칼부림을 제외하고는
돈을 훔치는 것 말고 나쁜 짓도 별로 안한다.

우리나라 사람에겐 '의적'에 대한 관념이 있다.
홍길동이나 임꺽정같은, 부자들의 돈을 도적질하여
의로운 데에다 쓰는, 그러한 '의로운 도둑'들에 대해선
관습적으로 '관대'하다.
즉, 남의 돈을 도둑질하는 것만으로 누군가를 무조건 비난하진 않는 '유전자'같은 것이 있다.
물론 <삼성단>은 의로운 데에다 쓰는 자들도 아니지만,
진짜 훔쳐선 안될 돈을 훔치는 정도로 나쁜 자들도 아니다.
그래서 옷 사러 명동에 나온 사람들의 주머닛돈 몇 푼을 훔치는
소매치기들 정도 가지고는 '강력범죄'의 이미지가 잘 안와닿는다.

<삼성단>의 대립축인 <광역수사대>는
그런 그들을 잡기 위해 동원된 경찰조직 치고는
너무 본격적이고 오버스럽다.
그리고 별로 새롭게 수사할 내용이 없는 듯 한데
너무 오랫동안, 힘들게 수사를 한다.

이미 백장미의 프로필도 다 알고 있으며
소매치기단 조직망도 파악되어 있다.
그리고 '소매치기범' 잡는 데만 평생을 바친,
소매치기 전문 경위 오연수가 수사반장이다.

이렇게 <삼성단>에 비해 과도하게
조직적이고 비대하고 철저한 <광역수사대>는
무엇을 하기 위해 소집된 것인가?

이 한국땅의 모든 소매치기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이 부분에서 영화는 불분명한 태도를 취한다.
주로 소규모나 점조직으로 활동하는, 게다가 조직 없이도 할 수 있는 범죄이기도 한
소매치기 범죄자들을 모두 검거, 소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
다른 영화들에서 쉽게 다루는 조직폭력단 검거와는 좀 문제가 다른 것이다.

그럼, 일본에서 있었던 소매치기 사건의 범인을 잡기 위해?
그건 일본에서 보내온 CCTV만 봐도 금방 알아챌수 있다.
왜냐하면 이걸 보기 전부터 수사단 반장은 백장미(외모, 신상, 소재지 등)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음만 먹으면 금세 그녀를 찾아내서, 검거하면 간단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또다시 소매치기를 할 때를 기다려 '현장'을 급습해야만 하는듯
뜸들이며 그녀의 주변만을 맴돈다.
도대체 무엇을 알아내고 싶어서 머뭇거리는 것인가?
일본의 사건의 범인이라는 것만 확실하면
(이건 백장미가 용의자로 지목된 순간 일본을 통해 목격자들만 찾으면 금세 확인되는 일 아닌가?)
당장에 잡아들일 수 있다.

그렇다고 그녀의 '윗조직'(몸통?) 또는 '다른 조직'을 잡아들이겠다는 목적인가?
영화는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수사단과 소매치기의 여러 조직들은
일종의 '공생'관계, '애증'관계처럼 보이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런 그들은 어느 순간에 대치하는 것일까?
언제 싸우고, 언제 쫓고 쫓기고, 언제 잡고 잡혀야 하나?
영화는 그게 불분명하다.


그래서 '대치'의 극적인 순간을 '억지로나마' 만들기 위해
얼토당토 않게, 백장미가 스스로 자기 조직이 '일을 나가는'
장소, 시간을 경찰에게 제보를 하는 퐝당한 시츄에이션을 연출한다.
그리고 나서 자기는 일본으로 도망칠 궁리를 한다는.
(그래놓고 나서, 이 경찰출동으로 죽게 된 강만옥의 죽음 소식에 충격을 받는 얼굴이라니...
진짜 뭐하자는 것인지?)

영화를 만든 사람들도 양심은 있었던 탓인지,
이러한 상황에 새롭게 '변명'을 덧붙인다.
그녀의 이러한 일들이 '운명' 또는 '의도'라고.(둘중 어느쪽인지도 영화만 봐서는 잘 모르겠다. 내 독해력의 문제인가?)



3. C: 운명 또는 의도-그 허술한 '뒷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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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운명, 또는 의도란
백장미와 조대영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이 두 사람은 여러가지로 얽힌 복잡한 관계이다.
백장미가 '이모'로 모시는 소매치기계의 '고수'가 조대영의 엄마이고,
백장미와 조대영은, 물론 백장미의 의도적 접근이었지만, 애정관계 비스무리한 것에 빠진다.
백장미의 엄마는 조대영에게 붙잡혔다가 도망치던 중 차에 치어 죽었다.

즉, 백장미와 조대영은 둘 다 소매치기범을 엄마로 두었는데
조대영만 하필 엄마의 직업을 세습받지 않고 경찰이 됨으로써
여기저기 관계가 얼그러진 셈이다.

백장미에게 있어서 조대영은,
자기가 모시고 싶은 '보스'(강만옥)의 아들이기도 하고(플러스 관계)
자기 엄마를 검거했던(마이너스 관계),
그리고 그랬다가 엄마를 놓쳐준(플러스 관계),
그러나 그때문에 오히려 엄마를 차에 치어 죽게 만든(마이너스 관계),
또한 지금은 자기를 검거하려 하는 경찰(마이너스 관계)이기도 하고,
그래서 자신이 유혹하고, 잠자리를 함께 한 남자(플러스 관계)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조대영에게 있어서의 백장미도 마찬가지로 플러스/마이너스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둘의 대치는 생겨났다  허물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이 과정이 재미도 없고
(<색,계> 수준의 뜨거운 욕망을 보이든가...아니면 진짜 두뇌게임을 하든가),
왜 조대영이 백장미를 안 잡는지, 왜 백장미가 조대영을 유혹하는지 납득도 잘 안되고,
마이너스 관계로서의 복수인지, 플러스 마이너스 관계가 얽힌 기구한 운명인지 모호해서,
영화 보며 여러 차례 고개를 설레설레 젓기까지 했다.


4. A,B,C의 조합이 최고의 배우들을 말아먹은 영화, <무방비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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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의 드라마 중독자로서,
2007년 가장 재미있게 본 드라마인 <연애시대>와 <하얀거탑>의 주인공
손예진과 김명민이 주연을 한다는
이 영화에 대한 기대는 남달랐다.
두 배우는 그 드라마들이 아니고서도 '남몰래' 아끼고 좋아하는 배우들이었다.
또한 김해숙 역시 '가슴시리게 만드는 엄마' 역할이라면 누구에게 뒤질 연기자인가?
(이 영화에서도 역시 김해숙의 연기는 내용과 관계없이 매번 가슴 절절하게 만든다.
그녀 특유의 약간 울먹이는, 한이 깃든 목소리와 말투,
당뇨병환자, 노숙생활, 소매치기범 등으로서의 표현력은 이 영화의 감상포인트다.)

그들이 나오는 영화라니...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었다.
그런데 위의 세 요소들이 하나같이 너무 형편없어서, 그것들의 조합이 만들어낸
이 영화 <무방비도시>는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도무지...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한없이 재미라도 느끼게 해주지도 못하고
짜릿한 자극을 주지도 않는 영화다.

'손예진'의 팜므파탈로서의 변신과
화려한 패션과 실루엣의 강조는 물론 훌륭하지만
영화 내용의 지지부진, 오리무중으로 인해
섹시함이나 매혹 보다는 백치미나 자뻑표정으로 보이기도 한다.
'김명민'의 밋밋한 캐릭터와 수동적인 행동패턴은
<하얀거탑>의 그야말로 '명민'한 외과과장 장준혁을 떠올리는 팬들에게
실망을 안겨준다.

최근 한국영화계가 여러모로 '침체'와 '위기'에 처해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 영화를 사랑하는 한 관객으로서 무척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으며,
무언가 여기에 나도 도움을 줄 수는 없을지,
내가 이러한 '위기'를 초래한 또 한명의 '방만한' 관객은 아니었는지
반성과 통찰을 해보기도 했었다.


그러나...이 영화를 보면서는,
'방만함'은 나보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더 많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소매치기'라는 새로운 '범죄'를 소재로 했다는 점,
악역의 주인공이 여성이며, 그녀가 남성주인공을 '이용'하기 위해 유혹하는 내용이라는 점,
선/악, 남/녀의 대치가 만들어낼 극적 긴장감이
영화 보기전에 꽤 많이 기대된다는 점 등의
좋은 출발선을 가졌던 이 영화는,
소재나 새로운 발상, 구도를 제대로 배치, 조율하지 못해
'무방비'로 허물어버려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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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BlogIcon 하이腦 2008/01/27 16:39

    영화 줄거리에 대해선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배우들이 워낙에 미더워보여서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 기대에 못 미치나보군요. 손예진이 드라마 <연애시대> 때 보여준 연기를 영화에서도 보고싶은데, 그녀의 영화 선택이...흐음....아쉽군요. 김명민은 역시 <하얀거탑>의 오라(aura)를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요. 좋은 배우라 해도 역시 좋은 작품을 만나야 하고, 좋은 영화는 좋은 씨나리오가 있어야 하는 거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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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패는 처음부터 노출되어 있다.
 

치아즈(탕웨이 분)가 이(양조위 분)에게 접근하여,
그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는 것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다.
대학의 친구들과 함께 벌인 치기어린 '쇼'로 한번,
3년 뒤 반군 조직에 의해 보다 철저히 준비, 위장된 '작전'으로 한번.


 

 첫번째 접근에서는, 그들의 정체가 금세 탄로나리라는 것이 쉽게 예측된다.

그들은 그저 '혈기왕성한 청년들'이었고,

돈 좀 있는 집 자식인 한 친구의 비상금을 털어

어쭙잖게 도모한 '결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치기어림, 어쭙잖음으로도

그나마 치아즈와 이의 단독 만남까지 갈 수 있도록 한 것은

치아즈의 매력의 힘이었다.

이는 그녀의 아름다움과 매혹적인 자태에 현혹되어

그녀의 패거리들이 벌이는 우스꽝스런 연극에 한 꼭지 출연해 놀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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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연극은 이의 갑작스런 상해로의 귀국으로 금세 막을 내린다.

그리고 그들의 연극이 이의 부하이자 광위민의 동향 선배였던 조덕희를 통해

얼마나 허술한 애들 장난이었는지가 밝혀진다.

치아즈 패거리는 조덕희를 우발적으로 죽이면서

해산되고, 3년이 흐른다.



3년 뒤, 그동안 중경정부의 첩보단 조직에서 일하게 된 광위민이 다시 치아즈를 찾아온다.

그는 그녀에게 3년전의 계획을 다시 한번 실행해 볼 것을 권유하고

치아즈는 이를 수락한다.

그녀는 중경정부 조직의 오와 만나 이에게 다시 접근할 방법에 대해 학습을 받고

그녀의 신분도 막부인으로서 좀더 철저하게 위장된다.

재회한 이와 치아즈는 3년 전에 못 다한

서로에 대한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밀회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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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번 역시, 그녀의 신분은

너무도 쉽게 이의 부하들에 의해 노출되어버린다.

다만, 그녀에게 빠져있는 이에게 보고만 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처럼 이 영화에서 치아즈의 정체는

'첩보원'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쉽게 발각된다.

즉, 그녀의 '첩보'는 처음부터 실패였다.



조덕희와 이의 부하가 치아즈와 그녀의 조직에 대한

조사 결과를 줄줄 읊는 장면들은

그녀의 '임무'와 '소명'이란 것이

얼마나 하릴 없이 파괴될 수 있는 것인지를 보여줘서

허탈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중경정부의 첩보원이 사랑(욕망)때문에

자신의 임무를 '포기한다'는 내용이라는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사전 정보는 조금 잘못된 것이었음을 확인하게 됐다.



처음부터 치아즈에게 주어진 선택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이나 국가(민족)의 강요에 따라

이를 살리거나 죽일 수 있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거나 포기할 수 있는

능동적 '주체'가 아니었다.

그녀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아 끼고

이에게 '가요...어서 도망쳐요'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러면 그는 죽었을까?

그리고 그녀는 살 수 있었을까?



어쩌면 이가 암살되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죽는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가?

이미 이의 조직에서는 그녀의 정체와 그녀 관련 조직단에 대해

모두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이가 죽은 뒤에 그녀의 단체 역시 모두 체포, 처형되었을 것이다.

이가 소속된 왕정위의 정부는 그녀의 조직 따위는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잡아들여 처리할 수 있을만큼

훨씬 철저하고 치밀한 조직과 정보망을 갖고 있다.

그들은 그녀를 계속 감시하고 주시하면서, 그녀가 무슨 짓을 벌이는지

자신들의 손바닥 위에 놓고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첩보'나 '암살' 등을 목표로 한 한 여자의

국가적 차원의 행위, 결의를 다룬 영화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 부분에 있어서 치아즈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1938~1942년, 항일, 반제, 애국 등의 시대적 배경은 그냥 이 영화를 화려하고 심오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적당한' 외피에 불과하다.



나에겐

"원수인 한 남자에게 응징을 하기 위해 접근한 한 여자가

그와 만나면서 결국 사랑을 하/믿게 되는 과정"

이라는 편이,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더 적절한 독법으로 보였다.



2. 그 남자, 그여자

남자,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를 '일반적인 사랑'의 문법으로만 대했다.

다만, 자신의 상처와 삶의 방식 때문에

표현 방법이 때때로 거칠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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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인사를 나누고, 자신의 집에 놀러온 그녀와 말을 섞고,

비가 쏟아지는 하늘 아래서 돌연 한 우산을 쓰게 되면서 가슴떨려하고,

그녀의 연락처를 외워 그녀와의 데이트를 즐기고,

자신의 일때문에 3년간 소식을 모르다가 다시 만나자 그녀를 다시 보게 된 것이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하고,

영화를 보러가는 그녀를 납치하듯 데려와 '당신을 가지는 일이 그렇게 힘든 일이야?'라며 가학적인 섹스를 하고,

그녀가 홍콩으로 돌아갈 지 모른다는 사실에 초조해하며 그녀의 침실로 들어가 정사를 나누며

아무도 믿지 않는 것 만으로 지켜온 자신의 목숨이지만 그녀의 말만은 모두 믿겠다고 말하고,

바쁜 일들 속에서도 그녀 생각때문에 일에 집중하질 못해 괴로워하고,

그녀의 위로와 그녀가 불러주는 "우린 영원히 함께 하리이다"란 노래를 부르며 잡아주는 손 앞에서 눈물을 짓고,

그녀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며, '반지 따위는 관심없어, 반지를 낀 당신 손이 보고 싶었을 뿐이야"라고 말한다.

그의 감정은 언제나 솔직하고 명료했다.



문제는 여자, 치아즈이다.

그가 저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공식대로' 사랑에 빠져들고 있을 동안

치아즈는 자신의 정체성때문에 그 말들을 오인하기도 하고 믿지 못하기도 한다.

그의 행동이 자신을 시험하는 것인지,

그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게 아닌지,

그가 자신의 정체를 파악해 함정으로 끌어들이는 것인지

늘 확신이 서지 않아 두려워한다.



이 불안과 불신을 어떻게 넘어서서

치아즈 역시 그의 사랑을 '믿게' 되는가의 과정이

이 영화의 중심 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3. 놓아라, 다이아몬드가 그리 좋더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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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불안과 불신을 일거에 소거해 버린 것은 반지, 다이아몬드였다.

이것 때문에 혹자들에게서는 이 영화가(혹은 치아즈 캐릭터가)

"왜 다이아몬드때문에 조국을 버리고 그 남자에게 넘어가느냐?" 또는

"다른 건 다 안되고, 다이아몬드에 넘어가는 게 사랑이냐?" 등의

비난을 받기도 한다.
또한 "결국 여자한테 사랑이란 다이아몬드와 섹스 아니냐"는,

좀더 냉소적인 말로 그녀의 감정의 '이동'을 이해해주는 축도 있다.



그러나 반지는 값비싼 물질이어서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아니다.

그녀가 그 반지 앞에서 마음을 바꿔 먹은 이유는

이 영화의 첫 장면이 설명해 준다.



마작을 함께 하던 이의 부인이 이에게 "지난번에 사달라는 다이아도 안사주고"라며 핀잔을 하고

이는 "다이아도 돌덩이인데 그런 거 끼고 있으면 마작 패도 못들걸"이라며

아내에게는 다이아몬드 선물을 해주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는 치아즈에게도 말했듯 다이아몬드 따위는 관심이 없으며, 그것은 돌덩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끼고 있어봐야 생활하기에도 불편하기만 한 거추장스러운 물건이라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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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가 치아즈에게는 선물하고, 그걸 낀 그녀의 손이 보고싶다는 소박한 진심 때문에,

그 '비실용적'이고 비싸기만 한 6캐럿짜리 비둘기 알 반지를 그녀에게'만' 안긴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이런 귀한 걸 끼고 거리로 나가기가 두려워요"라고 말할 때

"내가 함께 있어주잖아"라며 그녀의 떨리는 손을 잡아주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그녀는 확신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다이아몬드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일이었다면 어떤 것이든

그녀는 그를 믿게 되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사랑은 '다이아몬드'였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에게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의 확인,

그리고 오랜 세월 고독과 두려움에 길들여진 자신과 함께해 주겠다는 그의 약속이었다.



감독이 다이아몬드라는 상징적인 '물질'로

치아즈 감정이 고조되는 정점을 만들어 낸 것은 어떤 점에서 무척 손쉬운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만들어낼 감정의 '불순'에 대한 오해를 덜기 위해

영화의 도입을 '다이아몬드'에 관한 대화로 시작했던 것은 나름 배려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4. '시작'과 '확신'의 지점?

그러나 '다이아몬드' 지점은 그녀가 그의 사랑을 믿게 되는 지점이지,

그녀가 그를 사랑하게 되는 지점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훨씬 이전이었을 것이다. 언제부터일까?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를 가늠하는 것은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했을때, 그 사랑이 언제부터인지를 더듬어보는 것 만큼

모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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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이 이러저러한 행동을 하는 걸 본 순간 반했다, 식의 말을 하기 좋아하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대체로 사후적으로 만들어 낸 작위적인 낭만 모멘트일 뿐

감정의 기점같은 건 찾기 어려운 법이다.



치아즈에게 있어 이를 사랑하게 된 순간은

어쩌면 1938년 처음 만나 인사만 나눈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날 돌아와서 치아즈는, 원래 피우지 않던 담배를 아주 익숙하게 꺼내 물고,

이가 어떤 사람이었냐고 묻는 친구에게 "살짝 봤는데...상상했던 거랑은 다르더라"라는 말 한마디에서

이미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짐작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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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와 함께 빗속에서 우산을 쓰게 되었을때, 함께 양복을 맞추러 갔을 때, 함께 식사를 할때,

처음 섹스를 했을 때, 섹스 도중 절정에 올라 울부짖게 됐을 때, 그의 눈물을 보았을 때...등

그 어느 순간일 수도 있다.

그녀의 감정이 움직였음은 오와 광위민 앞에서

자신이 그에게 마음까지 빼앗기고 있음을 털어놓는 장면에서 이미 확실해졌다.

그녀는 다이아몬드 사건 이전에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으며,

다만 그의 감정을 확신하지 못해 자신의 마음도 드러내지 못했을 뿐이다.



따라서 다이아몬드 씬은

두 사람이 사랑을 하게 되는 첫 지점이 아니라,

치아즈가 이에게 자신의 감정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마지막 지점이다.



 이가 그녀의 말을 듣고 반지 상점에서 뛰쳐 나와 도망치고

사무실에 돌아와 부하로부터 그녀 일당의 정체에 대해듣고

화를 내며 그동안 왜 보고하지 않았냐고 묻자 부하는,

"그건...두분 관계에 대한 확신이 서질 않아서..."라고 답한다.

그리고 "물론...지금은 확실해 졌고"라는 말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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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하가 확신하지 못한 '두분 관계'란 무엇인가?

제3자의 눈에서 볼 때, 그녀의 정체에 대해 알고있는 사람임에도,

그들의 관계는 '정치적 게임'의 관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 아니었을까?

'첩보'의 문제로만 접근하기엔

이도 치아즈도 '감정'이 너무 강렬해 보여서

어쩌면 '적대'관계가 아닐지도, 아니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어서

그녀에 대한 보고를 미뤄뒀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지금은 확실해' 진 것은

명백한 암살계획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5. "욕망, 그 위험한 色, 신중, 그 잔인한 戒"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정치 게임'이 아니라 '사랑게임'으로 점철된 영화로도 읽을 수 있다.



이 영화 제목이 말하는 '색'과 '계'는

사랑이라는 개인적 욕망의 '색'과

국가, 이념, 정치 등이 강요하는 룰의 '계'의 충돌로도 볼 수 있지만,

사람이 사랑을 할 때 촉발되는 욕망(색)과

그것을 솔직하게 드러내지/인지하지 못하는 사랑의 룰(계)로 볼 수도 있다.

그것이 두 사람을 항상 불안하고 두렵게, 그러면서도 지독한 사랑에 빠지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 드러냄/인지를 힘들게 하는, '신중함'에

정치적 이념의 문제가 일부 포함되어 있을 수는 있지만.


사랑은 언제나 그 '신중함'때문에

유지되기도 하고, 깨어지기도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것이 '쾌락의 역설'이다.

모든 욕망이 너무 쉽게 충족되면, 쾌락의 역치는 점점 커진다.

그것은 결국 욕망을 사그러들게 만들고, 사랑을 끝장내게 한다.

그러나 반대로 지나치게 충족되지 않는 욕망은 쾌락을 주지 못하므로

점점 지치게 만들고, 욕망을 포기하게 만든다.



이와 치아즈가 그렇게 치명적이고 뜨거운 사랑을 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이 욕망(색)과 신중함(계) 사이에서의 줄타기를 잘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줄타기를 가능하게 한 힘은 자신들의 신분-정체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점까지 부인할 순 없다.)

양자 사이의 균형이 깨지고, '계'를 포기하는 순간

'색'은 두 사람을 파멸로 이끌었다.



죽은 치아즈도, '일단은' 살아남은 이도

그들의 사랑 때문에 고통을 겪기는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더 살아가야 하는 이의 고통이 심할 수도 있다.

그는 믿어의심치 않았던, 그래서 확인하려 들지도 않았던

치아즈의 사랑을 이제부터 다시 되짚어야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녀는 자신을 사랑했던 것일까, 의도적으로 접근했을 뿐인것일까.

그녀가 마지막 순간 자신을 도망치게 한 것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한 행동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 순간까지 철저히 자기 신분을 속이고, 암살계획의 현장으로까지 자신을 이끈 것은

그동안의 관계가 모두 거짓이었던 것으로 생각되게 하기도 한다.

또한 그런 그녀를 자신이 처형하도록 명령해 죽였다.

이 삼중고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의 운명은,

(물론 1945년 뒤에는 어쩜 살아있기도 힘들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사랑을 믿으며 죽을 수 있었던 치아즈보다 훨씬 가혹할 것이다.




6. 덧붙여-

이 영화는 2시간 30분이 넘는 시간이라는 길이에도 불구하고

지루함을 주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 영화가 두 개의 기승전결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938년 이야기/ 1941년 이야기

두 개의 닮은 꼴 이야기가 각각 완결된 기승전결을 지니고 있으면서

첫번째보다 두번째에 모든 것의 강도를 높여놓았다.

그러나 기본 틀은 두 개가 거의 동일하다는 점,

이것이 이영화의 재미난 특징 중 하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특히 두 이야기에서

이와 치아즈의 마지막 만남에서 이가 하는 말,

"입고 계시오."와 "끼고 있어"는

그의 그녀에 대한 감정과 그것의 표현방식을 보여주는 말이어서

짧지만 매우 인상적이다. 

 

그리고, 또한!!!!

절대 잊지 못할 것은

이 영화 속 양조위의 눈빛이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찍은 영화속의 삶을 진실로 살아낸 것은 아닐까 싶을만큼

그 상처와 외로움이 나이와 함께 체화된 듯한 그 눈빛, 표정은

이 영화가 주는 최고의 매력이다.



다시 양조위가 출연한 영화들을 찾아서 다 보고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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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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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ㅁㅎ 2008/01/09 18:03

    재밌는 글이네요. 같은 이유로 저 역시 양조위 씨가 출연한 영화를 다시 죽 훑어보고 있습니다.

    • BlogIcon coolya 2008/01/09 19:39

      앗, 감사합니다...
      글이 길기만 길고, 얘기가 산만하고 두서없어서
      사실 쓰고 나서 부끄러워하고 있었는데, 감사함미당.
      양조위, 쵝오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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